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박 전 시장과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한나라당 내의 유력 후보 중 한사람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대권 진입 노력이 활발하다.
왕성한 대권잡기 노력에도 불구하고 언중유골(言中有骨)이라고 수많은 말 중에 실언이 많아 천박한 정치철학을 지닌 그렇고 그런 찌그러지고 일그러진 가짜 영웅은 아닌지 심히 고려해봐야 할 검증대상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인 낙태 가능 발언으로부터 한물 살짝 간 배우 등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 전시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지전적인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이 후보의 고향은 지만원 박사의 글에 의하면 일본 오오사카시(大阪市: 일제 당시의 大阪府 中河內郡 加美村 ***** *** **)로 밝혀졌다.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는 오오사카시 히라노쿠(大阪市 平野区)에 해당된다.
이 후보의 자서전에 의하면 어려운 환경 속에서 군밤 장수 등의 고학을 하면서 대학을 다녔다고 한다. 어찌됐든 본인의 자서전에 의하면 대학 재학 중 군대에 가려했으나 폐가 좋지 않아 면제를 받았다고 한다.
그 이후 현대건설에 입사 30대에 사장이 되는 등 일취월장 샐러리맨의 우상이 될 정도로 돈도 많이 벌어 성공했으며, 자신의 성공신화를 <신화는 없다>라는 책으로 엮어 베스트셀러가 되고 TV에서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이명박 후보를 모델로 인기리에 드라마가 두 차례에 걸쳐 방영된 적도 있다. 참 복도 많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오늘이 오기까지 치밀하게 이 후보는 준비를 해 온 것 같다. 어찌되었건 미천한 신분에서 샐러리맨들의 신화를 뛰어넘어 이제는 대한민국의 최고 통치자가 되겠다고 아주 열심히 활동 중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 후보의 성장과정과 저돌적인 공격성 발언들을 보면 일본사를 전공한 필자가 볼 때는 마치 중세기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보는 것 같다.
우리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 토요토미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주범으로 조선의 앞선 인쇄, 도자기 기술자들을 대거 납치해가 메이지유신의 밑거름이 됐음은 우리로써는 통탄할 일이다.
그로 말미암아 유신 후 일본은 또다시 ‘한국을 치자!’는 정한론(征韓論)으로 이어져 우리는 강화도 조약의 강제체결을 강요당하고 1910년에는 마침내 국권도 잃고 강제 합병당해야 했던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다. 배은망덕한 싹수 노란 일본이고 보면 우리가 항상 경계해야할 이웃 나라다.
일본인 학자들조차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거나 ‘문화침략전쟁’으로 부르는 것은 이처럼 토요토미가 조선 문화를 치밀한 준비 하에 훔쳐간 전쟁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문화재뿐만 아니라 기술이 뛰어난 사람까지도 빼앗아 가 일본 발전의 기틀을 다진 것이다. 그것이 훗날 일본 발전의 원동력이 되어 또다시 우리는 침략을 받고 말았으니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면 언제든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명제를 입증시켜 주고 있을 뿐이다.
미천한 토요토미의 출세와 호적 세탁
토요토미는 부친이 하급 무사로 아주 미천한 가문 출신이었다. 토요토미의 출신지는 오와리국(尾張國:현재의 아이치현[愛知縣])이다. 그는 출세를 위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충성을 다했다.
일례로 토요토미는 오다 노부나가가 말을 타고 밖에 나갈라 치면 품속에 따뜻하게 넣어두었던 가죽신을 잽싸게 꺼내들고 장군이 따뜻함을 느끼며 신을 수 있도록 준비했을 정도다. 마치 현대건설을 그만 둘 때까지 이 후보가 정주영 회장에게 충성을 다하여 출세했듯이.
사실 토요토미의 출세에는 당시의 시대조류와 맞물려 능력 있고 잘 싸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즐겨 기용했던 파격적인 오다 노부나가의 덕도 크게 작용했다.
하여튼 토요토미는 미천한 가문의 하급 무사로 29세까지는 키노시타 토오키치로오(木下藤吉郞)라 불렸다.
