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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나_벽_캔버스에 유채_112×145cm_2010
이만나_벽 / 캔버스에 유채 / 145 x 112 cm / 2011
이만나 작가
벽 (The Wall)
시간이 쌓아올린 이소(異所)의 벽
작년 ‘깊이 있는 표면‘에 이은 이만나 작가의 다섯 번째 개인전의 주제는 ’벽‘이다.
벽면에 활기차고 생기있는 그림을 그리는 일은 많으나 벽이 주체가 되는 일은 드물다.
벽이 주는 단절과 ’너머’의 굴레 때문일 것이다. 벽은 한계, 장애, 단절, 건물둘레를 막은 수직 건조물을 뜻한다.
작가는 소소하고 지극히 범상[凡常]한 풍경들을 낯설음으로 제도하고 덧칠한다.
그동안 작가의 시선은 자연, 식물, 숲, 야경으로 찬찬히 옮겨져 왔다. 그러다 마침내 어떤 벽을 마주하게 된다.
지치고 돌아앉아 시선이 꽂히는 곳, 작업실에서 마주하는 창작의 고뇌, 문화적인 차이, 허물어 뜨리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시간과 공간, 생활방식과 역사가 켜켜이 쌓여있는 공간을 그는 벽이라 부른다.
지극히 인공적인 산물이지만 그것은 무서운 생명력을 품고 있고, 단절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화합과
넘어섬의 도전과 희망을 주는 산물이기도 하다. 이율배반적인 의미만큼 그의 그림 또한 그렇다.
실체와 매우 흡사한 일상의 풍경이지만 여행에서 만난 낯선 이방인이 된 듯 꿈 속 어딘가에서 만났던
그곳을 떠올리는 랑데뷰를 경험하게 한다. 이미지와 실체는 전위(轉位)된다.
이만나의 벽은 미셀 푸코가 정의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로 존재한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다른 장소’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없는, 어딘가 다른 장소를 의미한다고 할 때 헤테로토피아는 비일상적이고, 주변적인 변방의,
또는 잘못된 공간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된다. 이상적 장소를 상징하는 유토피아의 원래 뜻이
어느 곳에도 없는 곳(nowhere)인데 비해 헤테로토피아는 이상적인 곳이든 잘못된 장소이든 이곳에는 없지만
어딘가에는 있는(somewhere) 현실감을 지닌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실제 시설과 제도 속에 현실로 존재하면서
사람들을 초월시키는 장소로써 작가의 작품들은 그 주소를 갖는다. 벽 또한 그렇다.
“이만나의 그림은 분명 특정 대상의 재현이고 가시적 세계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실은 그 이면을, 세계의 내부를, 자신의 속을 뒤집어 보여준다. 자신을 둘러싼 외부세계를 관습이 아닌
자체로 생생하게 접촉할 때 생기는 생소함을 그리고자 한다.”(박영택 미술평론가)
환상적이고 다소 몽환적인 분위기는 깊이 있는 표면에 기인한다. 콘크리트와 돌처럼 차가운 공기의 색,
척박한 곳을 기어오르는 담쟁이와 나무들의 호흡을 그려냄에 있어 신중히 물감을 뿌리고 칠하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그의 뿌림은 치밀하고 과학적인 쇠라의 점묘보단 우연성이 높으며, 폴락의 드립핑보다는 계획적으로 진행된다.
‘깊이 있는 풍경’에서는 나무로 뒤덮힌 커다란 나무 울타리를 양쪽 끝으로 소실점을 잡아 몇 개의 캔버스에 나누어
쿵쿵뛰는 붉은 심장같은 바탕위에 그려냄으로 보색의 강렬한 대비가 이루어지며,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위대함과 생명력을 묘사하였다.
최근작인 ‘벽’ 시리즈는 땅위의 시간과 양식, 역사의 흔적들까지 아우르는 집적[集積]의 공간으로 작가의
정제된 감정과 서정성이 돋보인다. 이전의 작품들 보다 더 절제된 공간감과 시간의 깊이가 더해져 시처럼 짧지만 강렬하다.
문학가 카프카는 실존의 차원과 부조리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사실적인 문체로
변형 기담[奇談]을 특유한 유머로 예사의 것처럼 묘사하는 냉정함이 있다.
이만나 작가는 평범의 것을 기이로 묘사하는 색감과 붓의 화음이 있다.
그의 벽은 이소(異所)의 벽이며, 부조리다. 도달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벽을 보며 참선한다는 면벽[面壁]이라는 불교용어가 있다.
채워지기 전 백색의 캔버스가 그렇다. 창작의 고통과 환희를 따라가는 일이 작가에게는 동일할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봤어요^^
갤러리 고도 의외로 걸리는 작품들이 좋다는~~(작품 거래에도 아주 적극적인~^^)
음..좋다.....문득 바닥을 그리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좋아보여서 가볼까 했더니 끝났네요 ... 박하님 덕에 사진으로 대리감상 ^^
전시기간이 좀 짧았지요, 나중에 관심갖고 보심도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