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밥을 안치려면 먼저 쌀이 있어야 합니다.
논에 있는 벼가 달린 식물을 벼라고 하고, 그 열매도 벼입니다. 그 벼를 찧어 속꺼풀을 벗기고 깨끗하게 하는 것을 쓿는다고 합니다.
벼를 쓿 때 생기는 벼 껍질이 겨입니다. 겨 중에서 곁겨는 왕겨, 속겨는 쌀겨입니다. 왕겨만 벗기고 속겨는 그대로 둔 쌀이 바로 매조미쌀입니다. 이 매조미쌀을 여러 번 깎아내 속겨를 벗긴 것이 쓿은쌀입니다. 이런 쌀은 더는 손댈 필요가 없다고 해서 아주먹이라고도 합니다.
벼를 쓿 때 생기는 부스러진 쌀알이 싸라기입니다. 잘 쓿지 아니하여 빛이 깨끗하지 아니하고 겨가 많이 섞인 쌀은 궂은쌀입니다. 이때 찹쌀 속에 섞인, 멥쌀같이 보이는 좋지 않은 쌀알이 물계입니다.
이렇게 만든 쌀은 벼에서 나왔다고 해서 볍쌀이라고도 합니다. 이 볍쌀은 끈기가 많고 적음에 따라 찹쌀과 멥쌀로 나뉩니다.
멥쌀을 보리쌀 따위의 잡곡이나 찹쌀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 입쌀입니다. 이 입쌀로 지은 밥이 이밥입니다. (여기까지는 원자료에서 조금 다듬었습니다. 아래 자료는 나름대로 재료, 때, 시간, 장소, 대상을 임의로 묶어서 썼고 "우리말 갈래사전"을 보면서 보충했습니다. 분류가 꼭 맞지는 않습니다. 편의대로 나누고 썼구나, 해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밥 이름을 구경해 볼까요.
먼저, 함께 넣는 것에 따른 밥 이름입니다. 입쌀만으로 지은 쌀밥(이밥), 멥쌀로 지은 쌀밥, 잡곡을 섞지 아니하고 흰쌀로만 지은 흰밥, 입쌀에 잡곡을 섞어 지은 잡곡밥, 쌀에 보리를 섞어 짓거나 보리로만 지은 보리밥, 보리쌀로만 밥을 지으면 잘 지어지지 않아 두 번 삶아 지은 꽁보리밥(곱삶이), 껍질을 벗긴 통밤을 섞어 넣어 지은 밤밥, 껍질 벗긴 감자를 썰어 넣고 짓거나 감자로만 지은 감자밥, 끓는 밥 위에 생굴을 넣고 섞어서 익힌 굴밥, 쌀밥에 당근 쇠고기 감자 따위를 잘게 썰어 넣고 기름에 볶아 만든 볶음밥, 맨 좁쌀로 짓거나 입쌀에 좁쌀을 많이 두어서 지은 조밥, 찰수수로만 짓거나 수수쌀을 섞어서 지은 수수밥, 쑥을 넣어 지은 쑥밥, 멥쌀에 조갯살 넣고 간장 쳐서 지은 조개밥, 찹쌀과 팥 밤 대추 검은콩 따위를 섞어 지은 찰밥, 콩나물을 넣고 지은 콩나물밥, 쌀에 콩을 섞어서 지은 콩밥, 팥을 놓아 지은 팥밥, 피로 지은 피밥, 그해에 새로 난 쌀로 지은 햅쌀밥, 현미로 지은 현미밥, 찹쌀과 기장 차수수 검정콩 붉은팥 다섯 가지 곡식을 섞어 지은 오곡밥, 김치를 잘게 썰어 쌀 밑에 두고 지은 김치밥 등이 있습니다.
전복, 무, 거북손, 보말(고둥), 강낭콩, 옥수수, 고구마 등 뭐든 먹을 수 있는 걸 쌀이나 잡곡과 함께 넣어서 지으면 밥입니다. 무슨 밥이든 한번 지어보시지요.
둘째, 짓는 방법에 따른 밥 이름입니다. 새옹(놋쇠로 만든 작은 솥)에 지은 새옹밥, 가마솥에 지은 가마솥밥, 찬밥을 더운밥 위에 얹어 찌거나(데운) 찬밥에 물을 부어 다시 지은 되지기, 팥을 달인 물에 흰쌀을 안쳐 짓거나 찬밥에 물을 조금 치고 다시 무르게 끓인 중둥밥, 솥 안에 쌀을 언덕지게 안쳐서 한쪽은 질게 다른 쪽은 되게 지은 언덕밥 등이 있습니다.
