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총리와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주호영 특임장관, 민주당의 이강래 원내대표, 정대철 고문, 박선숙·김영환 의원, 한나라당 전여옥·홍정욱 의원, 여자 프로골퍼 서희경씨, 선동열 삼성 라이온스 감독, 이을용 강원 FC 축구선수, 모철민 국립중앙도서관장, SK 와이번스 김성근 감독, 주부 김가혜(29)씨, 대학생 조은혜(20)씨 등 137명이 설문에 성실히 답해 줬다.
20대든 40대든 60대든, 그들은 살아오면서 “어머니가 위대하다”고 느꼈던 순간을 삶의 에너지원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피폐했던 1960~80년대 한국 상황과 얽혀 있었다. 가족의 생존을 위한 전쟁터에서 어머니는 좌절이 아닌, 미래를 얘기했다. 강인한 정신력을 심어 주고자 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내가 살아가는 긍정의 힘’이고 ‘내가 갈 길’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엄마가 유방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힘들게 적응한 유학 생활을 포기하고 곁에 있어 드리고도 싶었지만 어머니는 괜찮다고 했다. 내가 공부하는 동안 투병 과정에 관한 어떤 얘기도 해 주지 않았다. 5년여 힘든 싸움 끝에 완쾌 판정을 받았다. 공부하는 자식을 위해 하나도 내색하지 않고 암을 이겨 내신 어머니의 강한 정신력은 내게 큰 가르침이었다.”(홍정욱 의원)
선동열 감독도 비슷한 경험을 얘기했다. “96년 일본 진출이 결정됐는데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고 갈 수 있도록 끝까지 눈물을 감추려 하셨던 어머니를 잊을 수 없다. 어머니는 암 말기로 사형선고를 받고 계셨는데 생전에 아들을 마지막으로 보는 시간일 줄 아시면서도 내가 맘 편히 못 갈까 봐 끝까지 의연하셨다.”
조현중 문화재청 과장의 얘기는 누구나 한 번쯤 느꼈던 경험이다. “어린 시절 아파서 앓다가 지쳐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염려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을 봤다."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 따뜻한 힘을 느꼈던 기억들이다. 엄마의 힘에 있어 정수는 ‘희생’과 ‘모성애’였다. 자식을 위해선 어떤 희생도 감내했던 이가 엄마였다. ‘대한민국 엄마의 가장 강한 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희생’이라고 답한 응답자가 65명이나 됐다. ‘모성애’라고 답한 이는 27명이었고 ‘인내’(12명), ‘생활력’(10명), ‘교육열’(10명) 순으로 답이 나왔다.
표현은 달랐지만 모성애나 인내·생활력 역시 희생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137명의 사연을 담은 설문은 한편 가슴 저린 편지였다. 자식들은 애잔한 마음으로 엄마를 바라보고 기억했다. 정운찬 총리의 어머니는 희생하는 엄마의 전형에 가깝다. “가난 때문에 상경했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게다가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다섯 자식을 건사하는 것은 전적으로 어머님 몫이 됐다.
그 뒤부터 어머님이 편하게 자리에 누운 모습을 보지 못했다. 늦은 밤까지 삯바느질을 하셨고, 새벽에는 얼음을 깨고 남의 집 빨래를 했다. 설핏 새벽에 잠이 깨면 어머님은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를 했다. 굉장한 기원도 아니었다. ‘어린 자식들 건강하고 남들에게 크게 폐 끼치지 않고 살게 해 주십시오’라고.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찡하다.”
세대에 따라 엄마의 힘은 조금 다른 모습으로 비쳤다. 대학원생 손주연(27)씨는 “초등학교 때 외국에서 학교를 다녔다. 나는 영어를 했지만 엄마는 못했다. 선생님과 면담하는 날이 왔다. 부모가 영어를 못하면 면담을 안 할 수도 있었다. 근데 엄마는 학교에 가 손짓·발짓으로 선생님과 면담을 했다. 부끄럽고 힘들었을 텐데 딸을 위해 엄마는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
‘나에게 엄마는 OOO 다’는 항목에서는 ‘엄마는 연민’이란 답이 가장 많았다. 자신과 가족을 위해 희생한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이 자식들에게 깊이 배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주호영 장관 등 12명이 ‘연민’ ‘미안함’ ‘안타까움’ ‘눈물’이라고 썼다. 이어 ‘힘’이라고 답안 이가 8명이었다. 정대철 고문은 ‘용기와 자신감을 주는 힘’이라 했고 프로골퍼 서희경씨는 ‘에너지’라고 엄마를 정의했다.
