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상태가 안 좋아 출장이 불투명하다는 선수를 중요한 중앙수비수 자리에 세우고, 컨디션이 떨어져 있던 이천수를 풀타임으로 출장시키고, 박지성 이영표는 1분도 피치에 세우지 않고, 이동국은 컨디션 점검에만 초점을 맞춘 듯, 몸이 무겁다기보다는 아예 걸어다니고...
한눈에 보아도 승부를 욕심낸 경기는 아닙니다. 본프레레의 전술적 측면이야 아직 더 두고보아야겠지만, 실전에 들어서기 직전의 평가전에서 착실하게 챙길걸 챙기는 점은 사주고 싶습니다. 보통의 경우는 이것저것 점검도 해보아야겠고, 승패도 신경이 쓰이고 해서 어정쩡한 결과가 나오기 쉽거든요.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선수들의 전술적 이해도에 대해서는 질책할 부분은 질책해야 하기 때문에, 본프레레가 이집트전 이후에 화를 냈다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이집트전을 보면서, 본프레레의 전술적 핵심은 차두리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본프레레의 색깔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독일전부터 지금껏 꾸준하게 3-4-3을 사용하고 있는데. 실은 딱히 3-4-3 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상당히 변형된 시스템이고, 이런 본프레레식 변형 3-4-3 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것이 차두리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본프레레 시스템의 특징은 3톱의 희한한 움직임입니다. 독일전을 기준으로 생각할 때에 수비시에는 차두리가 거의 윙백의 자리까지 내려와주면서 김동현-이동국의 투톱처럼 보이다가, 속공에 들어갔을 때에는 김동현이 이동국의 앞자리까지 올라가고 차두리는 사이드로 빠지면서 볼배급을 하는 것은 중앙공격수인 이동국의 몫이었습니다. 즉 왼쪽 윙포워드는 횡으로 많이 움직이면서 중앙포워드의 역할을 도와주고 오른쪽 포워드는 종으로 많이 움직이면서 오른쪽 윙백의 부담을 덜어줍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왼쪽은 창, 오른쪽이 방패가 되는 셈입니다. 우연히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면, 상당히 의미있는 선택입니다. 대한민국의 선수구성을 볼 때에 이상하게도 왼쪽에 공격력이 강한 선수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윙백라인에 이영표, 김동진이 있고, 이천수, 설기현, 정경호가 모두 오른발잡이인데도 왼쪽에서 더 인상적인 플레이를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왼쪽에 공격의 무게중심을 두면 우리 DMF 는 오른쪽 윙백이 올라간 자리는 오른쪽 포워드에게 맡겨두고 왼쪽의 뒷공간만 신경을 써주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부분에서 본프레레 시스템에 차두리가 적격인 이유가 나타납니다. 차두리가 뛰는 경기에서 오른쪽 윙백의 뒷부분이 아킬레스건으로 느껴진 적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버래핑하는 상대 윙백을 완벽하게 잡아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차두리는 단순히 수비가담만 좋은 선수는 아닙니다. 만약 오른쪽 포워드가 공격에는 전혀 가담을 못하고 수비에만 내려와 있다고 하면 이 변형 3-4-3 시스템은 자기 구실을 못하게 되고 왼쪽 사이드로 쳐져버린 변형 3-5-2 에 가깝게 되어버립니다. 차두리는 수비라인에 가깝게 내려왔다가도 순식간에 공격진영에 가담할 수 있는 스피드와 기동력을 가졌습니다. 게다가 차두리가 밑에 많이 내려와있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차두리의 앞에 뛸 공간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차두리를 따라 상대 윙백이 많이 올라와 있다면 이 공간이 웃어주는 쪽은 차두리입니다. 독일전에서 람과 스피드 경쟁을 벌이며 40미터를 질주하던 장면에서, 이 공간을 활용한 좋은 예가 드러납니다.
차두리가 뛸 수 없는 상황에서라면 이런 역할에 가장 잘 맞는 선수는 박지성입니다. 차두리처럼 윙백 뒷공간을 완벽히 커버하지는 않지만, 대신 앞선에서 악착같이 달라붙으며 상대에게 공간을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김남일마저 발목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는 박지성을 윙포워드로 쓸 여력은 없습니다. 이천수를 풀타임으로 뛰게한 것은, 설기현을 왼쪽에 쓴다고 할 때 정경호와 이천수 중 어느쪽을 쓸 것인가에 대한 최종점검으로 보입니다. 양쪽 다 장단점이 있지만, 김두현이 선발로 뛰지 않는다고 하면 이천수쪽에 무게가 갑니다. 짧은 프리키커가 없거든요.
