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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의 소주
“술 속의 영특한 기운만 있으면, 어디에 기대지 않아도 되네, 가을 이슬처럼 둥글게 맺혀 밤이 되면 똑똑 떨어지네. 청주의 늙으신 종사(靑州老從事, ‘오래된 좋은 술’을 뜻함)1)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니, 마치 하늘의 별과 같이 뽐내게 만드네. 도연명이 이 술 맛보면 깊이 고개 숙일 터, 굴원이 맛을 보면 홀로 깨어 있으려 할지. 반 잔 술 겨우 넘기자마자 훈기가 뼛속까지 퍼지니, 표범 가죽 보료 위에 앉아 금으로 만든 병풍에 기댄 기분이네.”2)
이 글은 고려 말과 조선 초의 격변기를 살았던 이색(李穡, 1328~1396)의 《목은시고(牧隱詩稿)》에 나온다. 역사학자 이익주의 연구에 따르면 이 한시는 이색이 55세였던 1382년(우왕 8)에 쓴 것이다. 시의 제목은 〈서린(西隣)의 조 판사(趙判事)가 아랄길(阿剌吉)을 가지고 왔다. 그 이름을 ‘천길(天吉)’이라고 했다〉이다. 서린은 고려의 수도 개성의 태평관(太平館) 서쪽에 있던 양온동(良醞洞)을 가리킨다. 조판사는 고려 말의 문신이었던 조운흘(趙云仡, 1332~1404)이다.
주당이라면 빈속에 술 한 잔을 ‘원샷’ 했을 때의 그 느낌, 즉 알코올이 식도를 타고 쫄쫄 내려가서 위장에까지 이르는 그 느낌을 기억할 것이다. 이색은 그 기분을 ‘뼛속’까지 퍼진다고 했다. 더욱이 술맛을 아는 사람(도연명)과 술 취하기를 거부한 사람(굴원)조차 반할 정도라고 읊조렸다. 그렇다면 굴원(屈原, BC 343?~BC 278?)과 도연명(陶淵明, 365~427)이 살았던 시대에는 이 술이 없었다는 말인가? 도대체 이 술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색의 표현으로 미루어 보아 이 술은 증류식 소주가 틀림없어 보인다.
증류식 소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잘 익은 막걸리가 있어야 한다. 막걸리가 담긴 술항아리에 싸리나 대오리로 만든 둥글고 긴 용수를 박는다. 그러면 용수의 위쪽에 맑은 술인 청주(淸酒)가 떠오른다. 이것을 조심스럽게 떠내서 밑술로 삼는다.
이 밑술을 증류하려면 소줏고리가 필요하다. 소줏고리의 형태는 대부분 눈사람 모양처럼 가운데가 잘록하다. 이 잘록한 부분에 주둥이가 달려 있다. 소줏고리를 청주가 담긴 솥 위에 올려놓고 중간 정도로 불을 때서 가열하면 청주가 곧 수증기로 변하게 된다. 소줏고리 윗부분에 미리 올려놓은 자배기에 차가운 물을 채워 넣으면 온도 차로 인해 소줏고리 윗부분에 닿은 수증기가 액화된다. 주둥이를 타고 똑똑 떨어져 내리는 액체가 바로 증류식 소주이다.
한반도의 소줏고리는 20세기 초반만 해도 지역마다 그 형태가 약간씩 달랐다. 요사이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소줏고리는 한반도 남부에서 가장 널리 사용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대체로 옹기로 만든 소줏고리를 많이 사용했는데, 서울의 부잣집에서는 값비싼 놋소줏고리를 사용하기도 했다. 또, 함경북도 사람들은 소줏고리를 ‘는지’라고 불렀다. ‘는지’는 간장 항아리처럼 생겼는데, 주둥이가 달려 있지 않아서 증류하기 전에 따로 청주가 담긴 솥 위에 발을 치고 증류액을 모을 단지를 올려놓아야 한다. 또 찬물을 담아 뚜껑처럼 올려놓는 자배기의 모양도 끝이 뾰족한 역삼각형이다. ‘는지’ 안의 수증기가 냉각되면 증류액이 자배기의 경사면을 따라 뾰족한 부분에 모여 단지로 똑똑 떨어져 내린다.
