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서울대학교 박훈씨가 "영작과 회화를 위해 다독을..." 이라는 제목으로 쓰신 글을 인용한 것입니다. 독해 실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다독이 최선이라는 제안을 하고 있는 안정효씨의 의견을 많이 반영했는데, 평소의 제 의견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 수긍이 갑니다. 모쪼록 도움이 되시길...
이 글은 인터넷에 뜬 글이 아니고, 안정효 씨가 자기 책 '안정효의 영어 길들이기 - 영작편'에서 <눈 뜨는 책읽기>라는 제목으로 '산 영어 실력'을 기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저도 이 방법을 써서(물론 소설만 읽은 것은 아니고 각종 잡지 등도 읽으며 '다독'을 위한 노력을 경주했습니다.), 남들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예전의 저보다는 영어를 잘하게 되었다고 믿습니다.
안정효씨가 '나 잘났다. 나 영어 잘한다.'고 잘난 체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사람 영어 잘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작년에 나온 번역 전문지 '미메시스'에서 한국의 내로라 하는 번역가들에게 한국에서 가장 번역이 잘된 책을 꼽아보라고 했을 때, 소설가 이윤기씨가 번역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더불어 안정효씨가 번역한 가브리엘 마르께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이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번역'은 한국어 실력도 포함된 것이지만, 안정효씨가 영어 잘하는 한 증거는 되지 않겠습니까? 시간이 없어서 급히 입력하다가 틀린 부분이 있을 텐데, 양해 바랍니다.
오직 그것만이 '산 영어'라고 많은 사람이 착각하는 '생활 영어', 그러니까 하루살이 품팔이를 하듯이 귀로 듣고 머리에 담아서 삭일 필요가 없이 입으로 말하는 영어만 공부했다가는 너도나도 영어 문맹자가 될 것이다. 미국 사람은 누구나 다 영어를 유창하게 잘 하지만 문맹자가 그렇게 많지 않은가. 입과 귀만을 연결하는 영어라면 기초 영어는 될지언정 참된 '산 영어'는 아니다.
그러니까 결국 눈으로 읽고 손으로 쓰는 또 다른 '산 영어'를 배워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남이 써 놓은 훌륭한 글을 많이 읽고 좋은 글을 쓰는 능력을 습득해야 하며, 이 책은 바로 그것을 소기의 목적으로 삼는다.
'번역편'에서도 이미 얘기한 바가 있지만, 나는 공부를 위한 책읽기에서는 사전을 찾지 않는 독서를 해야 한다고 믿는다. 사전을 안 찾고 영어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할지언정 그래도 읽어냈다는 성취감이 만만치 않으며, 단어를 찾고 내용을 자세히 이해해야 한다는 부담스러운 의무감도 없어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사전을 안찾으면 많은 단어의 의미를 모르기 대문에 소설이 안 읽힐 것 같아서 엄두를 못 낼지 모르지만, 아마도 나 자신만큼은 사전을 안찾고 많은 책을 읽었기 때문에 영어를 더 쉽게 이해하고 더 빨리 배우지 않았나 생각된다.
나도 고3 때는 남들처럼 무식하게 영한사전을 통째로 외우려고 덤비기가지 했지만, 서강대학교를 다니던 시절 나의 영어 글쓰기를 각별히 돌봐 주시던 번브락 신부(John E. bernbrock, S. J.)가 가르쳐 준 책읽기 방법이야말로 참으로 효과적인 길잡이였다.
뜻도 모르면서 책을 마구 읽어나가는 기간이 처음에는 낭비처럼 여겨질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언어 배우기의 터 잡기요 땅 다지기를 위한 기간이며, 나도 모르게 연습을 계속하는 과정이다. 처음 두세 권을 읽어 내는 동안은 정말로 도대체 책의 내용이 무슨 얘기인지도 모르겠지만, 얼마 안 가서 신기하게도 차차 전체적인 의미가 드러나 보이기 때문이다. 나뭇잎은 잘 안보여 헤아릴 수가 없어도, 어쟀든 나무의 윤곽이 대충 보인다는 듯이다.
