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제31대 왕인 공민왕(1330~1374, 재위 23년)은 14세기 원의 간섭을 뿌리치고 자주국 고려의 위상을 회복한 왕이다. 우리는 그를 ‘자주군주’, ‘개혁군주’로 부른다.
즉위와 동시에 주권 회복 정책을 강력히 추진해 친원파인 기씨(奇氏) 일족을 몰살하고 몽골이 함경도 영흥 이북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설치했던 쌍성총관부를 철폐했으며 빼앗긴 고토를 회복했다. 내부적으로는 권신들 통치기구인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해 귀족들이 뺏은 토지를 원소유자에게 되돌려주고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도 해방시켰다.
‘무인’ 기질이 넘쳤을 것 같지만 사실 공민왕은 예술가적 감성이 풍부해 거칠고 호방한 것을 싫어했다. 고려 왕들 중 유일하게 사냥을 하지 않았으며 말조차 타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서예가였던 공민왕은 그림, 글씨 등 여러 분야에서 걸작을 쏟아냈다.
공민왕이 그린 것으로 알려진 염재신 초상화. 보물1097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기마인물 모습이 가늘고 섬세하면서도 활기에 찬 선으로 생동감 있게 묘사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천산대렵도’가 대표작이다. 공민왕은 산수, 동물, 인물 등 영모화(翎毛畵)에 두루 능했다. 인물화 솜씨도 뛰어났는데 아내인 노국대장공주 초상화를 직접 그렸으며 심지어 자신이 아끼는 신하들에게도 초상화를 제작해 나눠주기까지 했다. 석가모니가 고행림을 나서는 모습을 그린 석가출산상(釋迦出山像) 등 다수의 불화를 남겼으며 글씨에서도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불행히도 이런 작품은 대부분 전하지 않는다.
예술가 삶을 동경했던 공민왕은 평생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노국대장공주와 후궁 6명을 뒀지만 자식은 후궁 반야 소생인 우왕뿐이다. 반야는 신돈의 시비(侍婢) 출신이어서 우왕이 신돈 자식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강력한 정치적 후원자였던 노국대장공주가 사망하고 개혁정책을 전두지휘하던 신돈이 숙청된 후 정치를 멀리하고 술과 남색에 빠져 방황했으며 결국 자신 주변 미소년들에게 살해된다.
조선 중기 문신 김안로는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에서 “아방궁도(阿房宮圖)를 그렸는데 사람이 파리 대가리만 하지만 의관과 신발처럼 털끝 같은 것도 다 그려 넣어서 그 정밀하고 세세하기가 겨룰 자가 없었다. 다만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만 능하지 못했다”고 논평했다.
공민왕 초상화는 조선시대에도 다수 존재했다. 왕조가 바뀌면 전 왕조 어진은 모두 불태우기 마련이다. 그러나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고려 역사가 공민왕대에서 끊겼다면서 그 스스로 공민왕 계승자임을 대외에 적극적으로 알렸고 이런 분위기로 인해 공민왕 초상화는 조선시대에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대원리(현 황해북도 개성시 용흥동) 소재 화장사(華藏寺)에 공민왕 어진이 봉안돼 있었다. 이 사찰은 고려시대 인도 승려 지공(指空)이 머물던 절이다. 화장사 소장 공민왕 진영은 조선시대 시인묵객들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의 존재는 이르게는 중종대 기록에서 나타나며 17~18세기 성행했던 문인들의 송도유람기에 자주 등장한다.
화장산에 봉안됐던 공민왕 진영 얼굴부분. 1916년 유리건판 촬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족실록에는 1540년 화장사에 전해지고 있던 공민왕 영정에 대한 진품 논란이 있었으며 이에 따라 기존에 도화서에 보관되던 공민왕 영정 3척(隻)을 화장사로 돌려보냈다고 쓰여 있다. 또 1607년 송경(松京) 유랑기에는 화장사에 가면 꼭 봐야 하는 보물로 공민왕 화상, 지공의 등신대상, 패엽경과 전단향을 지목했다.
화장사는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불탔고 안타깝게도 이 진영 역시 함께 소실된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 진영의 실체를 알 수 있는 기록과 유물이 일부 남아 있다. 1917년 편찬된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이라는 책은 화장사기를 인용해 공민왕상 한 폭은 길이가 208.2㎝, 폭 154.8㎝라고 기술하고 있다.
1916년 발간된 ‘조선고적도보’에는 당시 화장사 진영이 실려 있다. 조선고적도보는 조선총독부 지원 아래 일본인 학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등이 1915년부터 1935년까지 20년에 걸쳐 낙랑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고적과 유물들 도판을 모아 간행한 책이다.
화장산 봉안 공민왕 영정 전체. 1916년 유리건판 촬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고적도보 속 공민왕 진영은 너무 희미해 구체적인 인상을 확인하기 힘들다. 우측에 고려성군공민대왕진(高麗聖君恭愍大王眞)이라고 쓰여져 있다. 그림 주인공은 병풍이 놓인 공간에서 정면을 바라보며 두 손은 복부 앞에 모아 소맷자락에 넣었다. 머리에는 원유관(遠遊冠·임금이 조하(朝賀)에 나갈 때 쓰던 관)을 착용하고 포(袍)를 입고 있다. 어깨에 수놓은 원형 무늬는 곤룡포를 연상케 하고 가슴 부분엔 관복에 부착하는 흉배가 표현돼 있다. 조선고적도보는 진영을 설명하면서 공민왕이 직접 그렸다는 설을 소개하며 이 같은 주장은 회의적이나 고려말 그림으로 볼 수 있는 우수한 작품이라고 강조한다.
남인의 영수 미수 허목도 화장사 공민왕 진영을 언급했다. 그가 기술한 기언(記言)에는 1667년에서 1672년에 걸쳐 이 화상이 세 차례 언급돼 있다. 그중 눈길이 가는 대목은 공민왕 영정이 남아 있게 된 연유를 설명한 부분인데 허목은 “고려 유민이 비용을 모아 진전(眞殿)에 제사하는 관습이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그림은 오랜 시간 임모(臨摹·베껴서 그림)돼 전해지면서 불화의 요소가 지속적으로 반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홀수 폭으로 병풍이나 신발코를 아래에서 위로 향하게 그린 점 등은 불화성 그림에서 즐겨 사용되는 형식이다. 원유관을 쓰고 왕의 복식을 착용한 제왕의 형상도 왕을 소재로 한 불화와 연관이 깊다고 한다.
조선고적도보 속 초상화는 불분명하지만 유리건판(초기 필름의 일종)이 존재해 좀 더 선명한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014년 ‘유리건판으로 보는 북한의 불교미술’이라는 제목의 사진집을 펴내면서 이 초상화의 이미지를 보다 정밀하게 살린 도판을 공개했다. 초상화는 눈썹 끝은 길게, 수염은 다소 조밀하게 그렸으며 정형화됐다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인상이 부각돼 있다. 눈매가 처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둥글넓적한 느낌의 얼굴 형상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