《조선주조사》에 소개된 조선식 고리. 왼쪽부터 첫 번째는 ‘는지’라고 불리는 함경북도식 고리이다. 옹기로 만든 몸체와 뚜껑으로 이루어졌다. 두 번째는 제일 많이 사용되었던 옹기로 만든 고리이다. 세 번째는 서울에서 많이 사용한 동으로 만든 고리이다.〈출처: ⓒ주영하〉
이색이 살던 당시에 사용된 증류기 역시 이 세 가지 중 하나였을 것이다. 다만, 주둥이가 달린 소줏고리였을 것 같다. 실제로 오늘날의 백주(白酒, 중국, 고량주)·고구마소주(일본)·아르히(몽골)·보드카(러시아)·브랜디(프랑스)·위스키(스코틀랜드)·테킬라(멕시코) 등의 증류주는 증류과정에 기계가 도입되기 전에는 이런 형태의 증류기로 제조되었다. 다만, 나무·자기·구리 등 지역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증류기를 만들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색이 지칭했던 술 이름 ‘아랄길’은 본디 땀을 뜻하는 아랍어 ‘아라크(arrack)’의 한자 표기이다. 무더운 날씨에 자신도 모르게 땀구멍으로 땀이 솟아오르듯이 증류기에서 술이 방울처럼 맺힌다고 하여 증류주를 ‘아라크’라고 불렀다. 영국의 중국과학사학자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 1900~1995)은 고대 중국의 증류기술(distillation)이 아랍의 연금술(alchemy)에서 유래되었다고 보았다. 3) 즉, 비금속 재료를 가지고 귀금속을 만드는 연금술에서 사용되던 기구들 가운데 관이 달린 기구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소주를 내리는 증류기의 원형이라는 것이다. 학교 실험실의 ‘유리 증류기’를 떠올려보라.
몽골의 민속화가 샤라브(Baldugiin Sharav, 1869~1939)가 그린 〈몽골의 하루(provenance not verified)〉(1912~1913년경 제작)에 묘사된 증류주 제조법.〈출처: 몽골국립자나바자르기념미술관〉
니덤은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이 아랍의 연금술용 증류기를 유라시아에 전파시켰고, 증류주도 그때 생겨났다고 보았다. 그래서 몽골·중앙아시아 · 시베리아에 살았던 사람들은 말의 젖으로 만든 술인 쿠미스(kumys)나 아이락(airag)을 증류하여 ‘아르히(arkhi)’라는 증류주를 만들었고, 이 증류기술이 유라시아 대륙에 퍼져나가서 황주와 청주에서 소주4), 와인에서 브랜디, 맥주에서 위스키가 증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다른 주장도 있다. 미국의 언어학자 댄 주래프스키(Dan Jurafsky)는 무슬림과 중국인의 만남에서 그 연원을 찾는다. 5) 즉, 13세기 중반 지금의 인도네시아 자와섬 동쪽에 있던 마자파힛(Madjapahit) 왕국에는 아랍과 중국 남방에서 온 상인들이 몰려 살았다. 중국인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즐겨 마시던 황주를 가지고 왔는데, 더운 기후 탓에 못 마실 정도로 쉬어버렸다. 이때 무슬림들이 아랍의 증류법을 알려주어 ‘소주’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원나라 때 목판으로 인쇄한 《거가필용사류전집(居家必用事類全集)》에는 “번(番)에서는 아리걸(阿里乞)이라고 부른다”는 ‘남번소주법(南番燒酒法)’이 적혀 있다. 여기에서 ‘번’은 동남아시아를 가리킨다. ‘아리걸’은 ‘아랄길’의 다른 한자 표기다.
그런데 이색은 시의 제목에서 조운흘이 아랄길을 ‘천길’이라 불렀다고 하면서 한자로 ‘天吉’이라 적었다. 이색은 아랄길을 마시면 “마치 하늘의 별과 같이 뽐내게 만드네”라고 했다. 이로 미루어 천길은 바로 소주를 마시고 느낀 이 기분을 두고 조운흘이 붙인 아랄길의 별명이 아닐까?
