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수필과비평작가회의 원문보기 글쓴이: 남정언
[수필과비평 12월호 월평]
작은 것에 머문 작가의 시선 / 엄현옥
1. 작은 것과 눈 맞추기
수필은 자기 고백과 일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나 작가는 일상을 그대로 담아내거나 기록에 머무르지 않는다. 수필의 발단은 작가의 일상이라 할지라도 수필가는 그것에서 이탈하려는 빈번한 시도를 일삼는다. 일상을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일상이라는 구심력과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원심력이 상존한다. 수필가는 일상의 이면에 담긴 의미와 가치를 찾아 문학성을 확보한다. 수필이 일상에서 발화되었다 할지라도 내면의 이야기와 작가의 사유가 구체화되고 보편화될 때 타자의 공감을 불러오고 감동은 배가된다.
수필은 작가의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경험은 작가의 인생관과 심미적 관점에서 재구성하고 해석된다.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자신의 경험 안으로만 파고드는 것을 넘어 보편적인 삶의 원리와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다.
흔히 그냥 지나쳐버릴 사물이나 사건들이 수필가의 눈에는 예사롭지 않아 보이기 마련이다. 따라서 작가에게는 대상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작가만의 시선이 필요하다. 수필가 김소운金素雲(1907∼1891)은 “모든 예술의 근간이 인생에 대한 사랑이지만 유독 수필은 ‘사랑’이란 밑거름 없이는 피어나지 않는 꽃이며,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한 인간 세계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고뇌는 커진다.”(김소운,《가난한 날의 행복》 범우사. 1995)고 하였다. 이어서 “자연을 포함한 그 대상이 무엇이던간에, 작가에게 되돌아오는 작가 자신의 그림자가 수필이며, 필자 자신을 드러내는 문학이지만 현학을 드러내거나, 자기 선전이나, 어떤 이득을 계산에 넣은 완곡婉曲한 포석은 품격을 떨어뜨리니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이번 호 월평은 《수필과비평》 11월호에 발표된 작품 중 작은 것에 눈높이를 맞추고 그 대상에 자신을 투사한 작품들에 주목했다. 작가가 면밀히 관찰한 대상은 작은 화초나 곤충이다.대상에 대한 사랑과 관심 없이는 눈에 들어올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인간의 눈에 작고 미미한 존재일 뿐인, 그들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대상에 투영된 성찰을 통해 자아 확인에 이른다. 나아가 눈에 잘 띄지 않는 것들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자기 고백적 기록을 만나게 된다.
경계를 넘어 스스로의 삶을 확장해가는 담쟁이 덩굴(강순지의 〈담쟁이 발걸음〉)과 어머니의 젖내를 물씬 풍기는 분꽃(김재희의 〈분꽃〉), 여리게 보이지만 결코 쓰러지지 않는 화초(모임득의 〈세시화〉)가 있는가 하면, 대로변 횡단보도에서 파닥이는 나비의 날갯짓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조바심(강천의 〈나비의 출근길〉을 따라가 보자.
2. 소소한 것에 의미 부여하기
-강순지의 〈담쟁이 발걸음〉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대상과 다양한 현상은 누군가가 바라보고 공명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담쟁이 발걸음〉은 사계절 모습을 바꾸는 담쟁이의 묘사에서 시작된다. 이어서 잎을 떨군 담쟁이가 벽에 붙어 연명하는 것을 보며 느낀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전개된다. 잎을 떨군 담쟁이가 간신히 벽에 붙어있던 카페에 앉은 작가는 차 한 잔의 향기에 취해 있을 수만은 없는 현실적 고민에 잠긴다.
카페 창가에 앉아 카모마일 한 잔을 주문했다. 차 향기가 처음 왔던 날을 떠올리게 한다. 사직서를 쓰고 책상 서랍에 넣어 놓고 나온 날이었다. 심란한 내게 담쟁이가 들어와 쉬라는 듯이 초록빛 손짓을 했다. 차를 마시며 생각을 정리했다. 고민은 욕심에서 생겨난다는데 가정일과 회사일 사이에서 어느 욕심을 내려놔야 할까. 잦은 야근 때문에 아이들 돌보는 일로 고민이 많던 시기였다.
