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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1: 11 일백 쉰세 마리 - 요 21: 14 세 번째로 나타나신 것
요 21: 11 일백 쉰세 마리 -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
일백 쉰 세 마리의 고기를 잡았다.
요한이 숫자까지 기록한 것은 이날에 있었던 일이 역사적 사실이며 어부들은 고기를 팔거나 나눌 때 고기를 세어서 하기 때문에 고기의 숫자를 정확히 기록할 수 있었다.
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그물에 든 고기를, 끌어올려 셈하는 일에 있어서 주도적인 제자는 역시 베드로였다.
본문에는 베드로 혼자 그 일을 다 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게 묘사되어 있으나 6절과 관련지어 볼 때 다른 제자들과 함께 처리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다른 제자들은 배에 타고 있었으므로 물고기를 처리하지 않고 배에서 내려 식사자리로 갔다고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2]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본문에서 '고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잎뒤스'(*)는, 묘하게도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 글자를 모은 것과 일치하는데 이런 이유로 해서 초대교회에서는 물고기를 기독교 또는 기독교인을 상징하는 부호로 사용하였다.
초대 기독교인들의 거주지였던 곳에서 물고기 그림이 발견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요한은 여기에서 잡힌 물고기의 숫자가 153마리였다고 기록하는데 이 153이라는 숫자는 기독교 역사상 많은 해석을 야기시켜 왔다.
Ⓐ 어거스틴(Augustine)은 율법을 상징하는 10을 구약으로, 성령을 상징하는 7을 신약으로 보고 이 둘을 합한 수인 17에 이르기까지 1부터 더해 나가면(1+2+3+4+5...+17) 153이라는 숫자가 나온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덧붙여서 이 153이라는 숫자는 신. 구약 시대를 통틀어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를 입어 구원을 얻게 될 자들의 수를 가리킨다고 했다.
Ⓑ 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 of Alexandria)은 100을 이방인의 수로, 50을 유대인의 수로 그리고 3을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는 수로 보는 해석을 제시했다.
이렇게 볼 때 100+50+3=153이라는 수가 도출되며 이것은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됨을 가리킨다고 한다.
Ⓒ 고대의 동물학자들은 생선을 153종으로 분류했는데 본문의 이 숫자는 인류 전체의 인종(人種)을 상징 한다고 본다(Hieron).
Ⓓ 사도들에 '낚인' 즉 '구원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본다(Barrett).
Ⓔ 단지 많은 수의 고기가 잡혔다는 것 그리고 153이라는 숫자는 다만 사실의 보도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본다(TYemple, Leski).
위에 열거한 학자들의 제 견해들은 참고 자료로 삼을 수 있을 뿐 그 이상의 확고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엄청나게 많은 물기가 잡혀 있었다는 사실이다(6절).
3]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이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셨다. 그러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이 표현은 적어도 그 정도의 물고기가 잡혔다면 당연히 그물이 찢어졌어야 마땅했음을 암시한다.
* 눅 5: 6 -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그러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면 그것 역시 이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다는 것에 대해 학자들은 분리될 수 없는 교회의 통일성(unity)을 말해준다고 보기도 한다. 교회는 많고도 다양한 사람들로 채워지지만 그 통일성이 보전되어 언제나 하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육의 것을 풍성하게 주시는 자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자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일을 합하여 좋은 방향으로 이끄실 것이 확실하므로 하나님의 종들과 백성들은 의식주의 문제를 염려치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의 뜻대로 살기만 힘쓴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전도자의 사명도 잘 감당할 수 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한 명도 구원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많은 영혼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요 21: 12 조반을 먹으라 -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
이미 제자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이처럼 하실 분은 예수님뿐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또한 그의 따뜻한 음성에 이미 그가 주님이신 사실을 알았고, 제자들은 그 아침의 현실이 꿈처럼 믿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사실이었으며 제자들은 밀려드는 감격에 차마 예수께 말을 건네지 못했을 것이다.
