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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 짜 : 2023. 08. 26.(토) ~ 27.(일) 무박 ♣ 날 씨 : 구름 약간, 최저 20℃ / 최고 31℃, 바람 4km/h
♣ 장 소 : 전남 함양군 마천면, 경남 산청군 시천면 지리산 일원
♣ 공지대장/참석대원(존칭생략)
* 1호차 : 이흥재(총괄) / 정만주(선두), 진형기(후미), 삐딱공주(총무), 정유선(부총무), 쑤니, 짱가, 돌돌, 불이, 우춘숙, 애니콜,
전순선, 한영호, 윤선화, 변동석, 김정희, 김영선, 나프리, 주혜숙, 성봉언, 이희정, 따구, 박정진, 무아, 임무식, 도경, 장진호,
시루(포항), 고분(경주), 녹슨칼 【총 30명】
* 2호차 : 희망새(밴드장), 박연욱(왕총무), 로뎀나무(수석팀장), 서암(명산고문), 강나연, 야생화, 우주첫별, 시나, 안익섭, 김숙,
정미숙, 심정미, 브리즈, 이동찬, 이동찬2, 권혁준, 수피아, 김미키, 줄리안, 삼봉, 정진영, 진강산, 이철주, 이원주, 이보경, 황순옥,
이영훈, 임성, 이은호, 전설, 류용전, 오세중, 무영객, 홀로서기, 용아장성, 블루스타, 미주, 켈린,
【총 38명】
♣ 일 정 : 백무동(800m)→한신계곡→세석대피소→촛대봉(1703m)→연하봉(1667m)→장터목대피소→제석봉(1808m)→통천문
→천왕봉(1915m)→천왕샘→개선문→법계사(1450m)→로타리대피소→망바위→칼바위→출렁다리→중산리탐방안내소→중산리
【약 19km / 약 9:30’소요 / 3.5만보】
오늘이 우리 등야 백두대간종주대 제3기 남진 34차구간의 전 과정을 마치는 날이다! 대간 종주의 출발 깃발을 들어 올린 지
거의 2년 만에 민족의 영산이라 이르는 지리산 천왕봉에 오른다. 지리산은 한자로 '지이산(智異山)'이라 쓰고 '지리산'으로
읽는다고 한다. 2주 전 바로 앞 구간인 33차구간에는 이제 드디어 마지막 한 구간 만의 종주를 남겨 놓게 되었다는 데에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2년 전 대간길 첫 출발 때부터 나는 '완주를 했으면' 하는 희망사항은 간절했으나 체력적으로나 연령적으로나 반신반의를 했다.
어려서부터 나와 같은 또래에서 어떤 종목의 운동이나 놀이에서 바닥을 벗어나기 어려운 허약체질에 멘탈 또한 약하기 짝이
없었다. 무슨 일이든 조금만 어려우면 참지 못하고 포기를 한다.
아마 내가 대간길을 완주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에서 우리 초기 30여명의 대원들 중 중도탈락 1순위가 나 였던 것은
자타공인 수준이었으리라! 스스로 완주할 가능성 50% 이하로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도 처음에는 대간길 공지가 떠도 선듯
참석신청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비맞고 산행하기 싫어서 산행일 일기예보에 비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인이 되어야
비로소 신청을 했기 때문이다. 별로 비 맞지 않고 무사히 중반을 넘기고부터는 그동안 걸은 것이 아까워 악착같이 매달리게
되었다!
정작 어제 저녁 일명 졸업산행이라는 대간완주산행 출발일에는 기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큰 감정의 변화 없이
비교적 담담했었다. 이 나이에 방정맞게 남 앞에서 좋다고 호들갑을 떨거나 희로애락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래는 종주산행 중 보고 들은 얘기와 느낀 점 몇 가지!-
1. 욕실 딸린 침대방
지리산 능선길이 한산하던 어느날 대피소에서 숙박을 하다가 산장지기로 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숙소를 민간에서도 많이
관리하던 옛날에는 '대피소'라는 말보다 '산장'이라는 용어를 더 많이 썼다. (비교적 오래 남아 있던 민간 대피소는 지리산의
치밭목, 피아골, 연하천 산장이고, 설악산에서는 수렴동, 양폭 산장인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은 모두 국립공원공단에서
인수하여 개축 운영 중이다)
2002년 1월 16일, 내가 첫 지리산종주를 위하여 성삼재를 출발하여 숙박을 했던 곳은 벽소령대피소였다.
