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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여기에는 사실 약간 번거로운 문제가 숨어 있다. 그것은 바로 이슬람 세계가 와인을 비롯한 모든 주류를 철저히 금지하는 사회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혹시라도 커피가 와인의 일종으로 판명되는 날엔 커피의 앞길이 순탄치 않을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슬람 세계에서 커피가 정당성을 확보하기까지 만만치 않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 과정에 커피를 옹호하는 일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이슬람 신비주의 수도사, 즉 수피교 수도사였다. 우리는 이슬람 문화와 그 철학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수피즘이라는 신비주의 사상을 좀 더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아니, 사상 전반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커피와 관련된 부분만이라도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커피의 어원이 되는 ‘카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커피는 별난 음료다. 사실 대체로 몸에 나쁜 편이다. 마시면 쉬이 흥분하게 되고 잠들기 어려워진다. 식욕도 사라진다. 그래서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고들 하는 것이다. 이런 커피의 부정적인 특성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전 세계로 전파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이들이 바로 수피교 수도사다. 그들은 커피를 마시면 몸에 해롭다는 사실을 딱히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흥분하기 위해 커피를 마시고, 잠을 자지 않기 위해 커피를 마시고, 식욕을 줄이기 위해 커피를 마셨다.
---「‘커피는 본래 와인이었다’라는 말의 숨은 의미는?」중에서
그 밖에 다른 문제도 있다. 커피 무역에 뛰어든 유럽 상인은 카이로 상인이라면 겪을 일이 없는 전혀 다른 문제를 맞닥뜨렸다. 아라비아에서 구매한 커피를 유럽에 가져다 팔 때 특히 그렇다. 아무리 가격 차이가 크다고 해도 유럽인에게는 커피 자체가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상품이라 커피에 대한 수요가 제로에 가까웠다. 심지어 런던에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영업을 시작했을 때 이웃 주민이 커피하우스에서 나는 ‘악마의 냄새’를 적절히 조치해줄 것을 요구하며 상부에 고발한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아로마가 어떻고 하는 식의 문화 수준이나 국민성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상품이 유럽에서 판로를 개척하려면 유럽인 사이에서 커피의 사용가치가 통용되어야 했다. 사용가치는 상품의 자연적, 물질적 특성만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자연적, 정신적 욕구가 그에 대응해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말이 쉽지, 인간의 내적 욕구를 만들어내는 일이 수월하게 이루어지겠는가.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인간개조’를 의미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커피에는 ‘상용성’이 있었다. 어떻게든 일단 몇 번 마시게 하면 자연스럽게 내적욕구로 자리 잡아간다. 하지만 아무리 입에 발린 말로 속인다 해도 유럽에서는 이슬람 세계처럼 커피의 상품 이미지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관념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아라비아의 ‘검은 잠잠성수’에 필적하는, 영혼의 저 깊은 곳에서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를 어떻게든 만들어내야 했다. 커피에 얽힌 관념은 유럽 각국에 이미 존재하던, 혹은 새롭게 형성되는 이데올로기와 급속하고도 왕성하게 결합하며 자유자재로 변화하는 상품 이미지를 만들어갔다. 커피는 각 나라의 관념 안에서 주어진 위치를 차지해나갔는데 ‘이성의 리큐어’ 혹은 ‘안티 알코올’ 등이 대표적 예다. 그 관념이 어떤 모습이든 간에 커피라는 새로운 상품의 사용가치가 인간의 내적 욕구로 자리 잡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바란 이는 상업자본가들이었다.
---「17~18세기, 유럽의 상업자본가들은 왜 그토록 커피의 ‘상품 이미지’를 만드는 일에 골몰했을까」중에서
한편 커피하우스가 클럽으로 바뀌어가던 그 시점에 훨씬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홍차’의 등장이다. 사람들이 커피와 차츰 멀어지면서 찾기 시작한 것이 바로 홍차다. “왜 영국인이 정열적인 홍차 마니아인가는 그들의 커피를 마셔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커피가 맛이 없다는 것이 변화의 본질적인 원인일 리는 없다. 게다가 영국인은 ‘맛있는 차를 맛없게 마시는 국민’이라고 하지 않는가.
