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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의 기도
합 3:1-7
1 시기오놋에 맞춘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3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는도다 (셀라) 그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의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
4 그의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의 손에서 나오니 그의 권능이 그 속에 감추어졌도다
5 역병이 그 앞에서 행하며 불덩이가 그의 발 밑에서 나오는도다
6 그가 서신즉 땅이 진동하며 그가 보신즉 여러 나라가 전율하며 영원한 산이 무너지며 무궁한 작은 산이 엎드러지나니 그의 행하심이 예로부터 그러하시도다
7 내가 본즉 구산의 장막이 환난을 당하고 미디안 땅의 휘장이 흔들리는도다
합 3:1-7 / [동족의 고난에 대한 탄식] 예언자 하박국의 기도. 탄식시의 곡조로 읊을 것. 2) 오 주님, 제가 방금 주님의 답변을 들었습니다. 주께서 계획하신 그 무서운 일들이 두려워 저는 떨립니다. 그 일을 너무 먼 미래에 하지 마시고 속히 이루어 주소서! 주께서 간섭하시는 모습을 저도 직접 체험하게 하여 주소서! 주님의 진노가 폭발할 때에도 우리에게는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3) ㄱ)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부터 저 드넓은 사막들을 가로질러 오시는 모습이 보인다! (셀라) 그분의 존귀한 영광이 하늘을 환하게 비추고 그분의 빛난 광채가 온 땅을 가득 채운다. (ㄱ. 원문은 `데만 도성에서...바란 산맥에서'. 시내산에서 나오시는 주님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4) 그분은 사방으로 해처럼 빛을 발하시고 두 손에서 불빛이 뻗어 나온다. 그 속에 그분의 큰 권능이 숨겨져 있다. 5) 그분의 앞에서는 전염병이 진군하며 질병이 그분을 뒤따른다. 6) 그분이 발을 디디시면 땅이 지진을 일으키고 그분이 군대들을 노려 보시면 모두 겁에 질려 뿔뿔이 흩어져 버린다. 영원히 견고할 듯한 산들이 무너지고 태고적 언덕들도 주저 앉아버린다. 그분이 땅위로 걸어가시면 아득한 옛날부터 그러하였었다! 7) 그 재난 속에서 내가 보니 구산의 천막들이 지진을 만난듯 흔들리고 미디안의 천막 지붕들도 벗겨져서 흩날린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족속인 바벨론은 멸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나님의 선민 유다를 바벨론에 의해 징계하신다는 말씀에 불만을 가진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의 참뜻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1-2) 하박국은 하나님의 백성 유다의 징계와 자기 백성을 멸망시킨 바벨론의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에 대하여 '어찌하여'(1:13, 14)라며 불평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을 통하여 유다 백성을 징계하신 이유가 그들의 죄악 때문인 것을 알려주시고 잠시 사용을 하였으나 유다를 괴롭히고 하나님을 모르는 교만한 바벨론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을 듣게 된 후 자신이 믿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경외심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수년 내에 그러한 하나님의 일을 행하시는 때가 조속히 오기를 기도합니다(2).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도록 영적으로 늘 깨어있지 않으면 육신으로 한정된 내 뜻을 가지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판단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 유다를 징계하심은 멸망을 시키기 위한 징계가 아니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는도다(3-7)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나타내 보여 주십니다. 데만과 바란 산은 정확한 장소를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출애굽 여정 속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현현의 장소들입니다. 이러한 장소에서 오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이유는 바벨론에 멸망당한 유다의 백성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에게 출애굽 때에 강한 애굽과 이방인들에게 우레와 같은 빛의 모양으로 역병과 열병으로 현현하시고 그들을 진동시키시고 전율하고 엎드러지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신 구원의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심으로 포로가 되어 소망을 잃은 유다에 대한 구원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적용: 당신은 하나님의 뜻에 당신의 뜻을 맞추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당신의 뜻에 하나님의 뜻을 맞춰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라와 민족을 위해 얼마나 기도하고 있습니까?
가정은 어떤 곳일까요? '집'만 있고 '가정'이 없다고 하는 세태. 영국의 시인 C.스와인(1801∼1874)의 글을 소개합니다. “가정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어떤 것이든 애정을 느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가정은 마음을 기쁘게 하는 속삭임이 있는 곳입니다. 아무도 반갑게 맞이할 사람이 없는 곳을 어찌 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가정은 우리를 만나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 설 교 >
주의 일을 부흥하게 하옵소서
합 3:1=5 / 피종진 목사
사람은 누구나 간절히 바라는 소원이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박국 선지자처럼 ‘주의 일을 수 년 내 부흥하게 하옵소서’라는 꿈을 가져야 합니다. 영원히 변치 않고, 후회 되지 않는 것은 바로 주의 일을 부흥시키는 것입니다. 부흥은 ‘다시 산다’(revival)는 뜻입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듯이, 쇠퇴하던 것이 다시 일어나는 것처럼 날마다 새롭게 되는 것이 부흥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부흥할 수 있는지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철저한 회개를 통하여 부흥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죄악으로 만신창이된 그 시대 사람들을 향하여 탄식하였습니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합 1:3) 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주의 일이 부흥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회개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길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것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용서해주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철저한 회개가 있을 때 하나님의 역사가 함께 합니다(마 3:2).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회개는 방향 전환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욜 2:12,13)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런 회개가 방향을 전환 시킵니다. 다시금 새로운 삶을 살도록 유도합니다. 그래서 회개는 자기 인생의 이정표를 다시 설정하는 것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생활을 청산하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어 실패가 성공으로, 저주가 축복으로, 심판이 구원으로, 사망이 영생으로 바뀌어집니다.
둘째, 간절한 기도를 통하여 부흥하게 됩니다.
바라는 소원이 있을 때 혼자 고민하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다른 무엇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기도에 힘쓰며 부르짖었습니다. 그들이 기도에 힘쓸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는 함께 모여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 2:42) 이처럼 초대 교회는 기도할 때 부흥의 불길이 일어났음을 경험했습니다. 교회 생활은 초대교회처럼 기도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BC 756년에 웃시야 왕이 죽은 이후에 정치, 경제, 사회, 도덕, 윤리가 땅에 떨어지고 신앙마저 퇴보 되었습니다. 이 때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 올라가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에게 나타나셨고, 위기를 극복하게 도와주셨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어떻습니까?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의 불이 떨어져 제물을 불태웠고,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을 기도함으로 무찔렀습니다. 온 국민이 해결할 수 없는 것도 기도하는 한 사람을 통해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도 속에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나라와 민족, 가정과 교회가 부흥하길 바랍니다.
셋째,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부흥하게 됩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닌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부흥되지 않습니다. 부흥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의지할 때는 실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할 때는 실망이 없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라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 기회를 붙잡으면 겉사람뿐만 아니라 속사람도 새롭게 됩니다. 바울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말씀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져서 환난 중에도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때 능력있는 사명자가 됩니다. 두려워 떨던 예수님의 제자들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능력있는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에 능력있는 사명자가 되었습니다(빌 4:13). 또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바나바로 인하여 초대 교회가 크게 부흥되었습니다(행 11:24). 이렇게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우리는 부흥하게 됩니다. 이런 부흥이 다시 한 번 일어나길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철저한 회개를 통해서,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이 땅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서, 다시 한번 성령의 계절이 찾아와서 부흥되는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합 3:1-5 / 피종진 목사
‘부흥’이란 거의 죽은 것과 방불한 것을 살려내어 생명력을 넘치게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초월적 섭리와 주권 및 공의를 깨닫고 주의 예언의 빠른 성취와 긍휼을 간구하며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2절). 범죄한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 및 유다를 심판하기 위해 선택받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될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놀라운 계획을 접하고,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경외의 마음이 충만한 가운데서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속히 이루어질 것과 하나님의 진노 중에라도 선민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을 간구했던 것입니다.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게 하려면
첫째, 간절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 3:2) 하나님은 간절히 기도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게 하십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개인의 입장으로서는 선민의 나라인 유다가 하나님을 모르는 악한 이방 나라에 의해 유린당하는 것이 결코 원치 않는 일이지만, 그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이라는 강대국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을 때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스바로 모이게 하여 간절히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해주셨습니다(삼상 7:5).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두려워 떨며 숨어 지내던 제자들은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눅 24:49)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간절히 기도함으로, 성령의 능력을 받아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자신과 바알 선지자들과의 대결을 지켜보기 위하여 갈멜산상에 모인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과 바알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고 촉구하면서 각자의 신을 불러 불로 응답하는 이를 참 신으로 결정하자고 제안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함으로(왕상 18:37) 응답을 받아 여호와께서 참 하나님이신 것을 입증했습니다. 또한 초대 교회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하였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원동력이 되게 했습니다(행 4:31).
둘째,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역대하 34장 19절에 보면 서기관 사반이 제사장 힐기야가 발견한 율법책을 왕의 앞에서 큰 소리를 읽었을 때, 그 말씀을 겸손히 듣고 있던 요시야 왕은 탄식하여 자기 겉옷을 찢었습니다. 요시야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금까지 그의 조상들이 여호와 앞에 행한 반역과 불순종을 깨달았으며, 너무나 가슴이 아파 입고 있던 겉옷을 잡아 찢으며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게 됩니다. 예레미야 23장 29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불과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불과 같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죄인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정련의 기능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불은 아무리 단단한 금속이라도 녹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불순물이 섞인 금속을 용광로에 넣으면 순수한 금속을 걸러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리 더러운 죄로 오염된 자라도 능력으로 변화의 역사를 일으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겨납니다(롬 10:17). 그리고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합니다(딤후 3:16,17).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를 힘써야 합니다(딤후 4:2).
셋째, 하나님의 일을 행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고전 16:10)라고 디모데를 소개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평생을 동고동락하면서 바울의 동역자로서 복음을 위해 헌신적으로 사역했습니다(롬 16:21, 빌 2:20). 주의 일에 힘쓰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칭찬을 받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7,58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행할 때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박국 선지자처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를 힘쓰며, 하나님의 일을 힘써 행함으로 부흥의 불길이 계속 타오르게 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기오놋에 맞춘 기도
합 3:1-18
서 론
하박국 3장 1절은 하박국 3장의 제목입니다. “시기오놋에 맞춘바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합 3:1). 사실 하박국 3장에 기도는 한 줄밖에 없고 나머지는 주로 찬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시기오놋’에 관하여는 3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 수금이라는 악기를 가르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왜 이런 견해가 나왔느냐면 하박국 3장 19절에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라는 구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는 시기오놋이라는 악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견해는 별로 설득력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음악의 지시어라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음악에서는 ‘느리게’, ‘빠르게’, ‘세게’, ‘약하게’ 등의 지시어가 있습니다. 하박국서 3장에도 중간에 ‘셀라’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찬양을 잠깐 중지하고 묵상해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시기오놋은 보통의 감정으로 평범하게 불러서는 안 되고 감정을 강하게 넣어서 부르라는 뜻의 음악 지시어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박국 3장은 보통 감정으로 불러서는 안 되는 노래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해석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저는 세 번째 견해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잘못을 교정하고 교훈하는 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견해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6). 하박국서도 성경이기 때문에 교훈과 책망하기에 유익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시기오놋이 그런 뜻이 아니라고 해도 별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시편 7편을 보면 ‘다윗의 식가욘’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는데 ‘식가욘’은 ‘시기오놋’의 단수입니다. 그런데 시편 7편을 봐도 악인의 허물을 교정하려고 하는 의도가 포함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시 7:11-12). 악인의 잘못을 교정하려는 목적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식가욘’과 ‘시기오놋’을 ‘잘못을 교정하고 교훈하는 시’라는 뜻으로 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하박국서 3장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자기 잘못을 크게 교정하게 되는데 무엇이 하박국 선지자를 그렇게 변화시켰을까요?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합 3:2). 주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변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고 무관심하시다고 생각했더니 “아니다. 내가 성전에서 일하고 있다.” 이렇게 대답하셔서 놀랍니다. 그리고 악인들이 이기는데도 가만히 계시고 악인들을 앞세워 어떻게 의인을 치실 수 있느냐고 생각했더니 “아니다. 악인은 멸망하고 세계는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의인의 세계가 될 것이다.”는 소식을 듣고 놀란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면 변화합니다. 사람의 행동은 고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면이 변화되면 행동도 저절로 바뀝니다. 술 마시는 사람보고 마시지 말라고 하면 더 생각나서 더 많이 마십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들에게 끊으라고 아무리 말해도 끊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변합니다. 아무리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라고 해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된 사람이 많습니다. 욥도 얼마나 불평이 많았습니까? 고통이 너무 심하니까 자기 생일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 42:5-6).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모두 자기가 옳은 줄 압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자기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사야 6장에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뵙고 나서 변화되었습니다. 자신이 의인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을 뵙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숯을 이사야 선지자 입에 대니까 악이 제하여지고 죄가 사하여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말씀하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하며 순종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고 핍박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사도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사도가 된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은 변화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한 구절이라도 깨닫는 사람은 변화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주께 대한 소문을 듣더니 세 가지의 잘못이 교정되었습니다.
