숫자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면서 글로벌 시장의 ‘변화’가 가속되었다. 효율적인 시장은 자원을 효과적으로 배정할뿐더러 복잡한 분배의 문제 또한 해결해준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의 ‘보이지 않는 손’은 이러한 시장 효율성의 근본적인 가설에 해당한다. 최근에는 숫자가 이러한 보이지 않는 손처럼 “자동적으로”, 말하자면 그 자체로 작동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믿음이 널리 자리 잡은 것 같다. 그러나 숫자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숫자는 분쟁을 감추기만 할 뿐, 분쟁을 해결하지는 못한다. 숫자는 불가피성이라는 덮개 밑에 정치와 억압을 감춘다. 숫자가 지식의 발전과 거버넌스의 개선을 위한 중대한 도구라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와 동시에 숫자는 변화를 거부하고 현상을 유지하려는 세력들을 위한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숫자의 힘」 중에서
https://youtu.be/323Wq26xPIg
신용등급은 유럽의 사회적 부담을 가중시켰다. 정부의 차입 이자가 높을수록, 납세자들의 세금이 공공 서비스와 투자에 쓰이기보다는 투자자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평가사들은 정부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기보다 전 세계의 사회적 상황을 악화시키는 데 혈안이 된 것 같았다. 부채를 조달하려는 국가들의 등급이 강등된다면, 돈을 빌리기가 어려워지고 차입 비용이 늘어나게 된다. 나아가 평가사가 등급을 강등시키면 악순환을 유발해 해당 국가가 부담할 이자율이 늘어날 뿐 아니라 금융 기관과 맺은 기타 계약들이 부정적인 영향에 노출되게 된다. 추가적인 비용이 들어가고 계약 이행에 대한 신용도가 감소하는 것이다. 혹자는 평가사가 ‘터널 시야(좁은 시야를 의미함-옮긴이)’를 유도하는 대리인의 사례라고 말한다. 평가사들은 ‘확실성을 대신할 지표’를 생산하는 결과, 금융의 안정성을 강화하기보다는 불확실성을 무마하고 재생산하는 데 이바지한다.
---「새로운 국제 권력 : 신용평가가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권력」 중에서
2012년, 코펜하겐 컨센서스센터는 지구가 앞으로 맞닥뜨릴 가장 엄중한 도전들을 새로이 합의한 다음 세상에 공표했다. 기후변화는 리스트에서 꼴찌를 차지했다. 코펜하겐 컨센서스센터 전문가들은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인색했다. 그들은 성층권 에어로졸 주입법(Stratospheric Aerosol Injection, 산성비를 유발하는 이산화황의 전구물질을 성층권에 계속해서 주입해 햇빛을 반사하는 오존층을 형성하는 기술)이나 마린 클라우드 화이트닝(Marine Cloud Whitening, 바닷물을 대기에 섞어 구름을 더욱 희게 만들고 반사율을 높이는 방법)에 아주 적은 세금(10억 달러가량)만을 투입할 것을 권고했다. 또한 그들은 기후변화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지독히 과장되었다고 단언하면서, 농업과 여행업계가 체감하는 부정적 영향이 클 것이라 우려했다. 농업과 여행업계가 생각하기에 “상당수의 국가가 21세기 중반까지 GDP의 절반 가까이를 잃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변화에 적응한다면 이러한 손해를 상당 부분 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농부들은 더위를 이기는 작물을 선택할 것이고, 높은 기온을 견딜 수 있는 새로운 집들이 등장할 것이다. “부유한 국가들은 적응 방안을 고민한 결과 지구온난화의 부정적 영향에 적응하고 긍정적인 변화를 유도해 GDP의 절반에 이르는 긍정적 효과를 창출할 것이다.” 결국 별일 아닌 일이 되고 만 것이다.