아시아에서 차를 생산하는 식민지를 확보한 영국이 산업정책상 자국 내에 홍차 판로를 개척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는 없으나 그것만으로 모든 의구심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훗날 영국이 네덜란드와 함께 전 세계 커피 무역을 사실상 지배하게 되었을 때 전 유럽에 대량의 커피를 공급하면서도 정작 영국인 자신은 커피를 마시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영국인을 커피와 커피하우스에서 멀어지게 한 것일까? 이 문제의 해법을 찾는 데 도움이 되는 참고자료가 있다. 1674년, 남편이 허구한 날 커피하우스에 들락거리는 것을 애태우던 아내들이 커피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히기 위해 만들어낸 진귀한 팸플릿이다. 정식 제목은 「커피에 반대하는 여성의 청원. 사막처럼 메마르고 쇠약하게 만드는 음료의 과도한 섭취로 인해 여성의 섹스에 야기된 심각한 불편을 공공에 호소한다」다.
---「무엇이 영국인을 커피와 커피하우스에서 멀어지게 했나」중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은 모순된 면이 많으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묘한 남자였다. 우선 그는 계몽된 전제군주의 정체성과 위상을 몸소 구현하며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또 그는 플루트 곡집을 후세에 남기기도 했고, 여자와의 ‘전쟁’에 질린 남자의 슬픔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포츠담에 지은 상수시 궁전에서 잘 때는 늘 애견하고만 동침했다. 이런 타입의 남자가 커피를 마시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러고 보면 그가 마시는 커피도 얼마나 모순으로 가득한가. 그는 커피에 샴페인을 넣어 같이 끓인 뒤 마지막에 후춧가루를 뿌려 마셨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계몽적 이성으로는 왜 위대한 프로이센의 국민이 이런 음료를 마시는지, 그리고 결국 매년 70만 탈러의 막대한 자금이 네덜란드로 빠져나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에 그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의사들에게 명해 커피에 독성분이 있다고 소문을 내게 한 것이다. 효과가 있었을까? 아니, 효과는 제로에 가까웠다. 이유가 뭘까? 일반 서민들이 ‘커피가 무서워서 감자를 먹으랴’ 하는 심정으로 그 조치에 강력히 반발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감자가 독성식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감자가 지닌 몇 가지 탁월한 장점(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 재배하기 쉽고 소출량이 많은 데다 쌀?밀 등의 주식 대체용으로도 손색없다는 점 등)도 간파하고 있었기에 장차 독일의 고질적 식량난을 해결해줄 미래형 주식으로 만들기 위해 감자 재배를 장려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의사들에게 명령해 ‘커피에 독성분이 있다’는 거짓 소문을 내게 한 까닭은?」중에서 (219~220p.)
드디어 본격적으로 커피 폐기가 시작되었다. 엄청난 양의 커피가 소각되거나 배의 갑판 위에서 바다로 버려졌다. 커피대국 브라질의 파탄은 결코 한 국가의 파탄으로 끝나지 않았다. 식민지로 출발한 브라질은 노예무역과 이민 등을 통해 집요하게 커피 공급기지로의 변신을 강요당해왔다. 그리고 1929년 이후 대공황 시기에는 유럽 근대 시민사회에 ‘검은 혈액’을 흐르게 한 순환구조에 치명타를 입은 것이었다. 브라질의 커피 폐기 뉴스는 그 처참한 광경을 찍은 수많은 사진과 함께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독일의 각 신문도 브라질의 커피 폐기 뉴스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중 한 장의 사진이 있다. 1932년 3월에 발행된 한 잡지에 게재된 것으로, 브라질의 커피 폐기를 전하는 보도사진이다.
사진에는 연기를 내뿜으며 질주하는 증기기관차 위에 네 명의 남자가 서 있다. 두 명은 어이없다는 듯 엷은 웃음을 띠고 있고, 나머지 두 명은 얼굴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다. 한 사람이 석탄을 갑으로 퍼서 기관실로 보낸다. 아니, 자세히 보니 석탄으로 보였던 그 물질은 ‘커피콩’이었다. 커피콩을 에너지원으로, 구수한 아로마를 퍼뜨리며 브라질 전역을 누비고 다니는 증기기관차……. 이 한 장의 사진 앞에서 잠시 생각에 잠긴 이유는 옛날(‘옛날’이라고 말은 했지만, 불과 400여 년 전의 일이다)에 이슬람 세계에 홀연히 나타난 카와가 『꾸란』이 먹을 수 없다고 금지한 석탄인가 아닌가 하는 혐의를 받은 역사적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커피콩이 석탄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논쟁은 왜 필요했을까? 카와라는 새롭고 독특한 음료가 이슬람 세계에서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해,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커피가 세계교역의 대표 상품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불가피한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400년 지난 시점에 전 세계가 커피를 일상적으로 마시는 시대가 된 상황에서 커피의 ‘순환’을 책임지는 운전자이자 심장격인 브라질에서 ‘커피는 석탄이다’ 하고 선명한 사진과 함께 선언해버린 셈이었다.
