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오탁번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무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년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 아아 원시림
그 아득한 세계의 운반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발언.
연봉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한 세계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작은 새가 되어
나무가지 위에 내려앉아
해뜰 무렵에 눈을 뜬다.
눈을 뜬다.
순백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 번째
눈을 뜨듯.
구두끈을 매는 시문만큼 잠시
멈추어 선다.
행인들의 귀는 점점 맑아지고
지난밤에 들리던 소리에
생각이 미쳐
앞자리에 앉은 계장이름도
버스·스톱도 급행번호도
잊어버릴 때, 잊어버릴 때,
분배된 해를 순금의 씨앗처럼 주둥이 주
둥이에 물고
일제히 날아오르는 새들의 날갯짓.
지난밤에 들리던 석탄의 변성소리와
아침의 숲의 관련 속에
비로소 눈을 뜬 새들이 나라 오르는
조용한 동작 가운데
행인들은 저마다 불씨를 분다
불씨, 불씨를 분다.
행인들의 순수는 눈 내린 숲속으로
숲의 순수는 행인에게로 오는
이전의 순간,
다 잊어버릴 때, 다만 기다려질 때,
아득한 세계가 운반되는
불씨, 불씨를 분다.
은빛 새들의 무수한 비상가운데
겨울 아침으로 밝아 가는 불씨를 분다.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오탁번
소설가, 시인, 국문학자, 고려대 명예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43년 충청북도 제천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영어영문학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및 박사과정을 졸업(문학박사)했다.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철이와 아버지」,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 1969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처형의 땅」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로 재직했다. 동서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정지용문학상, 한국시협상, 고산문학상, 김삿갓문학상, 목월문학상, 공초문학상, 유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 『오탁번 시전집』, 『손님』, 『우리 동네』, 『시집보내다』, 『알요강』, 소설전집 『오탁번 소설』 1~6, 학술서 『한국현대시사의 대위적 구조』, 평론집 『현대문학산고』, 『헛똑똑이의 시 읽기』, 『현대시의 이해』, 산문집 『시인과 개똥참외』, 『오탁번 시화』, 『두루마리』 등이 있다. 2023년 2월 15일, 향년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첫댓글 오탁번 시인께서 2월 15일 새벽, 버슨분홍 옷을 입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