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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는 않는 시간 / 김종완
여름의 끝물이었을까, 가을의 초입이었을까, 아니면 가을의 절정이었을까. 오랜 병고에 시달리던 친구가 갔는데 그게 언제였는지를 잘 모르겠다.
그는 언젠가 불쑥 찾아와 엄지와 검지 사이의 근육이 쑥 들어가는 걸 보이며 말했다.
“루게릭이래. 사촌형님이 그쪽의 최고 전문가거든. 그 양반, 진찰하고는 암담한 표정을 짓더니 그러시데. 미안하다, 현대의학으론 해줄 게 아무것도 없다, 치료하겠다고 여기저기 쫓아다니지 마라. 허허! 이 병에 대해선 결연하시더만.”
할 말을 잃고 쳐다보는 나를 향해 싱긋 웃더니 남 말 하듯 정말 별 거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덧붙였다.
“그냥 견디다 죽으라는 말이지. 그냥 견뎌보는 수밖에 없지 뭐.”
그는 병원을 찾아다니지는 않았다. 다만 스승의 처방으로 식용황토를 얼마간 먹다가 그만두었고, 걸을 수 있는 동안은 일주일에 두세 번씩 한의사인 내 조카를 찾아가 침을 맞았다. 침을 맞으면 진전되는 속도가 조금은 완화돼 가는 것 같다고 했다. 난 그를 만나러 한의원으로 갔다. 그리고 그에게 가까운 시일 안에 내 자취방으로 초대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를 위해 밥을 짓고, 그를 위해 반찬을 장만하고, 그를 시중들면서 하룻밤을, 아니 몇 날을 함께 보내고 싶다고 하니까, 그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런 식사를 할 수 없고, 자다가 호흡 곤란이 시시때때로 찾아오는데 그때 자기만의 처치방법이 있어 외박은 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나의 게으름과 무심함을 진즉부터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난 그런 주제임에도 참으로 인덕이 많다. 성장하는 과정에서도,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는 과정에서도 항상 내 옆엔 또 하나의 나인 친구가 있었다. 중1 때 고향 친구 용규가 있었고, 중3부터 청소년기를 온전히 함께해준 종영이를 만났다. 이십 대 초반, 쏟아지는 내 말을 온전히 들어준 후배 영수가 있었고, 서른여섯에 다시 들어간 대학을 온전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소영이가 있었던 덕분이다. 담양 생활을 지켜준 일권이가 있고, 생활의 굴레에서 허덕이는 나를 구해내서 문학판에 세운 정경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함께하는 많은 문학 동지들이 있으니 못난 터수로는 과분한 복이다.
그가 내 곁에 있었던 것은 특별한 점지였던 것 같다. 군대 시절, 나보다 두어 달 늦게 입대한 그가 우리 소대에 배치되었고 함께 졸병생활을 시작한 우리는 제대할 때까지 딱 붙어 있었다. 내 친구들 대부분이 내가 첫눈에 반한 사람들인데, 그 또한 그랬다. 난 군대 가기 전 문학을 포기하고 종교운동에 빠져 있었다. 중2 때 강연을 듣고 스승으로 모시던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이 교주가 되어 벌인 새로운 교회운동이었다. 청소년기와 청년기의 그 활동은 나의 인생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정신적으로 많은 성장을 했고, 결국 그 성장 덕분에 내 스스로 그곳에서 나올 수 있었지만, 빠져나왔을 땐 이미 많은 것을 잃은 다음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어린 나이에 나의 전부를 걸고 따를 만한 스승을 만날 수 있었던 것 만큼은 큰 축복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를 처음 만났던 당시만 해도 나는 스승의 교리에 깊이 빠져 있었고 쏟아지는 말을 주체하지 못할 때였다. 나는 내 나름으로 해석한 스승의 교리를 그에게 전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곧바로 의기투합하여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새로운 메시아 운동에 생을 바칠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우리가 제대하고 종단에 들어갔을 때, 종단은 심한 내분 상태에 빠져 있었다. 스승은 자기의 교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걸 바라면서도, 한편으론 도둑맞을 것을 두려워해서 제자들에게 교리 강의는 하되 설교는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제자들에 의해서 임의로 해석되는 걸 엄격하게 금지시켰다. 내로라하는 이론가들이 뭉친 개혁파 쪽에선 틀에 박힌 내용을 반복하는 것으론 교회의 발전을 꾀할 수 없다고 반박했고, 또 한쪽에선 스승의 말씀에는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파가 있었다. 양쪽이 첨예하게 대립하자 스승은 순종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개혁을 주장했던 많은 인물들은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와 나도 빠져나왔다.