천안에 살때 밤 11시경 출발하는 야간열차를 타고 새벽에 구례구역에서 내렸다. 알고보니 열차에서 내린 사람 중 지리산종주를
하려고 내린 사람은 유일하게 나 혼자였다. 나는 수두룩 할 것으로 예상했었으나 택시비도 혼자 감당해야 했다!
'이런! 경험도 없는 초보산꾼인데 캄캄한 새벽 4시경 혼자서 산길을 걷게 되다니...!'
유난히 더운 겨울을 지나고 있던 그때 노고단 주변은 빙판이 많았지만 대체로 등로는 질척거리는 진창으로 등산화는
흙 투성이에 물이 스며들어 양말까지 완전히 젖은 채 벽소령에 도착을 했다. 어쨌거나 무사히 대피소에 도착하여 첫 밤을
지내게 된 것만도 황송하게 생각되었다. 준비해 간 도시락과 소주 한잔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니 방송이 나온다. 수돗물이 얼어서 안 나오므로 물이 필요한 사람은 그릇을 들고 매점앞으로 오라는 얘기다.
물을 받아다가 밥을 지어먹고 나서(그때는 대피소에서 햇반을 팔지 않아 쌀과 부식을 가지고 다녀야 되었었다) 또 물을 받으러
갔다. 무엇에 쓸거냐고 물어서 설거지하고 세수를 할 것이라고 했더니 대피소 직원이 하는 말인 즉.
"우리는 대피소에 물이 부족하여 세수는 물론 이도 못 닦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집에 가서나 이를 닦아요!"
"그럼 설거지는요?"
"눈으로 하던지 휴지로 대충 한번 닦으세요."
라고 하면서 딱 한번 밥 지을 물만 준다는 것이다. 나, 참! 그런 사실 진작 알았더라면 지리산종주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볼 걸...!
한 가지 더 나쁜 소식, 발생한 모든 쓰레기는 소지하고 다니다가 하산 후에 버리란다. 환장!
어느 무더운 여름날, 온몸을 고가의 산행장비로 감싸고 얼굴이 붉게 상기된 남녀 한쌍이 땀을 뻘뻘 흘리며 저녁 무렵 지리산
자락의 어느 대피소로 찾아 들었다.
산장지기가 나오자 남성 산객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욕실 딸린 침대방 하나 주세요!"
이 부잣집 자제로 보이는 젊은이 한쌍, 만약 산장지기가 가로폭 50cm 정도의 마루바닥에서 베개도 없이 냄새나는 모포만 한장
덮고 자야하는 곳을 보여주며 벽소령에서 나에게 한말 그대로 전해 주었다면 아마 기절하지 않았을까? 밥 지어먹을 쌀과
부식은 커녕 지갑 가득 돈만 채워왔기가 쉬웠을 텐데...!
2. 밴장님의 허리통증
오늘도 어김없이 대간 3기 중 최하위 등력으로 혼자서 터덜터덜 걷고 있는데 연하봉 근처에서 희망새 밴장님을 만났다.
'아니? 닉네임 그대로 새처럼 날아다니듯 산을 타는 분이 어떻게?'
몇마디 대화를 나눠 보니 허리통증이 심하여 걷기가 힘드신다고 한다. 아무래도 장터목에서 중산리로 곧바로 하산을 해야 할
것같다는 말씀을 곁들여서...!
서로 사진 한장씩 찍어 주고 갈길이 더 먼 내가 먼저 자리를 떴다.
그런데 장터목대피소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데 밴장님의 어느새 따라 오셨다.