그리고 엄마를 ‘고향’ ‘집’ ‘베프(가장 친한 친구)’라고 한 사람들도 꽤 있었다. 유명환 외교부 장관은 ‘인내심의 상징’, 박선숙 민주당 의원은 '아무리 해도 넘지 못할 높은산'이라고 했다. 선동열 감독은 ‘내 인생의 감독’이라고 했고, 사진작가 조세현씨는 ‘내 그림자’라고 썼다.
신의 손길이 못 미치는 곳에 신은 엄마를 보냈다
세계 최빈국에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유치할 정도로 대한민국이 성장한 배경에는 엄마들의 침묵의 희생, 뜨거운 교육열이 있기에 가능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든 ‘역사’다.중앙SUNDAY가 각계 인사와 일반인 137명에게 보낸 ‘엄마의 힘’ 설문조사에서 ‘엄마의 힘’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누구였을까. 단연 “우리 엄마”가 압도적이었다. 어머니는 존재 그 자체로, 매 순간 위대하다고 했다. 몸이 아프나 비가 오나 자식을 위해 기도하시는 어머니. 아버지가 노름으로 재산을 탕진했을 때도 초인적인 힘으로 자식들을 공부시킨 어머니기에 그렇다.
“이젠 쉴 란다” 하면서도 딸 넷의 손자·손녀까지 돌봐주시는, 아픔은 삭이면서 자식 일이라면 조그마한 일도 크게 기뻐하는 어머니이기에 그렇다. 자신이 보신탕을 전혀 먹지 않으면서도 가족들이 좋아한다면 척척 끓여대는 어머니다. “삭풍이 부는 겨울날 연탄 갈아 주는 소리” “다친 나를 안고 고갯길을 넘어갈 때 품에서 배어 나오던 음식 냄새와 엄마의 단숨”은 그 시절을 회고하는 자식들에겐 아련한 슬픔으로 다가온다.
‘우리 엄마’ 다음으로 응답자들은 신사임당과 한석봉의 어머니를 꼽았다. ‘솔선수범’의 리더십으로 자신을 단련시키며 아들을 가르쳤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다음은 김연아 선수의 어머니 박미희씨였고, 그 뒤를 영화 ‘말아톤’의 실제 주인공인 배형진씨의 어머니 박미경씨가 이었다. 주호영 특임장관은 “장애인 아들보다 하루만 더 살게 해 달라는 박씨의 애절한 소원은 우리 어머니의 자식 사랑과 걱정을 간절히 드러낸 것”이라고 했다. 다음은 영화배우 김혜자씨가 ‘엄마의 힘’ 하면 떠오르는 인물로 꼽혔다. “드라마 전원일기와 영화 ‘마더’ 등에서 ‘소름 돋는 엄마스러움’을 보여 줬다”(박선숙 민주당 의원)는 것이다.
1960~80년대 한국 사회의 척박한 상황을 견뎌 낸 40~60대 응답자들이 들꽃 같은 생명력으로 생활고 속에 자식들을 공부시킨 어머니를 돌아본 반면 20~30대 응답자들은 조금 달랐다. “초보 운전 딱지를 붙이고 오전 1시까지 학원으로 데리러 온 열성” “맞벌이하시면서 아침을 꼭 챙겨 주신 정성” “외국 생활 때 영어를 모르시는 어머니가 자존심을 접고 자식을 위해 열심히 뛰신 것” 등이다. 심화되고 있는 교육전쟁 속에서 엄마들의 비즈니스적 감각이 투영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과연 우리 어머니들은 행복한가. 많은 응답자가 어머니의 기도,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으로 오늘의 내가 있다고 얘기했지만 이젠 대한민국 어머니의 모성을 다른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대한민국 어머니들의 강인한 모성이 뜨거운 한국인의 피에 담긴 DNA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 DNA가 형성된 역사적·사회제도적 측면도 봐야 한다는 것이다. 30대 회사원 이정미씨는 “한국 엄마들의 자식에 대한 집착이 남다른 것은 선진국처럼 훌륭한 인재나 장애아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제도가 마련돼 있지 않아 엄마 개인의 힘으로 돌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40대 정혜승씨도 “엄마가 엄청 무리하고 뭔가를 희생하는 게 유의미하게 해석돼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며 “엄마는 강하니까 힘들어도 참고 해내야 한다는 식의 논리가 싫다”고 말했다.