이색은 고려 말 원나라 간섭기에 명문가 한산 이씨의 자제로 태어나, 요사이 미국의 아이비리그(Ivy League) 격인 원나라 국자감에 입학한 최초의 고려인이다. 이색은 1348년(충목왕 4) 3월 21세의 나이로 원나라의 수도 대도에 가서 국자감에 입학했다. 당시 원나라 조정에서 국자감과 관련된 관직에 있던 아버지 이곡(李穀, 1298~1351) 덕분이었다. 이색은 1356년 1월에 완전히 귀국하기 전까지 여섯 차례나 대도와 개경을 왔다 갔다 했다. 그는 유학생과 관리로서 원나라 문화를 몸으로 체험했던 몇 안 되는 고려 말 지식인 중 한 사람이었다.
이색이 살던 당시 고려 사회는 대단한 격변기였다. 원나라의 힘이 약해지자 고려는 반원정책을 펼치면서 동시에 개혁을 시도하고 있었다. 또 불교에서 유교로 문화적 주도권이 넘어가는 ‘유-불 교체’의 사상적 과도기였다. 6) 여기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가 된 신흥유신(新興儒臣)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쥐게 된 시기였다. 7) 이색은 신흥유신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이들 신흥유신 사이에 개혁정치에 대한 입장이 갈리면서 이색의 제자였던 정몽주(鄭夢周, 1337~1392)와 정도전(鄭道傳, 1342~13987)이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결국 1392년 음력 4월 4일 정몽주가 죽임을 당하고, 이색 또한 연좌되어 유배를 갔다.
이색이 남긴 수천 편의 시와 문은 1404년(태종 4)에 《목은시고》와 《목은문고》로 편집되어 《목은집》으로 간행되었다. 이성계가 친구로 여겼고 정도전마저도 유종(儒宗)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인지 몰라도 《목은집》은 이색 사망 이후 8년 뒤에 바로 간행되었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여러 판본이 사라지자 이색의 10대손이 1626년 8월에 다시 목판본으로 찍어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시집 《목은시고》는 이때 중간된 《목은집》에 담겨 있는 것이다. 8)
《목은시고》에는 증류식 소주는 물론이고 차·두부·팥죽·차기장밥·침채장(장김치)·밤·홍시·수박 등을 두고 읊조린 100여 편의 ‘미식시(美食詩)’가 담겨 있다. 《목은시고》를 가지고 이색의 삶과 생각을 연구한 역사학자 이익주는 한시를 통해서 개인의 ‘생각’을 읽어냈다. 9) 나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태려 한다. 즉, ‘아랄길’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목은시고》에는 그 시대 사람들이 즐겼던 음식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들어 있다.
바로 〈서과(西瓜)를 먹다. 승제(承制)가 얻어온 것이다〉라는 제목의 한시가 그렇다.
