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사
계룡산은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정하려고 답사를 왔을 때,
무학대사가 금닭이 알을 품은 형국(金鷄抱卵形)이고,
용이 날아 하늘로 올라가는 형국(飛龍昇天形)이라고 하여
계와 용을 따서 계룡산이라고 했다.
이 산봉우리들이 이어진 능선이
영락없는 닭이 벼슬이고
꿈틀꿈틀 용트림하는 산세는
용을 닮았다.
그래서 계룡산이고
산중의 산으로 친다.
동쪽에는 동학사
서쪽에는 갑사
남쪽에는 신원사가 자리하고 있다.
일주문 門額은
구당 여원구 해서체로 무인지하 구당이라는 款識가 보인다.
구당은 독실한 불교 신자로
예서와 해서의 대가이며
대한민국 國璽를 印文한 전각가이다.
금강문을 지나면 축대로 쌓고
조성한 법당구역이 나온다.
법당을 가로막고 있는 전각에 계룡갑사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왼쪽에 丁亥菊秋 節度使 洪在羲書 라는 款識가 보인다.
고종 24년 1887 충청감사였던 홍재희 글씨다.
기년 뒤에 쓴 국추는 9월을 의미한다.
季秋 暮秋 咏月 등과 같은 뜻이다.
계룡산 갑사는
干支 중 첫 번째로 으뜸을 상징하는 ‘甲’을 절 이름에 붙여 절 중에 절을 자부하는 이름이다.
대웅전 현판은
산중의 산이요
절 중의 절을 자부하는
계룡산 갑사의 위상에 걸맞게 쓴 것일까.
법당 중앙의 한 칸을 전부 차지한
현판을 곽 채워 썼다.
‘大’의 왼쪽 획이 ‘雄’의 ‘主’획과 겹쳤다.
또한 ‘雄’의 왼쪽 삐침을 크게 돌려 ‘殿’의 ‘又’획을 범접했다.
아주 드문 자법이자.
쉽게 감상하기 힘든
대형 글씨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康熙八年己酉六月日書라는 款識로 보아 현종 10년(1669)에 섰다.
글씨가 크고 획이 비대하기 때문인지
石蜂 韓濩(1543~1605)의 친필이라고 한다.
그러나 紀年인 己酉는 석봉이 죽은 지
65년이 지난 1671년이다.
석봉의 친필로 보기는 시대가 맞지 않다.
석봉의 친필이 아닐지라도
이만한 명필은 보기 쉽지 않다.
노련한 농부가 쟁기질로 일궈낸 밭고랑과 같이 필획이 자주 고르고 튼튼하다.
間架와 結構는
가래떡을 뚝뚝 잘라 맞춘 것과 같이 균밀하다.
붓을 藏鋒으로 逆入하여 형성한 蠶頭가 일품이다.
정말로 누에가 굼틀거리는 것처럼 생동감이 있다.
송나라 때 서예가 米芾은(1051~1107)은
나만이 큰 글씨 쓰는 법을 얻었다고 자부했고
실제로도 큰 글씨를 잘 썼다.
그는 큰 글씨는 작은 글씨와 같이
필봉의 형세를 완전히 갖춰야 하고
고심한 흔적이 없어야 아름답다고 했다.
글자의 大小와 疏密이 각기 균형을 이루되,
한 글자로 한 칸을 가득 차게 하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갑사 대웅전은
미불의 대형 서법에 대비해보면
감상의 맛을 더할 수 있다.
오후에는 모처럼 미불의 法帖을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