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한옥 기와지붕 위에 앉은 건축가 김석철씨(59)는 ‘서울의 파수꾼’처럼 보였다. “서울은 풍수상 완벽한 명당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서울은 형편없이 망가져버렸어요”. ‘예술의 전당’을 설계한 현대건축가이면서도 ‘도시풍수’ 연구에 몰두해온 그는 청계천 복개문제 등 도시 리노베이션이 쟁점이 되고 있는 요즘, 풍수와 유교의 주역 원리로 서울 재건축 연구에 여념이 없다.
사진을 찍기 위해 북촌의 작은 언덕배기에 자리잡은 ‘아키반 도시건축연구소’ 지붕 위에 올라선 그의 눈앞에는 서울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지난해 가을 20여년 동안 정들었던 대학로를 떠나 북촌의 한옥 2채를 고쳐서 그의 아키반(Archiban) 사무실을 옮긴 것은 옛 서울의 정취가 남은 마지막 섬 같은 곳을 지켜야겠다는 독립군 같은 사명감과 ‘수구초심(首丘初心)’이 어느 정도 뒤섞인 것이었다.
#망가진 2002년의 서울
김석철은 “100년 전까지만 해도 가회동 언덕배기에 서면 한눈에 보였을 서울의 산과 물을 찾을 수 없다”고 한숨지었다. 이제는 남산타워를 봐야 남산의 위치를 알고, 63빌딩으로 한강의 존재를 인식해야 하는 지경이 이르렀기 때문이다. ‘시간은 지나지만 공간은 남기에, 건축가는 시간의 이름으로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그는 믿는다. 그래서 그에게는 시간의 흔적이 사라진 서울의 ‘기억상실’이 더 안타까운 것이다. 그는 오늘의 서울을 이렇게 말한다.
“서울은 형편없이 망가졌다. 도성 안을 활기차게 흐르던 명당수인 청계천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다. 172개의 크고 작은 다리를 거느리고 흘러가던 청계천은 썩은 물이 되어 지하를 흐르며 서울의 하수구로 변했다. 그리고 그 위에는 흉물처럼 청계고가도로가 지나간다. 청계천은 단순한 물의 흐름이 아니라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이 물의 도시이기도 하게 만든 주요소였다. 또한 북악산에서 남산을 거쳐 관악산으로 이르는 남북의 녹지축, 그리고 북악에서 동으로는 낙산, 서로는 안산에 이르는 동서의 녹지축도 숲의 흐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궁궐과 종묘, 사직단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특히 세운상가, 대림상가, 삼풍상가, 진양상가 일대의 거대한 콘크리트군은 북악에서 남산 한옥촌에 이르는 녹지축을 완전히 차단해버렸다”
#풍수와 유교원리에 의한 계획도시, 옛 서울
김씨의 연구소 벽에 걸린 ‘漢城府’라고 쓰인 지도에는 한자와 그림이 한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답고 정교하게 인쇄되어 있다. 그는 ‘아름다운 옛 서울의 풍수원리’를 이렇게 설명했다.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은 북쪽의 북악산, 동쪽의 낙산, 남쪽의 남산, 서쪽의 인왕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다. 이들 산에서 내려오는 개울물을 끌어모아 청계천이 서에서 동으로 흘렀다. 한강은 그 반대인 동에서 서로 흐른다. 이것은 완벽한 명당이다. 한성부의 중심 혈(穴)을 임금이 사는 경복궁으로 볼 때, 뒤로 북현무인 주산(主山) 북악산, 좌청룡인 낙산, 우백호인 안산이 위치하고, 앞에는 남주작에 해당하는 남산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관악산은 임금을 받드는 신하인 조대산(朝對山)이라 할 수 있다. 청계천은 혈의 내부에서 솟아 밖으로 흘러나가는 내수구(內水口)이고, 남산과 관악산 사이로 흐르는 한강은 외수구(外水口)로 볼 수 있다”
그의 설명은 이어진다. 서울은 이렇듯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에 위치했는데 굳이 흠을 잡자면 서측보다 동측, 즉 낙산의 기운이 약하다는 것과 관악산의 ‘火’기가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선조들은 동대문의 현판을 다른 문들처럼 ‘흥인문’이라고 쓰지 않고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는 네 글자로 썼다. ‘之’자는 원래 풍수상 산맥의 모양을 나타내는 문자다. 또 하나의 흠은 남쪽인 ‘火’에 해당하는 관악산 기운이 너무 세어 ‘水’인 북악산의 기를 누른다는 점이다. 남대문인 ‘崇禮門’을 세로로 쓴 이유가 여기에 기인한다. ‘禮’는 주역의 원리상 ‘火’로 풀이되므로 ‘崇’자로 ‘火’의 기운을 누르기 위함이다. 광화문 앞 양쪽에 서있는 해태 역시 관악산의 ‘火’기를 누르기 위해 세운 것이다.