“6월이라 여름이 이제 끝나가려 하니, 어느새 서과를 맛볼 수 있겠네. 아들이 근교를 유람하고, 늙은 아비는 집에 있었더니, (아들이 얻어 왔네)10) 하얀 속살은 얼음처럼 시원하고, 푸른 껍질은 빛나는 옥 같구려, 달고 시원한 물이 폐에 스며드니, 신세가 절로 맑고도 서늘하구나.”11)
‘서과’는 오늘날의 수박이다. 12) 그 원산지는 아프리카다. 명나라 때의 서광계(徐光啟, 1562~1633)는 《농정전서(農政全書)》에서 ‘서과’라는 이름의 유래를 두고 “서역에서 품종이 나왔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13)라고 했다. 이 책의 주석에는 당나라 이후인 오대(五代) 때 서역의 회흘(回紇), 즉 지금의 위구르인들이 살던 중앙아시아에서 전해졌다고 적혀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수박은 10세기경 중국의 서북부에서 내륙으로 퍼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런데 허균(許筠, 1569~1618)은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 “고려 때 홍다구(洪茶丘, 1244~1291)가 처음 개성에다 심었다”14)라고 적었다. 홍다구는 본래 고려 사람인데, 원나라에 귀화하여 장수가 된 인물이다. 허균의 주장을 오롯이 신뢰한다면, 중국 대륙에 퍼지기 시작한 지 200년이 지나서야 수박이 비로소 한반도에 들어온 셈이다. 그러나 《고려사》에는 홍다구의 수박 전래 관련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홍다구보다 80여 년 뒤에 살았던 이색을 비롯해 당대인들이 남긴 수박과 관련된 기록들을 보면 허균의 주장이 그른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색의 제자 권근(權近, 1352~1409)은 “형체는 둥글어 모남을 드러내지 않네, 땅 위에 뻗은 덩굴 개미인들 용납하랴, 쟁반에 베어 놓으매 파리 또한 오지 않네”15)라고 읊조렸다.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이 그린 〈초충도병(草蟲圖屛)〉 가운데 ‘수박과 들쥐’. 고려 말에 들어온 수박은 당시만 하더라도 일부 계층에 한해 그 맛을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귀한 과일이었다.〈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권근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허기(許耆)는 어렵게 약을 보내준 이직(李稷, 1362~1431)에게 수박을 선물하면서 “운 좋게 커다란 수박을 얻었”16)다고 했다. 그러자 이직은 “수박이 큰 독만 한데, 안부 묻고 선물 보내니 은혜가 남다르네”17)라고 답시를 지었다. 이색 역시 수박을 선물 받고서 “이런 문안 받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18)라고 감동한 적이 있다. 이렇듯 이색은 당시에 한참 유행하고 있던 수박에 대한 기록을 놓치지 않았다.
아홉 편에 이르는 팥죽에 관한 한시 역시 당시의 풍속을 잘 전해준다. 1379년 11월 동지에 지은 〈팥죽〉이란 한시에서는 “우리나라 풍속에 동짓날 팥죽을 진하게 쑤어, 비취색 사발〔청자〕에 가득 담으면 그 색이 하늘로 날아오르네. 낭떠러지에서 구한 꿀을 여기에 타서 목구멍으로 적셔 내리면, 사악한 기운을 모두 씻고 뱃속까지 적시네”19)라고 했다. 동지에 세시음식으로 팥죽을 먹는 풍속은 적어도 이색이 살던 시기에 이미 자리를 잡았던 모양이다.
이색은 두부에 관한 한시도 다섯 편을 남겼다. 그중에서 압권은 그의 나이 55세였던 1382년 10월에 쓴 〈대사가 두부를 구해 와서 대접하다〉이다. “오랫동안 맛없는 채소국만 먹다 보니, 두부가 마치 금방 썰어낸 비계 같네, 성긴 이로 먹기에는 두부가 그저 그만, 늙은 몸을 참으로 보양할 수 있겠도다, 오월(吳越)의 객은 농어와 순채를 생각하고, 오랑캐 사람들의 머릿속엔 양락(羊酪)인데, 이 땅에선 이것을 귀하게 여기나니, 하늘이 백성을 잘 먹인다 하리로다”20)
이 시에서 ‘오월의 객’은 바로 서진(西晉)의 장한(張翰, ?~359?)을 가리킨다. 어쩔 수 없이 관리를 하다가 가을이 되자 고향 쟝쑤성(江蘇省) 쑤저우(蘇州)의 맛있는 순챗국과 농어회를 먹겠다는 핑계를 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양락은 양젖으로 만든 요구르트와 치즈로 북방 유목민족의 대표 음식이다.