Ⅰ. 두려움의 대상에 변화가 왔다
하박국 선지자는 세 가지가 두려웠습니다. 첫째, 유다왕국을 지배하고 있는 악인들이 두려웠습니다. 악인들이 정권을 잡으면 얼마나 두렵습니까? 사람을 잡아가서 때리고 죽입니다. 므낫세가 왕이 되었을 때 이사야 선지자를 톱으로 켜서 죽였습니다. 하박국이 예언하고 있던 당시의 왕은 여호야김이었습니다. 여호야김 왕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감옥에 집어넣고 예레미야 선지자가 증거하는 말씀을 칼로 잘라서 불에 던진 사람입니다. 여호야김 왕이 하박국 선지자 하나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정권을 잡고 있는 악인들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둘째, 유다왕국의 멸망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전쟁이 나서 서울이 망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혹시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셋째, 나라를 멸망시키려는 바벨론 군대가 두려웠습니다.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심판과 위령이 자기로 말미암으며” (합 1:7).
하지만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을 만나고 주께 대한 소문을 듣더니 이런 것들보다 더 두려운 것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성전에서 일하시고 과거에도 일하셨고 미래에도 일하시며 하나님의 능력은 두려운 능력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박국서 2장 20절은 하나님께서 현재 일하신다는 확신입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합 2:20). 또 하박국서 2장 14절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일하신다는 확신입니다.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합 2:14). 그리고 하박국서 3장 3-15절은 하나님께서 과거에도 일하셨다는 확신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도다 (셀라) 그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 그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 손에서 나오니 그 권능이 그 속에 감취었도다” (합 3:3-4). 이것은 시내 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영광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권능을 다 드러내시면 사람은 그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 권능이 그 속에 감취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출애굽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온역이 그 앞에서 행하며 불덩이가 그 발밑에서 나오도다 그가 서신즉 땅이 진동하며 그가 보신즉 열국이 전률하며 영원한 산이 무너지며 무궁한 작은 산이 엎드러지나니 그 행하심이 예로부터 그러하시도다” (합 3:5-6). 하나님께서 행하시면 온역이 나오고 불덩이가 나옵니다. 불덩이는 열병을 말합니다. 애굽이 아무리 높고 큰 산 같아도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니까 꼼짝 못하고 무너지고 엎드러졌다는 것입니다. “내가 본즉 구산의 장막이 환난을 당하고 미디안 땅의 휘장이 흔들리도다” (합 3:7). 구산이 어딘지는 잘 모르지만 사사시대에 옷니엘이 물리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말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미디안은 사사시대에 사사 기드온의 300 용사가 물리친 미디안을 말하는 것으로 봅니다. 결국 하박국 3장 7절은 사사시대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박국 3장 8-10절은 홍해를 가르시고 요단 강을 가르신 하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 바다와 강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즉시로 길을 내고 말씀대로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주의 날으는 살의 빛과 주의 번쩍이는 창의 광채로 인하여 해와 달이 그 처소에 멈추었나이다” (합 3:11). 해가 멈춘 것은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면서 아모리 족속과 전쟁할 때 적을 죽이는 시간을 주시기 위해 태양을 멈춘 사건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박국 3장 12-14절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7족을 멸하는 사건들을 가리킵니다.
이 모든 사건들은 복잡하고 기억하기 어렵지만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은 두려운 분이시다는 것입니다. 산, 바다, 강, 어떤 열국도 하나님 앞에는 항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박국 선지자는 자신이 두려워할 것은 통치하는 악인들, 나라의 멸망, 바벨론이 아니라 하늘에 계시며 영광과 능력을 가지신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세상 것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가 그것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서 멸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십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잠 14:27).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시 103:11).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인자를 베푸시고 생명의 샘이 되어주시며 사망에서 벗어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두려워하면 됩니다.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Ⅱ. 기도의 우선순위와 내용에 변화가 왔다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내용이 하박국서에 여러 번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합 1:2-3). 기도가 전부 ‘내, 나의, 나를, 나에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하박국 1장의 기도는 자기중심적인 기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박국 3장 2절을 보면 주의 일을 부흥케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합 3:2). 자신의 일에서 주의 일로 초점이 변화된 것을 명확히 볼 수 있습니다. 주의 일을 부흥케 해달라는 기도 이후에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말아 달라고 기도를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주기도문도 우선순위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우리와 관련된 것은 나중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우리 기도의 우선순위에도 변화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 먼저 기도하고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일을 책임져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박국은 주님의 일을 위해 먼저 기도하고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매우 좋은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노하시면서도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지만 애굽처럼 노예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유로운 시민처럼 70년을 살다가 B.C. 539년 고레스 칙령으로 해방되었습니다. 하박국의 기도는 그의 생전에 다 응답되지는 않았지만 사후에 응답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보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일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말아 달라고 기도하면 응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Ⅲ. 이스라엘 역사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는 변화가 왔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이유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축복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축복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사는 것으로만 생각한 것입니다. 축복의 개념이 현세의 축복에 국한되어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젖과 꿀을 풍성하게 주는 존재가 있다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대상을 바꿀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근을 주시거나 고난을 주시면 젖과 꿀을 주는 존재로 섬김의 대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현세의 축복을 복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우상숭배에 빠집니다. 하지만 현세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의 맛보기에 불과합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진짜 복은 영원한 축복, 영생의 축복,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사는 축복입니다. 여러분이 평생 돈 벌고 이 땅에서 축복을 받아봤자 영원한 축복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두신 목적은 현세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메시아를 보호하기 위해서임을 깨달았습니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인의 집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끝까지 드러내셨나이다” (합 3:13). ‘기름 받은 자’가 히브리어로 메시아이고 헬라어로는 그리스도입니다. 유다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 왕가를 보호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 왕가의 왕손을 끊어버리려고 여러 사람들이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유다 왕국이 망하고 나서도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보내 자식을 낳게 하시고 13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박국 선지자는 이스라엘 나라를 두신 목적이 메시아를 보내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박국 선지자는 역사와 인생을 보는 눈이 넓어졌습니다. 유다 왕국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왕국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이 잘 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인 것입니다. 지난번 부흥회 때 강사님이 오셔서 비유로 사용하셨는데 이스라엘이 무너져야 되는 이유는 거푸집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실제 집인 교회, 하나님의 왕국이 지어졌는데 거푸집을 왜 갖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거푸집이 무너져야 실제 집이 나타나므로 이스라엘이 무너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이번 선거를 통해 훌륭한 국회의원과 대통령이 나와서 정치가 잘되고 경제가 잘되고 우리나라가 번영하고 발전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또 남북한이 자유통일이 되고 평화통일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들어주셔야 될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들어주셔야 합니까? 하나님의 관심은 대한민국이 잘되는 것 그 자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일하는 나라가 되면 하나님께서 누구라도 세우셔서 나라를 잘되게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목적에 맞지 않으면 어떤 사람이 나와도 나라가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과 관심을 이루고 그것을 위해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을 주목하고 축복하실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지난 50년간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을 받은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대한민국이 선교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새벽마다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선교헌금을 하며 신학교를 나와 선교사로 헌신하니까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을 주목하시고 복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목적을 잃어버리게 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결 론
우리의 타락된 마음은 항상 잘못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우리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으로 책망과 교정과 교훈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 받고 교훈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해보십시오. “나는 하나님만 두려워한다. 세상에 두려울 것 없다.” 질병도 두렵지 않고 전쟁도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할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또 나의 문제를 위해 기도하기 전에 먼저 주님의 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나라의 유익을 구하고 일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우리 마음속에 하박국과 같은 변화, 하나님을 만남으로 오는 변화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흥의 불길
합 3:1-5 / 피종진 목사
할렐루야!
사람들은 세월을 ‘유수와 같다.’ ‘베틀의 북과 같다.’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세월이 빨리 지나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성경 말씀에도 우리 삶의 존재 가치는 이슬로 비유하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으로 비유합니다. 그것은 바로 육신에 관한 모든 것은 부귀도, 명예도, 사라지고, 떨어지고, 멀어지고, 지나간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영원히 변치 않는 주님의 사랑은 물론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한 일들은 영원히 천국까지 이어지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경배하기 위해 거룩한 주일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은 2016년도를 신앙으로 끝까지 달려 승리하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가 되고 이 축복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하박국 선지자는 간절한 기도를 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합 3:2)
하박국 선지자의 간절한 기도처럼 여러분의 가슴에 깊이 우러나오는 소원기도가 되길 기원하면서 ‘부흥의 불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 하겠습니다.
부흥이란 말은 참으로 귀한 말입니다. 쇠잔한데서 번성하게 되고, 죽음에서 살아나게 되고 또 안 되는 것들이 일어나게 되어 크게 번창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부흥의 불길이 신앙생활에 지펴지는지 말씀을 통하여 은혜 받으시길 축원합니다.
첫째, 죄를 철저히 자복하고 통회함을 통하여 부흥의 불길이 지펴집니다.
우리의 심령에 부흥이 일어나야 합니다. 가정이나 교회 그리고 국가도 부흥이 일어나서 번창해야 합니다. 이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회개를 통해서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 앞에 뉘우칠 때 비로소 개인도 은총을 입게 되고 가정, 국가에도 하나님의 긍휼로 회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 첫 관문은 회개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전에 첫 번에 외친 말씀이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마 4: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사도 베드로는 갈릴리 바닷가 어부로 제대로 된 교육은 비록 받지 못하였지만, 주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혈기와 분노를 때론 나타내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에 대제사장 종 말고의 귀를 자르므로 그르침을 하여 예수님께 꾸지람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베드로는 회개를 통하여 성령을 받은 후 그때부터 능력 있는 사역자로 새로운 성령의 불길이 지펴지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행 2:38) 아멘.
구약 성경 에스라서 9장(1~4) 말씀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의 생활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자 선민(選民)의 본질을 잊어버리고 자제하지 못하여 이방 사람의 풍습을 좇고 죄를 범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구별되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특히 당시 지도자로 세움을 받았던 고관들이나 방백들이 모범을 보이지 못하고 더욱 앞장서서 그릇된 죄악의 행위에 빠졌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도 더불어 죄악에 빠져 하나님의 성민(聖民)이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의 축복을 잃어버리고 삶의 방향이 질서가 파괴되어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이에 에스라 선지자는 이러한 죄악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견딜 수 없는 안타까움에 겉옷과 속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까지 뜯으며 기가 막혀 앉아 있었습니다. (스 9: 3)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떠는 자를 불러 모아 저녁 제사를 드릴 때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중보의 회개 기도를 드렸습니다. (스 9: 4~7)
열왕기상 18장에도 가뭄으로 인하여 사마리아 땅에 기근이 심해졌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합 왕을 따르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팔백오십 명과 엘리야는 홀로 갈멜산에서 담판을 짓습니다. 즉 바알의 허구성과 무능함을 확인시키기 위함임과 동시에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의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오직 그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저녁 소제를 드릴 때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에스라 선지자는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스 9:6)라고 하며 내적인 부끄러움과 백성들의 죄로 인한 외적인 수치를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조상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의 죄가 심하매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우리 왕들과 우리 제사장들을 여러 나라 왕들의 손에 넘기사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을 당하며 얼굴을 부끄럽게 하심이 오늘날과 같으니이다」 (스 9:7) 조상의 죄와 민족의 죄를 끌어안고 기도했습니다.
한 사람의 회개의 기도일찌라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고 역사하시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에스라 선지자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이 나라를 일으키시며 부흥의 불길이 지펴졌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 장소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고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육성을 죽이고 자신을 비우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함께하시고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성령의 역사가 임하심으로 부흥의 불길이 지펴집니다.
성령 없이는 부흥도 없습니다. 구약에도 신약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 1:2)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여호와의 영 즉 성령이 함께 역사하시므로 모든 것이 창조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한 후에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 1:31)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역사한 곳에는 사람의 마음이 감동되어 다윗과 같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고, 꿈의 사람 요셉은 애굽의 이방 땅에서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창 41:38)라는 바로왕의 철저한 인정하에 총리가 되었고, 예레미야, 에스겔 선지자는 큰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기독교를 박해하던 사울은 다메섹도상에서 회심하고 사도 바울로서 하나님의 큰 사명을 부여받았고, 그가 복음을 전하는 곳에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성령만이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 또한 성령의 충만한 삶으로 마음과 뜻을 합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참 부흥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부흥은 영어로 revival입니다. re-vival이 합친 것으로 re는 ‘다시’라는 뜻을 지니고 vival은 ‘산다’는 뜻을 지닙니다. 즉 성령이 다시 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우리는 모태로부터 죄 중에 태어났으므로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re-vival로 다시 살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산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야(히)’는 ‘생명을 일으킨다’는 뜻을 지닙니다.
