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향기
올봄 나와 같이 부임해온 교무부장은 오십대 초반으로 헤아려진다. 가르치는 교과가 영어이며 생활 근거지는 통영이다. 거기서 우리 학교까지 출퇴근은 승용차로 삼십 분 남짓이라고 들었다. 거제에 터 잡고 사는 분들이 대부분이지만 더러 통영에 연고를 둔 동료들도 있었다. 한동안 오른팔 깁스를 해 불편했는데 이제는 풀었다. 전임지에서 직원체육으로 배구를 하다 다쳤다고 했다.
부임 첫날 교직원들과 상견례를 가진 시간 사회를 보면서 유의미한 얘기를 나누어 인상적이었다. 우리 학교는 거제 지역 특성상 신규 교사들이 많다. 정규교사가 배치 받지 못한 미발령 과목은 기간제 교사로 채워졌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교무부장은 담임을 맡으신 선생님들께 학생이나 학부모 사이에 지도나 상담에 어려움이 있으면 언제든 터놓고 머리를 맞대어 풀어가자고 했다.
나중 알고 보니 교무부장 역은 교장 교감이 억지로 떠맡긴 모양이었다. 신학기를 앞둔 이월에 업무와 담임을 배정할 때 교무부장 적임자가 있었더라면 미련 없이 그에게 양보할 의향이 있었던 듯했다. 교무부장은 지난해 여름 교감 자격연수를 받아 놓고 때가 되면 교감으로 승진해 학교 관리자로 역량을 펼칠 분이었다. 승진을 앞둔 평교사 시절을 마무리하는 봉사와 헌신으로 임했다.
내가 창원에서 거제로 부임해 가니 교장이 먼저 각별히 챙겨주어 황송했다. 교장이 나에게 마음 써 주는 것은 업무를 가볍게 하는 일이다. 내 나이가 되고 보니 컴퓨터로 처리하는 일들은 공문서 처리를 비롯해 굼뜨기는 어쩔 수 없다. 학생들과 호흡을 맞추기도 어려운지라 담임을 맡길까 봐 은근히 걱정했다. 나이가 좀 들었다고 담임을 면제 받고 쉬운 일을 맡겨 고맙기 그지없다.
생면부지인 교장이 나를 배려해 줌엔 눈이 보이지 않은 분의 도움이 있었다. 떠나온 학교 교장이 거제 교장에게 전화를 넣어 내 프로필을 소개했나 보다. 나는 전임 학교 교장과 술도 밥도 나눈 사이가 아니다. 동향도 아니고 동문도 아니고 가르친 교과도 달랐다. 둘은 산골 빈농 출신으로 국립 사대를 나왔다는 공통분모뿐이다. 맡은 역할이 달라도 바라보는 방향은 같을 수 있다.
공립학교 교사는 순환 근무제라 연한이 되면 학교나 지역을 옮겨간다. 나이가 들수록 학교를 옮기기가 부담이 된다. 사람의 뼈가 어릴 적이 부드럽고 나이 들면 뻣뻣하듯, 나이 들면 낯선 환경에 적응도 유연성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중년 이후 근무지는 만기를 다 채워 떠밀리다시피 학교를 옮겼다. 새로운 임지에 가면 지난날은 잊고 그곳 풍토와 문화에 젖어들어야 한다.
나는 거제로 부임하면서 새내기 같은 심정으로 근무하고자 각오했다. 무슨 업무를 맡겨도 받아들일 자세였다. 담임을 맡겨도 나름대로 노력 아이들과 부대끼며 호흡을 같이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고맙게도 업무는 수월하고 부하가 적었다. 담임에서 빼어주어 마음속으로 얼마나 고마웠던지. 국어과 동료들과 협의해 내가 들어갈 수업만 책임지면 되었다. 나는 한문도 마다 않고 맡았다.
신학기가 시작되고 이틀째였던가. 교무부장은 그 바쁜 와중 우리 업무부서 기획과 교무실무원을 나와 같이 한 자리에 모셨다. 그리고는 내가 맡고 있는 ‘장학’과 ‘수상’을 그 두 분에게 나누어 가집사고 했다. 공문이 잦거나 복잡한 일이 아님에도 고 경력 교사에 일을 맡김이 부담되던 모양이었다. 사실 나는 나이스에 접속해 공문을 처리해 본지가 아득해 일머리와 끝을 모른다.
엊그제다. 내가 수업이 빈 시간 교무부장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다가와 차를 한 잔 나누러 가자고 제안해 왔다. 교무실과 인접한 상담실에 같이 들어섰다. 진로상담 교사로부터 차를 한 잔 대접 받으며 둘이서 편한 얘기를 나누었다. 교무부장은 내가 객지에 혼자 와 지냄이 안쓰럽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이곳 생활에 불편한 점이 없는지 물으면서 뭐든지 더 도와주려고 해 고마웠다. 19.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