이후에는 양반 성씨인 하시바를 사칭하여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라 불렸고, 49세 되던 1585년 7월 이후에는 고대로부터 유명가문이었던 후지와라(藤原: 백제출신의 후지와라 카마타리[藤原鎌足]가 시조)라 사용하다가 일왕 다음의 최고위 직인 캄빠꾸(關白)가된 1586년 12월부터는 토요토미 히데요시로 개명했다. 수차례에 걸쳐 호적 세탁을 한 것이다.
그만큼 미천한 출신이었던 토요토미에게 양반 성씨는 꼭 넘어야할 높은 산과도 같았을 것이다. 아마 그러한 동기가 권력의 정점에 서게된 하나의 동인(動因)으로 작용한 것은 아닐까 한다.
이는 이 후보의 부친이 일제시대 일본에서 이씨 성에서 츠키야마(月山)라고 성씨를 고치고 덕쇠(德釗)라는 이름도 충우(忠雨)로 바꾼 것과 비슷하다.
▲ 이덕쇠라는 이름이 사라진 이명박 전 시장의 아버지 이충우씨의 호적
이 호적에는 이덕쇠라는 이름이 한번도 나타지 않았다. 분명히 이덕쇠가 이충우로 개명했다는 근거를 기록해야 하는데 누가 보아도 이충우씨가 개명했다는 것을 알 수 없다. ⓒ 뉴스타운
만일 이후보가 지만원 박사의 주장대로 1941년 12월 일본 오오사카에서 출생하여 1945년 해방 후에 귀국하였다면 여섯 살 때까지는 그곳에서 살았다는 것이 합리적인 설명이고 타당하다.
아울러 지박사가 제시한 호적등본대로라면 이 후보는 귀국하는 6세 때까지는 일본에서 츠키야마 아키히로(月山明博:Tsukiyama Akihiro)라 가족들이나 친구들로부터 불렸을 것이다.
▲ 이명박의 할아버지 이종한씨 일제시대 호적
이 호적을 보면 성씨를 李씨에서 츠키야마(月山)로 개명한 것이 보인다. ⓒ 뉴스타운
이후 한국에서 다시 원래의 성씨를 회복하여 이명박(李明博)으로 불려 지게 되는 과정이 마치 토요토미의 호적 세탁과정을 보는 것 같다.
토요토미는 미천한 가문 출신이라는 콤플렉스 때문에 자신의 출세에 따라 하시바(羽柴), 후지와라(藤原)를 이어 일왕(天皇)이 자신에게만 부여한 토요토미(豊臣)라는 성씨를 하사받아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명실상부한 최고의 성씨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치밀한 준비성과 꼼수, 잔머리의 대가
뿐만 아니라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결과 지상주의자인 토요토미의 조선 침략은 일찍부터 그 준비가 치밀했다. 임진왜란 10년 전부터 음흉한 토요토미는 농민의 지배를 한층 강화하면서 조세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태합검지(太閤檢地)를 단행했다.
일제시대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를 앞세워 토지조사 하던 것과 같은 개념일 것이다. 이 조사로 침략을 위한 군자금 조성은 착착 진행되었으며, 전쟁 4년 전인 1588년에는 도수령(刀狩令)을 내려 사찰이나 농민들이 가지고 있던 창, 칼, 활, 조총 등의 무기를 압수하여 새로운 침략무기를 제조하였다. 이로써 농민봉기를 예방하고 농사일에 전념케 하여 쌀 생산량을 늘리니, 치밀한 전쟁준비는 일석이조의 효과까지 거둬들였다.
더욱이 당시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떠오르던 토쿠가와 이에야스를 미카와(三河:아이치현의 동부지역)에서 멀리 에도(江戶:현재의 토오쿄오)로 전봉(轉封:봉토를 이전시킴) 조치함으로써 반란의 싹을 잘라두었다.