이에 비해 고려 사람들은 두부를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꼽는다고 했다. 그만큼 이색 당대에 두부가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21) 〈새벽에 한 수를 읊다〉에서는 아예 두붓국 요리법을 한시로 적어두었다. “기름에 두부 튀겨 잘게 썰어서 국을 끓이고, 여기에 다시 파를 넣어서 향기를 보태네, 잘된 멥쌀밥은 기름이 자르르 흐르고, 깨끗이 닦은 그릇들은 눈에 환히 빛나누나”22)라고 하여 고소하고 시원한 두붓국과 기름이 잘잘 흐르는 멥쌀밥이 놓인 밥상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원나라는 몽골제국 중 중국 대륙을 통치했던 왕조였다. 23) 몽골제국은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을 통치했기 때문에 중국의 문화가 유라시아의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기도 했고, 유라시아의 다양한 문화가 원나라에까지 유입되기도 했다. 특히 원나라의 수도 대도에는 몽골제국의 온갖 음식문화가 집중되었다. 대도 유학생 출신 이색의 미식시에 나오는 아랄길·수박·두부는 바로 몽골제국 내부에서 진행된 ‘남과 북’, 혹은 ‘서와 동’ 사이의 문화교류가 만들어낸 결과물인 셈이다. 그리고 그 영향이 한반도에까지 미쳤음을 이색은 미식시를 통해서 알려준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색의 시에서 ‘청주의 늙으신 종사’라는 표현은 ‘좋은 술’을 의미하는 ‘청주종사(靑州從事)’에서 유래된 것이다. ‘청주종사’라는 말은 남북조 시대 남송(南宋)의 유의경(劉義慶, 403~444)이 편찬한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나온다. ‘청주(靑州)’는 중국의 청주라는 지역명이다. ‘종사(從事)’는 본디 관직명이지만, ‘순조로이 따른다(從事)’라는 글자 뜻을 살려 ‘뱃속으로 순조롭게 내려가는 술’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청주종사’는 좋은 술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목은시고》 제33권, 〈서린조판사이아랄길래(西隣趙判事以阿刺吉來). 명천길(名天吉)〉. 이하의 한시 번역문은 한국고전번역DB의 것을 참조하여 필자가 보완하였다.
Needham, Joseph, Ho Ping-yu, and Lu Gwei-djen. “Spagyrical Discovery and Invention: Apparatus, Theories and Gifts”. 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 vol. 5: Chemistry and Chemical Technology, part 4.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1980. 테킬라(Tequila) 역시 나무나 옹기로 만든 증류기를 사용하여 만든다. 17세기에 중국의 닝보(寧波)에서 필리핀의 마닐라를 거쳐 멕시코로 가서 무역을 했던 중국 상인들이 증류기를 소개했다고 알려져 있다. 군인이면서 문화인류학자였던 미국인 존 그레고리 버크(John Gregory Bourke, 1846~1896)가 테킬라의 증류법에 대한 최초의 민속지를 발표(Bourke, John Gregory. “Primitive Distillation among the Tarascoes”, American Anthropologist 6.1, 1893)했고, 이후에 아시아와의 관련설을 주장한 논문도 나왔다(Bruman, Henry J. “The Asiatic Origin of the Huichol Still”, Geographical Review 34.3, 1944; VALENZUELA-ZAPATA, BUELL, SOLANO-PEREZ, PARK, “‘Huichol’ Stills: A Century of Anthropology: Technology Transfer and Innovation”, Crossroads – Studies on the History of Exchange Relations in the East Asian World 8, 2013).
중국의 고문헌의 증류주 명칭은 ‘아랄길’(阿剌吉, (원)《음선정요(飮膳正要)》), ‘화주’(火酒, (명)《본초강목(本草綱目)》), ‘주로’(酒露), (청)《전해우형지((滇海虞衡誌)》), ‘고량주’(高粱酒, (청)《수원식단(隨園食單)》) 등 여러 가지다. 지금의 ‘백주’는 20세기 이후에 생겨난 명칭이다. 1993년 이후 중국 증류주의 역사를 당나라 이전으로 보는 주장도 등장했다(李华瑞, 〈中国烧酒起始探微〉, 《历史研究》 1993年 第5期).
댄 주래프스키 지음, 김병화 옮김, 《음식의 언어》, 어크로스, 2015, 111~113쪽. 아랍인과 중국 남방 상인의 교류에 관해서는 역사학자 조흥국의 글(조흥국, 〈조선왕조 초기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마자파힛 왕국 간 접촉〉,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동아연구》 55권, 2008, 48~61쪽)을 참고하기 바란다.
이익주, 《이색의 삶과 생각》, 일조각, 2013, 174쪽.