작가는 워킹맘으로 당면한 갈등에 잠겨 카페의 창문을 열었을 때 담쟁이의 여린 줄기들을 만난다. 줄기와 잎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뿌리 역할을 하는 흡반吸盤에 의지하며 인간힘을 기울이는 담쟁이를 보며 작가는 식물의 고단한 일상을 엿본다. 담쟁이에게 수직의 벽은 위태롭지만 어디든 타고 올라가 뿌리내려야 하는 삶의 현장이며, 최선을 다해야만이 버틸 수 있는 생존의 세계였다.
담쟁이는 의지할 것을 가리지 않는다. 뿌리를 내리는 곳이 그들의 영토가 된다. 삶과 죽음, 낭만과 현실 사이를 잇는 밧줄처럼 줄기를 뻗는다. 평면이건 수직이건 어떤 방향으로든 줄기를 뻗는다. 뿌리를 내리면 어디든 타고 오른다. 암벽은 물론 나무줄기나 건물 외벽, 울타리나 돌담 위도 걷는다. 새벽을 시작하는 서민들의 발걸음처럼 쉬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나아간다. 팍팍한 현실에서 위태롭고 절박한 게 어디 담쟁이 발걸음뿐이랴. 첫차를 타고 가서 막차에 몸을 싣는 일용직 노동자들, 피곤한 몸을 이끌고도 아침이면 출근해야 하는 가장들, 어린 나이에 가장 역할을 해야 하는 소년 소녀들, 보육원을 나와 어른으로 살아야 하는 젊은이들, 힘든 일상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삶 속에도 간절함과 절박함이 녹아있다.
〈담쟁이 발걸음〉은 담쟁이라는 대상에 밀착하여 이미지화와 표상에 도달한다. 담쟁이의 생육 여건에 밀착하여 그것의 특성을 재현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대상에 동화되어 담쟁이와의 감성적 일치를 이룬다. 담쟁이라는 덩굴식물의 특성은 작품 속에서 감성적 공감과 미학적 장치로 작용한다.
이 수필은 작가의 독백과 내면에 머무르지 않고, 대상을 해석하는 통찰력에 의해 사회적인 관심으로 확대된다. 첫차로 일터에 나가 막차로 돌아오는 노동자들과 소년 소녀 가장들, 보육원을 나와 어른으로 살아야 하는 젊은이들, 힘든 일상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삶을 아우른다. 개인의 감성 표출을 넘어 인간 존재의 본질적 결핍뿐만 아니라 삶의 조건으로서 사회 현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작가의 본분이다.
개인의 소소한 일상에서 시작된 내면의 목소리가 개인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문학작품일 수 없다. 개인의 단편적인 일상이지만 타인의 삶을 관찰하고 다채로운 사유의 무늬를 펼칠 때 개별성을 탈피해 구체적 보편성을 획득한다.
이어서 세 아이를 혼자 키우게 된 언니의 모습을 불러온다. 흡반에 의지해 온 힘을 다해 오르는 담쟁이에서 시작된 작가의 시선은 사유의 스펙트럼을 통해 주변부로 확산된다. 작은 것에서 시작되었으나 주변과 전체를 아우르는 구조의 실마리를 놓치지 않고 보편적 의미를 구축했다.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하여 수백의 줄기로 수천 개의 마디로 벽면을 채운다. 붉은 갈색빛의 어린 이파리는 전장의 깃발처럼 바람에 흔들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모세혈관처럼 퍼져있는 줄기의 번식은 삶의 터전을 지켜나가는 성실한 도전이다. (중략)
고난의 시간을 살아낸 이들의 얼굴에는 푸르른 생명력이 있어 좋다. 투박해진 손가락 마디와 얼굴의 주름 사이로 견디고 살아낸 시간이 모여 눈이 부시다. 그들의 걸음은 연대의 행렬이다. 담쟁이가 푸른빛으로 반짝인다.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지켜나가는 모습이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누군가의 얼굴이다.
척박한 벽을 토대로 뻗어나가는 담쟁이의 생명력은 인간 삶의 의지이자 도전의식을 상징한다. 작가에게는 쉼 없이 달려온 시간에 대한 마침표이자 비장의 무기인 사직서가 담긴 흰 봉투가 있다. 더 나은 내일은 위해 사직서의 효력은 아직 발생하지 못했으나, 벽을 넘고자 안간힘을 기울이는 담쟁이의 생명력을 통해 동질감과 용기를 얻는다. 담쟁이처럼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삶이라면 돋보이지 않는다 해도 의미와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삶에서의 고난과 고독은 인간에게 주어진 필연적인 현상이다. 담쟁이의 생존 본능은 작가에게 삶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대상으로 작용한다. 나아가 자신만의 삶의 지향점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생활인으로서의 자세는 존재와 삶에 대한 자각으로 귀결된다. 그 과정에서의 관찰과 묘사, 생태학적 상상력은 지식과 관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작가 자신과 주변인들의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획득한 것이어서 설득력을 더한다.