냄비밭, 프라이팬밥 등 밥 짓는 그릇에 따라 붙일 이름 많겠습니다. 먹을 게 많지 않아 찬밥으로 다시 짓던 되지기, 할아버지와 어린 자식밥을 함께 짓던 언덕밥을 먹고 산 사람도 옛날에 그랬지 하는 기억만 있겠습니다.
셋째, 상태에 따른 밥 이름입니다. 질게 지어진 진밥, 물기가 적게 지은 된밥, 충분히 익지 않은 선밥, 아주 되게 지어 고들고들한 고두밥, 솥 바닥에 눌어붙은 누룽지, 누룽지에 물을 부어 불려서 긁은 눌은밥, 맨 위는 설거나 질고 중간은 제대로 되고 맨 밑은 타버린 밥은 삼층밥, 솥에서 처음으로 푼 밥이나 손대지 않은 깨끗한 숫밥. 같은 솥에서 푼 한솥밥, 한 되가량 쌀로 지은 됫밥, 한 말가량 쌀로 지은 말밥, 한 섬 쌀로 지은 섬밥 등이 있습니다.
숫 자 들어간 말은 참 가슴 설렙니다. 더럽혀지지 않아 깨끗하거나 새끼를 배지 않는 뜻을 더하는 접두사로 숫국, 숫눈, 숫눈길, 숫길, 숫되다, 숫접다, 숫지다, 숫스레, 숫곡(햇곡), 숫구멍, 숫음식, 숫제, 숫처녀 등이 있네요.
넷째, 담은 모양에 따른 밥 이름입니다. 그릇 위까지 수북이 담은 밥은 감투밥, 밑에는 다른 밥을 담고 그 위에 쌀밥을 수북이 담은 고깔밥. 사발 바닥에다 작은 그릇이나 접시를 엎어 놓고 담거나 밑에는 잡곡밥을 담고 위만 쌀밥을 담은 뚜껑밥, 주먹처럼 둥글게 뭉친 주먹밥 등이 있습니다.
고깔밥은 손님 접대할 때(손님은 밥 다 먹지 않고 뜨는 시늉만 하던 시절에 내놓던 마음인데 내놓는 엄마나 밥상 받는 외할아버지나 참 속으로 눈물 꽤나 훔쳤겠습니다), 뚜껑밥은 젯밥 담을 때 귀신을 속이려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밥이었겠습니다.
다섯째, 먹는 시간에 따른 밥 이름입니다. 끼니때 외에 따로 짓는 군밥, 점심 끼니때가 지난 뒤에 간단히 먹는 한점심, 저녁 끼니때가 지난 뒤에 간단하게 차리는 한저녁, 저녁밥을 먹은 지 한참 뒤 밤늦게 또 먹는 밤밥, 저녁밥을 먹고 난 한참 뒤 밤중에 먹는 밤참, 지은 지 오래되어 식어버린 찬밥, 쉬어서 쉰내가 나거나 시금하게 된 쉰밥, 등이 있겠습니다.
찬밥이고 쉰밥이고 배곯지 않으면 장땡이던 시절도 이제 아득한 옛날입니다. 남 몰래 숨어 먹는 밥은 도둑밥(사전에는 돈을 내지 않고 먹는 밥이라고 하네요)일 때도 있었습니다. 밥 먹을 때는 조용히 해야 한다, 밥 먹을 때 떠들면 복 나간다는 말씀이 실은 남보다 한 숟갈이라도 더 먹게 하려던 엄마 마음인 것을 알았을 때는 더는 밥 걱정 않을 때였습니다. 아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남길 때였습니다.
여섯째, 반찬이나 국이 있는지에 따른 밥 이름입니다. 국이나 물에 말지 아니하고 그냥 먹는 강다짐, 국이나 찬도 없이 맨밥으로 먹는 강밥, 반찬 없이 먹는 매나니(맨밥). 반찬이 변변치 않아 소금을 반찬으로 차린 소금엣밥, 고기나 나물 따위와 여러 가지 양념을 넣어 비빈 비빔밥, 끓인 국에 밥을 만 음식이나 국에 미리 밥을 말아 끓인 국밥, 김 위에 밥을 펴 놓고 여러 가지 반찬으로 소를 박아 둘둘 말아 싸서 썰어 먹는 김밥, 메밀을 찧어서 나깨(메밀을 갈아 가루를 체에 쳐내고 남은 속껍질)를 벗겨 버리고 지은 메밀밥, 무를 채 썰어 쌀에 섞어서 지은 밥으로 주로 양념장에 비비어 먹는 무밥, 물에 말아서 풀어놓은 물만밥, 더운 장국에 말아놓은 장국밥, 흰밥과 국수를 넣고 끓인 떡국은 국수원밥숭이, 떡국에 밥을 넣어 끓인 원밥수기 등이 있겠습니다.