이익주, 《이색의 삶과 생각》, 일조각, 2013, 23쪽.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청구번호(奎 4276-v.1-24, 奎 4976-v.1-24, 奎 5771)
이익주, 《이색의 삶과 생각》, 일조각, 2013, 30쪽. 이익주는 《목은시고》에 실린 시를 시간순으로 정리하여 일기처럼 사료로 이용했다.
이 시의 제목에 나오는 ‘승제’는 당시 승제로 재직 중이던 큰아들 이종덕(李種德)을 가리킨다. ‘승제’는 다른 말로 ‘승선(承宣)’ 혹은 ‘용후(龍喉)’라고 불렸던 왕명 전달을 맡은 정3품 관직이다. 괄호 안 표현은 시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임의로 덧붙였다.
《목은시고》 제17권, 〈상서과(嘗西瓜). 승제소득(承制所得).〉
조선 후기의 서호수(徐浩修, 1736~1799)는 자신이 편찬한 《해동농서(海東農書)》에서 ‘서과’를 한글로 ‘수박’이라고 적고, “민간에서는 수박이라고 부른다”(《해동농서》 권2, 〈西瓜 수박〉 : 西瓜種出西域故名, 俗謂之手瓠.)고 했다. 조선시대 문헌에서 수박의 또 다른 한자는 ‘수과(水瓜)’이다. 즉, ‘물이 많은 박’이라는 뜻으로 수박과 수과는 조선에서 서과를 불렀던 이름이었다. 오늘날 수박을 가리키는 일본어 ‘스이카(すいか)’ 역시 ‘서과’에서 온 것이다. 따라서 수박은 오로지 한반도에서만 쓰였던 서과의 또 다른 이름인 셈이다.
《농정전서》 권27 : 西瓜, 種出西域, 故之名.
허균, 《도문대작》, 〈서과〉.
《양촌선생문집》 제10권, 〈서과〉.
《형재시집》 제2권, 〈梅軒詩附 : 病中得西苽奉呈李相國以謝惠藥〉.
《형재시집》 제2권, 〈매헌송서고이시답지(梅軒送西苽以詩答之)〉.
《목은시고》 제35권, 〈함창음(咸昌吟)·기사(紀事)〉.
《목은시고》 제20권, 〈두죽(豆粥)〉.
《목은시고》 제33권, 〈대사구두부래향(大舍求豆腐來餉)〉.
두부의 유래에 대해 가장 널리 알려진 주장은 한나라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 BC 179?~BC 122)이 발명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유안의 두부 발명설을 반박하고, 10세기 이후 유목민족의 치즈 제조법에 영향을 받아 두부가 발명되었다는 주장이 서양 학계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주장의 문헌적 근거는 북송의 도곡(陶谷, 903~970)이 965년에 쓴 《청이록(淸異錄)》이다. 이 책은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두부’ 관련 문헌이다(石毛直道(編), 《論集 東アジアの食事文化》, 平凡社, 1985; 주영하, 《차폰 잔폰 짬뽕: 동아시아 음식 문화의 역사와 현재》, 사계절, 2009, 49~53쪽).
《목은시고》 제27권, 〈효음(曉吟) 일수(一首)〉.
최근 세계 역사학계에서는 원나라의 정체성에 대해 논쟁 중이다. 친중국 학자들은 원나라를 중국의 한 왕조로 보지만, 서양의 역사학자들은 몽골제국의 여러 왕조 중의 ‘중국지부’로 원나라를 본다.
발행일 : 2018. 03. 02.
저자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음식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어내는 ‘음식인문학자’.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양대 대학원 문화인류학과에서 〈김치의 문화인류학적 연구〉로 석사학위를, 중국 중앙민족대학교 대학원에서 〈중국 쓰촨성 량산 이족의 전통칠기 연구〉로 민족학(문화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문화예술학부 민속학 담당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음식전쟁 문화전쟁》, 《음식인문학》, 《식탁 위의 한국사》, 《한국인, 무엇을 먹고 살았나》, 《한국인은 왜 이렇게 먹을까?》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중국음식문화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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