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0년초 발표되었던, 그리고 그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던 하일지의 소설 ‘경마장 가는 길’.줄거리는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 온 주인공 R의 4개월 반 동안의 행적을 통해 도덕이나
사랑으로 맺어진 것처럼 보이는 인간관계의 허위를 드러내 보인다.
5년 반 동안 프랑스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R은 귀국하자마자
프랑스에서 함께 살았던 J라는 여자를 만난다.
그러나 J는
프랑스에서와는 달리 그를 귀찮아하면서 헤어지려고 한다.
R은 J와의 관계를 회복하려 하는 한편, 자신과 맞지 않는 아내와
이혼하기 위해 서울과 대구를 오간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막무가내로 말이 통하지 않고 J와의 관계도 점점 허물어져 간다.
작가는
철저한 3인칭 시점에서 알파ㅤㅂㅔㅌ 이니셜로 지어진 주인공 R의 일상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사람들이 타인들과 맺고 있는 인간관계의
실체를 해부해 보인다.
‘도덕’ 또는 ‘사랑’으로 맺어져 있는 것처럼 외면적으로 포장되어 있는 인간 관계의 실체가 얼마나 허구이고 절망적인가를,
그것은 R이라는 주인공의 삶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우리 자신들의 삶의 한 실상으로 자괴감을
던져준다.
폭우로 쏟아지기도 하던 8월의 마지막 주말, 온 몸을 비로 적시고 젖은 등산화로 물소리도 내며 과천 경마장엘 갔었다.
약간의 호기심과 터부같은 것이 공존하던 공간! 주말이면 숱한 인간 군상들이 모여드는 곳.
오래 전의 일이지만 전도양양한 한 청년장교가 이곳엘 드나들다가 은행강도로 너무나 초라하게 모습을 바꾸게 했다던 곳.
70년대 대통령선거 유세장에라도 가는 인파들처럼 밀려가는데, 지나던 누군가는
'비가 이렇코롬 징하게 오는디 말들은 왜 달린다는 거야'라며 묘한 표정으로 투덜거리기도 했었다.
깔끔해 보이는 조경과 건물들. 수려한 청계산 자락이
올려다보이는
그곳에 근무하는 분의 사무실에 들러 차도 한 잔 마시고 그 분의 빽으로 말 그대로
‘대단히 중요한 사람들’이나 들
수 있다는 6층으로 올라갔다.
관람석으로 노출된 이하층과는 다른 아득하고 전망 또한 좋아 마주들을
포함한 회원들만 드나들 수
있는 곳이라는데.
기말고사를 치루는 학생들처럼 '쉬는 시간'에 마치 벼락치기로
예상문제를 찾아내는
듯한 초초한 모습의 숱한 군상들. 담배연기가 짙은 안개처럼 떠다니던 스탠드.
30분마다 새로운 경주가 시작되고,
끝나면 대부분 기대보다 시험을 잘못 본 예의
학생들 같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묘한 표정들.
86년 아시안 게임과 88서울 올림픽때 승마경기장으로 활용 된 후 89년 뚝섬에서 이곳으로 이전하였고 35만평의 부지에
놀이공원을 포함한
현대적 시설에 1500여필의 말과 최대 4만여명이 관람할 수 있도록 되어있는 곳이란다.
경기가 좋을 때는 하루
매출액이 천억에 가까울 때도 있었으나 요즘에는 7백억 안팎이란다.
거친 광야를 달리던 원시와 로마시대 원형경기장 같은 야성, 그리고 마치 바람 든 무 씹는 것 같은 현대인들의 퍽퍽한 일상의 탈출과 얼마만큼의 요행이 공존하는 곳.
이곳에 왔으니 ‘경험삼아’라는 이유를 달고 예상지도 들여다 보고 안내해주신 분의 정보도 귀동냥으로 육천원 정도의 마권을 사러
갔는데
그 창구의 아가씨는 묘한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고. ‘참 이곳이 6층이었지’
자격지심같이 천원짜리 지전을 든 손이
초라해지고.
그러나 가끔 고스톱을 치면서 ‘스톱’을 외쳐야 할 때 ‘고’를 외치는
결코 치밀하고 냉정한 도박사 기질이 나에겐
없음을 일찍이 간파하였기에
그저 ‘찍는 수준’으로 였다. 어찌돼든 도박은 도박이니까 말이다.
경주가 끝나고 늘 그렇듯이 마치
로또복권의 1등 당첨금 숫자처럼
1등으로 들어온 말의 번호가 자꾸만 되뇌이어지고 되돌리고도 싶은 심사도 같았다.
본전을 찾아야 겠다는 아쉬움을, 그리고 일행의 막걸리값이라도
건지고 싶은 기대를 던져버리고
자리를 털었다.
그저 ‘잃어도 그만, 따도 그만’의 여유를 부릴 형편은 못되니 약간의 아쉬움은 털어버릴 수 없었다.
다시 지루함처럼 30분후의 행운을 기대하며 담배연기를 허공에 날리는 숱한 사람들을 뒤로하고
돌아나왔다. 얼마 지나지도 않아 다시 비원같은 함성이 허공을 가르더니 이내 사그러지고는
비가 개어가며 뜨거워지는 팔월의 오후가 낮술에 취한것처럼 휘청거리고 있었다.
첫댓글 경마장의 갔던 일이 지금 생각해도 즐겁습니다.멋진 경험이었지요.
나는 경마보다 승마가 더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