그렇게 책읽기를 계속하면, 너댓 권으로 접어들 무렵부터 어느새 줄거리와 상황의 전개가 조금씩 이해되고, 드디어 눈으로만 익혔던 어휘가 하나 둘 저절로 의미를 드러낸다. 한 한 번도 사전에서 찾아보지 않은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뜻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그러다가 작품의 이해를 위해서 정말로 중요한 어휘이거나 궁금해서 알아보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단어를 사전에서 하나 찾아볼 대, 그 때는 사전에서 펼쳐 놓은 쪽의 단어를 주욱 훑어내려가 보라. 그러면 눈으로만 익혔던 수많은 단어가 줄지어 나타나고, "아하, 이런 의미이리라고 막연히 짐작했었는데 역시!"라는 깨침이 온다.
이렇게 '감'으로 익혀 배운 어휘는 그냥 줄줄이 암기해서 배운 단어하고는 달라서 절대로 잊혀지지가 않고, 여기에서부터 어휘력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단어의 접두어나 접미어 등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를 나도 모르게 터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책읽기에서 어떤 경지에 이르고, 시야가 훤히 트인다.
대학 시절에 내가 실제로 익혔던 이런 독서법은 나에게 부수적인 혜택도 가져다 주었다. 영문과의 다른 학생들이 시험 때만 되면 누가 무슨 작품을 썼나 제목을 암기하느라고 바쁜 사이에 나는 아예 작품을 모조리 읽어버렸기 때문에, "<사랑하는 시바여 돌아오라(Come Back, Little Sheba)>는 <피크닉>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윌리엄 인지의 히곡이다."라는 사실을 암기하느라고 다른 아이들이 애를 먹는 동안 나는 <피크닉>과 <사랑하는 시바여 돌아오라>를 통째로 읽어버리고는 했으니, 시골에서 가을 벼에 붙은 메뚜기를 잡으러 다닌 아이와 서울에서 처음 내려가 벼를 보고 '쌀나무'라고 그랬다는 아이의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경쟁자가 별로 개인차를 보이지 않는 수준이라면 질보다는 양의 경쟁이기가 쉽고, 어쨌든 이렇게 양적인 책읽기를 하고 나면 언어 연령이 어느새 일곱 살 취학기가 되고, 그러면 이제부터는 체계적인 공부가 필요하다.
언어 배우기는 바둑이나 마찬가지이다. 18급일 때는 아무리 많은 바둑책과 기보를 보고 암기해도 겨우 이해했다가는 곧 잊어버리기가 쉽지만, '싸움바둑'으로 무수한 실전을 거쳐 13급 정도까지 큰 다음 책을 읽으면 모든 얘기가 얼마나 쏙쏙 머리에 잘 들어오는가.
그래서 다음 얘기로 넘어가기 전에 여기서 책읽기에 대한 안내삼아 1백 권(시간이 없어서 1백 권을 입력할 수는 없습니다만, 안정효씨는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의 책은 거의 다 처음 영어 공부에 좋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책을 보세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 꼭 소설이 아니더라도 좋은 글은 많이 접할 수 있습니다. 'Atlantic Monthly'나 'The New Yorker', 'Economist' 등에 실리는 글도 참 좋지요. 뉴요커 외에는 인터넷에서 본문을 공짜로 볼 수도 있고요. 나중에 이에 대해 얘기해 보지요.)의 책을 추천하겠다. 교보문고 외서부에만 가도 읽을 만한 좋은 책이 얼마든지 널렸지만, 여기에 추천한 목록은 내가 직접 읽어 본 책 가운데 사전을 찾지 않고도 읽기에 비교적 수월할 뿐 아니라, 널리 알려진 작품이어서 이미 우리말로 읽어 봤다면 이해가 그만큼 더 쉬우리라는 점도 고려했으며, 또한 문학성이 높고 우리 정서에 잘 맞는 작품을 골랐기 때문에 우리말로 번역이 되지 않은 경우에는 남들이 접하지 못한 숨겨진 작품을 읽어냈다는 기쁨도 얻게 되리라고 기대한다. 우리말 제목이 붙지 않은 경우는 우리 나라에서 아직 번역이 되지 않은 작품임을 의미한다.
만일 사전을 찾지 않으면서 다음에 추천한 책을 1년이나 2년쯤 걸려 모조리 읽어낸다면, 틀리없이 자신의 영어가 두드러지게 달라졌음을 느끼리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책을 언제 다 읽느냐고 기가 질리거나 포기하려는 독자라면 그만큼의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고 영어로 좋은 들을 쓰고 싶다는 달콤한 결과만 꿈꾼다는 것은 과욕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싶다.
마음을 다져 먹고 하루에 한 권씩만 읽기 시작한다면 1백 권을 읽어내는 데 필요한 기간은 3개월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러고도 70 인생에서는 69년 9개월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