김재희의 〈분꽃〉
문학 작품 속 모성은 한국인의 보편적 정서를 표현하는데 적절한 소재다. 특히 수필에서는 어머니의 인고의 삶과 무한한 사랑이 화수분처럼 재생산되곤 한다. 가족의 사랑이라는 절대적 가치와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가족 서사는 주제의 보편성과 문학성의 구현에 용이하다.
〈분꽃〉은 이러한 전형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있다. 수필에서 서술자아는 경험자아의 경험에 개입하여 삶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드러낸다. 이야기하는 나인 서술자아와 경험자아는 동일인이지만 시간의 거리에 따라 차이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의 경험자아는 단순한 과거 회상과 기억에 의해 경험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서술자아의 현재 관점에서 과거의 경험을 재구성하고 해석한다.
〈분꽃〉에서의 서술 자아는 유년의 경험 세계에 스며들어 있다. 저녁 무렵이면 작가는 서러워서도, 억울해서도 아닌 허전함에 잠기곤 한다. 그럴 때면 화단의 분꽃에서 큰 위안을 받는다.
큰 딸이면서도 나는 어머니와 그리 살가운 정을 나누지 못했다. 어머니로서는 맨날 병치레만 하는 딸이 그리 미덥지 않으셨는지 마음이 들지 않아 하셨다. 나 또한 그런 어머니에게 곰살맞게 굴지 못했다. 그럴라치면 자꾸 더 야단을 맞고 그것이 억울해서 눈물을 훔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분꽃은 큰 위안이 되어 주었다. 까만 씨 속에 하얀 분말가루처럼 포근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작가는 어머니와의 살가운 정을 나누지 못한 과거의 경험을 서술한다. 세월이 흘러 작가 자신이 어머니라는 자리에 이르렀으나 아직도 당시 어머니의 심정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한국인에게 가족서사와 모성은 명백한 인과관계의 성립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대부분 수필 속의 어머니는 조건 없는 사랑과 희생의 아이콘으로 등장한다. 문학작품 속 모성담론의 실체는 좋은 어머니로 상정된 어머니와, 모성에 숭고함을 품은 딸의 관계의 전형적인 방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어머니이고 딸이면 모두 용서되고 가라앉은 앙금도 사라졌다.
그러나 모든 모녀 관계가 그러한 도식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수필이기에 당연하다는듯 부모에 대한 윤리적 자각과 천편일률적인 반성으로 치닫을 필요는 없다. 〈분꽃〉에서의 어머니는 병약한 딸이 못미더웠다. 그 점이 억울하고 섭섭했던 작가는 자신이 어머니가 되었음에도,어머니에게 애틋함을 갖거나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삶에는 때로 힘이 되는 슬픔이 있다. 숨바꼭질로 묘사된 어머니와의 감정의 엇갈림은 쉽사리 합일점을 찾지 못한다. 작가는 어머니에게 애틋한 마음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지만, 요양원에 가시는 날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나아가 명료하게 설명되지 않는 묘한 감정만 깃들어있는 관계에 자문한다. 때론 요양원 주변을 맴돌다 오고, 명명되지 않는 어머니와의 모종의 감정과 아픔은 삶에 힘을 주기도 한다. 베란다의 분꽃을 심은 이유는 요양원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어머니를 잊지 않으려는 작가의 심정을 대변한다.
그런데 그 감정이 그리 싫지만은 않는 것은 또 무슨 조화일까. 자꾸 삭막해져 가는 마음 구석에 오롯이 남아 촉촉함을 유지해 주고 있다. 사람의 감정이란 꼭 좋은 것만을 생각하고 싶은 것은 아닌가 보다. 마음 아픈 상처도 나름대로 기억하고 싶은 일일 것이다. 아픔이 있었기에 다른 일들이 고맙게 느껴지기도 하고 살아갈 힘이 생기기도 하는 것 같다.
작가 감정의 양가성은 결미에서 두드러진다. 〈분꽃〉에서 엿볼 수 있는 작가정신의 출발은 통속성과 감성의 거부로 보인다. 경험의 특성보다 그것을 해석하는 삶에 대한 보편적 태도는 작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단서로 작용한다. 어머니와의 관계에 대한 고백은 인간 자율성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자아를 재정립하기에 이른다.
