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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게 그리 쉽지가 안타
경불 제 30대 여촌 김덕수
경주 남산 칠불암 가는 길에는 바람골이 있다,
바람골은 남산 동네 끄트머리에 있는 염불사지를 지나서 과수원 집을 거치면 개울을 건너게 된다,
개울 건너서 얕으막한 언덕바지를 올라서면 펼쳐지는데,지금은 나무들이 울창하여 그 진면목을 볼 수가 없다,바람골은 경주 남산 계곡 중에서도 넓은편에 속한다.
경주불교학생회 시절 이 골짜기를 오르내리면서 얼마나 외쳤던가?
「 살생중죄 금일참회,
투도중죄 금일참회,
사음중죄 금일참회,
망어중죄 금일참회,
기어중죄 금일참회,
양설중죄 금일참회,
악구중죄 금일참회,
탐애중죄 금일참회,
진애중죄 금일참회,
치암중죄 금일참회」
정말 목탁채가 부러지도록 염불을 했었는데, 그 이 후 거의 5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정말 그렇게 살고 있는가?,간단하지 않은가?,십악참회문대로 살면 된다.그런데 그게 그리 쉽지가 않다,
예전에 직장에 다닐때나,스리랑카에서 3년동안 어설렁거릴 때나,퇴직 후 집에서 백수생활로 빈둥 거릴때나,이곳 필리핀에 와서 새마을봉사단원으로 생활하고 있는 지금이나 매양 마찬가지이다.왜 그러한지도 어슴프리 알고 있는것 같다,부처님 말씀대로 살면 되는데 그런데 그게 그리 쉽지가 않다.
32년전인 1984년 9월16일 나는 경불 31대 김구석 동문과 함께 부처님마을이란 단체를 결성했다.그 당시의 창립 취지문으로 제목은 "부처님 은혜에 감사드리면서..."였다.
부처님 마을은, 부처님을 생각하고 그 가르치심에 따라 바르고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마을을 이룩한 우리들의 생각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겨레와 함께 역사를 지켜온 1천 6백년 한국 불교는 찬란한 전통과는 달리,
절은 저만큼 먼 곳에 있어 역사와 함께 하지 못하고, 아쉬울 때만 찾아가는
기복신앙의 보금자리였을뿐, 부처님 말씀 따라 법다이 사는 삶이 아니었기에
오늘날 서러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 '민족중흥은 불교중흥으로'라는 기치를 내걸고 생활불교·포교운동에
전념하여, 영남불교 운동사에 굵은 한 획을 긋고 입적하신 故 최상진 거사님의 뜻을 받들어,
이 땅을 기필코 부처님과 함께하는 나라로 이룩하고자 우리는 모였습니다..
우리는, 경주 남산을 한국 불교의 고향으로 삼아 부처님 나라를 이룩하고자 했던
저 서라벌 사람들의 불심을 본받아, 착하고 정다운 이웃을 우리 가족으로 모셔
기쁨을 함께 나누는 한마을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우리는 소리내어 큰일을 벌리려 함이 아니고,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작으나마
포교·전번·수행에 힘쓰는 알려지지 않은 분들을 찾아서 적은 힘이나마 보태고자 합니다..
우리들의 무주상보시운동은 소박하고 순수하며 그저 주는 기쁨이 아니라 줄 수
있음에 감사드리고, 주는 마음 받는 마음이 모두 맑고 밝아져서 서러 나누는 기쁨으로
만족하고 부처님의 가르치심에 따라 법다이 생활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원은 오직 하나
이 세상 어디에나 부처님 마을
이 세상 누구라도 부처님 이웃
이러한 마을 사람들의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다음과 같이 4가지 강령을 지었습니다.
- 실천강령-
1. 우리는 욕심 없는 마음을 키운다. 그래서 이웃과 나누어 가짐이고.
2. 우리는 날마다 부처님과 함께 하여, 늘 기뻐할 것이며,
3.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리 생활 가운데서 실천하여 믿음을 더욱 굳힌다. 그리고,
4. 우리는 처음 내었던 그 마음을 영원히 간직한다.
부처님 마을에서는 양력 정월 초하루 새벽, 경주 토함산(석굴암)에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해맞이를 하는 것으로 한 해를 시작하며. 그리고 나서 한 해동안 각기 처한 위치에 온 힘을
다해 부처님의 거룩하신 법을 널리 펴고 부처님의 가르치신 바대로 적으나마 무주상보시를
마음을 닦는 것입니다.d
경주불교학생회에 입문하여 방학때마다 칠불암을 오르내리면서,
꿈꾸어 오던 부처님마을은 신앙공동체이었습니다.
부처님을 생각하며,
부처님답게 살아가는,
착하고 좋은 이웃들이 부처님 말씀대로 모여서 사는 곳으로 만들어 보자고 생각하였습니다.