어떤면에서 김동현은 본프레레가 생각하는 왼쪽 포워드에 가장 근접해있는 선수입니다. 생각보다 빠르고, 왼발크로스도 날카롭고, 게다가 적극적인 몸싸움으로 중앙공격수의 부담을 덜어주니까요.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포지션에서 자기자리를 잘 찾지 못했고, 아직 더 성장해야 하는 선수입니다. 이 시스템에 가장 맞는 선수는 현재로는 역시 설기현이겠지요. 윙포워드로도, 중앙공격수로도. 자기 몫을 해주는 선수입니다. 정경호가 좋은 경쟁을 해주고 있고요.
독일전부터 시작해서 일련의 평가전들을 볼 때, 본프레레는 일단 투톱카드를 접어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경기중반이후에 선수교체와 함께 일시적으로 투톱처럼 느껴진 적은 있지만 항상 윙포워드 위주의 경기를 해왔습니다. 투톱카드를 폐기하고 왼쪽 포워드가 중앙으로 많이 들어오는 변형 3-4-3 을 택한 결정에는 납득할만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투톱조합으로 재미를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나, 가장 먼저 떠오름직한 안정환-이동국 조합은 이론상 빅-스몰형으로 이상적인 조합이고 여러차례 가동이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한국의 공격루트는 전통적으로 중앙쪽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중앙에서 상대 수비를 순간적으로 따돌리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는 공격수는 황선홍 뿐이었습니다. 셋째로, 투톱을 쓰기엔 윙포워드자원이 아쉽다는 점입니다. 정말로 이동국-안정환 카드를 가동한다고 할 때에, 벤치에는 설기현, 이천수, 정경호, 차두리가 일렬로 앉아있게 됩니다. (아마도 이중 설기현이나 이천수 둘중 하나 정도가 OMF 로 나올 수 있을까요.) 이것은 완벽한 자원의 낭비입니다. 아마도, 클루이, 마카이, 하셀바잉크, 반호이동크가 잡담을 하고 있는 네덜란드 벤치를 보는 기분이 들겠지요.
한가지 의문이 더 남습니다. 왜 감독은 최성국을 거의 포기하다시피하면서까지 남궁도, 김동현을 테스트한걸까. 정말로 단순한 "몸빵선호" 감독인걸까. 하는 의문이 그것입니다. 물론, 하드웨어는 모든 감독들의 최우선 고려대상입니다. 하지만 최성국의 재능은 체격적 열세를 상쇄하고 남습니다.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현대축구에서 원톱 전형의 가장 큰 약점은 중앙공격수의 고립이라는 점입니다. 이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윙플레이어는 때론 중앙공격수를 도와 헤딩경합을 해주고, 또한 중앙공격수가 수비를 끌고 나온 공간을 노려 잘라먹는 플레이를 해주어야 합니다. 이럴 때에 헤딩력이 관건이 되는 것입니다. 또하나는 독일전처럼 이동국이 공격전환시에 플레이메이커에 가까운 역할을 하고, 오른쪽 포워드가 사이드로 치고 나간다면, 왼쪽 포워드가 중앙으로 들어와서 헤딩경합을 해주어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더군다나, 차두리가 수비선에 치우쳐서 미쳐 공격에 가담 못할 때에는 이동국이 오른쪽 사이드로 빠져주었습니다. 김동진의 독일전 첫골 장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동국의 오른쪽 돌파에 이은 크로스때에 다른 공격수들이 헤딩 경합을 해주지 못했다면 김동진의 골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다른 이름이 생각납니다. 바로 안정환입니다. 공격수가 플레이메이킹을 하는 이 시스템은 이동국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안정환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안정환이 원톱을 설 때에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공중볼을 못 따내준다는 점입니다. 공중볼 경합은 대신 윙포워드들이 중앙으로 들어오면서 도와주고, 안정환은 공격의 방향을 전개하는 역할을 해줍니다. 쿠엘류시절 때에도 안정환이 뛰었던 경기중 가장 인상적인 공격력을 보였던 것은 설기현-안정환-차두리가 선발로 나왔던 레바논전으로, 독일전과 유사한 공격전개 양상을 보였습니다. 즉 설기현이 헤딩경합을 도와주고 안정환은 피딩 역할을, 차두리가 사이드를 허무는 식입니다. 그리고, 또 한명의 공격수인 조재진 역시 주고 돌아뛰는 역할에 익숙한 선수입니다. 즉, 지금까지 이야기한 본프레레 전형은, 바로 한국공격수들의 특성을 잘 고려하고 있습니다.