---「타오르는 지구를 외면하기 : 기후변화의 상품화」 중에서
생태계에 가격을 매기면 자연이 경제에 이바지하는 정도를 알고 싶기 마련이다. 그 결과 우리는 자연 자원의 상품화라는 위험한 유혹에 빠지게 된다. 가격을 지닌 모든 상품은 사고팔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장에서 논의한 것처럼, 사람들 대부분은 사용, 비사용, 선택가치의 복잡한 개념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가격을 접하는 순간 다른 형태의 가치를 생각한다. 이를 곧 교환 가치로 정의할 수 있다. 가격은 상품이 교환 가능하다는 생각을 우리에게 심어준다. 실제로 가격이 있는 상품은 팔리거나 동일한 가치를 지닌 무언가로 교환될 수 있다. 가격은 자연이라는 상품과 용역이 전통적인 생산 요소로 탈바꿈한 양 시장에서 교환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자연과학자들이 말하는 ‘강한 지속가능성’은 경제학 법칙인 ‘약한 지속가능성’으로 대체되기 쉽다. 강력한 지속가능성이란 일부 자원이 희귀하고 대체 불가능하므로 인간의 활동은 지구 역량의 한계에 맞춰져야 한다는 개념이다. 반면, 약한 지속가능성이란 모든 자본은 생산 투입을 통해 자연 자본을 완벽히 대체할 수 있다는 발상을 골자로 한다. 이와 같은 중언부언식 논리는 결국 인간이 자연을 정복함으로써 자연을 자연 스스로에서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측정할 수 없는 것을 측정하기 : 대자연의 금융화」 중에서
지속가능한 개발은 원조 프로젝트의 성공을 넘어 문화적 유대를 강화하고, 정치와 경제의 틀을 구축하기 위한 장기적인 과정이다. 따라서 데이터에 혈안이 된 자본주의 자선가들의 ‘조급증’은 안정적이고 공평한 목표를 달성하려는 국가들의 역량을 훼손한다. 여러 측면에서 원조 효과성과 결과 기반적 접근을 둘러싼 논쟁은 역효과를 내기 쉽다. 논쟁의 초점이 ‘필요한 것’에서 ‘측정할 수 있는 것’으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세는 공공자금을 지원받는 개발 기관의 운영과 정책의 우선순위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기관들은 원조 프로그램의 가시적 결과를 보여주고, 기부자들에게 공로를 돌리라는 내부적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필자 또한 앞서 언급한 유럽의 원조 기관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원조의 영향이 감소하더라도, 기관들이 시달리는 압력은 가실 줄을 모른다.44) ‘효과를 발휘하는 것을 측정한다’는 명제를 지지하는 자들은 개발 자금이 들어가는 원조의 대상을 통계적 실험 기법에 근거한, ‘엄격한’ 증거 실험을 통과한 원조로 한정한다.45) 개발 프로젝트의 수익자들은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으므로 납세자나 투자자를 만족시키는 숫자를 양산하는 것이 민초들의 아쉬운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더욱 중요해졌다. 결과에 바탕을 둔 개발이 점점 중요해지면서 어떤 프로젝트에 재정을 투입할 것인지 결정하는 데 수치 모델이 핵심 요소로 자리 잡았다.
---「공공의 선을 위한 숫자? : 원조의 효과와 사회적 영향에 대한 탐구」 중에서
숫자와 인간사의 관계는 그렇지 않다. 측정이 사회적 삶을 파고들수록, 현실을 형성하는 데 이바지한다. 예컨대 표준화된 평가 절차는 성과를 분석하는 도구에 그치지 않으며, 성과를 유도하는 도구의 역할을 수행한다. 논문의 수량이 중요하다면, 학계는 질을 상관치 않고 모든 연구 결과를 출판하려 안간힘을 쓸 것이다. 페이스북의 친구 수가 중요하다면, 이용자들은 기존의 교우관계를 강화하기보다 새로운 친구를 만들려 최선을 다할 것이다. 사랑의 양이 화목한 가정을 측정하는 척도가 된다면 부모들은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 장난감, 외출 횟수 등 측정 가능한 것에 더욱 많은 관심을 쏟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우선순위를 오판하는 리스크 말고도, 측정 불가능한 것의 가치를 향유하지 못할 수 있다는 분명한 리스크가 존재한다. 독일의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다음과 같은 취지로 말한 적이 있다. 숫자를 사회적 삶에 체계적으로 적용하면서 발생하는 문제는 “숫자가 틀린 것이 아니라 숫자가 진실이 될 수 있다는 현실이다.”
---「숫자를 다시 생각하고, 거버넌스를 재검토하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