부처님마을 회보 제1호에 실린,
"경주남산을 한국불교의 고향으로 삼아,부처님나라를 이룩하고자 했던,
서라벌사람들의 불심을 본받아서 착하고 정다운 이웃을 우리 가족으로 하여,
기쁨을 함께 나누는 한마을 사람이 되고자 한다"
는 소문을 듣고서 당시 팔공산 파계사에 계시던 법우스님(현 김호성 동국대교수)께서,
부처님이 마을마다,직장마다,개인이 살아가는 곳곳마다에 계시는데,
어찌 경주의 한 곳만 있을 수 있느냐는 말씀에 공감하여,
우리의 원은
이 세상어디에나 부처님마을,
이 세상 누구라도 부처님이웃.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출발한,
부처님 마을은 금새 200여 회원으로 다시 일천여 회원으로 번져나갔습니다.
부처님마을 출범 당시,
저와 경주블교학생회에서 부터 마음을 다둑거려온 김구석거사(현 경주남산연구소장)과
안강불문회 창립멤버로,경주불교서점을 오픈하여 말뚝신심으로 불교운동에 매진하겠다는
김갑만거사와 함께,소위 부처님마을 3김씨로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견제 받기도 하면서 삼두마차가 되어 부처님마을을 원만하게 이끌었습니다.
부처님마을이 10년만에 2500여회원으로 우뚝 서게된것은,
첫째, 부처님마을 정기총회격인 전체모임으로 시작한 제야법회와 해맞이법회 입니다.
지금은 보편화된 12월 31일 산이나 해변으로 가서 새해 첫 해돋이를 보는 행사를
처음 시작한것입니다.
그 시작은 이러했습니다.매년 12월31일에 경주시 천북면 신당리에 소재한 원효사
(당시 주지 법광스님,현 원담스님)에 모여서 저녁예불을 올린후에 전체모임을 갖고,
밤 11시경에 출발하여 자정에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봉덕사신종을 타종하는
제야법회에 참석하였다가,
잠시 추위를 녹인후에 새벽 3시에 시작되는 석굴암 새벽예불을 참석한 후에 발을 동동구르며 기다렸다가 새해 새아침에 떠오르는 햇님을 보며 해돋이법회를 하는것입니다.
그런데 어느새 해맞이 법회가 소문이 나서 석굴암마당은 물론 석굴암주차장도 만원이 되어서, 옮긴 장소가 문무대왕릉이 있는 경주시 양북면 대본리 바닷가이었습니다.
처음엔 우리일행뿐이었는데 그곳마저 몰려드는 국민들로 인해서 포항해수욕장,
칠불암 신선대로 옮겨다니면서 해맞이법회를 하였던것입니다.
두번째는,여름이면 이절저절 옮겨다니면서 가지던 부처님마을 여름마당이었습니다.
이 또한 현재는 템플스테이란 이름으로 전국의 유명사찰에서 실행하고 있습니다.
당시 여름마당의 시초는 속리산 법주사 강원에서 강주로 계시던 종광스님의 도움으로
시작하게된것입니다.그 당시만해도 일반 불자들이 큰 사찰에서 이틀 사흘을 먹고자면서
수련하는 프로그램은 전무한 시절인데 부처님마을 가족 2~300명이 모여서
바루공양과 아침,저녁예불, 그리고 법명스님의 재치있는 사회로 이어지는 캠프파이어 등,
정말 야단법석을 이루었습니다.
세번째는,부처님마을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다양한 모임이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여러 문화운동 단체 및 축제를 기획하여 실행하였습니다.
그게 바로 "경주남산사랑모임","삼국유사절터찿기모임"과 "경주남산성역화결사대회",
"충담재","월명재" 등등 입니다.
이가운데 "충담재"와 '월명재"는 당시 부처님마을을 주도하던 김덕수거사와 김구석거사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만들었는데 지금도 경주의 문화축제로 자리매김하여,
"충담재"는 매년 삼월삼짓날에 가까운 토요일에 신라문화원에서,
"월명재"는 구월보름날에 경주문화축제위원회에 의해서 개최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경주의 모든 시민운동,문화운동에 부처님마을이 주축을 이루었습니다.
부처님마을을 대표하는 이를 촌장이라고 호칭하였는데,
초대촌장에 김덕수거사,2대촌장에 용봉스님(원적하신 전 안강향림사 주지),
3대촌장에 종광스님(법주사강원 강주),4대촌장에 불심 도문스님(현 조계종 원로의원),
5대촌장에 종광스님(전 기림사 주지)로 이어져 오고 있으며,
그동안 참석하여 주신 원담스님(전 원효사주지),승원스님(통영 대성암 주지),법명스님(안강 향림사 주지) 등이 계십니다.
또 사무국장으로는 초대 김구석거사(현 경주남산연구소장).2대 정완석선생(안강 불인당 대표),3대 김지웅(경주불교서점 대표)거사가 잘 이끌어주셨으며,
당시 열악한 환경에서 밝은 마음으로 근무하신 사무국 요원으로는 최귀분보살,최원희보살,
손정수보살,최규숙보살,금강장보살,이명희보살께서 무주상보시의 마음으로 거들어 주셨습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랜기간 장명진여사께서 수고해주셨습니다.
그뿐아니라,부산지역모임,대구지역모임,울산지역모임,서울지역모임,경주지역모임 등
각 지역모임을 훌륭하게 이끌어 주신 거사,보살님들도 계십니다.