---「전 세계 커피 총생산량 4분의 3 이상을 담당하고 국민 90퍼센트가 커피 생산에 종사하던 커피 대국 브라질이 1930년대에 엄청난 양의 커피를 바다에 버리거나 소각한 이유는?」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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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영양분이 거의 없는데도 왠지 힘이 나게 하는 검은 음료’
커피를 군대에 보급하기 위한 나폴레옹의 노력이 산업혁명을 촉발하고
세계사를 바꾸다
“나는 귀하의 나라도 이렇게 만들 수 있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이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바닥에 떨어뜨려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면서 오스트리아 정부 사절단을 향해 한 말이다. 이는 1797년의 일로, 나폴레옹은 동쪽의 맹주 합스부르크가의 신성로마제국을 공격해 사지로 몰아넣은 뒤 강화조약을 거부하는 사절단에게 엄포를 놓았다. 커피를 보면 국가 존망 위기를 떠올리는 나쁜 습성이 몸에 밴 사람들은 부들부들 떨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조약에 응했다.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곧바로 조각난 커피잔 같은 처지가 된 신성로마제국을 빗자루로 쓸어 담듯 공략하며 해체해버렸다. 1804년의 일이다. 이후 1806년 베를린에 입성한 나폴레옹은 베를린 칙령을 선포해 대륙을 봉쇄했다(여기서 ‘대륙봉쇄’는 대륙을 봉쇄하는 것이 아니라 대륙으로부터 바다를 봉쇄한다는 의미다). 이는 강대국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무릎을 꿇은 상황에서 대서양과 지중해에 이어 발트해마저 제압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 천재 전략가 나폴레옹이 단행한 해상봉쇄조치였다. 그런데 문제는 해안이 봉쇄되면 커피도 봉쇄된다는 점이다.
나폴레옹이 대륙봉쇄령을 내리면서 커피를 염두에 두었으리라는 점은 거의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는 식용음료로 군대에 커피를 최초로 도입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왜 자신의 군대에 커피를 보급하려고 안간힘을 썼을까? 영양분이 거의 없는데도 왠지 힘이 나게 하는 ‘검은 음료’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군대에 대량의 커피를 보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산업’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나폴레옹은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는 자신의 명언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군대에 막대한 양의 커피를 보급하기 위해 대단한 추진력과 실행력을 발휘했다.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프랑스 정부는 직물기계 개량, 인디고 대체용 색소 개발, 새로운 종류의 설탕 제조 등 여러 분야의 발명과 기술 개발에 상금을 걸고 산업혁명을 독려했다. ‘영양분이 거의 없는데도 왠지 힘이 나게 하는’ 독특한 음료 커피는 유럽은 물론이고 전 세계를 제패하고 싶은 나폴레옹의 야망과 뒤얽히며 프랑스 산업 전반을 비약적으로 성장시켰으며, 머지않은 미래에 유럽과 전 세계 경제를 송두리째 바꾸는 ‘산업혁명’의 근간이 되었다(18세기 ‘산업혁명’ 하면 영국만을 떠올리기 쉬운데 당대 프랑스의 발전상과 기여도는 영국의 그것과 비교해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군대에 커피를 보급하기 위한 노력이 18세기 프랑스와 유럽,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전 세계 산업 구조를 혁명적으로 뒤바꿔놓는 중요한 계기가 된 셈이다.
암스테르담 시장이 루이 14세에게 바친 커피나무 한 그루가
커피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꾸다
18세기, 네덜란드는 커피 재배에 관한 한 유럽 최고의 선진국이었다. 1706년, 암스테르담시는 자바에서 커피나무를 들여왔는데, 그 나무는 전 유럽에서 대단한 호평을 얻었다. 그 무렵 암스테르담시에 부임해 있던 프랑스 영사는 암스테르담시와 오랫동안 교섭한 끝에 커피나무 한 그루를 루이 14세에게 보내는 데 성공했다. 이는 1714년의 일이다. 그해 7월 29일, 마를리 성에 도착한 키 150센티미터의 튼튼하고 어린 커피나무는 왕립식물원 온실에 보내져 뿌리를 내렸고 왕성하게 개체 수를 늘려갔다.