알바트로스 새는 별명이 바보새라고 합니다. 이 새는 양쪽 날개가 무려 3미터나 되지만 정작 스스로 날지 못합니다. 다만 바람의 속도와 방향으로 가늠하여 바람의 힘으로만 날아갑니다. 한번 날기 시작하면 6일 동안 날개를 들고 있으며, 두 달에 지구를 한 바퀴를 도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오직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의 바람은 걸어가도 달려가도 피곤치 않고 새 힘을 주시고 역사해 주십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겔 37:5) 아멘.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내 영이 소생하고 내 생활이 새롭게 소생케 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열심을 다해서 복음을 전파할 때 부흥의 불길이 지펴집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딤후 4:2) 아멘.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향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전도란 ①잃은 자를 찾는 것이고 ②생명 줄을 던지는 것이며 ③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이끌어 주는 것이고 ④사탄과 죄악과 멸망에서 구출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자에게는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눅 10:19)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아멘.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우선순위로 살아가면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서 주관해주시고 역사해주십니다. 세상의 수단과 방법으로 열매 맺는 사람 없습니다. 성령을 의지하여 입술이 복음의 나팔이 되길 축원합니다. 우리의 발길이 어떤 생활에서도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가는 곳마다 주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고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천사를 보내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형통한 길을 열어주실 뿐만 아니라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 곧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여러분을 이끌어 주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와 전 세계교회가 2016년도에 부흥의 불길이 지펴지길 원합니다. 그렇게 되길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죄를 철저히 자복하고 통회하며, 성령의 역사가 임하심 속에 열심을 다해서 복음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진노 중의 긍휼
하박국 3:1-3(P.1304),에베소서 2:4-7(P.311)
서론
‘긍휼의 리더십’이란 테드 엥스트롬과 폴 세더의 공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워 애급으로 가지 못하게 한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하시며 “지팡이를 사용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대한 체격을 가진 골리앗 앞에 서 있는 어린 다윗에게 “물맷돌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온갖 박해와 어려움이 있는 바울에게 자신의 재능인 “펜을 가지고 편지를 써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을 하나씩은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사람, 특히 하나님의 사람에게 중요한 삶의 도구, 재능이 없이 살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동정이며 책임입니다. 약한 자에 대한 애처로움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사랑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신 예수님의 심정이 하나님으로서의 긍휼입니다.
‘긍휼’의 사전적 의미는 ‘불쌍하고 가엾게 여겨서 도와줌’입니다. 긍휼의 히브리어는 ‘라함’인데 ‘자궁’이란 뜻입니다. 생명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양육하는 어머니의 희생적 모습이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을 우선 사랑하시는 속성을 지니고 계십니다.
에베소서 2:4-5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란 하나님께 대한 히브리적 표현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삶과 역사에서 볼 때 하나님의 긍휼이 없이는 살 수 없는 민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은 그들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시편 116:5에는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라고 합니다. 이사야 54:7에는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애가 3:22에는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긍휼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긍휼은 큽니다. 하나님께는 긍휼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성경 곳곳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병자들, 귀신 들린 자들, 굶주린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심지어 죽은 나사로를 향해서 그리고 예루살렘 성을 향해서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긍휼이며, 이 긍휼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조직적이고 기계적인 언어입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제창한 이유가 ‘훈민정음’ 서문에 있습니다. “내 이를 위하여 어여삐 녀겨 새로 스물여듭 자를 맹가노니.” 백성들이 글을 알지 못하여 자기 뜻을 펴지 못하는 것을 어여삐 여기는 것이 한글을 만들게 된 까닭이었습니다. 백성을 긍휼히 여긴 왕의 마음이 세계 최고의 문자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긍휼’(compassion)이란 문자적으로는 ‘함께 아파한다’는 뜻입니다. 긍휼은 사랑, 자비, 용서, 관용 등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이란 징계, 책망, 용서하지 않음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사랑만 하시고, 용서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의, 징계, 책망, 벌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1:6에는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을 것임이니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면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시면 영원히 살 길이 없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호소합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도 사랑이며, 하나님의 진노도 긍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왜 우리에게 중요한지 말씀을 통하여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주께서 긍휼을 베푸셔야 주의 일이 부흥합니다.
하박국 3:2에는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고 합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을 받은 후에 간절한 기도를 드립니다.
하박국 1장에서는 “어떻게 이 세상에서 악인이 잘됩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의인이 고통을 당하더라도 어떻게 악인의 손으로 당하게 하십니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이런 하박국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2장에 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입니다. 3장에는 하박국이 응답 후에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이 나옵니다. 첫째는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둘째는 이 일을 수년 내에 나타내달라는 기도입니다. 셋째는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말아달라는 기도입니다.
“부흥케 하옵소서”라는 말은 ‘하예후’라는 히브리어입니다. 이 말은 ‘살게 하다’라는 뜻의 ‘하야’에서 나온 명령형입니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을 다시 살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것도 살리십니다. 하나님이 부흥하게 하십니다.
지난달에 목포 어느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서 그 교회 목사님과 함께 식당에 갔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식당 종업원에 목사님이 이렇게 인사를 했습니다. “잘 살았소?” 호남식 인사인데 저는 “야, 참 좋은 인사구나”라고 했습니다. 잘 살아야 합니다. 다 살자고 하는 일이고, 특히 우리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 잘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왜 죽게 되었습니까? 왜 심판을 당합니까? 왜 고통을 당합니까?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므로 죽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죽음 때문에 모든 삶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는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혼란에 처할 정도로 영적인 죽음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눈앞에 닥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을 보세요.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가죽으로 치마를 지어 입히셨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죄를 지은 상태에서 영원히 살까봐 생명나무에 접근하지 못하게 불 칼을 둘러치셨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다른 사람이 자신을 죽일까봐 염려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7배나 받을 것이라고 하시며 표를 주어 죽음을 면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코로 숨 쉬는 생물을 다 죽이려고 하셨을 때에도 노아와 그의 가족을 방주에 오르게 하셔서 죽음을 면하게 하셨습니다. 모세가 말을 못한다고 했지만 그의 입에 말을 주셔서 출애급하게 하셨고, 광야에서는 매일 아침 만나를 주셔서 먹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반역한 백성들이 불 뱀에 물리게 되었을 때 구리 뱀을 장대 높이 달아놓아 바라보는 자들은 다 낫게 하셨습니다. 사사시대는 죄를 지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사를 통하여 다시 살 수 있는 긍휼의 길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인류가 다시 살게 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긍휼을 이미 알기에 하박국은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인생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런 자신의 약함을 고백하는 마음이 이미 긍휼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담배를 끊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담배를 끊어야 한다고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가 다정하게 앉아 있는 방청석의 젊은 커플에게 사회자가 질문을 하였습니다. “담배 피웁니까?” 남자는 담배를 피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성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남자친구의 담배 냄새가 싫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여성은 “남자친구에게서 나는 향기가 좋아요”라고 합니다. 남이 피우는 담배냄새는 구역질이 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피우는 담배는 향기가 난다고 합니다. 사랑은 긍휼입니다.
밖에 나가서 진창에 구르고 장난을 쳐 옷이 더러워진 채로 집에 들어온 아이를 부모는 야단하지 않습니다. 땀으로 온 몸에 냄새가 나고, 얼굴이 검게 타도 부모는 받아주고, 씻어주고, 여전히 예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얼마나 몸에 냄새가 나고, 얼마나 더러웠겠습니까? 돌아온 아들의 몰골은 요즘 노숙인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안아주고, 씻어주고, 옷을 갈아입히고, 잔치 상을 베풀어 줍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돈을 다 탕진하고 마음까지 상처를 받고 돌아온 아들에게 긍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에게 이렇게 베푸십니다. 더러워지고 상처받고 진노의 대상이 된 우리에게 하나님은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플라톤은 “신은 인간을 불쌍히 여겨 인간들이 힘든 일을 하다가 숨을 돌릴 수 있도록 매년 축제의 날을 주었으며 축제의 친구로 뮤즈(학문 예술 여신)와 그의 동반자 아폴로(태양신, 음악과 시 주관)와 디오니소스(술, 풍요의 신)를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누구나 자기가 믿는 신이 인간에게 긍휼을 베푼다고 합니다.
현실을 보면 낙망과 좌절하는 인간이 죄로 인한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죄인인 인류는 누구나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실패한 영혼, 쇠퇴한 교회, 병든 사회, 절망적인 국가의 부흥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긍휼이 절대 필요합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는 기도는 모든 인간의 간절한 바램입니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1875년 독일의 알자스 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26세에 철학, 신학, 음악 박사 학위를 얻었고, 후에 의학박사까지 네 가지 박사학위를 가졌습니다. 1913년 자신이 쌓아놓았던 모든 것을 버리고 복음을 전하려 아프리카에 갔습니다. 하필이면 덥고, 독사와 악어가 우글거리는 람바레네에 가서 병원을 세우고 주민을 돌보았습니다. 그가 아프리카 오지에 들어가자 고난은 물론이고, 오해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같은 야만인들을 고쳐 주기 위하여 이런 곳에 오다니 나는 정말 바보일까?” 그의 말을 통역하던 통역사가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과연 세상에서 제일 바보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심령이 부흥합니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야 우리가 삽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야 교회도 나라도 부흥됩니다. 여러분은 부흥을 원하십니까? 긍휼을 구하세요. 참 삶의 지혜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시면 하나님은 긍휼이 여겨주십니다.
둘째, 주께서 긍휼을 베푸시기 위하여 오십니다.
하박국 3:3에는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는도다 그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의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라고 합니다. 데만과 바란산이란 지명이 등장합니다. 민수기 11장에는 출애급 후에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하자 모세가 탈진하여 하나님께 투정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하나님, 내가 그들을 낳았습니까? 고기를 어디서 구해서 먹입니까? 나를 죽여 고난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70인의 장로와 지도자를 모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영을 주어 모세 혼자 이 일을 담당하지 않고 함께 백성들의 짐을 담당하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장소가 데만과 바란산이라고 합니다.
긍휼은 헬라어의 ‘엘레에이’인데 히브리어는 ‘헤세드’(인애)와 상응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충실히 지키며 사랑을 베푸시는 것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본질인 사랑을 긍휼을 통해 구속의 은총을 베푸시려고 친히 내려오십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사람의 눈에 보기에 좋은 땅인 소돔과 고모라를 택하여 아브라함과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당할 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롯을 구하기 위하여 친히 천사를 내려 보내셨습니다. 롯의 가정을 구원하시려고 직접 오신 것입니다. 곧 멸망당할 가정을 긍휼로 다가오신 것입니다.
모세가 애급에서 탈출하기 시작했을 때 바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계 최강의 병거를 앞세워 뒤따라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었고 뒤에는 애급의 군사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밤새 불기둥으로 군사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시고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싸울 것이니 너희는 가만히 있어.” 하나님이 친히 오신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여종 하갈은 사라가 임신하지 못했는데 자신이 임신하자 사라를 업신여겼습니다. 사라는 하갈을 구박하게 되었고 하갈은 구박에 못 이겨 애급으로 도망을 가고 있었습니다. 앞에는 사막이 가로놓여 있었는데 하나님은 하갈에게 나타나십니다.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하갈은 여주인을 피하여 도망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네 여주인의 수하에 가서 복종하라”고 하십니다. 그 길을 계속 가면 죽음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하갈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이고 도망을 갑니다. 외롭게 홀로 가던 야곱에게 하나님은 임재하셨습니다. 야곱은 “내가 알지 못하였는데 하나님이 여기도 계십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네가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 네가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하시며 언약을 맺으러 벧엘에 친히 오셨습니다.
엘리야는 450명의 바알 선지자와 갈멜산의 결투에서 이겼습니다. 왕후 이세벨은 엘리야를 더욱 심하게 박해하였습니다. 절망한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먹지도 않고 “하나님 이만하면 넉넉하오니 내 생명을 거두어주십시오”라고 합니다. 이 때 천사가 와서 “일어나 먹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오셔서 먹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예수님은 좌절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평안하냐”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 사람들에게 10번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시고 소망을 주시기 위하여 친히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실의에 빠진 제자들에게 긍휼을 베풀려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헤롯이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인 후에 백성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밤중에 주의 사자가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워 옷을 입고 따라오게 하여 마가의 집에 갔습니다. 베드로가 문을 두드리자 로데라는 아이가 베드로가 왔다고 했지만 함께 있던 제자들은 로데가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실제로 왔습니다. 천사는 친히 베드로를 감옥에서 이끌어내려고 감옥을 찾아온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고통 가운데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내려가십니다. 출애급기 3:8에는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내려가시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절망한 사람에게 친히 내려오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잠시도 떠나지 않으십니다.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러
오신 최대의 사건은 예수님이 오심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죄를 지은 인류를 불쌍히 여기셔서 긍휼을 베푸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긍휼의 화신이십니다. 13세기의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하나님을 사랑이라 부를 수도 있고 선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최고의 이름은 긍휼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긍휼이시고, 긍휼을 베푸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신의 세계’와 같은 신화 이야기들을 보면 신이 내려와서 인간과 결혼하고, 싸우고, 죽습니다. 헬라, 로마, 애급의 신화에 나타난 한 결 같이 신이 내려오는 이유는 인간사에 개입하고, 싸우고, 인간을 통치하기 위함입니다. 복을 주시고 보살피시고 긍휼을 베풀려고 내려오시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강림과는 전혀 다릅니다.