그는 “엄마의 힘은 내 아이뿐 아니라 남의 아이, 다음 세대를 모두 품어야 마땅하다. 엄마들의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교육열을 공동체적인 교육열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했다.설문 결과를 취합하던 날 ‘어머니의 힘’ 설문 요청을 받은 김모 교수가 “며칠간 고민을 했다”며 편지를 보내왔다.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있는 그는 이렇게 썼다. “대한민국은 지난 60년간 괄목할 만한 근대화·선진화를 이뤄 냈다. 그 바탕에는 어머니들의 희생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머니의 힘이 아니라 ‘온전한 희생’으로 이뤄진 것은 아닌지를 묻고 싶다. 어머니의 힘이라는 찬사 뒤에 감춰진 어두운 면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가족의 행복을 뒤로한 채 기러기로 헤어져 외국에서 자식 교육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한국 어머니들의 예도 들었다. 그는 사회는 가족 구성원 모두가 평등하게 행복을 나눠 가질 수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 우리 사회는 그런가라는 문제 제기였다. 강원대 박정애 교수도 “한국에서 엄마와 자식은(엄마는 강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너무 ‘중독’돼 있다”고 했다.
타당한 얘기다. 출산율이 떨어지고 1인 가족이 늘어나는 것도 엄마들이 물려준 ‘희생의 유산’이 너무 커서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2010년 5월, 한국 엄마들의 치열한 24시는 계속되고 있다. 교육열의 대명사 ‘대치동 엄마’들은 프로의 경지로 자녀 교육에 올인하고 있고, 손지영(44)씨는 장애 아들을 기적의 힘으로 키우고 있다(22~23면). 손씨는 “나와 같은 길을 걷는 엄마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취재요청에 응한다”고 했다
"자식을 키워보니 엄마는 언제나 위대한 존재였다"우리 엄마가 가장 위대해 보였을 때김수정 기자 sujeong@joongang.co.kr | 제164호 | 20100501 입력
유명환 장관 '병석에서도 자식위해 웃는 얼굴' 유명환(64) 외교통상부 장관은 8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회고했다. 유 장관은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신자셨고 나는 교회에 다녔는데 ‘한 집안에는 한 종교를 갖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 한 차례만 하셨을 뿐이다. 자식을 위한 당신의 정성 어린 기도를 계속하셨다”고 했다. 유 장관은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에도 자식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 늘 웃음을 잃지 않으셨다"고 했다. 주호영 특임 장관도 칠순을 넘긴 어머니의 기도를 꼽았다. 주 장관은 “무릎 관절이 온전치 않아 제대로 걷지도 못하시면서 몇 해 전 젊은이들도 힘들다는 설악산 봉정암으로 가족을 위해 기도하려 가셨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기도가 주는 힘은 세대를 초월했다. 회사원 문정윤(29)씨. “고3 때 부모님과 대구 팔공산에 갔는데, 살을 에는 추위였다. 바깥에 나갈 생각을 못하고 숙소로 들어갔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머니가 산 정상 부처님 앞에서 나를 위해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밴쿠버 겨울올핌픽 은메달리스트 성시백 선수는 “어머니는 올림픽이 열리기 전 절에서 3000배를 하시고 밴쿠버에 와서도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고 절에서 사셨다”며 “그 얘기를 듣고 눈물을 쏟았다”고 말했다. 