허리가 아프니 누가 좀 밟아달라고 얘기하는데 이런 사람 우리 3기에도 있다. 경험 많은 한 분이 엎드린 밴장님 허리를 맨발로
밟았는데 하는 얘기가 척추 가운데에 뼈가 튀어나와 발바닥에 걸린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나중에 쉼터에서 누군가가 하게 되었다. 앞 뒤 얘기를 순서 없이 대충 주워 들은 삼봉 대장이 갑자기 흥분을 했다.
"뭐라고요? 누가 밴장님을 밟아서 척추뼈가 튀어나오게 했습니까? 그런데 그냥 두고 구경들만 하신 겁니까?"
천진한 소년 같은 얼굴을 한 삼봉대장이 저렇게 화내는 것 처음 봤다. 주먹을 불끈 쥐고 곧 달려가 누군가를 한 주먹에 때려
눕힐 기세다! 밴장님, 경호원이 필요하시면 삼봉대장을 추천합니다! ㅋㅋ
3. 민망한 볼일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무슨 일을 하다보면 차마 얘기하기 껄끄러운 내용이 있을 수 있다. 특히 생리문제가 그렇다.
전세계에 제일 가는 미녀라도 피할 수 없고, 제일 못난이라도 당연히 보아야할 볼일인데 여러 사람 앞에서 당당하게 '나 똥싸러
가니 기다려 주세요.'라거나 '똥싸러 가야할 텐데 누구 휴지 갖고 있는 사람 있어요?'라고 말할 수 있나?
그렇다고 말 꺼내기 민망하여 참고 있다가 옷 입은 채 볼일을 본다면 그건 더 해외토픽 감이 된다.
어쩌다 한번 모여 가는 경우는 참 어려운 얘기이지만 가족처럼 오래 같이 생활을 해 나가다 보면 가능할 수도 있다.
등로를 걷다가 갑자기 볼일을 보고 싶으면 어찌해야 할까?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첫 산행에 따라 나서면 깊은 산 중에서도
화장실이 어디 있느냐 묻는 경우도 있다. 다행히 바로 옆에 숨기 좋은 바위나 나무숲이 있다면 좋겠지만 세상이 어디 내 편할
대로 세팅되어 있나? 그렇지 못한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어쩔 수 없이 앞뒤 오는 사람 있나 없나 살핀 뒤 등로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볼일을 보는 수밖에...! 그런데 살핀다고 살폈어도
갑자기 사람이 나타나서 놀라게 만든다. ‘오마나, 이걸 우째! 어뜨케?’ 어쩌구 하면서 오는 사람도 쳐다보고 피할 곳 없나
이리저리 살피기 쉬운데 아주 잘못된 방법이다.
속으로야 당황을 했을지언정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양 그냥 정면을 고정주시하고 시선을 오고 있는 사람을 향해서 마주치면
절대 안 된다.
-숲속에서 큰 짐승을 만나도 서로 눈이 마주치지 말라는 매뉴얼도 있는데 사람 같은 큰 짐승이야 말 할 것도 없지.-
하던 대로 태연한 척 볼일을 본다. 단 이미 끝났더라도 지나가던 사람이 완전히 지나갈 때까지는 움직이지 말고 기다렸다가
안전해 졌을 때 뒤처리를 한다. 만약 눈이 마주쳤다면 긴 거리를 걸어가면서 다음 쉼터에서 또 마주쳐 나보다 상대편이 더
민망해 할 수도 있고, 서로 얼굴이 붉어질 수도 있다.
이런 고급 정보는 동네 대중목욕탕에 갔을 때 불이 나면 알몸으로 튀어 나가야 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와 방법이 비슷하다.
옷 찾고 신발 찾아 신고 나가려다가는 타 죽고 만다. 남에게 알몸을 보여주기는 싫으니 가려야 하는데 가릴 것이라고는 두
손밖에 없다.
이럴 때는 남이 나를 못 알아보게 다 팽개쳐 두고 두 손으로 얼굴만 최대한 가리고 달려가다가 옷가게나 몸을 가릴 수 있는
것을 파는 곳으로 뛰어 들어가 얼른 몸을 가려야 하는 것이 정답이다.
부끄럽더라도 죽는 것 보다는 사는 것이 낫지!