#‘서울 되살리기’-서울시장에 대한 제언
김석철씨는 서울시장에게 호소한다고 했다. 서울 중심부를 다섯 권역으로 나누어 풍수의 원리를 살린 새 얼굴로 만들어 활력을 되돌려놓고 싶어했다.
우선 세종문화대로를 녹지축으로 만들어야 한다. 세종로를 파리의 샹젤리제,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대로처럼 서울의 얼굴로 만드는 것이다. 광화문과 남대문의 왕복 16차선 대로를 정도 당시의 풍수원리를 되살려 북악~광화문~남대문~남산에 이르는 녹지축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둘째는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옛 서울 북촌의 전통가옥 거리를 되살리는 것이다. 북촌에서 이어지는 인사동, 조계사, 동측의 운현궁은 서로 가깝지만 육중한 건물들로 인해 뿔뿔이 차단된 공간이 되어버렸다. 이곳을 ‘특별역사구역’으로 지정해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셋째로는 청계천을 운하로 만드는 것이다. 그는 “동대문에서 배를 타고 서울 4대문 안을 지나갈 수 있게 해야 한다”며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말했다.
넷째는 세운상가와 대림상가, 진양상가 등을 녹색공간으로 리노베이션 하는 것이다. 이 무지막지한 콘크리트 구조체들은 북한산에서 북악산~응봉~인왕산~낙산의 흐름 가운데 청계천을 건너 남산에 닿던 자연의 흐름을 완전히 파괴한 것으로 세운상가가 가장 큰 짐이다.
다섯째는 ‘장충단 문화단지’를 조성하는 일이다. 장충체육관을 다목적 홀로 전환하고, 자유센터 자리로 현대미술관을 이전하며, 국립극장과 자유센터 사이의 도로를 지하화하는 구상이다. 그러면 국립극장과 현대미술관이 한 광장으로 묶이고 타워호텔을 한국전통마을 숙소로 개조한 후, 신라호텔과 동국대가 배후공간이 되도록 하면 서울에서 가장 훌륭한 접근로를 가진 최고의 문화단지가 된다.
“한가한 몽상이 아니라 더 늦기 전에 해내야 하는 프로젝트”라고 그는 말했다.
-[취재수첩]“영종도에 바다의 도시 설계중”-
“영화로도 화제를 모은 책 ‘뷰티풀 마인드’를 한순간도 손에서 떼지 못하고 꼬박 읽었어요. 고교시절의 바로 책 속 주인공처럼 ‘모든 일을 수학적으로 풀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수학에 미쳐 있었거든요”
건축가가 된 것은 절충안이었다. 대학 진학 무렵 밥벌이를 걱정하는 식구들과 자신의 미래를 위한 차선이었다. 밀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자주 갔던 ‘영남루’를 보고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을 건축과의 첫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서울대 공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한국 건축계의 양대 거장이었던 김중업 건축연구소와 김수근 건축연구소를 거쳐 1971년에는 김석철 건축연구소를 설립했다. 3년 뒤에는 ‘아키반’으로 개명했다.
“세종문화회관 현상공모에서 떨어지고 70년대 말까지 10년간은 주택을 지었습니다. 큰 스케일에서 갑자기 줄어드니 당황스러웠지만 건축주들의 평가가 너무 좋았습니다. 실력보다 나이가 적은 것이 문제되었던 현상공모와는 달랐지요”
80년대 이후 김씨는 국내외의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을 맡을 기회를 계속 얻게 되었다. 쿠웨이트의 자하라 주거단지를 시작으로 예술의전당, SBS 탄현스튜디오, 제주 영화박물관, 한국예술종합학교,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명보극장 등이 그의 손을 거쳤다. 현재는 이탈리아 베니스대학과 미 컬럼비아대학 건축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김씨는 요즘 영종도 부근에 동북아의 중심이 될 ‘바다의 도시’를 설계중이고,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인 ‘경주 문화지도’도 곧 완성시킬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