가브리엘 드 클리외는 ‘루이 14세의 커피나무’에서 엄청난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 가능성을 실현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그는 프랑스령 마르티니크섬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해군대위 출신이었는데, 1721년 군복무 중 파리에 잠시 귀국했을 때 사람들이 대량으로 커피를 사고팔며 소비하는 것을 목격한 일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 커피는 네덜란드가 자국 식민지인 동인도에서 재배한 것이었다.
드 클리외의 머릿속을 섬광과도 같은 생각이 불현듯 스치고 지나갔다. ‘동인도와 서인도, 이름이 같다면 기후와 풍토에도 큰 차이가 없지 않을까? 만일 그렇다면 내가 군복무했던 서인도제도의 마르티니크섬에서도 얼마든지 커피를 재배할 수 있을 것이다.’ 드 클리외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머릿속에 담아둔 채 시간을 허비하는 타입이 아니었기에 신속하게 그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그는 어느 지체 높은 부인을 연줄로 삼아 커피나무를 루이 14세에게 직접 가져다 바치는 역할을 맡았던 왕의 주치의 M. 드 시라크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결국 어린 커피나무 한 그루를 얻어냈다. 드 클리외는 그 커피나무를 소중히 지닌 채 낭트를 떠나 마르티니크로 향했다. 1723년의 일이다.
드 클리외는 소중한 커피나무를 햇빛을 잘 받도록 고안된 유리상자에 보관했다. 적도 부근에서 주로 서식하는 커피나무에게 햇빛은 물이나 다른 어떤 것보다 생장에 중요한 요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운반 도중 햇빛이 부족하다 싶으면 인공적으로 커피나무에 빛을 비추어주곤 했다. 그런 식으로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인다고는 해도 대서양을 횡단하는 항해는 멀고도 험했다. 그 과정에 드 클리외의 시대적 소명을 시샘한 어떤 승객이 유리상자를 훔쳐가는 해프닝까지 일어났다. 포르투갈령 마데이라섬 연안에서는 튀니지 해적선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거센 풍랑에 휘말려 난파할 뻔한 일도 있었다. 온갖 고난을 겪은 끝에 드 클리외와 커피나무는 무사히 마르티니크에 도착했다.
파란만장한 시련을 겪으며 드 클리외가 프랑스에서 가져온 커피나무는 놀라운 생산량을 기록했다. 그 시점으로부터 35년여 후인 1759년에 마르티니크와 과달루페는 1,120만 파운드의 커피를 수출했으며, 같은 해에 아이티·마르티니크·과달루페의 커피 수확량은 각각 7,000만, 1000만, 700만 킬로그램에 달했다.
https://youtu.be/cM-9Om2Ud6g
프랑스령 서인도제도에서 산출되는 막대한 양의 커피는 이슬람 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한발 더 나아가 전 세계 커피산업과 커피무역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드 클리외에 의해 시작된 서인도제도산 프랑스 커피가 18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이슬람 세계의 커피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카이로의 거상들에게 치명적 타격을 입힌 것이었다.
아이티·마르티니크·과달루페 커피는 마르세유를 거쳐 커피의 출발지 격인 서아시아로 거침없이 밀고 들어갔다. 키 150센티미터의 어리고 튼튼한 ‘루이 14세의 커피나무’ 한 그루에서 놀라운 가능성을 발견한 가브리엘 드 클리외의 뚝심 있는 노력이 커피 세계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돌려놓는 순간이었다.
한때 화려한 영광을 누린 영국 커피와 커피하우스가
결국 홍차와 티하우스에 밀려나며 쓸쓸히 퇴장한 이유가
여성을 배제했기 때문이다?!
커피는 원래 이슬람 수피교도가 ‘욕망을 억제하고 수행에 정진하기 위해’ 즐겨 마시던 음료였다. 그 독특한 ‘검은 음료’는 역설적이게도 17세기 유럽 상업자본가와 정치권력자의 들끓는 욕망을 자극하며 유럽과 전 세계 문화를 송두리째 바꿔놓기 시작했다.