‘부부란 좋아서 살다가, 어쩔 수 없이 살다가, 필요하여 살다가, 불쌍해서 살다가, 묻어주려고 사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부부가 그렇게 처량하게 살면 되겠습니까? 최소한의 긍휼은 있다는 말인데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긍휼은 무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여인 고멜 보다 못한 우리에게 수없이 속아주고, 또 속아주고도 긍휼로 감싸십니다.
에베소서 2:4에는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라고 합니다. 5절에는 그 긍휼로 무엇을 하는지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결 론
우리는 지금 냉정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연민의 정도 없어져 갑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다. 어려움 당하고, 사고 당한 사람을 봐도 외면하고 고개를 돌립니다. IS의 만행을 알리는 끔찍한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어느 동네에서 기독교인을 색출하여 공개처형을 하는데 여러 사람이 이리 때리고 저리 차고 마침내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질러버립니다. 기독교인은 소리 치고 딩굴고 아파하지만 주위의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고 구경만하고 있습니다. 불에 탄 기독교인은 점점 소리가 적어지고, 동작이 느려지더니 죽었습니다. 최소한의 사람다운 동정심도 긍휼도 없는 것이 이교도의 행태입니다.
최근에 문제가 된 아동학대 사건도 보세요. 자녀를 때리고, 죽이고, 냉동시키고, 토막을 내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사실을 감추고 삽니다. 우리사회는 스스로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인정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긍휼도 자비도 다 외면하는 사람들입니다.
야고보서 2:13에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로 구원받은 우리들이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교회가, 우리의 사회가 다시 부흥의 계절을 맞이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진노 중의 긍휼
합 3:1-3; 엡 2:4-7 / 이성희 목사
서 론
‘긍휼의 리더십’이란 테드 엥스트롬과 폴 세더의 공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워 애굽으로 가지 못하게 한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하시며 “지팡이를 사용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대한 체격을 가진 골리앗 앞에 서 있는 어린 다윗에게 “물맷돌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온갖 박해와 어려움이 있는 바울에게 자신의 재능인 “펜을 가지고 편지를 써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을 하나씩은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사람, 특히 하나님의 사람에게 중요한 삶의 도구, 재능이 없이 살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동정이며 책임입니다. 약한 자에 대한 애처로움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사랑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신 예수님의 심정이 하나님으로서의 긍휼입니다.
‘긍휼’의 사전적 의미는 ‘불쌍하고 가엾게 여겨서 도와줌’입니다. 긍휼의 히브리어는 ‘라함’인데 ‘자궁’이란 뜻입니다. 생명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양육하는 어머니의 희생적 모습이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을 우선 사랑하시는 속성을 지니고 계십니다.
에베소서 2:4-5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란 하나님께 대한 히브리적 표현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삶과 역사에서 볼 때 하나님의 긍휼이 없이는 살 수 없는 민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은 그들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시편 116:5에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라고 합니다. 이사야 54:7에는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애가 3:22에는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긍휼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긍휼은 큽니다. 하나님께는 긍휼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성경 곳곳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병자들, 귀신 들린 자들, 굶주린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심지어 죽은 나사로를 향해서 그리고 예루살렘 성을 향해서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긍휼이며, 이 긍휼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조직적이고 기계적인 언어입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제창한 이유가 ‘훈민정음’ 서문에 있습니다. “내 이를 위하여 어여삐 녀겨 새로 스물여듭 자를 맹가노니.” 백성들이 글을 알지 못하여 자기 뜻을 펴지 못하는 것을 어여삐 여기는 것이 한글을 만들게 된 까닭이었습니다. 백성을 긍휼히 여긴 왕의 마음이 세계 최고의 문자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긍휼’(compassion)이란 문자적으로는 ‘함께 아파한다’는 뜻입니다. 긍휼은 사랑, 자비, 용서, 관용 등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이란 징계, 책망, 용서하지 않음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사랑만 하시고, 용서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의, 징계, 책망, 벌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1:6에는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을 것임이니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면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시면 영원히 살 길이 없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호소합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도 사랑이며, 하나님의 진노도 긍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왜 우리에게 중요한지 말씀을 통해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첫째, 주께서 긍휼을 베푸셔야 주의 일이 부흥합니다.
하박국 3:2에는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고 합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을 받은 후에 간절한 기도를 드립니다.
하박국 1장에서는 “어떻게 이 세상에서 악인이 잘됩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의인이 고통을 당하더라도 어떻게 악인의 손으로 당하게 하십니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이런 하박국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2장에 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입니다. 3장에는 하박국이 응답 후에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이 나옵니다. 첫째는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둘째는 이 일을 수년 내에 나타내달라는 기도입니다. 셋째는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말아달라는 기도입니다.
“부흥케 하옵소서”라는 말은 ‘하예후’라는 히브리어입니다. 이 말은 ‘살게 하다’라는 뜻의 ‘하야’에서 나온 명령형입니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을 다시 살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것도 살리십니다. 하나님이 부흥하게 하십니다.
지난달에 목포 어느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서 그 교회 목사님과 함께 식당에 갔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식당 종업원에게 목사님이 이렇게 인사를 했습니다. “잘 살았소?” 호남식 인사인데 저는 “야, 참 좋은 인사구나”라고 했습니다. 잘 살아야 합니다. 다 살자고 하는 일이고, 특히 우리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 잘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왜 죽게 되었습니까? 왜 심판을 당합니까? 왜 고통을 당합니까?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므로 죽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죽음 때문에 모든 삶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는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혼란에 처할 정도로 영적인 죽음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눈앞에 닥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게 내버려두지 않고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을 보세요.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가죽으로 치마를 지어 입히셨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죄를 지은 상태에서 영원히 살까봐 생명나무에 접근하지 못하게 불 칼을 둘러치셨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다른 사람이 자신을 죽일까봐 염려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7배나 받을 것이라고 하시며 표를 주어 죽음을 면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코로 숨 쉬는 생물을 다 죽이려고 하셨을 때에도 노아와 그의 가족을 방주에 오르게 하셔서 죽음을 면하게 하셨습니다. 모세가 말을 못한다고 했지만 그의 입에 말을 주셔서 출애급하게 하셨고, 광야에서는 매일 아침 만나를 주셔서 먹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반역한 백성들이 불 뱀에 물리게 되었을 때 구리 뱀을 장대 높이 달아놓아 바라보는 자들은 다 낫게 하셨습니다. 사사시대는 죄를 지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사를 통하여 다시 살 수 있는 긍휼의 길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인류가 다시 살게 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긍휼을 이미 알기에 하박국은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인생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런 자신의 약함을 고백하는 마음이 이미 긍휼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담배를 끊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담배를 끊어야 한다고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가 다정하게 앉아 있는 방청석의 젊은 커플에게 사회자가 질문을 하였습니다. “담배 피웁니까?” 남자는 담배를 피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성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남자친구의 담배 냄새가 싫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여성은 “남자친구에게서 나는 향기가 좋아요”라고 합니다. 남이 피우는 담배냄새는 구역질이 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피우는 담배는 향기가 난다고 합니다. 사랑은 긍휼입니다.
밖에 나가서 진창에 구르고 장난을 쳐 옷이 더러워진 채로 집에 들어온 아이를 부모는 야단하지 않습니다. 땀으로 온 몸에 냄새가 나고, 얼굴이 검게 타도 부모는 받아주고, 씻어주고, 여전히 예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얼마나 몸에 냄새가 나고, 얼마나 더러웠겠습니까? 돌아온 아들의 몰골은 요즘 노숙인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안아주고, 씻어주고, 옷을 갈아입히고, 잔치 상을 베풀어 줍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돈을 다 탕진하고 마음까지 상처를 받고 돌아온 아들에게 긍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에게 이렇게 베푸십니다. 더러워지고 상처받고 진노의 대상이 된 우리에게 하나님은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플라톤은 “신은 인간을 불쌍히 여겨 인간들이 힘든 일을 하다가 숨을 돌릴 수 있도록 매년 축제의 날을 주었으며 축제의 친구로 뮤즈(학문 예술 여신)와 그의 동반자 아폴로(태양신, 음악과 시 주관)와 디오니소스(술, 풍요의 신)를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누구나 자기가 믿는 신이 인간에게 긍휼을 베푼다고 합니다.
현실을 보면 낙망과 좌절하는 인간이 죄로 인한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죄인인 인류는 누구나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실패한 영혼, 쇠퇴한 교회, 병든 사회, 절망적인 국가의 부흥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긍휼이 절대 필요합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는 기도는 모든 인간의 간절한 바램입니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1875년 독일의 알자스 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26세에 철학, 신학, 음악 박사 학위를 얻었고, 후에 의학박사까지 네 가지 박사학위를 가졌습니다. 1913년 자신이 쌓아놓았던 모든 것을 버리고 복음을 전하려 아프리카에 갔습니다. 하필이면 덥고, 독사와 악어가 우글거리는 람바레네에 가서 병원을 세우고 주민을 돌보았습니다. 그가 아프리카 오지에 들어가자 고난은 물론이고, 오해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같은 야만인들을 고쳐 주기 위하여 이런 곳에 오다니 나는 정말 바보일까?” 그의 말을 통역하던 통역사가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과연 세상에서 제일 바보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심령이 부흥합니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야 우리가 삽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야 교회도 나라도 부흥됩니다. 여러분은 부흥을 원하십니까? 긍휼을 구하세요. 참 삶의 지혜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시면 하나님은 긍휼이 여겨주십니다.
둘째, 주께서 긍휼을 베푸시기 위하여 오십니다.
하박국 3:3에는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는도다 그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의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라고 합니다. 데만과 바란산이란 지명이 등장합니다. 민수기 11장에는 출애급 후에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하자 모세가 탈진하여 하나님께 투정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하나님, 내가 그들을 낳았습니까? 고기를 어디서 구해서 먹입니까? 나를 죽여 고난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70인의 장로와 지도자를 모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영을 주어 모세 혼자 이 일을 담당하지 않고 함께 백성들의 짐을 담당하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장소가 데만과 바란산이라고 합니다.
긍휼은 헬라어의 ‘엘레에이’인데 히브리어는 ‘헤세드’(인애)와 상응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충실히 지키며 사랑을 베푸시는 것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본질인 사랑을 긍휼을 통해 구속의 은총을 베푸시려고 친히 내려오십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사람의 눈에 보기에 좋은 땅인 소돔과 고모라를 택하여 아브라함과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당할 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롯을 구하기 위하여 친히 천사를 내려 보내셨습니다. 롯의 가정을 구원하시려고 직접 오신 것입니다. 곧 멸망당할 가정을 긍휼로 다가오신 것입니다.
모세가 애급에서 탈출하기 시작했을 때 바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계 최강의 병거를 앞세워 뒤따라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었고 뒤에는 애급의 군사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밤새 불기둥으로 군사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시고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싸울 것이니 너희는 가만히 있어.” 하나님이 친히 오신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여종 하갈은 사라가 임신하지 못했는데 자신이 임신하자 사라를 업신여겼습니다. 사라는 하갈을 구박하게 되었고 하갈은 구박에 못 이겨 애급으로 도망을 가고 있었습니다. 앞에는 사막이 가로놓여 있었는데 하나님은 하갈에게 나타나십니다.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하갈은 여주인을 피하여 도망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네 여주인의 수하에 가서 복종하라”고 하십니다. 그 길을 계속 가면 죽음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하갈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이고 도망을 갑니다. 외롭게 홀로 가던 야곱에게 하나님은 임재하셨습니다. 야곱은 “내가 알지 못하였는데 하나님이 여기도 계십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네가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 네가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하시며 언약을 맺으러 벧엘에 친히 오셨습니다.