그때 별난 정보를 얻었다. 랙스라는 신품종 토끼가 나왔다는데, 털이 밍크 뺨치게 좋아서 모피용으로 고수익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하늘이 우리와 함께하면서 이 국면을 돌파하라고 내려보낸 대책이라고 믿어버렸다. 서양 속담에 닭 숫자 세기라는 말이 있다. 암탉 한 마리가 달걀을 낳고, 그게 부화하면 병아리 몇마리가 되고, 그것이 자라서…. 우리에게 토끼는 정말 그랬다. 종단의 이 모든 문제가 결국은 경제적 자립이 되지 못한 데서 생긴거니까. 토끼를 키워서 돈을 벌면 그 돈으로 종단을 개혁하자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차마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의 뜻이 숭고할진대 가호하는 손길이 있어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릴 것이라는 믿음으로 확고했다.
처음에 담양 금성의 옛 우사에 터를 잡았다가 일 년 후 호남의 랙스토끼 분양의 중심이 되려면 광주 부근이 유리할 것 같아 광주 비야로 옮겼다. 그런데 이 신종 토끼는 유별나게 병이 잦았다. 게다가 수의사도 못 고치는 병이 대부분이었다. 선진 사육농가들을 찾아다니며 사육기술을 습득해야만 했다. 전국을 돌았다. 대한민국에서 토끼를 가지고 사업적으로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거의 만났을 것이다. 별사람들이 다 있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게, 랙스토끼라는 게 이삼십 년 주기로 부는 토끼 분양 사기극 중 하나라는 사실이었다. 사육기술을 습득해서 이제 비상하려는 단계에서 암초에 부닥치고 만 것이다. 우리는 막 분양하기 시작한 토끼마저 회수해버렸다. 원대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농장을 접어야 했다. 그와는 그때 헤어졌을 것이다.
그와 한솥밥을 먹으며 지낸 세월이 족히 7~8년은 된다. 군대 3년을 온전히 같이 지냈고, 제대 후 공부를 한다고 광주의 독서실에서 6개월 여를 보냈고, 다음 해 한신대 입학 후 같이 과외교실을 열면서 1년여를 보냈고, 그리고 토끼농장에서 2년여를 보냈으니까. 우린 최고의 콤비였다. 우리가 뭉치면 세상 무서울 게 없었다. 내가 가진 걸 그는 갖지 못했고, 그가 가진 걸 나는 갖지 못했다. 그는 맥가이버였다. 내가 말로 그리면 그는 어떤 것도 만들어 내 눈앞에 내보였다. 내가 보기에 그는 정말 천재였다. 우리의 얼굴은 생판 다르게 생겼는데도 사람들은 닮아 보인다고 했고, 동성애 하느냐고 놀리기도 했다. 사실 둘 사이에 성애만 없을 뿐 동성애자들이라 해도 우리만큼 하나가 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우린 생각하는 것도, 느끼는 것도 정말 하나였다. 더는 친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지 않은 완벽한 하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난 그가 토끼농장을 떠난 모든 상황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농장의 실패로 그를 떠나보내야 했겠지만 그건 나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우린 그 이후 거의 만나지 못했다. 처음엔 다른 사람을 통해 소식 정도는 전해 듣다가 언제부터 그마저 뚝 끊겼다.
나는 빈손이었다. 너무나 억울했지만 돌파구는 어디에도 없었다. 사육기술의 진보로 사업성이 확보된 앙고라토끼를 사육하면 될 것 같았다. 광주 비야의 농장을 처분하고 담양 집으로 들어갔다. 텃밭에 비닐하우스를 치고 새로 분양받아온 앙골라 토끼 몇마리를 키우다가 새끼를 낳기 시작할 때, 가까운 외곽으로 나가 공터를 빌려서 토끼를 사육할 막사를 짓고, 파이프를 이용해서 거주할 집을 혼자서 직접 지었다. 산판하는 곳에서 화목으로 쓸 재목들을 거저 얻다시피 구해서 그걸 잇대어 기둥을 세우면서 통렬히 나의 청춘을 참회했다. 그간 내가 살아온 삶이 얼마나 관념적이고, 허황된 것이고, 건방진 것이었고, 얼마나 귀중한 시간과 가능성을 잃어버린 것인지. 그래서 내가 얼마나 가난한지를 뼈에 사무치도록 외고 또 외면서 종교와는 완전히 결별했다.