아라비아의 커피는 바다 건너 영국에 ‘커피하우스’를 통해 전파되었다. 영국 런던에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문을 연 때는 1652년이었다. 그 역사적인 커피하우스의 문을 활짝 연 이는 영국인이 아닌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출신의 파스카 로제였다. 그는 레반트를 무대로 활약하던 상인 대니얼 에드워즈의 시종이었는데, 매일 아침 주인을 위해 커피를 끓이던 습관이 커피하우스 창업으로 이어진 셈이었다. 그렇게 출발한 런던의 커피하우스는 한동안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어느 시점에 이르러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문을 연 지 30여 년 만인 1683년에 3,000여 곳, 1714년에는 8,000여 곳으로 늘어났다.
아무것도 없다시피 하던 영국은 ‘없는 것’을 끊임없이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는 커피하우스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커피산업이 급성장하던 17세기 후반의 상황이다.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하기에 적합한 커피하우스는 영국이 맞닥뜨린 당대의 시대 상황·니즈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고, 커피산업과 커피문화의 급성장으로 이어지며 시민의 일상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영국에서 커피하우스의 인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까지 런던 시민생활의 중심을 차지하던 커피하우스는 18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급격히 쇠락했다. 실제로 1714년에 8,000곳을 넘어섰던 런던의 커피하우스가 1739년에는 551곳으로 줄었다는 통계가 발표될 정도였다.
한때 영원할 것처럼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던 영국 커피하우스의 열기는 왜 갑자기 시들해졌을까? 그리고 그 열기가 홍차와 티하우스로 옮겨 붙은 주요 원인은 뭘까? 우선, 영국 커피하우스가 사회적 기능을 다했다는 점을 주요한 이유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여기에 더해 흥미롭고도 인상적인 요인을 한 가지 더 들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애초에 영국 커피하우스가 여성을 철저히 배제하며 탄생하고 성장했기에 결국 ‘여성 청원’ 등 거센 반발에 부닥치며 직격탄을 맞아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점이다. 이는 영국의 커피와 커피하우스의 운명을 바꿔놓는 데 그치지 않고, 홍차를 매개로 한 중국과의 아편전쟁으로까지 비화하며 세계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꿔놓았다.
수피교도가 ‘욕망을 억제하기 위해 마시던 검은 음료’
커피가 역설적으로 상업자본가와 정치권력자의 욕망을 자극하며
유럽과 세계를 제패한 이야기
교보문고 65주 연속 역사 분야 베스트셀러(『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 교보문고 ‘2019년을 빛낸 역사책 100권’ 1위(『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 2021년 교육청 학생교육문화원 추천도서(『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 행복한 아침독서 추천도서(『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세계사를 바꾼 10가지 감염병』), 학교도서관저널 추천도서(『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 교보문고 CEO를 위한 북모닝도서(『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세계사를 바꾼 10가지 감염병』) 등 주요 온 · 오프라인서점에서 베스트&스테디셀러로 자리 잡고 꾸준히 판매되며 내용과 가치 면에서도 인정받은 ‘세계사를 바꾼’ 시리즈. 사람과나무사이 출판사가 이 시리즈 여섯 번째 책을 출간했다. 『세계사를 바꾼 커피 이야기』가 바로 그 책.
커피는 어떻게 세계사를 바꿨을까? 『세계사를 바꾼 커피 이야기』는 ‘‘커피는 원래 와인이었다’라는 말의 숨은 의미는?’, ‘커피가 ‘니그로의 땀’이라는 섬뜩한 별명으로 불리게 된 은밀하고도 잔혹한 이유는?’, ‘커피문명과 전쟁은 왜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일 수밖에 없는가?’ 등 커피를 둘러싼 근원적 의문을 던지고 그에 대해 날카롭게 통찰한다. 또한 이 책은 ‘커피와 카페가 없었다면 프랑스 계몽주의 운동도 프랑스대혁명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독일혁명의 트리거를 당긴 것이 커피였다는데?’, ‘프리드리히 대왕이 의사들에게 명령해 ‘커피에 독성분이 있다’는 거짓 소문을 내게 한 까닭은?’, ‘프로이센 시대 독일인이 반나폴레옹 해방전쟁에 나선 이유는 ‘진짜 커피’에 대한 강렬한 욕망 때문이었다?’ 등 이슬람 수피교도가 욕망을 억제하기 위한 도구로 마시던 ‘검은 음료’가 역설적으로 상업자본가와 정치권력자의 ‘검은 욕망’을 자극하며 아라비아와 유럽, 나아가 전 세계를 제패한 흥미롭고도 매혹적인 이야기를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