수필이 윤리적 성찰을 수반할 수 있으나, 그것이 주제로 작용할 필요는 없다. 모든 수필에서 윤리적 자각과 반성이 뒤따른다면 문학이기보다는 반성의 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윤리적 자아를 드러내거나 지나친 강박으로 과장된 자기 부정과 반성, 상투적 다짐으로 편향되는 경우는 빈번하다.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가족 서사의 전형은 모계 중심이 대부분이다. 가족서사의 기본 인자인 어머니는 모성이라는 보편적 정서의 중심에서 희생을 베푸는 사람이지만, 작가의 시선으로 그려낸 어머니의 도식은 다르다.
〈분꽃〉에서의 모녀관계는 일반적인 통념에서 비켜서있다. 요양원의 어머니에 대한 도리와 연민을 앞세워 무조건의 그리움을 토로하거나 자책하는 일을 자제한다. 자신의 언어로 풀어낸, 삶의 경험을 발효시킨 진솔함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미화되거나 과장되지 않고 작위적인 요소를 걷어낸 모녀 관계가 진정성 있게 다가오는 이유다.
서술자아가 과거의 기억을 서술하는 전개에서 중요한 것은 작품의 주제가 확립되는 기억의 사후성이다. 사후성이 모호할 때 작품속 과거의 기억은 감상적 차원에서 회상에 머무르고 만다. 과거의 사실 자체보다 그것을 구성하고 해석하는 작가의 관점이 중요하다. 수필에서 작가의 해석이 주관적으로 치우치거나 윤리적 자각에 머무를 필요는 없다.
〈분꽃〉의 결미에는 “요즘, 저녁녘이면 베란다에선 어머니의 젖내가 물씬 풍긴다.” 라는 문장을 배치했다. 작가에게는 꽃의 까만 씨 속의 흰 분말가루가 어머니의 젖내처럼 포근함을 주었다. 선뜻 다가갈 수 없었던 어머니와 분꽃과의 대비를 통해 양자가 갖는 공통점을 제시함으로서 주제를 제시한다. 구성의 탄탄한 밀도와 언어의 미적 구조를 읽을 수 있다.
모임득의 〈세시화〉
작가는 친구의 정원에서 오후 세 시에 핀다는 세시화를 발견하다. 그 꽃을 면밀히 관찰한 이유는 인간으로 보면 노년의 시간에 개화하는 특성 때문이다. 누가 바라보지 않아도 다섯 장의 꽃잎을 열었다가 저녁이면 오므라드는 세시화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대상에 대한 관찰과 탐구를 거쳐 자신의 삶과 세시화가 안겨준 의미와 해석에 다다른다.
〈세시화〉에서의 유비類比 구조는 세시화라는 식물과 작가 자신의 유사성을 통해 사유를 확장해 나간다. 세시화와 작가 자신을 동일성을 연결하는 방식을 통해 작가의 정서를 투사한다. 두 대상의 유사성을 통일하는 구조는 직설적인 서술보다 함축적이고 암시적이다. 수필을 일상의 경험에 보편적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라고 할 때 이러한 유비 구조는 주제 전달에 효율적이다. 힘든 시간을 보낸 작가의 경험과 행동은 작가의 의식체계에 의해 세시화에게 전이되며 꽃의 생육 특성에 따른 다양한 은유로 전개된다.
4월부터 11월까지 꽃이 피고 진단다. 꽃봉오리는 왜 하필 오후 세 시 경에 열까. 사람의 인생으로 치면 오후 3시는 딱 내 나이일까. 한낮의 뜨거운 열기가 가라앉은 시간, 강렬하게 내리쬐는 한낮의 태양도 좋지만 한 꺼풀 힘이 사그라진 세시의 빛이 좋아질 나이다. 한창 열정적인 시간은 가고 이제 느긋하게 노을을 보며 차 한 잔 여유 부릴 나이로 가는 시간이다. 청춘을 지나 노년으로 접어드는 시간에 꽃이 피다니. 참으로 신기하다.
식물학자가 기록한 꽃시계에 의하면 꽃들은 저마다 개화 시간이 다르므로 그것을 이용하여 시간을 짐작한다. 개화 시간과 인간의 시간을 비유한 작가는, 자신이 서 있는 현재의 삶의 시간이 어림잡아 세 시라고 자각한다.