강다짐, 강밥, 매나니, 참 슬픈 이름입니다. 소경불알, 앉은뱅이꽃, 며느리밥풀꽃처럼 말입니다. 어떻게든 먹고살아야 했던 데서 나와 굳은 말이 많습니다.
일곱째, 먹는 양에 따른 밥 이름입니다. 보통 때에는 얼마 먹지 않다가 갑자기 많이 먹는 밥은 소나기밥, 마음껏 배부르게 먹는 밥은 한밥, 끼니때가 아닌 때에 먹는 밥도 한밥, 먹다가 그릇에 남긴 밥은 대궁, 숭늉 속에 들어 있는 눌은밥은 물눌은밥, 먹고 남은 턱찌꺼기, 먹고 남아도는 군밥, 지어서 먹고 남은 찬밥 등이 있겠습니다.
세상 사는 일 참 만만찮습니다. 대궁이고 찬밥이고 먹을 게 있다면 어떻게든 살았겠습니다. 께작께작밥, 후루룩밥, 홀앗이밥, 서러움반외로움반 밥이란 이름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덟째, 장소나 때에 따른 밥 이름입니다. 모를 내거나 김을 맬 때 논둑에서 먹는 기승밥, 낮에 일을 하다가 잠시 먹는 낮참, 들일하다 들에서 먹는 들밥, 모내기하다 들에서 먹는 못밥, 일을 하다 잠깐 쉬면서 먹는 새참, 농사꾼이나 일꾼이 끼니 외에 참참이 먹는 곁두리, 아침과 점심 사이 곁두리는 아침곁두리, 일할 때 아침과 점심 사이에 먹는 샛밥은 아침참, 점심밥과 저녁밥 사이에 먹는 곁두리는 저녁곁두리, 일할 때 저녁을 전후해서 쉬는 동안이나 그동안에 먹는 저녁참 등이 있겠습니다.
PC방밥, 모텔밥, 휴게소밥도 나옴직합니다.
아홉째, 누가 먹느냐에 따른 밥 이름입니다. 임금이 드시는 수라, 양반이나 윗사람이 드시는 진지, 하인이나 종이 먹는 입시, 귀신이 먹는 메. 주로 미역국과 흰밥으로 된 아이를 낳은 뒤에 산모가 처음으로 먹는 국과 밥은 첫국밥, 드난살이하면서 얻어먹는는 드난밥, 옥에 갇힌 죄수에게 벽 구멍으로 몰래 들여보내던 구메밥, 제값을 치르지 않거나 일을 하지 아니하고 거저먹는 공밥, 남 눈치를 보아 가며 얻어먹는 눈칫밥이 있습니다.
밥을 먹기 전에 아귀 또는 새와 들짐승 따위에게 주기 위하여 조금씩 떠내는 생반(生飯), 중이 밥을 먹기 전에 귀신에게 주려고 한술 떠 놓는 여동밥, 산천 신령에게 제사 지내기 위하여 놋쇠나 구리로 만든 작은 솥에 지은 노구메, 무당이나 판수가 굿을 하거나 물릴 때 귀신에게 준다고 물에 말아 던지는 물밥, 초상난 집에서 죽은 사람의 넋을 부를 때 저승사자에게 대접하는 사잣밥,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차려 놓은 제삿밥(祭ㅅ밥), 불공드릴 때 부처님 앞에 놓는 잿밥(齋ㅅ밥)이 있겠습니다.
우리 선조께서는 날것, 길것에 귀신, 아귀까지 두루 챙겨셨습니다.
오늘 찾으려던 엄마 말입니다. 이 말 찾느라 새벽부터 지금까지 애썼습니다.
겅그레 : 솥에 무엇을 찔 때, 찌는 것이 솥 안의 물에 잠기지 않도록 받침으로 놓는 물건. 흔히 댓조각을 얽어서 만드는데, 임시로 나뭇개비를 걸쳐 놓기도 한다.
시룻번 : 시루를 솥에 안칠 때 그 틈에서 김이 새지 않도록 바르는 반죽
시룻밑 : 시루 구멍을 막아 시루 안의 것이 새지 않도록 하는 제구
부꾸미 : 찹쌀가루, 밀가루, 수숫가루 따위를 반죽하여 둥글고 넓게 하여 번철이나 프라이팬 따위에 지진 떡. 팥소를 넣고 반으로 접어서 붙이기도 한다.
어레미 : 바닥이 구멍이 굵은 체
쳇다리 : 액체를 거를 때 체를 올려놓는 제구
부디기 : 삶은 국수를 가마에서 건져 내는 데에 쓰는 기구. 보통 올이 굵은 베로 자루 모양으로 만들어 아가리에 굵은 철사나 나뭇가지 따위로 손잡이를 붙인다.
다래끼 : 아가리가 작은 바구니
(올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