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좀 보소
문희순
경부선열차가 청도를 지나 상동 역에 도착하니 방송이 나온다. 선로에서 사고가 생겨 지연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내용이다. 영문도 모른 채 객실에 손님들은 막연히 기다릴 수밖에, 추억속의 간이역, “밀양 상동역” 그림처럼 내 눈앞에 있다. 무궁화열차와 아날로그적인 작은 간이역이다. 경북 청도역과 밀양역 사이에 있는 정겨운 작은 역이다. 유년시절에 본 네모난 성냥갑 짙은 빨간색을 생각나게 하는 빨간색 벽채에 초록색 지붕이 참으로 소박하다. 왠지 따듯한 마음을 지닌 친구가 기다릴 것만 같아 보이지도 않는 대합실 안쪽을 고개를 빼고 기웃거리는 내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냥 이곳에 내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화첩에 크레파스로 그려놓은 것 같이 무심하게 예쁘다. 하지만 오늘의 목적지는 밀양이기에 참기로 했다. 사고를 수습하는 시간이 20분정도 소요 된 것 같다. 또 방송이 나온다. 지연되어 죄송하다고 하며 기차가 다시 덜컥 덜컥 기침을 하듯 출발한다.
밀양 역에 도착하니 기자들이 대합실에서 웅성웅성 인터뷰를 한다. 들어보니 조금 전 지연 되었던 선로사고 내용은, 선로 작업하던 3명을 기차가 밀어 1명이 사망하고 2명은 병원으로 갔지만 위중하다고 한다. 서로 교신연결이 안되어 이런 사고가 일어났다고 한다. 너무 안타깝고 무거워진 마음으로 역 앞에 나오니 영화배우 전도연 주연에 “밀양” 영화 촬영지 장소에 포스터와 줄이 쳐져있다. 밀양의 자랑이기도 하다. 오랜 전에 이 영화를 본 기억이 난다. 서른세 살(전도연) 그녀는 남편을 잃고 아들 준과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간다. 이 작은 도시에서 피아노학원 간판을 건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러나 시작의 결심도 잠시 아들 준이 납치되어 살해된다. 애벌레처럼 웅크린 그녀의 등에서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를 듣는다.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그녀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이는 영화의 장면을 기억하며 끄집어본다.
역 앞에서 2번 버스를 타고 아리랑시장으로 가는데 기사아저씨 말씀을 알아듣기 어려웠다. 경상도 사투리가 아주 심해서 재차 물어봐야했다. 시장 안에 있는 약산비빔밥식당에서 점심을 맛있게 먹고 깔끔해서 건강해지는 기분이 든다. 아리랑시장 오늘이 장날이라는데 너무 한산하기만 하다. 상인들 말씀이 터미널시장으로 많이 뺏겼다고 한다. 시장 구석구석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데 오늘은 틀린 것 같다. 시장을 빠져나와 독립운동 해천거리와 의열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독립운동의 성지 밀양의 열정을 담은 곳이다.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 200m 벽화거리가 태극기 종류와 변천사 벽면가득 그려져 있다. 그 시대의 무거운 감정이 느껴진다. 밀양에서 8번의 만세운동이 있었고 독립운동가는 100명에 달한다고 한다. 해천 주위에 있는 약산 김원봉생가터에 세워진 의열기념관을 찾았다. 기념관 1층에는 의열투쟁의 주요사건을 소개하는 연대표와 약산 김원봉의 연설장면을 보여준다.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다보면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대한독립선언서의 마지막문장) 글귀를 읽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지며 그날의 처절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2층으로 들어서면 최수봉의사의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영상을 보여준다. 짧은 영상이지만 가슴이 뭉클하다. 옥상 쉼터에는 광복의 기쁨과 평화로움을 상징하는 청동상이 있고 석정 윤세주를 비롯한 해천 주변 독립운동가들의 생가와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를 조망하면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구성되어있다.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이지 결코 남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의열단장 약산 김원봉)
먹먹해진 가슴으로 자연생태하천으로 복원된 쉼터에서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었다.
한나절 가을햇살이 따끈따끈, 등에 담요를 두른 것 같다. 생수를 입에 적시며 시내 한가운데 우뚝 솟은 “영남루”에 오른다. 영남루는 지방 관아의 누각이다. 한쪽 벽에 시 한 구절이 눈에 띈다. “오뚝한 누각 영남하늘에 높이 올려놓아서 십리의 빼어난 경치 눈앞에 다 보이네.” 땀을 식히며 바라보니 넓은 강이 흐르고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나 역시 아 ~ 무엇하나 부러울 것이 없고 두려울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며 담대함이 가득 채워진다. 어디선가 애절한 목소리로 밀양아리랑 노랫소리가 들린다. 누각 올라오기 전 큰 바위에 밀양아리랑이 새겨져있는데 그곳에 설치된 벨을 누르면 노래가 나온다.
날좀 보소 날좀 보소 날좀 보 소 /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좀 보 소 /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내 귀에는 구슬프게만 들리는 밀양아리랑, 우리민족의 애환이 담겨있는 노래가사가 가슴을 조이는 것 같이 아프다. 누각에 있는 분들도 조용히 아리랑 노래에 흠뻑 빠져 시야에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2절을 듣는다.
정든님이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벙긋 /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아주 오래전에 000방송국 00의 명곡 프로에서 “아리랑 특집” 시간에 무대를 삼켜버린 어느 여가수가 역대급 퓨전 국악 “밀양아리랑”을 부르는데 소름이 돋으며, 그리운 님을 향한 절규를 목소리 하나로 우리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던 그 아리랑이 생각난다. 밀양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이 “영남루”에서 소중하게 느껴본다.
영남루에서 촉촉해진 마음으로 역 쪽으로 길을 따라 걸어가는데 동무삼아 도란도란 모여 있는 집들의 담장 안에, 남쪽나라 밀양의 가을이 누런 감과 함께 익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