4. 훈련소 수료와 백두대간 완주
대한 남아이면 피할 길 없는 징집 영장을 내가 만 20세에 받고 들어간 곳은 논산 연무읍에 있는 육군제2훈련소였다.
별칭은 '연무대'이고, 나는 23연대 10중대 4소대 소속으로 6주간의 육군 기본훈련을 받았다.
군대와 민간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훈련소 생활과 백두대간 종주 둘 사이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우선 시작할 때 두려움이 크며, 진행 중일 때는 빨리 끝나기를 학수고대한다. 가장 중요한 끝날 때는 뿌듯한 자부심과 함께
지난날의 온갖 어려움이 떠오르며 회한의 눈물이 솟는다!
훈련소에서는 군대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초훈련을 받지만, 훈련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목표를 정확히 맞추는 사격에 있다.
대간길에서는 가장 중요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사진 찍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사격과 사진촬영에도 공통점이 많다!
우선 사격에선 목표를 정확히 조준해야 되듯이 촬영은 피사체에 초점을 정확히 맞춰야 한다. 그 외 총이나 카메라를 몸 가까이
밀착시키고 움직이면 안되며, 결정적 순간에는 호흡을 멈추고 치약을 짜듯이 서서히 당기고 서서히 눌러야 한다.
팍팍 당기거나 누르면 총알은 빗나가고, 사진은 흔들려 촛점이 맞지 않은 사진이 된다. 그리고 새나 짐승들은 겨냥하거나
사진을 찍으려 하면 시선 집중에 위협을 느끼고 달아난다!
얘기가 옆으로 좀 샛는데, 훈련소에서 6주간의 육군 기본훈련을 수료하면 수료식을 마침과 동시에 훈련병 딱지를 떼고
이등병 계급장을 단 군복을 입는다. 그리고 신병 전원이 열을 지어 연무읍 시내를 행군하여 ‘배출대대’로 이동을 한다.
나는 오늘까지 같이 고생하며 훈련을 받던 10중대 4소대 동기들이 이제 전국각지로 뿔뿔이 흩어져 각각 자대에서 32개월 정도
군대생활을 하다가 제대할 텐데 같은 부대로 배치 받는 몇 명을 제외하고는 평생 얼굴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슬퍼졌다.
논산을 향해선 오줌도 안 눟겠다는 군인들이 많지만, 그 고생을 한 것도 다 같은 동료들이었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나약한
나는 앞으로 배치될 자대 내무반에서 홀로 모셔야할 층층시하 고참들 밑에서 괴로운 쫄병생활을 어떻게 견디나 걱정이 많았다.
어쨌거나 지나간 훈련받던 생각, 앞으로의 걱정 등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배출대대까지 걸어가는 그 짧은 시간 내내 눈물이
쉴새 없이 흘렀다.
5. 백두대간 종주대 3기 졸업식장에서
졸업식장을 들어설 때부터 그간 겪어온 많은 일들, 이제 같이 동고동락하던 다른 대원들은 대간길 완주를 시작으로 더 격상된
산행에 매진을 하며 산행의 질을 높여 갈 텐데 나는 대간완주를 마지막으로 인생의 황금기를 장식하고 하향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제 지옥문을 들어서는 듯 심정이 착잡하여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조금만 더 자제할 능력이
부족했더라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펑펑 소리내어 울 뻔 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자꾸만 써논 모니터 글씨를 확인하기가 어렵다.
그동안 불편한 자신의 입장에도 끝까지 대원들을 이끌어 완주에 이르게 해 주신 이흥재 대장님 진심을 담아 감사드립니다.
정만주 선두대장님, 진형기 후미대장님, 삐딱공주/최현경 총무님, 정유선 부총무님 모두 고생 많았지만, 특히 삐딱공주 총무님은
전 대원들의 치닥거리를 맡아 하시느라고 엄청 고생하셨습니다. 완주를 했건 일부만 참여했건 그동안 같이 했던 모든 님들
함께 하여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영겁을 흐르는 우주의 역사에 우리가 만난 것은 찰나이지만 무엇 보다도 더 진한 인연이었습니다!
우리가 이제 더 이상 함께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건강하세요, 행복하세요. 가족과 함께 이웃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