이 시스템이 좋은 경기력으로 이어지는 핵심은 히딩크의 축구가 그랬듯이 활발한 포지션 체인지로 공간을 메우는 것입니다. 중앙 공격수가 피딩을 하느라 내려오면 왼쪽 공격수가 그 자리를 메꾸고, 왼쪽 사이드는 다시 윙백이 메꾸고, 오른쪽 공격수가 수비로 내려오면 중앙공격수가 오른쪽으로 빠지고, 다시 그 자리를 중앙미들과 왼쪽 공격수가 메꾸고, 이런 식으로 실타래를 잡아다니듯이 연속적으로 공간을 메꾸어주어야 하는 시스템입니다. 필연적으로 윙포워드들이 중앙공격수의 자리를 메꾸는 빈도가 높아지고. 이래서는 키가 작은 최성국을 쓰기가 어려워집니다.
포지션 체인지를 이렇게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시스템의 경우, 체력과 조직력이 필수입니다. 유상철, 이천수처럼 경기경험이 떨어져있는 선수가 팀에 막 합류한 경우 아무래도 삐걱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천수 본인의 활약은 나쁘지 않아 보였는데도 자꾸만 미들에서 구멍이 나 보인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게다가, 쿠웨이트전의 선발이 유력한 선수들의 경우 체력을 아끼면서 컨디션을 끌어올리는데만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습니다. 괜스레 체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이집트전 전반의 졸전은 이런 이유가 클겁니다. 김동진마저도 평소에 비해서는 뛰는 양이 적어 보였습니다.
설기현, 박지성, 이영표가 가세하고 선수들이 전력을 다할 쿠웨이트전은 이집트전과는 다른 양상이 될 겁니다. 미들에 세 선수가 바뀌는 것만으로도 팀 자체가 완전히 다른 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영표가 오른쪽에서 뛴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오범석을 제외할 때부터 예상할 수 있던 일입니다. 아시안컵 직전의 코스타리카전때는 확실히 왼쪽일 때보다 경기력이 떨어졌지만, 정작 요르단전 때에는 접지 않고 올리기 때문에 공격타이밍이 오히려 더 좋아지지 않았나 싶은 부분도 있었습니다. 박규선마저 왼쪽이 더 낫기 때문에, 이번 명단은 실은 왼쪽 윙백만 세명이 있는 셈이 되었습니다.
시험은 끝났습니다. 이제부터는 한경기 한경기가 독일로 가는 중요한 고비가 됩니다. 본프레레는 매경기 꾸준한 경기력은 보여주고 있지 않지만, 적어도 준비하는 과정만큼은 신뢰할만한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수도, 코칭스태프도, 팬들도. 한마음으로 대한민국의 필승, 전승, 압승을 일구어냅시다.
힘내라. 한국!
여기가지가 원문이고 참고로 코스타리카가 아니라 트리니다드 토바고입니다...
아시안컵직전시합은 토바고 아닌가요?
첫댓글 오..논리적으로 잘써놨다.멋진데..
저도 왜 윙들을 김동현,남궁도를 사용했는지 몰랐는데 저런 실타래가 있었군요..그러나 낭궁도나 김동현은 아직 잘 활용이 안되는것 같네요..능력부족인가요?아마도 차두리,설기현,안정환이 이 있으면 뭔가 보일듯..이천수에다..정경호..
참 좋은 글이네요...스크랩해야겠습니다...ㅋㅋ
잘정리된 글..
짜증난다..너무 멋지네..;
굉장하네요.......ㅋㅋ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오.....당신을 진정한 매니아라고 칭합니다. 웬만큼 축구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에 비하면 아직도 저도 초보입니다....good....
와~ 논리적이에요~!! 전 안정환이 대표팀에 합류한다고 했을때의 상황이 궁금해지네요.ㅋ ㅎ 감독 비난 선수 비난 하지 말고!! 우리 쿠웨이트전 꼭 승리하도록 응원 열심히 합시다!!!
다 이유가 있을겁니다. 봉감독님도.... 봉감독님도 축구전문가인데 이정도 욕먹을줄 몰랐겠습니까? 그리고 욕먹고 싶은 감독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이튼... 전 조용히 있다가 쿠웨이트전이나 열심히 응원하며 볼랍니다.. 이분 글 너무 멋지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