엘리야는 450명의 바알 선지자와 갈멜산의 결투에서 이겼습니다. 왕후 이세벨은 엘리야를 더욱 심하게 박해하였습니다. 절망한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먹지도 않고 “하나님 이만하면 넉넉하오니 내 생명을 거두어주십시오”라고 합니다. 이 때 천사가 와서 “일어나 먹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오셔서 먹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예수님은 좌절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평안하냐”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 사람들에게 10번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시고 소망을 주시기 위하여 친히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실의에 빠진 제자들에게 긍휼을 베풀려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헤롯이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인 후에 백성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밤중에 주의 사자가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워 옷을 입고 따라오게 하여 마가의 집에 갔습니다. 베드로가 문을 두드리자 로데라는 아이가 베드로가 왔다고 했지만 함께 있던 제자들은 로데가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실제로 왔습니다. 천사는 친히 베드로를 감옥에서 이끌어내려고 감옥을 찾아온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고통 가운데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내려가십니다. 출애급기 3:8에는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내려가시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절망한 사람에게 친히 내려오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잠시도 떠나지 않으십니다.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러
오신 최대의 사건은 예수님이 오심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죄를 지은 인류를 불쌍히 여기셔서 긍휼을 베푸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긍휼의 화신이십니다. 13세기의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하나님을 사랑이라 부를 수도 있고 선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최고의 이름은 긍휼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긍휼이시고, 긍휼을 베푸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신의 세계’와 같은 신화 이야기들을 보면 신이 내려와서 인간과 결혼하고, 싸우고, 죽습니다. 헬라, 로마, 애급의 신화에 나타난 한 결 같이 신이 내려오는 이유는 인간사에 개입하고, 싸우고, 인간을 통치하기 위함입니다. 복을 주시고 보살피시고 긍휼을 베풀려고 내려오시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강림과는 전혀 다릅니다.
‘부부란 좋아서 살다가, 어쩔 수 없이 살다가, 필요하여 살다가, 불쌍해서 살다가, 묻어주려고 사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부부가 그렇게 처량하게 살면 되겠습니까? 최소한의 긍휼은 있다는 말인데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긍휼은 무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여인 고멜 보다 못한 우리에게 수없이 속아주고, 또 속아주고도 긍휼로 감싸십니다.
에베소서 2:4에는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라고 합니다. 5절에는 그 긍휼로 무엇을 하는지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결 론
우리는 지금 냉정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연민의 정도 없어져 갑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다. 어려움 당하고, 사고 당한 사람을 봐도 외면하고 고개를 돌립니다. IS의 만행을 알리는 끔찍한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어느 동네에서 기독교인을 색출하여 공개처형을 하는데 여러 사람이 이리 때리고 저리 차고 마침내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질러버립니다. 기독교인은 소리 치고 딩굴고 아파하지만 주위의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고 구경만하고 있습니다. 불에 탄 기독교인은 점점 소리가 적어지고, 동작이 느려지더니 죽었습니다. 최소한의 사람다운 동정심도 긍휼도 없는 것이 이교도의 행태입니다.
최근에 문제가 된 아동학대 사건도 보세요. 자녀를 때리고, 죽이고, 냉동시키고, 토막을 내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사실을 감추고 삽니다. 우리 사회는 스스로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인정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긍휼도 자비도 다 외면하는 사람들입니다.
야고보서 2:13에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로 구원받은 우리들이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교회가, 우리의 사회가 다시 부흥의 계절을 맞이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부흥케 하옵소서!
합 3:1-3 / 양향모 목사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부흥케 하옵소서!”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부흥케 하옵소서!” 여러분? 지난 한 주간 제게 계속적으로 들려오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저는 오랜만에 다시금 이 노래를 들으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부흥이라는 노래입니다. 우리 다같이 찬양하십시다.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의 죄악 용서 하소서 이 땅 고쳐주소서
이제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이 땅의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을 때
우리의 우상들을 태우실 성령의 불 임하소서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오- 주의 영광 가득한 새 날 주소서
오- 주님 나라 이 땅에 임하소서
여러분? 언젠가부터 우리는 집회 때마다 부흥을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젊은이들 입에서 먼저 불려지던 이 노래가 어린이와 노인에 이르기까지 간절한 염원이 되어 불려졌으며, 그것도 모자라 부흥 2000이란 노래까지 불려졌습니다.
“오소서 진리의 성령님, 이 땅 흔들며 임하소서. 오소서 은혜의 성령님 하늘 가르고 임하소서... 거룩한 불꽃 하늘로서 임하사 타오르게 하소서. 주 영광 위해...”
그런데 여러분? 지금이야말로 다시금 부흥을 노래해야할 때인 줄로 믿습니다. 그리하여 은혜를 사모하는 저와 여러분 위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 부흥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게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공동체가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 여러분이 살고 있는 삶의 상황이 기울어져만 갈 때, 여러분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그러할 때 문제 상황을 회피하고 도망가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예 포기하고 낙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방법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져서는 아니 되는 태도입니다. 대단히 나쁜, 아주 위험한 태도입니다.
이는 전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오히려 문제 상황을 악화시키는 길이 되고야 맙니다. 오늘 본문은 주인공 하박국 선지자가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부흥시켜 주실 것을 확신케 되었는지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부흥은 기도하는 한 사람을 통해서 시작됩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부흥을 위한 한 사람” 다같이 1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시기오놋에 맞춘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시기오놋에 맞춘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여러분? 먼저 하박국이란 이름이 가진 뜻이 많은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박국이란 이름의 의미는 영어로 임브레이스(embrace) 즉 "포옹한다, 껴안는다.”는 뜻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어려움이 있을 때 낙심하거나 도피하거나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가슴에 끌어안고 씨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집안에 걱정거리가 있을 때 그 문제를 가슴에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 씨름하는 사람, 그가 바로 하박국 선지자 였습니다.
사업이나 직장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로부터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직면하고 가슴에 안고 녹여버리는 사람이 바로 하박국 선지자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교회에 문제가 있을 때 불평하고 원망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슴에 안고 몸부림치며 기도하는 한사람, 진정 하박국 선지자 같은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찾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시기오놋”은 과연 무엇을 말할까요? 악기 이름이거나 어떤 음악 부호일 것이라고 성경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시기오놋! 이는 절정의 환희, 용솟음치는 기쁨을 표현하는 부호인 것입니다.
시기오놋! 이 무슨 뜻입니까? 민족의 아픔을 가슴에 끌어안고 성전에 들어가 엎드려 기도하던 선지자는 지금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얼굴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그 놀라운 부흥이 하나님의 진노 앞에, 심판의 불길 앞에 쓰러져가는 이 민족, 이 백성 안에서 멀지 않은 시간에 다시금 일어나고 다시금 살아날 것을 꿈꾸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는 “부흥케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요즈음 매일 아침마다 주님 전에 나아와 눈물 흘리며 뜨겁게 기도하는 중보 기도자들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힘이 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제가 이렇게 기쁠진대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얼마나 대견스러워하실까요?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얼굴을 경험하고 있는 저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하박국의 기도를 들으사 이스라엘 땅에 부흥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진정 큰빛광성교회 위에 놀라운 부흥을 허락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십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십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놀라운 부흥을 허락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하박국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절 여호야김 왕은 대단히 사악한 왕이었습니다. 예레미야 36:20-26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이 왕에게 성경을 읽어주면 두루마리 성경을 칼로 잘라 불에 던져 버리며 하나님을 모욕하고 말씀을 무시했던 그런 자가 바로 여호야김 왕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을 통해서 유다를 심판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주전 605년 유다를 침공해서 여호야김 왕을 쇠사슬로 결박하여 잡아갑니다. 그리고 그 때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같은 젊은 인재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기울어가는 민족의 운명을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합니다. 그 기도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하나님의 백성을 버리지 말고,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케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는 하나님 백성의 회복과 치유 그리고 주의 일의 부흥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몰락해 가는 민족의 운명 앞에 못내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기도해 보니까 하나님의 이러한 진노와 심판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매를 맞고 이방인의 발굽에 짓밟혀도 마땅한 그런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잘도 참으셨습니다. 많이도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심판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우리 백성이 선하고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그 긍휼하심으로 이 백성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하나님이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도피하고 낙심하는 사람들 앞에서 역사는 침체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불평하고 원망하고 비판하는 사람들 앞에서 역사는 무너지고 파괴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를 가슴에 끌어안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있다면 그 공동체는 진정 부흥을 경험케 될 줄로 믿습니다. "주의 일을 부흥케 하옵소서!" 이 기도는 진정 주의 뜻을 아는 하박국 선지자와 같은 사람들만이 드릴 수 있는 기도인 것입니다.
19세기말 유명한 부흥 운동가 스미스 목사에게 한 성도가 찾아와 물었습니다. “나는 부흥을 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부흥을 맛보길 원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에 스미스 목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집으로 돌아가 방문을 걸어 잠그고 모든 문제를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리고 분필로 당신이 앉아 있는 그 자리에 원을 그리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바로 여기서부터 부흥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당신 자신부터 부흥이 일어나면 당신의 가정도, 당신의 교회도, 당신의 민족도 부흥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기오놋에 맞춰서 간절히 기도드렸던 하박국 선지자처럼 주의 일의 부흥을 위해서라면 내가 진정 불씨가 되겠노라 결단의 기도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둘째로, 하박국은 뭐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을까요? 다같이 따라합시다. “부흥을 위한 기도문” 다같이 2절 말씀 함께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그런데 여러분? 교회에서 흔히 부흥이라고 말할 때 단지 교회의 수적인 성장만을 생각합니다. 물론 부흥의 열매로 복음이 전해지고 전도의 열정이 되살아나면 수적성장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수적성장이 곧 부흥이 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부흥이란 말을 사전에서는 "쇠하였던 것이 다시 일어남, 또는 다시 일어나게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부흥이란 "다시 일어난다."는 뜻으로 침체되었던 것들이 새롭게 살아나고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영어로 부흥을 revival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revival이라는 이 말은 '다시'라는 말과 '산다'는 말이 합쳐져서 '다시 살아나다.' '소생한다.' '활기를 되찾는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말씀을 버리고 타락했다가 몰락하고 멸망해 가는 조국의 현실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 민족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어 매 맞고 심판 받는 사실에 아무런 이의가 없습니다. 사랑 받을 가치도 없고 잘한 것도 없고 내세울만한 공로도 없는 백성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믿고 간구합니다. 내 민족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다시금 기회를 주옵소서. 하나님의 선민으로써 당당히 살아가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기회를 허락해 주옵소서. 이방의 조롱거리에서 벗어나 영광의 백성이 되는 그 날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바로 이런 의미로 "부흥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두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주 가까운 장래에, 깜짝 놀랄 만큼 짤막한 시간 내에 주님께서 행하시는 부흥을 보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907년 성령 대 부흥 운동이 일어났던 시대만큼 우리 민족사에서 고통스러웠던 때가 또 있었겠습니까? 국권은 일본의 손에 통째로 넘어가고 황제는 폐위 당했습니다. 나라를 살려보려던 애국지사들의 몸부림, 자결, 원수들 암살 등...
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모든 국민들은 허탈과 절망에 빠져있었습니다. 세계가 한국을 버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바로 이 때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찾아오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임재하셨습니다.
백낙준 박사가 지적한 것처럼 "이는 장차 한국민족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하심"이었습니다. 우리네 선조들은 집회시간마다 목이 터져라 심장이 터져라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를 불렀습니다.
성령님의 임재와 함께 너도 나도 앞을 다투어 죄를 고백했으며, 관계가 깨진 사람을 찾아가 먼저 용서를 구했습니다. 회개와 성령의 임재, 대 부흥과 불신자를 구원하려는 열정이 예배시간, 기도시간, 찬송시간, 성경공부 시간마다 폭발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남자와 여자, 노인과 아이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날의 성령 대 부흥 운동은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 학교에서 저 학교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 사회의 암울한 현실을 바라보며, 희망의 빛을 상실한 채 날로 어두워져만 가는 역사를 바라보며, 하박국의 기도가 우리의 심장에서 터져 나와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구석구석 병든 채 신음하는 민족을 바라보며, 침체와 분열과 갈등으로 허덕이는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세속적 가치로 병들어 있는 교우들을 바라보며, 생명을 잃고 죽어 가는 영혼을 바라보며 하박국의 기도를 쏟아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느끼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이여, 우리는 가진 것 없는 백성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가운데 많은 복을 누렸습니다. 교회도 잘 성장했고 경제와 사회도 잘 성장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 교만했으며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합당한 존재들입니다.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압니다. 매 맞아 마땅하다는 것도 잘 압니다. 하나님, 그러함에도 이 백성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에겐 부흥을 간구할 아무런 공로도 의로움도 없습니다. 우리 가정들은 복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저는 이 백성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을 믿습니다. 주여, 이 땅에 다시금 당신의 부흥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이 아닌 저와 여러분이 하박국 선지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처럼 기도의 무릎을 꿇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부흥의 기쁨과 감격을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1907년 성령 대 부흥 운동이 오늘 이 시간, 우리 교회에서부터 다시금 시작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내가 먼저 회복되고, 교회가 회복되고, 이 나라와 이 민족이 회복됨으로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셨노라.’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로, 여러분? 부흥이 임하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부흥이 임한 모습들” 다같이 3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는도다. (셀라) 그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의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907년에 있었던 그날의 부흥이 오늘 이 땅에서 새롭게 일어나기를 기대할 때 그것은 도대체 어떤 모습의 부흥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참된 부흥은 무엇일까요? 참된 부흥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분명한 몇 가지 공통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참된 부흥이 오면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나타납니다.