응답자들의 상당수가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를 힘의 원천으로 꼽았다. 이을용 선수 대학실패 가출 '그래도 믿는다' 어머니들은 자식의 선택을 믿고 지원했다. 시민단체 간사 이희수(44)씨는 “아버지는 받아들이지 않았을 선택을 엄마는 이해하고 수용했다”고 했다. 20대 이주성씨는 “동생이 유학 간다고 하니 다들 말렸는데 어머니만 ‘우리 아이는 큰물에 데려다 놓으면 크게 될 아이’라며 지지했다”며 “어머니의 결단은 위대하다”고 했다. 채윤희 대표도 “20대에 가장이 된 오빠에게 큰아버지가 빨리 취직하라고 했을 때 엄마는 ‘아이들은 자기가 꿈꾸던 일을 해야 한다’며 오빠의 연극을 지원해줬다”고 했다. “청년 실업 이야기로 사회가 시끄러워도 엄마는 우리 3남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도와주고 용기를 준다.” 조은혜(20)씨 얘기다. ‘나는 너를 믿는다’는 엄마의 메시지는 길 잃은 아들을 되돌아오게 하는 마법사였다. 치과의사 백승엽(42)씨는 “중1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평범한 주부였던 어머니가 자식들을 다 키우기엔 역부족이어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몇 년을 친구집에 얹혀 살면서 나는 전형적인 비행 청소년이 돼갔다. 고3이 막 됐을 때 찾아오신 어머니를 ‘잔소리나 하겠구나’ 하고 시큰둥한 표정으로 맞았다. 어머니는 나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오직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하셨다. 3시간 동안…. 그 이후 난 새사람이 됐다.” 40대 황모 교수는 “초등학교 때 용돈을 벌기 위해 신문 배달을 시작했는데, 며칠 만에 힘들어서 못 가겠다고 하자 어머니께서 대신 배달을 나가겠다고 해 함께 나갔다. 자식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러셨는데, 한번씩 추운 새벽에 깨면 신문 배달을 가자며 나를 깨우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는 사연을 보내왔다. 프로야구 SK 와이번즈의 김성근(68) 감독은 “한국으로 떠나올 때 (재일교포인) 어머니가 속이 타고 괴로웠을 텐데 내가 부담을 갖지 않도록 강인한 모습을 보이셨다”며 그때 그 모습이 자신의 삶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김군호(49) FN가이드 사장은 어머니가 분노와 슬픔이 교차된 표정으로 회초리를 들었던 순간을 잊지 못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우리 반에는 가게에 가서 물건 훔치는 것을 자랑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문방구에서 내 역할은 이것 저것 달라며 정신을 분산시키는 역할이었다. 나중에 ‘공로’를 인정받아 지우개를 받았다. 신나고 짜릿한 경험이었다. 집에 가서 엄마에게 자랑했는데…. 어머니의 따가운 회초리, 눈물 어린 설득, 그것은 이후 내 삶의 가치 판단 기준이 됐다.” 김주성 선수'척추장애 어머니가 업고 다녀' 많은 응답자들은 자라면서 어머니에게서 초인의 힘을 느꼈다고 했다. 강원대 박정애(40)교수는 “7살 때 명절에 사촌 오빠가 야구선수 흉내를 내며 휘두른 빨래 방망이에 맞고 쓰러졌다. 고관절로 평생 다리를 절며 살던 어머니가 나를 안고 2시간 걸리는 읍내병원까지 달렸다. 지금도 이마의 상처를 만지면 그때 엄마에게서 나던 음식 냄새, 땀 냄새, 단숨이 생각난다”고 했다. 