그는 결혼할 때마저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난 그가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성공해서 꼭 그 보상을 해주고 싶었다. 5년여 동안을 계속해서 토끼를 키웠다. 토끼사육은 거의 수익을 내지 못하는 사업이었다. 그럼에도 토끼는 새끼를 쳐서 수가 제법 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는 꼼짝없이 토끼장에 매달려야 했고 저녁부터 밤늦게까지 중고생 과외지도를 해서 그 돈으로 토끼의 사료값을 댔다. 진즉 그 일을 접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한 것은 순전히 오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그 어떤 것도 끝까지 마무리해서 끝낸 것이 없었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혔던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실패증후군 같은 것이었다. 한번 실패한 사람은 그다음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 죽음만큼이나 괴롭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나는 다짐했다. 지금까지는 모든 걸 미친 것처럼 열중했다가 정상 바로 밑에서 이게 아니야, 라고 내팽개치고 말았지만 이젠 그 어떤 것도 팽개치지 않을 테다. 기어오르고 기어올랐으면 그 높이가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겠다. 최소한 천 마리 규모의 농장을 만들지 못하고 접게 되면 앞으로 어떤 일도 완성 지을 수 없을 것 같은 조바심이 날 놓아주지 않았다. 이제 수익은 문제가 되지 않았고 번듯한 규모를 만들어보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세상살이는 엄혹했다. 낮에는 토끼장에서 일하고 밤이면 늦게까지 아이들을 가르치고, 녹초가 되는 삶을 되풀이하면서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참회하고 참회했다. 내가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어떻게 낭비했는가를 돌아보며 뼈저리게 후회했다. 관념적인 삶이 얼마나 허망하며 그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가를 뼈에 사무치도록 반성하고 반성했다. 나는 완벽한 실패자였다. 그럼에도 나의 참회가 철저하게 끝나기 전까지는 실패의 흔적을 버리지 않겠다는 오기로 되지도 않는 토끼장을 고집스럽게 유지하다가 88년, 지긋지긋한 토끼사육을 정리하고 비로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생활이 웬만큼 안정되자, 그가 너무나 보고 싶어서 아내를 앞세우고 그를 찾아갔다. 그는 수원에서 큰 물류회사의 슈퍼를 하나 맡아서 경영하고 있었다. 그 회사의 전산요원으로 들어갔다가 사장과 돈독한 관계가 되어 사장의 파격적인 대우로 슈퍼를 맡게 되었다고 했다. 난 내가 실패자였다는 게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사랑한다면 실패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실패는 동지에게 상처만 줄뿐이다. 동지를 계속 사랑하려거든 성공해야만 한다. 우린 무심했다. 수시로 생각하면서도 오랫동안 소식도 없이 잘 산다. 만나지 않아도 잘 살겠지 하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후 그는 유능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몇 개의 회사를 옮겼고, 모 중견기업 전산부의 책임자로 있다가 그 회사가 대기업에 인수합병되는 과정에서 퇴임했다.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2008년 겨울, 그가 퇴임한 후였다. 그는 결혼 후 언제부턴가 다시 그 종단에 나가기 시작해서 어머니를 위시한 온 가족을 전도했고, 수원 교회의 실질적인 운영자였다. 그러나 종단은 그를 강단에 세우지 않았다. 종단 내 유일한 개혁론자인 그의 진보적 교리 해석을 경계한 탓이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종단 내 자기의 사명은 그때 함께했던 인물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터전을 지키는 것뿐이라고 했다. 신앙을 순전히 자기 식으로 지키고 있었는데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인물이 바로 나라는 것은 꽤나 답답한 노릇이었다. 얼마 뒤부터 내 수업에 들어온 그가 수필 몇 편을 썼을 때 나는 다소 흥분했다. 그가 등단하면 우린 종교가 아닌 수필 문우로 함께 가게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부풀었다. 하지만 9개월 뒤에 그는 새 직장을 구했고 직장 여건 상 수필수업은 당분간 쉬어야겠다고 하더니, 일 년 남짓 지나 병든 몸으로 찾아온 거였다. 그 후로 네댓 번 더 우리집에 왔었을까. 병이 빠른 속도로 악화되어 집에 자리보전하고 누워버렸다. 나는 몇 번인가 그를 찾아갔다. 갈 때마다 내 한계에 스스로 절망했다. 그에게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나는 그와 헤어진 이십 대 이후 이미 발전이 멈춰버렸고 거의 말까지 잃었는데, 누가 말을 걸어오면 단답형의 대답뿐 내 쪽에서 말을 거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이제 나는 그에게 말을 해야 했다. 육체는 무너지고 정신만 초롱초롱해서 누워 있는 그에게 무슨 말인가를 건네야 했다. 왜냐하면 그가 다시 그 종단에 들어간 이후 아직까지도 날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왜 포기하지 않았을까? 왜 포기할 수 없었을까? 난 그 이유를 안다. 무섭고도 무서운 일이다. 난 그가 지키는 믿음의 잔혹성에 대해서 말하지 못했다. 차라리 그가 쓴 그의 드라마 속에서의 내 배역을 나름 소화해내려고 어느 날 작정하고 미련을 떨었다.