여린 듯하면서도 쓰러지지 않으며, 쓰러졌을지라도 다시 일어나는 세시화는 작가가 동일시 하고 싶은 대상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에게 함께 갈 친구가 있음은 큰 위안이다. 세시화의 주인이 작가에게는 그런 사람이다.
내 인생 9시경일 때는 빠른 판단과 행동도 거침없었다. 세상 두려운 것이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이룰 것만 같았던 패기가 있었다. 그 패기가 무모함이 세상과 부딪히면서 적당히 타협하고 조율하며 여기까지 왔다. 딱 세시화가 피는 시간까지.(중략)
눈에 보이지 않는 씨앗이 어디에 숨어 있다가 싹을 틔워 꽃을 피울까. 여리디여린 듯 하늘하늘하면서도 절대 쓰러지지 않는다. 물을 주면 바닥에 쓰러졌다 다시 일어난단다. 나보다 더 씩씩한 화초 같다. 친구도 나도 세시화 피는 오후 세 시 인생을 지나고 있다. 그리 길지 않은 인생, 다섯 시를 지나고 저물녘 노을을 맞이하는 길에 같이 하고 싶다.
세시화라는 식물은 그 자체만으로 고유한 의미로 존재하지만, 작가는 세시화라는 대상을 모방하여 특정한 형식으로 재현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세시화는 작가에 의해 의미의 전이로 인식된다. 〈세시화〉에서 볼 수 있는 유비 구성은 세시화라는 식물의 속성과 작가의 삶의 경험이 나란히 배치되어, 작가가 삶의 의미를 해석하거나 인식하는 방식으로 적용된다.
인간은 자연을 포함한 사물에 무수한 감정을 투사하고 그것들의 다양한 모습에 동화하고 공감한다. 작가는 세시화라는 식물의 특성에 자신의 삶을 투사하고 자기 동일시의 의미화를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육화된 체험을 여과시켜 표출함으로써 감동을 배가시킨다.
강천의 〈나비의 출근길〉
현대인은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 목적지를 향해 서둘러 걷는 것이 일상인 시대이기에,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것들에게 마음을 내주는 일은 쉽지 않다. 〈나비의 출근길〉에서 작가는 사람들이 관심조차 두지 않을 법한 작은 생명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안위를 지켜본다.
건널목으로 날아온 한 마리의 나비가 무단 횡단을 시도한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나비의 날갯짓에 작가 사유의 주파수에 걸려들었다. 이른 아침인지라 이슬 젖은 날개도 말리지 못했을 터였다. 목숨을 건 나비의 이동은 성공할 수 있을까. 왕복 8차선 대로를 앞에 둔 나비는 대형 트럭과 시내버스의 질주에도 살아남아야 한다.
속력을 내며 다가온 트럭과 충돌할 수도 있는 위기상황을 알 리 없는 나비는 앞으로 나아간다. 트럭과 나비가 엇갈린 자리에서, 작가는 연약한 몸으로 생사의 기로에 선 나비가 걱정스럽기만하다.
차선 하나를 겨우 다 건너갈 즈음 이삿짐을 실은 트럭이 속력을 내어 다가온다. 저대로 가다가는 충돌할 것이 뻔한 데도 아는 듯 모르는 듯 앞으로만 나아간다. 휘익 휙, 둘이 엇갈렸다. 부딪혀서 땅에 떨어졌을까, 아니면 아래로 빠져나왔을까. 어디로 갔는지 종적이 묘연하다. 보이지 않는 나비를 찾아 두리번거리다 괜스레 한숨을 내쉰다. 산목숨이라는 것이 이리도 허무한 것을. 미처 알아챌 틈도 없이 생사가 바뀌어버리다니. 나비의 연약한 몸이야, 저 무쇠 덩어리와 스치기만 해도 저승길이 아닌가.