1]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조반'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리스테사테'(*)는 하루 중 첫 식사를 뜻하는데 후대에는 눅 11: 37에서처럼 '만찬'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 눅 11: 37 -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참고로 어떤 학자에 의하면 1세기의 유대인들은 보통 하루에 두 끼의 식사를 했다고 하는데(L. Morris), 본문의 '아리스톤'(*)이 바로 그 첫번째 식사로 대개는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기 전에 먹었지만 때로는 이른 점심으로 먹기도 했다고 한다.
다음에 먹는 두 번째 식사는 '데이프논'(*)으로 저녁 식사에 해당한다.
2]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식사를 위해 제자들이 와서 숯불 주위에 둘러앉았을 때 이미 제자들은 자기를 식사에 초대하신 이가 바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자기들에게 두 번이나 나타난 바 있던 주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153마리의 생선이 분명한 현실이듯 지금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려 하신 주님의 현존(現存)도 결코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 손으로 만져 느낄 수 있는 현실이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이제 더 이상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놀라움과 감격이 뒤섞여 감히 예수께 선뜻 말을 건네지 못한 듯이 보인다(Godet).
요 21: 13 예수께서 가셔서 -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
예수께서 왜 이와 같은 행동을 하셨는지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예수께서제자들을 위해 스스로 식사를 준비하시고 또 모자라는 부분을 공급하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기꺼이 봉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예수께서 가셔서
본 절에서 '예수께서 가셔서'라는 표현 가운데 '가셔서'의 의미가 무엇인지, 여분의 떡과 생선을 가져오셨다는 것인지 아니면 제자들이 머뭇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다가갔다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오셨다'는 의미가 특수한 어법인지 분명치 않다.
2]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아무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떡과 생선을 나누어 주셨다. 어떠한 축복의 말씀도 없고 함께 식사를 했다는 언급도 없다. 따라서 이 식사를 굳이 성만찬과 관련시켜야만 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혹자는 이 식탁에서 오병이어의 이적(6: 1-13)과 같은 형태의 이적이 또 있었으리라고 추측한다. 본절의 '생선'에 해당하는 말은 9절의 '와사리온'(*)과 동일하다는 점. 그리고 11절의 '큰 고기'(*, 잎뒤스)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는 것이다(Hendriksen).
예수께서 이적적인 방법으로 생선을 가져오라 명하신 목적이, 예수께서 준비한 생선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잡은 것을 더 가져오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는 가능성은 더 희박해진다.
요 21: 14 세 번째로 나타나신 것 -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
부활 후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요 20: 16), 두 번째 도마 외 제자들이 모였을 때(요 20: 19-23), 세 번째 도마를 포함하여 다른 제자들이 모였을 때(20: 26-29)와 그리고 네 번째 나타나심이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만은 세 번째가 된다.
1]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계속적으로 제자들과 함께하지 않으셨다. 잠시 출현하셨다가 헤어지셨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그가 다시 사심으로 큰 혼란에 빠져 공허한 상태가 계속되었을 것으로 사료 된다.
제자들 역시 스스로 혼란에 빠진 듯하다. 그러므로 스스로 수습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으리라고 본다.
2]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난 것을 계산에 넣지 않고 있다. (20: 15-17, 19-20, 26-29).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난 것을 계산에서 뺀 것은 그녀가 제자가(*, 메데테스)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Barrett).
그런데 요한이 언급하고 있는 세 번의 현현은 다른 신약성경들과 관련시켜 볼 때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아마 요한은 자신이 쓰고 있는 복음서에서의 순서만 고려하고 있는 듯하다.
3] 디베랴 바다에 나타나신 예수님 (21:1-14)
주님이 부활하신 후 여러 번 제자에게 나타났으나 제자들은 늘 고아와 같은 허전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이때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을 향하여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노라”라고 말하고는 그물을 가지고 디베랴 바다로 향했다.
베드로는 허탈한 마음에 옛날의 직업인 어부의 자리로 되돌아갈 심산이었다. 베드로의 말을 들은 다른 제자들 역시 “우리도 함께 가겠다”하고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1)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노라.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을 향하여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노라”라고 한 말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교훈해 주고 있다.
① 사명자가 사명을 상실하면 세상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면 누가 이 사명을 상실하는 것인가? 게으른 종이다.
* 잠 18: 9 - 자기의 일을 게을리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니라.
바울 사도는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으라고 말씀했다.