“누구나 다 가는 길이잖아. 다만 서둘러 가는 거지 뭐. 뱃속의 아이가 산도를 뚫고 나올 때는 자기가 죽는 줄 알았을 거야. 그러나 그게 탄생, 새 삶의 시작 아닌가. 죽음도 비슷하지 않을까. 살다가 죽으려니 죽을 것 같아도 막상 죽어보면 죽을 만할 것이야. 저 쪽도 새로운 뭐가 있겠지. 견딜만한 뭐가 없겠어?”
그는 다만 찾아오는 고통이 힘들 뿐 죽음은 두렵지 않다고, 이 고통도 과정이니 괜찮다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 함께 살아온 삶에 만족한다고 했다. 나는 또 떠들어댔다.
“괴테는 80이 넘은 어느 날, 석양을 보면서 이 세상에서 내 할 일을 다 했으므로 어서 저세상으로 가서 새로운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네. 이십대에 우리가 함께 꾸었던 꿈, 나 아직 포기하지 않았어. 변형되었지만 결국엔 토씨 하나까지도 다 이룰 생각이야.”
목이 메도록 슬프고 슬펐다.
한동안 그에게 가지 못했는데 며칠째 꿈자리가 이상했다. 그가 날 찾는다는 걸 직감하고 전화를 걸었더니 그의 부인이 받았다. 그가 호흡장애를 일으켜 중환자실에 있다는 것이었다. 중환자실의 그를 만나러 갔다. 사람이란 게 살과 근육을 빼고 나면 참으로 왜소한 거였다. 눈빛만은 여전히 형형한 그가 뭐라고 웅얼대면서 발가락을 까닥거렸다. 부인만 알아먹는 발음과 발가락 필서로 간단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난 안도하며 그에게 차라리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을 하고 말았다.
“많은 선사들이 도를 닦다가 육체가 장벽이 되어 주저앉았던 고비들을 수없이 겪었더라구. 어쩌면 이 상태가 많은 선사들이 육체로부터 벗어나 정신만을 붙잡고 매진하길 그렇게 바랐던 그런 상태일지도 모르잖아. 그렇다면 이게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기회 아닐까?"
이후 내가 그를 통해 여실히 확인하게 된 것은 육체에 갇힌 정신이란 육체가 받혀주지 않는 한, 발전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두뇌 활동 또한 육체의 활동이었다.
그가 요양병원으로 옮겼다는 말을 듣고 한참이 지나서야 찾아갔다. 백 평이 넘을 것 같은 큰 병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누워있었지만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다. 환자들 대부분은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나는 병실 안쪽 깊숙한 곳에 앉아 있는 그의 부인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침대에 부려진 그의 육신은 완전히 육탈이 되어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상태였지만, 그는 또렷한 의식으로 눈을 뜨고 있었다. 많이 지친 표정이었지만 설핏 미소까지 지어보였다. 나는 그의 손을 부여잡고 위로랍시고 무슨 말인가를 했고, 그는 무어라 말을 하며 울음도 아닌 울음을 게워냈다. 부인의 통역에 의하면, 이렇게라도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었다. 나는 누워 울고 있는 그를 안았고, 생명(生命)이란 게 살아[生]라는 명령[命]이라면 힘들더라도 마지막 숨까지 살아주는 게 도리일 거라고 말했다.