그리고 마침내 침략 10여 개월 전인 1591년 8월에는 신분통제령을 내려 신분 간 이동을 금지, 일본에 천민집단인 부락민(部落民)이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특히 소, 돼지를 도축하던 백정이나 배를 만드는 사람들과 갖바치 등 전쟁 물자를 만들던 직업에 집중, 이들이 오늘날도 차별받는 300만 명의 피차별 받는 천민이 되었다.
그들은 같은 일본인이면서도 일본인 대우를 못 받는 피차별 집단이 된 것이다. 이들은 지금도 알게 모르게 일본 사회로부터 직업, 결혼, 취업에 심각한 차별을 받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의 공산당은 엄청나게 활동하나 쉽사리 없어질 문제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주군(主君) 오다 노부나가가 부하인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로부터 불의의 습격을 받고 혼노지(本能寺)의 활활 타오르는 화염 속에서 스스로 한 많은 할복자살을 하니, 그때 나이 49세였다. 천하통일 일보 직전에 자신이 키운 부하 장군인 아케치의 불의의 일격에 천하 명장 오다 노부나가도 꼼짝없이 독 안에 든 쥐처럼 할복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주군 오다가 죽었을 때 하시바(토요토미)는 백제 임성태자의 후손인 오우치(大內) 가문을 몰아내고 스오(周防) 및 쵸오후(長府) 지역(현 야마구치현 내)을 통치하던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와 강화를 요청하기에 이른다. 이때도 사실 군사의 숫자나 보유 식량 면에서 토요토미는 모리 군대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요토미는 자신들이 오히려 유리한척 허세를 부리며 서둘러 속임수를 쓰니, 오다의 죽음을 모르던 모리 측이 강화에 임함으로써 주군을 죽게 한 아케치 군대를 향해 야마구치현에서 쿄오토(京都)로 마음 놓고 말머리를 급히 돌릴 수 있었다. 만일 이때 모리가 좀 더 현명했더라면 일본 역사에 토요토미의 시대는 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임진왜란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처음에 상당히 불리하면서도 허세를 부려가면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잔꾀와 꼼수로 상대를 야금야금 치고 들어가는 면이 또한 이명박 캠프 쪽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
하여튼 전국 통일을 이룬 토요토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최소한 10년 전부터 일본 국내의 산적한 문제와 라이벌들을 깨끗이 합법적으로 숙청할 계획을 가지고 조선 침략을 준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이 후보를 모델로 1989년에 이미 KBS 텔레비전에서 <야망의 세월>을 방영하였고, 2004년 7월부터 7개월 여간 또다시 MBC에서조차 <영웅시대>를 대대적으로 내보냈음을 되돌아볼 때 그 치밀한 준비성이 더욱 엿보인다.
드라마가 최초로 상영된 이후에는 <신화는 없다>라는 자서전을 1995년에 내는 등 대권을 향한 야망은 이미 18년 전부터 차근차근 준비되어 온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수백 년 전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이웃 조선을 침략하여 엄청난 재앙을 안겨준 인물. 자국민 수 백 만 명을 죽이고 오랫동안 황폐화 시켰으며, 이웃 조선마저 쑥대밭으로 만든 인물이 이 전 시장과 오버랩 됨은 비단 필자뿐일까?
다시금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자신의 성공을 위해 장애우, 한물 살짝 간 배우(이 후보 말), 교수노조, 낙태, 오케스트라 노조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 대하여 폄하성 짙은 발언을 스스럼없이 하는 것을 볼 때 사회적 약자에 무한정 비정한 것은 아닌지 매우 우려된다. 반면, 대기업 산업자본에 의한 금융산업 진출 허용 등 강자 편을 드는 발언을 보면 강자에게는 한없이 약하고 약자에게는 제왕처럼 군림하는 타입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울러 정치철학 또한 종이 한 장 무게도 안 되는 얄팍한 수준은 아닌지 아무래도 걱정된다. 미래의 엄청난 독재정치가가 21세기 한국에서 탄생되지 않을까 매우 염려스럽고 우려되는 현실이다.
누가 토요토미가 몰고 올 대재앙을 막을 것인가? 이순신인가. 잔다르크인가. 아니면 토쿠가와 이에야스인가. 그것도 아니면? 문제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