* 롬 12: 11 -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일이 무엇인가를 살펴 부지런히 그 일을 해야 하며, 무엇이나 맡은 일에 충실해야 한다.
② 지도자가 타락하면 양 무리가 함께 타락한다.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할 때 이 말을 들은 다른 제자들은 어떻게 행동했는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라고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다.
다른 사람을 주 앞으로 인도한 사람은 특히 신앙적인 바른 자세를 가지고 전도 받은 다른 사람에게 본을 보여야 한다. 다른 사람을 전도했으면 그를 바른 생명의 길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다.
전도함을 받은 사람은 언제나 신앙적인 표본을 전도한 사람의 기준에 두기 때문이다. 나는 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말한 베드로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와 함께 고기를 잡으러 가게되었다.
(2) 물고기를 잡으러 간 결과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러 가게 된 것은 그가 실의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을 잃어버렸다. 주님이 어데 계시는지? 그들의 마음은 공허했고 지난날에 가지고 있었던 소망이 사라져버렸다.
주님을 잃으면 소망도 상실해 버린다.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하는 생활,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그 방편은 주님을 우리 안에 모셔야 한다.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이 늘 성령 안에서 성령으로 충만한 생활이 아니면 주님을 잃어버린 생활, 실의에 빠지는 생활이 될 수밖에 없다.
① 물고기를 잡으러 간 시점이 밤이었다.
밤이란 인생이 맞는 어두움과 고난을 말한다. 이 밤을 맞이한 인생은 고통과 환난을 겪게 된다.
* 욥 22: 11 - 어둠이 너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고 홍수가 너를 덮느니라.
* 잠 4: 19 -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이 우리 심령에서 떠나시면, 우리는 인생의 밤을 맞게 된다.
* 요 8: 12 -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 요 12: 46 -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은 낮에 다니라고 말씀하시며 사람이 밤에 다니면 실족하게 된다고 하셨다.
* 창 1: 5 -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 요 11: 9-10 –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 창 19: 33-35 – 33 그 밤에 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큰 딸이 들어가서 그 아버지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그 아버지는 그 딸이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34 이튿날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어제 밤에는 내가 우리 아버지와 동침하였으니 오늘 밤에도 우리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네가 들어가 동침하고 우리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 하고 35 그 밤에도 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작은 딸이 일어나 아버지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아버지는 그 딸이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세상은 어둡지만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시기 때문에 이 빛을 따라 낮에 다니는 생애를 살아야 한다.
* 롬 13: 12 -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 살전 5: 2, 5 – 2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② 그들은 아무런 소득도 올리지 못했다.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고 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다
* 요 15: l5 -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주님을 떠난 생활은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 마 5: 13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3) 그들에게 주님이 찾아오셨다.
우리 주님은 그의 피로 값 주고 사신 백성들을 절대로 버리지 아니하신다. 이들이 비록 옛날 직업으로 되돌아갔지만, 주님은 다시 그들에게 나타나시어 소망을 주시며 용기를 주셨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물어보신 말씀은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너희가 나를 떠나서 무엇을 할 수 있었느냐는 뜻이다. 너희가 세상에 나아가 얻은 것이 무엇이냐는 의미다.
그들의 대답은 “없나이다”였다.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주님을 떠난 생활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주님은 그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라고 명하셨다.
제자들이 이 명령을 따랐더니 고기가 심히 많이 잡혔다고 했다. 축복은 순종에서 온다. 제자들은 이같은 실제적인 교훈을 통해서 순종에 따르는 축복을 다시 한번 체험하게 되었다.
결론 : 예수님은 밤새도록 고기잡이에 지친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권하셨다.
예수님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고 그들의 양식을 미리 준비하셨다. 여러분은 혹 밤중에 디베랴 바다로 물고기를 잡으러 나간 사람들은 아닙니까? 주님의 음성을 듣고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 새로운 순종의 생활에 들어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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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장 넉넉한 사람은~자기한테 주어진 몫에 대하여 불평 불만이 없는 사람이지요.
싱그러운 향기와 더불어 기분 좋은 미소가 바람과 함께 솔 솔 솔~~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행복한 하루 되시길 진심으로 기원 드립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