어느 시대나 교회와 성도들이 침체되어지면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을 받고 조소의 대상이 되고야 맙니다. 그러나 부흥이 오면 하나님이 친히 백성과 역사 가운데 오셔서 당신의 이름과 영광을 회복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대하는 부흥은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와 민족 가운데 드러나는 것입니다.
둘째, 참된 부흥이 오면 통회하고 자복하는 회개운동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뵙기엔 너무나 부족하고 형편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깊이 애통하게 됩니다.
부흥의 선구자 프랭크 바틀맨은 “부흥의 높이는 회개의 깊이로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회개를 하고 나면 정죄감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강하게 확신하고, 하나님의 복된 소식을 전해야지 하는 구령의 열정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부흥은 1907년 그날에 있었던 회개의 몸부림이 우리교회에서 일어나, 거룩한 무리 즉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수적인 증가가 아니라, 불신자를 전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가슴앓이가 온전히 회복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일을 통해 부흥되는 교회를 보고 싶은 것입니다.
셋째, 참된 부흥이 오면 능력이 나타나고 역사를 변화시키는 영향력이 커지게 됩니다.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변화되고, 그 영향력은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교회에 찾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대하는 부흥은 한국교회에 사도행전적인 능력과 영향력이 회복되는 그런 부흥을 말합니다.
넷째, 참된 부흥이 오면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 그 분을 구하는 간절함이 더욱 커지게 됩니다. 여러분? 참된 부흥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 분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하나님을 구할 때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납니다. “당신의 은혜나 능력이나 선물 이전에 하나님 그 분을 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부흥입니다. 여러분? 목마름과 굶주림이 없는 곳에 하나님은 성령을 부어주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갈급한 자, 갈급해 하는 공동체를 찾아오십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 그 분이 가지고 계신 선물에 흥분하기 보다는, 하나님 그 분에게 흥분하는 저와 여러분을 찾고 계십니다.
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아빠에게 “아빠, 뭐 사왔어? 선물은?”이라고 말한다면 참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진정 참된 사랑을 받으려면 아빠를 보자마자 “아빠!”하고 달려와서 아빠 품에 푸욱 안기는 아이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선물이 유가 아닙니다. 달이라도 따주고 싶은 게 아비의 마음입니다. 모든 게 다 해결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그 분의 혜택만을 구하는 자에게 찾아오시지 않으십니다. 진정 하나님 그 분의 얼굴을 구하는 자에게 찾아오셔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것까지도 더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하나님 그 분의 손길만을 구해왔습니다. 우리는 그 분이 우리에게 해 주실 수 있는 일들만을 구했습니다. 그 분의 축복을 원하고, 짜릿한 감동만을 원했습니다.
반면에 깊은 헌신으로 하나님 그 분의 얼굴을 구하는 데는 게을리 했습니다. 그 분의 얼굴을 구하기만 하면 그 분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데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부흥을 구하는 것보다 더 긴급한 것이 있습니다.
부흥을 주시는 하나님 그 분의 얼굴, 그 분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 충만한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오~ 주의 영광 가득한 새 날 주소서. 오~ 주님 나라 이 땅에 임하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흥이란 무엇이며 참된 부흥이란 어떤 것인지 아는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지금은 저와 여러분 모두 다 하나님 그 분을 구하고 그 분의 역사를 체험할 뿐더러, 하나님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2010년 큰빛광성교회의 부흥을 준비하고 계시는 성령하나님께서 지금 부흥의 불쏘시개, 부흥의 땔감을 찾고 계십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불은 빈 제단에 내리지 않습니다. 불이 내리려면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제단에 땔감과 제물을 쌓은 후에 하나님의 불을 구했습니다. 여러분? 웨슬리는 이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불에 올라가면 사람들은 내가 타는 것을 보려고 모인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물의 마지막 때에 있으나마나한 그런 교인으로 살아가길 원하십니까? 우리 교회가 수많은 세상 교회 중 하나로 그냥 그렇게 남아 있기를 원하십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안 되겠지요?
하나님께서는 큰빛광성교회가 주님의 비전을 이루는 그런 교회가 되길 원하십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충만한 초대교회와 같은 그런 교회가 되길 원하십니다. 한국교회를 진정 부흥의 불길로 불태우는 땔감과 같은 교회가 되길 원하십니다. 여러분? 이를 위해 저 이 대성 목사부터 그 땔감이 되겠습니다. 그 제물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부흥의 제단에 저 이 대성 목사를 먼저 올려놓습니다. 주여! 교회를 위해 땔감이 되겠노라 결단하는 동역자들을 붙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큰빛광성교회가 진정 주님의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주여, 우리를 진정 부흥의 도구로 써 주옵소서. 주여, 우리 교회를 성령의 땔감으로 사용해 주옵소서. 그리하여 수 년 내에 큰빛광성교회 위에 부흥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하박국 선지자처럼 간절히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 그 분의 뜻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내 뜻이 아닌 하나님 뜻대로 온전히 순종하는 자 다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하나님의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 노래하며 하나님 그 분의 행하심을 온 세상에 기쁨으로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부흥하게 하소서
합 3:1-2 / 김남수 목사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감사하면 더 큰 축복을 주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아들을 주시고 그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죄사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는데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나갈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실줄 믿습니다. 심령의 부흥이 일어나야 되고, 다시한번 우리에게 부흥을 주시옵소서! 새로운 부흥을 주시옵소서!
오늘 성경말씀은 주님이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놀랐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수년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수년내에 나타나시옵소서! 진노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시옵소서! 현대어 성경에는 "오 주님! 제가 방금 주님의 답변을 들었습니다. 주께서 계획하신 그 무서운 일들이 두려워 저는 떨립니다. 그 일을 너무 먼 미래에 하지 마시고 속히 이루어 주옵소서! 주께서 간섭하시는 모습을 저도 체험하게 해 주시옵소서! 주님의 진노가 폭발할 때에도 우리에게는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한 내용을 봅니다.
이 본문을 설명하기에는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전후 좌우의 여러 가지 상황을 설명드려야 이 부흥을 위한 기도의 내용을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다. 하박국이라는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시작합니다. 철학적인 질문이 섞인 기도를 시작하다가 결국 하나님 앞에 여러 가지 불만을 쏟아 놓습니다. "하나님 언제까지, 어느때까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로 이 악한 것을 보게 하십니까? 주님은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데 왜 이렇게 악한 것이 그냥 있으며 어찌 주님이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십니까? 왜, 어찌하여라는 단어를 써서 계속해서 성토합니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왜? 언제까지 이렇게 놓아두시겠습니까?
우리의 신앙도 가끔 질문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론도 있을 수 있고, 불평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낮기 때문에 하나님의 높은 생각을 이해할 수 없고, 우리의 생각이 좁기 때문에 하나님의 넓으신 뜻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 눈의 시야가 가깝게 밖에 볼 수 없기 때문에 하루 뒤의 일도 모르는 우리가 "하나님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하고 말할 수 있는 수 많은 질문이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신앙생활 하다 보면 그런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심령의 진정한 부흥은 이러한 자세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하박국은 하나님 앞에 대단한 불평과 함께 하나님께 시비에 가깝고, 호소에 가까울 정도의 하나님에게 원망섞인 불평과, 의문과 질문을 쏟아 놓습니다.
사람 못된 것이 행렬만 높고 음식 못된 것이 뜨겁기만 하다. 이러말 들어보신적 있으시지요. 제가 살던 시골에서 보면 조그만 아이가 할아버지 보고 "자네" 하고, 그 할아버지는 "예 아저씨" 합니다. 그래서 사람 못된 것이 행렬만 높다는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음식 맛은 없고 못된 것이 뜨겁기만 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생활 잘 못 된 것 말만 많고 실천이 없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믿음은 질문만 많고 아멘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가 그리도 많은지.... 오래된 교인으로서 바로 되지 아니하면 불평만 많고 순종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흥이 아닙니다. 심령의 부흥을 위해서는 바뀌어야 됩니다. 설교 좀 많이 들으면 이론만 많고 행함이 없어지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고 차마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적인 불평이나 논리적인 이론이 섞인 이유가 되어도 이것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즐거움과 기쁨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은 행악에 그칠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에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야 되겠습니다.
지난 25년을 보면 정말 순전한 마음으로 감사하면서 전심, 전력을 다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서 어린아이와 같이 기도하고 은혜를 사모하는 시간이면 하나님은 예외 없이 은혜를 부어주셨고, 심령의 부흥을 주셨고, 우리의 마음속에 기쁨과 감사함이 충만하게 해주신줄 믿습니다. 목장에서나 교구에서 불평하는 몇몇 사람이나, 이론이 많은 사람이나 무슨 일이라도 반대가 많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들이 마치 무슨 전염병이 도는 것처럼 그 동네를 다 휩쓸고 한사람 한사람의 기쁨을 다 죽이고 그 다음 나중에 시험에 걸려서 마음이 낙심하고 메마르게 되면 부흥의 불길이 싹 식어지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지난날에 경험한 것입니다.
이제 한 세기를 마치고 다시 새 천년을 시작하면서 이제 25년이라는 하나님이 주신 이정표를 세우면서 에벤에셀의 하나님 여기까지 인도하셨는데 이제 여기서 다시 새로운 부흥이 우리 심령속에 임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심령 속에 하나님을 향하여 무슨 불평이나, 이론이나, 원망이 없어지고,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하박국은 질문을 쏟아놓고 퍼부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는 말이 2장에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 높은데 올라가서 하나님 할말 없으시지요 라고 불평합니다.
물론 그의 기도 속에는 나라는 어지럽고, 기도의 응답은 더디고, 죄는 관영하고, 전쟁의 구름은 짙어만 가고, 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같이 위태한 곳에 놓여있고, 정권을 잡은 사람들은 시기와, 분쟁과, 그리고 부정에 정신이 없고, 하나님은 잠잠하시니 답답한 중에 마음을 호소하는 호소요, 간절한 하나님 앞에 외침이라고 보아야 될 것이지만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하시기로 결심을 하셨습니다. 대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2장에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평하기 시작하면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안 해야지 하면서도 또 하게 되니까 "적어라, 새겨라, 크게 새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주야로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생각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여호와의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하나님의 음성이 조용히 들려왔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주시면서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농부들은 콩을 수확하려면 콩을 심고, 팥을 원하면 팥을 심고 이렇게 심은 종자보다 수확은 많이 하지만 종자가 바뀌는 법은 없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추수의 원칙이듯이 영적, 도덕적 세계에서도 그렇게 응용되는 것인데 신령한 세계는 두 가지 씨를 뿌리는데 하나는 육체를 쫓아 뿌리는 씨요, 하나는 성령을 쫓아 뿌리는 씨다. 육체를 쫓아 뿌리는 씨는 썩어질 것을 거두지만, 성령을 쫓아 뿌리는 씨는 영생을 거둘 것이다. 하나님은 우매하시거나 무지하신 분이 아니시라, 심은 대로 거두시는 분이십니다.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되리라" 진실과, 거짓이 갈라져서 반드시 심은대로 거두게 됩니다.
25년을 한결같이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며 기도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1년, 5년, 10년, 20년 수많은 세월을 눈물과 기도와 사랑으로 어제나 오늘이 한결같이 주님을 섬기며 기도하고 충성되이 봉사한 이들을 다른 것으로 나타나지 않고 반드시 다른 상급을 주실 줄 믿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십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인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 부흥은 먼저 하나님 앞에 원망과 불평을 버리고, 이론을 버리고 어린아이와 같이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되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 진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심은대로 거둔다는 것을 믿고 믿음으로 인내하고 살아가는 것이 축복인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기다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거짓되게 결론지어지지 않는 것이며, 충분히 기다릴 수 있습니다. "잠잠하라 하나님은 거룩한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잠잠할찌어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난 하박국은 기도가 바뀝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내가 당대에, 우리의 시간에, 우리의 날에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나타나게 하옵소서. 부흥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그런 기도가 그때에 나오는 것입니다. 진정한 부흥은 이런 마음에 하나님이 임하시게 됩니다. 역하 7:14의 말씀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 것이다.
