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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수카페]산삼을 찾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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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리의 승리(1974년 미국) ↓
“나는 당신들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챔피언이 되겠다. 베트콩은 우리를 검둥이라고 욕하지 않았다. 베트콩과 싸우느니 흑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싸우겠다.” 자신들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소망 , 꿈 , 그리고 이상이 진짜 챔피언을 만든다. [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 ] 내가 뭘 하려는지 아는 사람이 없어요. 미국 사람들은 권투선수를 그다지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죠. 권투가 아니었다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뛰어넘으려고 내가 권투를 한다는 걸 사람들은 몰라요. 권투를 함으로써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멋있어 보이려고 싸우는 게 아닙니다. 여러 가지를 바꾸고 싶을 뿐이에요. .... 나는 내가 조지 포먼을 두들겨주고 주먹으로 세계를 정복해도 우리가 자유로워지지 못한다는 걸 압니다. 나는 내가 이 모든 걸 뛰어넘고 그 이상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걸 압니다. 나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 일생 미국의 권투선수. 1942년 1월 17일 켄터키 주 루이빌에서 태어났다.
흑백 갈등이 첨예했던 미국 사회의 인종 차별에 거침없이 저항하는 발언을 쏟아내며 백인 사회에 적대감을 표출하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고, 블랙 무슬림에 가입하여 이슬람교로 개종하면서 본명 캐시어스 마르셀러스 클레이 2세를 '흑인 노예'의 이름이라며 버리고 무하마드 알리가 되었다. 베트남전 징집영장 거부로 인해 챔피언 벨트를 빼앗기는 등, 여러 사건들 이후 커다란 사회적 이슈의 중심에 서게 된 알리는 일약 흑인 이슬람교도들의 선구자이자 인종 차별이 공공연하게 행해졌던 당대 미국 백인 주류 사회에 반기를 든 흑인 저항 세력들의 영웅으로 부상했다.
열두 살 때 자전거를 훔쳐간 도둑을 때려주기 위해 권투를 시작한 후, 아마추어 권투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총 여섯 번의 켄터키 골든 글러브 타이틀, 두 번의 내셔널 골든 글러브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는 라이트헤비급 금메달을 땄다. 그의 아마추어 전적은 105전 100승 5패였다.
1960년 첫 프로 데뷔전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1963년까지 19전 19승 15케이 오승이라는 쾌거를 이루었다.
1964년 소니 리스턴을 7회 케이오승으로 꺾고 헤비급 세계 챔피언에 올랐지만 베트남 전쟁 당시 징집영장이 발부되자 "베트콩과 싸우느니 흑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싸우겠다."는 말을 남기고 양심적 병역거부를 한 대가로 챔피언 벨트를 빼앗긴다.
그사이 챔피언 벨트는 '무패 철권'의 복서 조지 포먼에게 넘어갔고, 1974년 아프리카 중부 내륙의 자이르공화국(현 콩고민주공화국)의 킨샤사에서 '럼블 인 더 정글'이라 불리는 세기의 대결 후 헤비급 세계 챔피언 자리를 되찾았다. 잠시 신예 리언 스핑크스에게 챔피언 벨트를 빼앗겼지만 리턴 매치에서 승리를 거둬 세 번이나 챔피언 자리에 오르는 최초의 선수가 된다. 통산 전적 61전 56승(37KO) 5패라는 전설적인 기록을 남기고 1981년 은퇴했다. '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는 명언이 나올 정도로 가볍고 경쾌하며 빠른 몸놀림을 구사했던 알리 스타일의 권투는 마치 춤을 추는 것 같다고 묘사되었고, 심지어 아름답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1998년 유엔개발계획(UNDP) 친선대사로 임명, 1999년 BBC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선정 '세기의 스포츠맨'이 되었으며, 2005년 유엔 오토한 평화상 등을 수상했다. ■ 조지 포먼과의 권투시합 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먼, 두 흑인의 권투 시합. 하지만 알리와 포먼은 피부색이 같을 뿐 신념과 가치관에 있어 완벽한 대조를 이루는 양극이었다.
백인 전용 레스토랑에서 출입을 통제당한 후 올림픽에서 딴 금메달을 강에 버려버리는 등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에 강력하게 저항하고 흑인 민권 운동에 앞장서며 백인 종교인 기독교 대신 흑인 이슬람교로 개종하며 본명까지 버린 알리에게 포먼은 자본주의 미국 사회의 백인들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궁극적인 목표가 흑인 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던 알리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미국 국기를 흔들어대며 미국을 경멸하는 말조차 못하게 했던 포먼은 권투경기의 상대 선수로서뿐 아니라, 이념과 신념의 차원에서도 반드시 쓰러뜨려야 할 장애물이었던 것이다.
백인들의 시선을, 같은 인종이지만 자신의 움직임에 동조하지 못하고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소극적인 흑인들의 시선을 바꾸고 개혁하는 것. 그 험난한 고난과 투쟁의 여정 중간 지점에 1974년 자이르공화국 킨샤사에서의 역사적인 경기는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는 하나의 깃발과도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1974년 자이르공화국 킨샤사 알리 측 선수 대기실. 항상 "사방의 벽들아, 내 위대함을 알아다오."라고 외치듯 시끄럽게 떠들어대며 승리를 장담하던 알리와는 달리 전체적인 분위기는 마치 사형장에 끌려가기 직전 죄수의 감옥 같다. 무기 없이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가장 무서운 존재, 케이오로 쓰러져 있는 선수에게도 마지막 확인 사살을 잊지 않았던 잔혹한 복서 조지 포먼과의 경기에서 노쇠한 전 챔피언 알리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알리 측 사람들까지도. 하지만 알리 자신만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마치 주문을 외우듯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그 분위기를 전파하고자 애썼다.
두 육체가 맞붙어 이루어내는 몸의 향연, 20세기 몸의 예술 권투. 가볍고 경쾌하며 빠른 몸놀림, 자신의 몸으로 쏟아지는 공격도 가장 적은 움직임으로 처리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위해 필요한 만큼의 주먹만을 날리며 완벽한 공격과 수비의 조화를 이룬 예술 권투를 구사했던 무하마드 알리의 권투는 일종의 아름다운 춤이었고, 즐거운 자신만의 소명이자 기쁨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공이 울렸다. 같은 극의 자석처럼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공격의 기회만을 살피던 순간, 번개처럼 날아간 알리의 오른손 스트레이트! 일 인치나 반 인치 차이로 승부가 결정되는 권투경기에서 거의 모든 자세에서 왼손보다 목표까지 최소한 한 걸음 이상 거리가 먼 오른손 주먹으로 경기를 시작한 선수는 이제껏 아무도 없었다. 그것도 성난 황소처럼 달려들어 파괴적인 주먹을 퍼붓는 조지 포먼을 상대로 한 경기에서. 그리고 그때부터 모두의 예상과는 다른 경기가 펼쳐지기 시작하고 알리의 승리로 끝났다.
비록 1984년 은퇴 몇 년 뒤 파킨슨 병 진단을 받은 후 오랜 기간 투병으로 거동도 불편하고 예전의 날랜 퓨마 같은 모습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를 영원히 새로운 변화를 향해 나아가는 '영웅'이자, 미국 흑인들을 있게 한 '선구자'로 기억하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