이 모습을 바라본 작가는 그 과정에 관여하게 된 것을 후회했을지 모른다. 지켜볼 뿐 도와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트럭의 돌진에도 살아남은 나비는 저승사자처럼 달려오는 대형버스가 달려오자 작가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버스의 상승기류 때문이었는지 중앙선을 넘어 반대편 도로를 날고 있다. 질주하는 자동차들을 내려다보며 달리는 나비에게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횡단보도에 푸른 등이 들어 왔다. 우르르 사람들이 길을 건넌다. 나는 차마 앞설 수가 없어 맨 뒤에서 미적거린다. 생사를 확인하기가 두려워서다. 나비는 살기 위해 죽음을 무릅쓸 수밖에 없었다. 무엇 때문인지도 모른 채 어느 순간 닥쳐온 풍파에 이끌려 들어가 파닥였다. 살아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불가항력의 재앙 앞에서는 헤어날 도리가 없었다. 어쩌랴, 삶과 죽음은 아등바등 살아가는 모든 생명의 태생적 숙명인 것을. 요행을 바라며 다시 나비를 찾는다. 있다. 보도블록 위에 주저앉아 허덕이고 있다. 나비는 만신창이가 된 날개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 이렇게 살아남았다. 그래, 살아있다는 현실보다 중요한 게 어디에 있으랴. 이제 고난은 끝났으니 네 가고 싶은 곳으로 훨훨 날아가 보렴.
일상의 작은 체험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나비의 출근길〉에서 작가의 촉수는 나비의 진동에너지에 공명한다. 공감을 전제한 공명은 남과 더불어 우는 것이다. 작지만 소중한 생명과 마주친 일상의 순간들을 담고 있지만, 단순한 관찰기가 아니다. 작가는 나비가 위험천만 상황에서 대로를 날아 무사히 살아있는 과정을 지켜보며 나비의 생존에 집중한다. 사물과 현상을 감상하는 차원을 넘어 존재 자체로서 역할을 다하는 나비의 시간을 섬세한 관찰력으로 포착해낸다.
결미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본 무당거미가 관망한 것이 파란 하늘뿐이랴. 작가는 그렇고 그런 문제로 가득 차 있던 세상에서 한 발짝 물러나 지극히 소소하지만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섬세하고 따뜻하게 바라보는 기쁨에 독자는 대리만족할 것이다.
3. 작은 것의 아름다움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은 인생관이나 가치관을 상징하는 문장으로 인용되거나 대중적인 명제로 자리 잡은 적도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줄곧 ‘큰 것이 좋다.’는 사고방식을 유지해 왔다. 경제는 성장해야 하고 부의 획득이 최선의 목표였다.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마허는 더 많은 자원과 효율화를 원하는 주류 경제학의 문제점과 한계를 비판하고, 작은 것, 인간적인 것을 추구하기 위한 대안을 《작은 것이 아름답다》(문예출판. 2002)에 담아냈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각자 나름의 가치와 의미를 갖고 있으며, 세상의 모든 존재는 타자와의 관계 맺음을 통해 존재 가치를 얻는다. 독서광으로 알려진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李德懋는 주변에 존재하는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을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여겼기에 일상 생활에서 마주한 모든 것들이 그의 시의 소재이며 주제였다.
그에게 시는 세상의 모든 존재와 대화하는 방법이며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 통로였다. 이덕무는 벼슬에 나간 이후 ‘매미’라는 시를 통해, 비록 환경이 다르고 처지가 변했다고 해도 매미처럼 향기롭게 살겠다는 자신의 뜻을 표명했다.
실제로 이덕무는 벼슬에 나간 이후에도 자신의 뜻과 기운을 굳건히 지켜나갔다. 쓸쓸한 오두막집에 살면서 빈천을 감내할망정 끝끝내 권력을 쫓아다니거나 부귀를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벼룩이나 매미, 기러기, 고양이, 화초 들은 자연과의 정서적 합일과 타자와 공생하는 삶의 향기가 있다. 이덕무의 시에 나타나는 작은 것의 아름다움은, 작은 것 속에 거대한 것이 있고 작은 세계 속에 큰 세계가 있음을 노래한 것이다.
이덕무는 보통 사람에게는 볼품없어 보이는 작은 것들이 지닌 의미를 세밀하게 관찰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그것들을 통해 인간과 사물의 본질 그리고 세계와 우주의 이치를 꿰뚫어 보았다. 무겁지 않고 인위와 가식이 섞이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후대인들의 공감을 불러오는 것이다. 바쁨을 기본 정서로 장착한 현대인들은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더 많은 것을 취하기 위해 분주히 뛰어다니지만, 스스로 내면의 작은 공간을 채울 풀꽃 하나에도 마음을 주기가 쉽지 않다.
한 편의 수필을 위해 작가는 민감한 촉수로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려 한다. 작은 것들에 집중한 작품 뒤의 작가들도 대상에 감추어진 것들을 찾아 나선다. 주변에 존재하는 소소한 것들을 관찰하고, 그에 대한 울림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작품들은 사소할망정 소중한 일상을 지탱하는 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