1996년 경주콩코드호텔에서 불심도문 큰스님을 모시고,
부처님마을 10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가졌고,
부처님마을 탄생지인 천북면 신당리 원효사에는 부처님마을 기념비을 세웠으며,
부처님마을 사무국에는 부처님마을 법당을 개원하는 등 파죽지세로 성장하던
부처님마을에 십년세도의 권력(?)을 누린던 3김씨에 대한 반발이 있게됩니다.
이에 당시 김구석 사무국장과 초대촌장이었던 저는 부처님마을의 앞날을 위하여 자진하여
부처님마을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부처님마을이 주관하여 치러지던 "충담재"와 '월명재"를 매년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개최하다가 경주문화축제위원회를 결성하여 여법하게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그뿐아니라 부처님마을 노래를 작곡하신(작사가 김윤기선생) 백홍수선생과 함께
한국.스리랑카불교복지협회를 결성하여 20년째 스리랑카 어린이 돕는 일과
사랑의 집짓기 운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오는 2014년 9월 16일은 부처님마을 창립 3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제가 경주불교학생회원 시절에 경주분황사에서 불심도문 큰스님을 만난 것은
영남불교중고등연합학생회 하계수련대회 때 였습니다.
분황사 모전석탑에 길게 걸린프랑카드에 적힌 글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마음이 일어나면 모든것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모든것이 사라진다"라는
원효스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제 부처님마을도 서산에 걸린 노을처럼 화려하게 사라지려 합니다.
그러나 사라짐은 새로운 기다림을 시작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부처님마을에 동참하여주신 2800여 가족분들은 이세상 어디에서
또 다시 만나게 되어 함께 하게될 날이 머지않아 닥아오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좋은 이웃과의 고운인연을 부처님께 감사드리면서,
부처님마을 4대강령을 큰소리로 낭독하면서 이 글을 마치려 합니다.
부처님마을 4대강령
1.우리는 욕심없는 마음을 키운다,그래서 이웃과 나누어 가짐이고,
1.우리는 날마다 부처님과 함께하여 늘 기뻐할 것이며,
1.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리생활가운데 실천하여 믿음을 더욱 굳힌다.
1.그리고 우리는 처음 내었던 그 마음을 영원히 간직한다.
「경불」지 편집을 맡은 이형우동문과 박부강 동문의 전화를 받고 안쓴다고 야박하게 대하던 내가 무슨 말이 그리도 많은지 자꾸 길어진다.그런데 그게 그리 쉽지가 않다.
불심 도문 큰스님을 모시고 길을 나서다 보면 갖가지 일화가 많다, 그 한가지는 길을 걷다가 걸인을 만나면 지갑에 든 돈을 세어보지도 않고 그냥 그대로 다 주어 버린다, 나도 언젠가는 그렇게 한번 해보아야지 하며 생각만하고 산지가 벌써 40년이다.그런데 그게 그리 쉽지가 않다.
우리집 금강장보살과 같이 살아온지가 어느새 40년 다되어 가는데, 아직도 벌컥벌컥 화를 낸다,한.스리랑카 불교복지협회 사람들과 스리랑카 여행을 하면서도 그렇게 했더니,버럭대감,버럭대장이란 별명을 추가했다.그런데 그게 그리 쉽지가 않다.
필리핀에 새마을봉사단으로 파견된지도 벌써 7개월이 지났다,그런데 여기서도 그 버릇은 여전하다,쪼금 지 맘에 안들면 벌컥 화를 낸다.그러면 그동안 벌어 놓은 좋은 이미지는 다 날아간다.그런데 그게 그리 쉽지가 않다.
BTN(불교방송)을 틀면 새벽마다 108배를 한다,108배가 좋다는걸 KBS <생노병사의 비밀>이란 프로그램에서 방영을 한 후에 담당피디가 "108번의 내려놓음"이란 책을 내기도 했었다, 그 책을 보고 이건 건강을 위해서라도 해야겠다고 했는데,그런데 그게 그리 쉽지가 않다.
나는 늙으면 절에 가서 마당이나 쓸고 스님들이 공부하는 방 부직에 군불이나 때면서 살아가겠다고 입에 달고 살았는데,막상 불심 도문큰스님으로 부터 경주남산 중 고위산 천룡사 사무국장으로 명받아 2년간 근무하면서도 한번도 천룡사에 잔적이 없다,그런데 그게 그리 쉽지가 않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에 가면 구구절절이 다 나에게하는 말 같이 들린다,법문을 듣고 오는 날은 나도 그렇게 해야지 하면서 속으로 다짐을 하고 또 하는데, 그런데 그게 그리 쉽지가 않다.
얼마전에 고문희동문과 김순진동문이 카카오톡으로 대화하는데 낑기가지고 고문희동문에게 한마디 했는게 "담에 경주 가거든 내가 소주 한잔 살께"였다,그런데 그게 그리 쉽지가 않다.(문희야 그 말 꼭 믿지는 마라)
백겁적집죄 백겁동안 쌓인 죄도
일념돈탕진 한 생각에 사라지니,
여화분고초 마른 풀이 불에 타듯이
멸진무유여 남김없이 사라지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