진정한 부흥은 우리의 마음을 낮추는 것입니다. 이번에 25년동안의 교회를 되돌아보고, 지금상태와 담임목사로서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며 하나님! 우리교회에 부흥을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성도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주는 설교를 많이 합니다. 책망하는 일을 제가 잘 하지 못합니다. 세상에서도 피곤하고 지치고, 얻어맏고 고달픈데 교회까지 와서 책망 받으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간음하다 걸린 여자에게 "너를 정죄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아무도 없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느니 가서 잘하라"고 용기를 주심이 주님의 방법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르지 않은 것과 병든 것과 고쳐야 될 것을 잘 고치고, 수술해야 될 것을 빨리 자르지 않으면 그것이 자신과 교회의 부흥을 망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와 같이 신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주님을 섬길 수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마음의 심령에 찌꺼기가 갈아 앉은 것 같아서 시간되어 흔들리면 다시 또 올라오고, 또 시간이 있으면 잘 가라앉았다가 다시 올라오는 그런 심령이 되지 말고 다 쏟아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뜬물통이 지저분하면 북북 수세미로 시원하게 닦아서 새 심령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야 새 부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붓는다고 했는데 뜬물이 아직도 있다면 버리시고 심령이 시원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이 중동전을 마치고 미국사람들이 Old Glory 라는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기를 좋아합니다. 옛날의 미국의 영화를 되찾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해주시던 은혜와 큰 부흥을 이 사람들로부터 시작해서 여러분 모두가 다 새 심령에 은혜를 받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새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엠마라고 하는 사람은 23년동안 C.C.C에서 일했습니다. 그는 하반신 불구자였습니다. 휠체어를 밀고 다니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그는 끊임없는 통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55세를 일기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날때까지 생전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100명만 하나님께 헌신시켜 달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냥 전도한 사람이 아니고 내가 전도한 사람중 100명이 하나님께 헌신해서 주님을 위해서 일생을 바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본인이 몸이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가서 뛰지 못하니까 그가 기도하기를 100명의 전도자가 대신 주의 일을 하게 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55세에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에는 이 분을 통해서 23년동안 전도를 받고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400명이 참석을 했었습니다. 또 장례하객은 1000명이 참석했습니다. 그들은 빌 브라이트 C.C.C 책임자가 만들어준 4영리 전도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고통 속에서 주의 일을 위하여 그와 같은 사람으로 살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이 엠마라고 하는 사람이 고통속에서도 주님을 위해 살아간 것 처럼 우리들도 살겠다고 장례식에 온 1000여명이 결심을 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서서 다니기 때문에 문제입니까? 우리가 너무 건강하기 때문에 문제입니까?
결국 하박국은 마음에 기도가 바뀌었습니다. 마침내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성경 3:17에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위하여 기뻐하리로다" 는 심령으로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되니까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레오나르드다빈치는 위대한 예술가입니다. 그의 걸작인 "최후의 만찬"을 막 완성했을 때입니다. 그는 다른 화가를 초청해서 그림을 한번 보여주었습니다. 그 그림을 보던 한 화가가 자세히 보더니 "그리스도 손에 있는 잔이 참 아름답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빈치는 가지고 있던 붓을 꺼내서 그 잔을 재빨리 치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얼굴에서부터 눈길을 돌리게 하는 것이 이 그림 속에 있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들의 보잘 것 없는 인생 속에서 만약에라도 그리스도의 영광으로부터 눈길을 돌리게 하는 것이 한 가지라도 있다면 그것을 한시바삐 버리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에서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한시바삐 던져 버리고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예비하는 진정한 심령의 부흥이 새 시대, 새 역사에 일어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하시는 주님! 다시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말이 충분하지
아니하고 물질도 충분하지 않아 우리의 시간과 생명까지 주님께 바치게 해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의 심령속에 가라앉은 찌꺼기같이 마음속에 이 하박국 선지자와 같이 불안과,
원망과, 불평과, 질문이 많이 있거든 주의 음성으로 씻어내게 하시고, 새 마음, 새 영을
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신앙 부흥의 길
합 3:1-3 / 이성희 목사
하박국이 어떤 인물인가 하는 것은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전승으로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레위인이었고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예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예수가 어떤 인물인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랍비들의 전승에 따르면 그는 엘리사가 살려준 수넴 여인의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회의가 많아 ‘구약의 도마’란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바벨론 포로 시기에 애굽으로 피신하였다가 포로기가 끝나기 2년 전에 죽었다고 합니다.
하박국서는 소선지서입니다. 3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짧은 책이지만 신약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외경 ‘벨과 용’에 보면 하박국이 밭을 갈고 있을 때 천사가 그의 손을 끌고 데려다가 다니엘이 갇혀 있는 이방 감옥에 갔습니다. 거기에서 하박국은 죽을 쑤어 갇혀 있던 다니엘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하박국 제1장에서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왜 의인이 고통을 당합니까?”, “왜 악인이 잘되고 성합니까?” “왜 악인으로 하여금 의인을 고통당하게 만드십니까?” 이런 문제가 하박국의 마음에 가득했습니다. 2장에서는 문제를 해결 받습니다. 2:4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질문에 해답을 주십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3장에서는 해결 후의 하박국의 기도가 있습니다. 그는 3:2에서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합니다.
하박국 당시에 백성은 포로가 되고 나라는 황폐했습니다. 성은 무너지고 국민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하박국의 고민은 더 해갔습니다. 그는 억울하고 비참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전 역사의 고민도 이런 것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 하나님의 백성이 고통을 당합니까?” “왜 이방인이 우리보다 잘 삽니까?” “왜 우리를 오랫동안 고통에서 해방시키지 않습니까?” 하박국의 기도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의심의 돌파구였습니다. 문제 해결의 방법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당면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침체합니다. 경제도 침체합니다. 사회도 혼란합니다. 이런 때에 교회와 하나님의 사람의 부흥이 요청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이 말씀은 하박국에서 바울에게로, 바울에게서 어거스틴으로 그리고 루터로 이어지면서 신앙의 근간이 된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루터의 종교개혁의 성경적 근거이기도 했습니다.
부흥이란 영어 단어, ‘revival’은 “죽었던 것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지칭합니다. 없던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이 되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적은 것이 많아집니다. 작은 것이 커집니다. 이것이 부흥입니다.
로마서 1:7에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믿음에”가 무엇입니까? 앞의 믿음은 무엇이며 뒤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작은 믿음에서 큰 믿음으로 확대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작은 믿음이 커지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성장이며 신앙 부흥의 길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이 다시 부흥되기를 바랍니다. 이번 신앙사경회는 우리의 작은 믿음이 커지는 신앙부흥의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신앙부흥은 의를 지킴으로 일어나는 주의 일의 부흥입니다.
우리의 부흥이 주의 일의 부흥입니다. 우리 교회의 부흥이 주의 일의 부흥입니다. 우리는 주의 일을 합니다. 고린도전서 16:10에는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고 바울이 말합니다. 바울도 디모데도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의 일을 힘쓰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58에서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권합니다.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주의 일입니다. 주의 일의 부흥이 우리의 관심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그의 책에서 “거룩한 삶은 미소를 띠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안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주의 일이 내 삶입니다. 이것이 주의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하박국은 의를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의를 지키는 일은 당시에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악한 자가 왕성합니다. 마음에 많은 회의가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그의 마음에 위기를 조장합니다. 그러나 악한데 가담하지 않고 하나님의 회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의로운 자의 고난이란 하나님의 의를 지킴으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이런 의를 지키려는 마음이 하나님의 일을 부흥케 하는 기본자세입니다.
사이토 다카시가 쓴 ‘코멘트력’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부시를 죽이면 범죄자이지만 후세인을 죽이면 영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국인을 죽이면 테러지만 이라크인을 죽이면 정의라고 합니다. 이런 인간적, 주관적 의가 아닌 성경적 의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힘이 의입니다. 승리가 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옳은 것이 의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무엇입니까? 구약에서는 ‘체타카’라고 합니다. 이것은 도덕적 소질입니다. 신약에서는 ‘디카이오수네’라고 합니다. 이 말은 행위의 법칙입니다. 이 모든 것은 바른 것을 의미합니다.
노아는 당시에 의인이었습니다. 모두 악한 때에 의로운 자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악하게 살 때는 악하게 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의롭게 살았습니다. 욥은 당시에 의인이라고 불리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의롭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합니다. 왜 팔복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등장합니까? 사람들이 아예 의를 추구하지 않고 삽니다. 나아가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라고 하십니다. 의 때문에 박해를 받으면 복이 있습니다. 욕하고 박해를 당하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고 합니다. 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절대로 헛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팔복 가운데 의에 대한 대목이 두 번 나옵니다. 의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이것이 신앙부흥의 길입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의로운 행동을 하게 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도와 우리가 의로운 백성이 되게 하는데 있습니다. 의로운 생각이나, 의로운 행동이 아니라 의로운 백성 되는 것이 신앙부흥의 길입니다.
둘째, 신앙부흥은 회개와 변화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우리의 간절한 바람입니다.
“여호와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이는 하박국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소망입니다. 간절한 바람입니다. 하늘의 뜻이 우리를 통하여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이런 일은 첫째는 회개와 기도를 통하여 신앙부흥이 가능합니다. 모든 신앙부흥은 회개의 기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때든지 회개의 기도 없이 교회가 부흥된 적이 없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루에 세 번씩 하는 기도였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금식하였습니다. 십일조를 꼬박꼬박 드렸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자기의 공을 나열합니다. 여기에는 회개가 없습니다. 회개할 것이 없습니다. 참 기도는 아닙니다. 신앙의 성장이나 부흥도 꿈꿀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5:7에는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합니다. 죄인이 회개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이 부흥과 성장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가 세리입니다. 세리의 기도를 보세요. 이 사람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구석에서 작은 목소리로 말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회개가 있는 기도가 참 기도입니다. 이런 회개의 기도가 신앙의 성장이 있고 부흥이 있습니다. 이런 기도는 주님이 거둬주시는, 잡아주시는 손이 있습니다.
주기도문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가르치십니다. 우리의 죄 사함이 있는 회개의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미국의 위대한 부흥사이며 미국교회의 새로운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무디는 “위대한 하나님의 운동은 모두 무릎 꿇고 기도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크게 부흥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회개의 무릎이 회개의 기도가 신앙의 부흥을 가져옵니다.
유대인이 생각하고 있는 기도의 의미는 ‘히트파렐’입니다. 히트파렐은 ‘스스로를 평가한다’ 혹은 ‘자기를 달아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를 달아보는 것이 무엇입니까? 스스로를 평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결국 회개하고 돌이킨다는 뜻입니다.
어떤 기도는 경배이고, 어떤 것은 회개이며, 어떤 것은 찬양입니다. 그런데 기도는 경배와 회개와 찬양 이 모든 요소를 다 포함해야 참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가 들으시는 기도입니다. 기도에는 반드시 회개가 있어야 하고 이런 기도가 부흥의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방법은 간단하게 ACTS라는 네 가지로 요약하여 기억하면 쉽습니다. 찬미(Adoration), 고백(confession), 감사(Thanksgiving), 간청(Supplication)이 그것입니다. 고백이 무엇일까요? 고백은 회개입니다. 기도에는 반드시 고백 즉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카톨릭교회에서는 고해성사가 있습니다. 고해를 성사라고 합니다. 사제에게 자신의 죄를 고하는 것은 성례입니다. 신부에게 고해하고 죄사함의 선포를 받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예식입니다. 우리는 목사에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직접 합니다. 우리는 세례와 성찬만이 성례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할 때 성례처럼 거룩하게, 매일 진지하게, 간절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기도이며 이것이 개인의 신앙부흥의 길입니다. 세례나 성찬을 받지 못하고도 구원 얻을 영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 없이 구원받을 영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회개의 기도를 통하여 신앙의 부흥을 가지고 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 신앙사경회도 우리가 회개의 기도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변화와 개혁을 통하여 신앙부흥이 가능합니다. 베드로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합니다. 이 말은 비굴한 항복이 아닙니다. 일시적인 외침이 아닙니다. 새로운 변화와 자신의 내면의 개혁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부흥의 요소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완전한 변화를 의미합니다. 완전히 옛 생활에서 돌아선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통하여 부흥이 시작되었습니다. 회개만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변화와 개혁이 부흥의 요소입니다.
새롭게 함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아나카이노스’는 사고의 중대한 개혁을 암시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변화와 성장을 위하여 때때로 그동안 의존해온 우리의 껍질인 구조와 외형을 벗어버려야만 합니다. 그래야 신앙의 성장과 부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4:22-24에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합니다. 벗어버리는 회개는 새롭게 되는 변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런 변화는 새 사람을 입는 개혁을 가져옵니다. 여기에 부흥이 있습니다.
플라톤의 한 제자는 바다에 나갔다가 죽을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시는 바다로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는 바다의 유혹을 받지 않으려고 바다로 향하는 창문을 막아버렸다고 합니다.
영적 성장이란 꼭 변화를 의미합니다. 믿지 않는 삶에서 믿는 이의 삶으로, 죄 많은 삶에서 경건한 삶으로 변화를 의미합니다. 마음이 변화되면 사람이 변화되고 사람이 변화되면 문화와 세상이 변화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부흥이며 성장입니다.
결 론
2007년은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났던 부흥운동이 전국으로 불같이 번진 것입니다. 우리교회도 새로운 부흥의 불실이 타오르기를 바랍니다. 올해에 있었던 특별새벽기도회의 감동이 우리의 부흥의 불씨가 되기를 바랍니다. 2007년에는 다시 40일 특별새벽기도회로 부흥운동 100주년을 우리교회에서부터 일어나게 하려고 합니다.