그즈음 나는 자다가 다리에 경직이 일어나 비명을 지르며 뒹구는 일이 잦았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릴 정도로 끔찍한 통증에 놀라 정신없이 주무르다 보면 경직이 풀렸다. 내가 주물러서 풀린 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안 주물러도 그 몇 초의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풀렸을지 모를 일이다. 통증이 사라지면 일어나 앉았다. 루게릭 환자인 그가 겪는다는 경직이 나에게 찾아온 것이라는 기이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는 양손이 멀쩡하니 주무르기라도 하지, 움직임을 잃어버린 그는 수시로 찾아드는 그 끔찍스런 고통을 근육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뼈 마디마디로 온전히 겪어야만 한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고는 충격에 휩싸였다. 게다가 정신은 말짱해서 그 말짱한 정신으로 살점들이 뜯겨져 나가는 고통을, 처참하게 파괴되는 육체를, 고스란히 목격해야만 하는 것은 더 끔찍한 고통일 것이다. 루게릭은 참으로 잔인한 병이었다.
오랫동안 그를 찾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 며칠간이나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그가 나를 부른다는 걸 알면서도 안 가고 버텼다. 견디고 견디다가 못 견뎌 찾아갔을 때 그는 자고 있었다. 살점이 다 떨어져 나가버린 살아있는 미라. 관자며 광대, 위턱과 아래턱의 뼈마디가 가파르게 드러난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손등으로 불거진 앙상한 뼈들을 더듬었다. 그의 부인은 목이 잠겨 말소리가 이상했다. 사오일 전 의사가 준비하라고 해서 각오하고 있었는데 이젠 위험한 고비를 넘긴 것 같다고 했다. 고비를 넘겼다는 그 말이 왜 그렇게도 공허하고 기막히던지, 나는 눈만 끔뻑거리며 멀대 같이 서 있었다. 그가 눈을 뜬 것은 한참 뒤였다. 무거운 침묵에 눌린 내가 갑자기 기침이 터져 나와 고개를 외로 꼬며 쩔쩔매는데 그의 부인이 말했다.
“여보, 김 선생님이 오셨어요.”
나는 터져 나오려는 기침을 참느라 목을 움켜쥔 채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그의 눈동자가 나를 향하고 있는 것을 목도했다. 그러나 우리의 눈빛은 마주치지 못했다. 그의 눈빛은 이미 기름 떨어진 등잔불처럼 희미해져 있었고 이내 초점을 잃고 꺼지듯 감겼다. 눈을 감고 잔뜩 찡그린 그가 단말마적으로 괴상한 비명을 질러댔다. 부인이 얼른 그의 상의를 젖히더니 손가락을 세워 그의 몸을 마구 긁었다. 나는 차마 손가락을 세울 수 없어 손바닥으로 팔과 가슴께를 문질렀다. 그는 다시 조용해졌고 나는 병실을 나왔다. 그날 그의 병실에서 내가 한 말이란 부인에게 ‘고생이 많으십니다’라는 작별인사 한마디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았을 때 갑자기 말문이 터졌다.
“그만 벗어나시게. 어서 그 몸 벗어버리시게, 제발 떠나시게.”
내 목소리가 그렇게 낯설 수가 없었다. 그 낯섦이 하도 이상해서 그 말을 또 하고 또 하고 미친 듯 혼자 중얼거리면서 낮은 폭의 진동으로 좁은 화장실 안을 떠도는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부음이 들려온 것은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뒤였다. 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의 빈소에 앉았다. 내가 숨을 쉬는 한, 나는 그를 가슴속에 간직했다가 언제든지 보고 싶으면 불러낼 수 있을테니까 절대로 슬퍼하지 말자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냥 굳건히 굳세게 앉아만 있었다. 이별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가 언제 갔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깜깜하다. 얼마 되진 않았는데, 그때가 여름이었는지 가을이었는지, 날은 맑았는지, 비가 왔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요즘 부쩍 그를 떠올리면 두려운 생각이 든다. 내가 죽더라도 그를 만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저승에 갔는데 내가 간 그곳에 만약 그가 없다면, 그를 찾을 수가 없다면, 그때 그 슬픔을 어찌할까! 어쩌면 어머니 뱃속이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어머니 뱃속에 들기 이전은 아예 없었던 듯 깜깜한 것처럼, 저쪽으로 가면 이쪽에서의 기억은 완전히 삭제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를 만난다 해도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더 슬픈 일이다.
그는 나쁜 사람이다. 살아서 함께 이룰 수 없는 꿈이라면 죽어가면서는 그게 한낱 일장춘몽이었다고 그 꿈을 깨고 갔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그 꿈을 그대로 간직한 채 가버렸다. 그는 살아서도 내 애간장을 녹인 이기주의자였는데, 죽어 떠나면서도 순전히 자기 존재 의미를 위해서 나에게 그 꿈을 증명해 보이라는 짐을 떠넘기고 갔다. 네가 없는데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