2005년 신앙사경회는 우리의 신앙을 다시 깨우치는 좋은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으로 깨우치고, 신앙이 부흥되고, 신앙이 성장되는 기회로 삼기를 바랍니다. “이 수년 내에 주의 일을 부흥하게 하소서”.
하박국의 이 기도가, 이 소망이 우리의 기도가 되고, 우리 교회의 소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여 일을 부흥하게 하옵소서
합 3:1-4 / 이중표 목사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일이 부흥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잘 되는 것처럼 좋은 일이 없습니다.
하박국 선지가 강렬하게 부르짖는 기도 '시기오놋'이라는 말은 정열적인 노래를 의미합니다. 하박국 선지의 강한 감정과 긴박감을 가진 성품을 가지고 노래하는 심정을 기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의 기도는 그의 마음속에 타오르는 열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2절)
여기 '주께 대한 소문'이라는 말은 주께서 하박국에게 알게 하신 계시의 내용을 가리키며 이 소문은 주의 음성을 말합니다. '내가 주의 음성을 듣고 놀랐나이다.' 왜 놀랐습니까? 주께서 하박국에게 장차 갈대아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징계하리라는 계시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방의 나라 강국인 갈대아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전쟁의 시련을 겪고, 국토가 폐허화되고, 예루살렘이 초토화 되어 포로로 잡혀갈 전쟁의 두려움 때문에 그는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비록 우리가 망할지라도,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곤고함을 겪을지라도 주님의 일은 부흥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고생을 하고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주님의 일, 주님의 나라, 주님의 뜻은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여기 '부흥케 하소서.'라는 말은 죽었던 것을 다시 소생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 다윗 시대와 솔로몬 시대를 회복시켜 달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환난의 때가 빨리 지나가고 옛날처럼 다시 회복되는 은총을 달라는 강한 소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옛날 하나님의 특별한 긍휼을 입어 크게 부흥되었던 그 시절 다윗과 솔로몬 때의 영화를 다시 보게 해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대를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라 말하는데 무엇이 아름다울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어떤 번영했던 시대를 의미하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일, 주님의 뜻이 이 땅에 실현되는 가장 아름다웠던 때가 다윗, 솔로몬 시대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면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가 오심에 대하여 모형적으로 예비한 왕이었고 솔로몬은 이 지상에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룬 귀한 왕입니다. 이러한 시대를 주의 일이 강하게 나타난 부흥된 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흥케 하소서.' 이 말은 다시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회복시켜 하나님의 진노의 때가 지나가고 하나님의 긍휼의 때를 빨리 허락해 달라는 간청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도다 (셀라) 그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3절)
여기 '데만'은 에돔의 한 지방을 가리키는데 남쪽에 있습니다. 그래서 시내산 지역,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임하시던 그 권능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또 바란산이라는 곳도 시내산 곁에 있는 산인데 이 산도 결국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던 하나님의 강렬한 영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때 그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더라 그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 손에서 나오니 그 권능이 그 속에 감취었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권능과 그 영광과 오묘하심에 대한 비밀을 하박국 선지가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곧 부흥인데 곧 하나님의 임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의 영광을 부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일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한 일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우리에게 부흥시켜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의 "주의 일을 수년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말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회복시켜 달라는 의미가 있으면서 더 깊은 심조에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라가 임하시옵소서." 그런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구원의 큰 일이 이루어지는 이 일을 결국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지상에 교회를 세워주시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주의 일을 부흥시켜 주시옵소서." 이 말은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잘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말입니다. 하나님이 잘되는 것, 이것은 성도들이 가장 원하는 것입니다. 잘된다는 말은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이 잘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자기가 잘 될 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잘되는 것은 하나님이 잘되는 것을 의미한다.' 반드시 그런 일치를 가지고 자기 존재를 생각해야 됩니다. '내가 망하더라도 하나님이 잘된다면 나는 망해야 된다. 내가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이 잘되는 것이라면 내가 성공해야 된다.' 반드시 내 성공이 하나님이 잘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시는 그 일은 하나님의 일의 부흥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은 잘되는데 하나님의 일은 쇠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일은 안되는데 하나님의 일은 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교인 가운데 IMF로 사업이 어려운데도 여전히 하나님의 일을 잘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집사님,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예, 잘 지냅니다." "사업은 잘 됩니까?" "예, 잘 됩니다." "아니 모두 다 IMF로 사업이 안된다고 하는데 어떻게 잘됩니까?" "내 사업은 잘 안되는데 하나님의 사업은 잘 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기가 하는 일은 외형적으로 잘 안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을 향해서 충성하고, 열심을 내고, 헌신하는 일은 잘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주의 일을 부흥케 하옵소서.' 이 말은 "하나님의 일이 잘되게 하옵소서." 이 뜻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잘되어야 될텐데 하나님의 일을 전혀 생각지 아니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사람들은 자기 일보다 공적인 일을 우선합니다. '나는 잘못되더라도 사회는 잘 되어야지, 나는 잘못되더라도 나라는 잘 되어야지' 이것이 바로 애국자적인 큰 마음입니다. 그런데 가장 위대한 사람은 '나는 잘못되더라도 하나님은 잘 되어야지' 이 생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마음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부흥되기를 원합니다. 부흥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뜨거운 열정, 헌신이 주님을 향해서 날마다 타오를 때 부흥된 심령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이것이 하나님을 잘되게 하는 것이고 내가 잘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요일 2:15-16)
이 세상을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자랑하고, 세상에 있는 것을 자랑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나깨나 하나님을 자랑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자랑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정욕도 가고, 세상도 가고, 다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만이 영원히 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한가지만은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계속 눈물을 흘렸습니다. '주님의 일을 내가 얼마나 부흥케 했던가, 내가 예수를 믿은 이후로 수십년 동안 내가 주님의 일을 얼마나 부흥케 했던가' 주님 앞에 너무 송구스러워서 눈물이 계속 흘러나왔습니다. '아, 내가 주님의 일을 부흥케 해야 할 종인데 섬기는 교회가 부흥되었던가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이 크게 나타났던가 오 주여, 이 종을 용서하소서.'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의 마음속에 내가 하나님을 믿은 이후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이후로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이 나타났는가 하나님의 일이 부흥되었는가 자신을 반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게서 회개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6-7)
하나님을 멀리했던 우리의 죄악들이 다 내게서 떠나가고 하나님의 영광이 내게 임할 수 있도록 회개해야 합니다.
이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사 1:4) 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마다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께서 원치않는 것이 다 물러갑니다. 우리의 죄악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신앙의 고백은 하나님을 믿으므로 말미암아 내 안에 있는 불의와, 악과, 하나님을 반역하게 하는 인간의 모든 허탄한 생각들이 다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 역사에 가장 중요한 부흥이 있었는데 1907년 평양에서 한국교회 최초의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선교사들의 말씀을 듣다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므로 말미암아 교인들에게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903년에 원산에서 있었던 일인데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신앙체험을 설교하는 중에 그 말씀을 듣다가 한 성도가 가슴을 치면서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아내를 잘 돌보지 아니해서 내 아내를 죽게 한 죄인입니다.' 자기는 술 먹고 방탕하면서 자기 가족들을 돌보지 않아서 자기 아내가 죽었다고 통곡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너도 나도 통곡과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는데 이 소문이 평양에 전파되어서 평양에서도 선교사님들이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다같이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이때 평양에서도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는데 길선주 장로로부터 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길선주 장로가 예수 믿기 전에 친구로부터 진실한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아서 두 부부가 글자를 모르니까 집안 재산을 다 길선주 장로에게 맡겼는데 이때 3백냥을 횡령했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고 말씀을 듣는 중에 생각나가지고 회개했습니다. 이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너도 나도 회개하면서 얼마나 울고 통곡을 했는지 당시에 선교사들이 한국을 점령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꼭 감옥의 지붕이 열린 것 같다."
너도 나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고백하면서 회개하는데 교만한 마음들이 무너지고, 불화한 죄를 용서하고 서로 얼싸안고 화목했으며, 남의 것을 도적질 한 죄를 자복하고, 서로 미워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면서 인종차별, 빈부차별이 다 물러갔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때 당시에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할 때 완전히 그 지역 사회가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악으로부터 돌이켰기 때문입니다. 주일날이면 모든 가게가 다 문을 다 닫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런 운동이 바로 회개운동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예수 믿고 자기 삶에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청산되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에 불순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죄를 다 청산해야 됩니다.
전 세계적으로 잘되는 나라는 부흥운동이 일어난 나라입니다. 부흥운동은 양심을 회복하는 운동입니다. 거짓을 버리고 악을 청산하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모든 인간의 그릇된 삶을 다 청산하는 것입니다.
블란서나 러시아는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회개운동과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요한 웨슬레와 찰스 웨슬레가 복음을 전하므로 말미암아 회개운동이 일어나서 영국을 피의 혁명에서 건졌다고 말합니다. 혁명으로는 나라가 안됩니다. 부흥운동이 일어난 나라는 다 잘됩니다. 미국은 찰스 피니와 DL 무디 목사의 부흥운동과 청교도의 신앙으로 말미암아 세계 강국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미국이 타락한 면도 있지만 청교도 신앙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 민족이 잘되는 길은 복음이 우리 국민들의 깊은 정신 세계속에 박혀서 부흥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나 한 사람이 부흥됨으로 말미암아 가정을 살리고, 지역사회를 살리고, 직장을 살리시기 바랍니다.
이 부흥운동의 놀라운 사건을 사도행전으로 모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7-38)
'이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저들의 마음이 찔려서 회개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네 죄에서 돌이켜라 그리하면 너희가 산다. 성령의 능력이 너희에게 임한다. 그리고 성령의 선물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뿐만 아니라 내가 바르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내 안에 임재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임재를 오늘 이 시대는 성령의 강림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이 내게 임하는 것이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구약에서는 시내산에 하나님이 임재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임마누엘의 하나님의 임재는 성령이 우리 안에 임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내게 임하면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부흥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하시기 바랍니다.
아틀란타 올림픽 때 성화를 점화한 사람이 권투의 황제 무하마드 알리였습니다. 이 사람은 주먹 하나로 전 세계를 휘두른 사람인데 그 주먹 앞에서는 아무도 당할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가 파킨슨 병에 걸려서 투병을 하고 있는 중에 아틀란타 올림픽 때 성화를 점화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단상에 올라가서 점화를 할 때 제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기자 회견에서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내게 사람보다 하나님이 강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 이 파킨슨 병을 주셨다." 자기 주먹이 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세다는 것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이 세계 역사에 강한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나를 통해서 보여주려고 내게 이 병을 주셨다.'
부흥은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마치 봄이 오면 봄바람이 불어오므로 메말랐던 가지에 싹이 나듯, 하늘에서 단비가 내려야 나무순이 돋아나듯, 태양의 따뜻한 햇빛이 와서 열기가 나야 땅속의 생기가 숨쉬듯 하나님의 성령이 내게 임해야만 빈들의 마른풀 같이 시들은 내 영혼에 소생하는 역사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부흥하는 모델을 사도행전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흥하는 심령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데서 시작됩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
말씀을 듣는 중에 심령이 부흥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말씀을 듣는 중에 초대교회가 부흥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라는 것은 말씀이 임재하는 것입니다.
제가 목사로서 10년전에 읽은 책 또 읽습니다. 작년에 읽은 책 또 읽어도 은혜가 됩니다. 그런데 하물며 성경은 얼마나 더 은혜가 되겠습니다. 항상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똑같은 말씀 같아도 하나님의 설교 말씀은 계속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심령을 부흥시키는 비밀입니다.
하박국 선지가 주의 음성을 듣고 놀랐습니다. 그가 기도할 때 그의 심령에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 말씀 듣고 전혀 기도에 힘썼던 초대교회와 같이 기도할 때 부흥이 일어나기 바랍니다.
이러한 초대교회 부흥의 역사는 47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부흥되는 심령은 찬송을 하는데서 시작됩니다. 성령충만한 성도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모두가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성령의 능력은 찬양하는 가운데 임하시고 능력이 임한 성도는 찬양하게 됩니다. 살아있는 성도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찬양합니다.
저들은 입을 열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40-41)
부흥하는 교회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6). 성도들이 다락방에 모여서 교제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헌금하는 것이 즐거워야 합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행 2:44-45)
사업이 잘될 때 "주님 좀 쓰시죠." 하고 헌금한다면 얼마나 주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주님 전 세계를 복음화 하시려면 많이 필요하시죠. 주님 쓰시죠."
부흥되는 교회는 칭찬받는 교회가 됩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사회에서나, 어디에서든지 칭송받는 성도가 되는 것이 부흥입니다. 이렇게 될 때 놀라운 하나님의 일이 이 땅에 부흥되어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