대학원생 강나리(25)씨는 “6살 때 목욕탕 물에 빠졌는데 어머니가 물속으로 뛰어들어오다 발톱이 빠져 피가 철철 나는데도 놀란 나를 안아 다독여 줬다”며 엄마의 힘을 느낀 순간을 얘기했다. “초등학교 때 엄마가 큰 수술을 하셨는데, 수술 부위가 잘못돼 피가 솟구치는데도 우리가 놀랄까 봐 침대 시트로 꾹 누르고 우리를 바깥으로 내보내셨다. 초인적인 힘이었다.” 민유정(35)씨 얘기다. 권태명(51) 삼성화재 상무는 “중학생 때 다리를 다쳤는데 쉰을 훌쩍 넘긴 연세의 어머니가 15리가 넘는 병원까지 업고 뛰어가신 게 생각난다”고 했다. 농구선수 김주성(31)씨의 어머니는 척추 장애가 있다. “허리가 아픈 어머니가 키가 큰 나를 업고 키우셨다. 학교에 오셔도 당당하게 오셨다. 부모님이 창피한 적도 없진 않았다. 그러나 부모님은 당신의 장애 때문에 내가 피해볼까 봐 더 당당하게 하셨다. 동시에 남에게 절대 피해주는 행동은 하지 말라고 하셨고 나는 그렇게 자랐다. 뭐든 열심히 했다.” 김주성 선수는 "내가 아이를 낳아 보니 어머니가 키 큰 나를 업고 키우신 의미를 알겠다"고 했다. 전여옥(51) 한나라당 의원은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조차 꺼리는 어머니가 총선 때 가게마다 방문하며 나를 위해 적극적인 선거운동을 하셨을 때 내 어머니의 위대함을 느꼈다”고 한다. 김용범 씨 '새벽에 나가 밤 11시까지 공장일' “대학에 가라. 못 배운 거 후회한다. 나는 못 배웠지만 너희는 배웠으면 좋겠다. 학비는 내가 알아서 하마.” 30대 회사원 김모씨는 강원도 태백 산골의 광부로 일한 아버지의 수입으론 생계 꾸리기도 힘든 상황에서 형제 3명이 동시에 대학에 다녔다고 했다. 어머니의 결단과 희생 덕이었다. 어머니는 새벽에 우유 배달을 하고 오전에는 아파트 청소를, 오후엔 식당일을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했다고 한다. 말기 유방암과 싸우고 있다는 50대 장명숙씨는 “아버지가 빚 보증을 잘못 서서 망할 순간에도 엄마는 흔들리지 않고 가족들을 다독였다”며 눈물을 흘렸다. 이강래(57) 민주당 원내대표도 “어머니의 희생과 인내로 어려운 시절 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했다. 남상명(62)씨는 “50년 전 태풍 사라를 만나 우리집의 모든 것이 파괴돼 8식구가 거리에 나앉게 됐을 때 평소 단아하던 어머니가 아버지를 설득, 장사길로 나섰고 나를 유학까지 보냈다”고 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사별하고 여러 명의 자식들을 키워온 삶 자체를 ‘엄마의 힘’으로 꼽은 이들도 많았다. 회사원 김우용(35)씨는 “중학교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입원해 생계가 막막했을 때 사회 생활 경험이 없던 어머니가 한 치 망설임 없이 운전면허증을 따서 직접 운전을 하며 거래처를 유지했던 때”를 기억했다. 김용범(36)씨는 아버지가 병으로 쓰러진 뒤 굉음과 분진이 가득한 공장에서 꽃다운 청춘을 다 바친 어머니를 기렸다. “새벽 6시에 가족들 아침식사를 챙겨 놓고 일을 나가 밤 11시가 넘어서야 들어오셨다. 퇴근길에 단팥빵을 잘 사오셨는데 철없던 시절, 늦은 밤에 먹는 그 간식이 나는 그저 맛있을 뿐이었다.” 모철민(51) 국립중앙도서관장도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신 뒤 어머니가 가족 대소사를 다 책임지셨다”고 했다. 자식을 넘어서 가족 전체에 대한 헌신으로 어머니의 힘을 기리는 이가 적지 않았다. ㈜예라고 허은아 대표는 “어머니는 아버지가 암에 걸렸을 때 헌신적으로 간호해 살려냈다”고 했다. 공무원 문영신(29)씨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고혈압과 당뇨, 폐암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10년 동안 간호하고 결혼 안 한 고모까지 간병한 어머니가 정말 위대하다”고 했다.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우리 어머니의 위대함을 느낀 경우도 꽤 있었다. 권혁용(43) 고려대 교수, 주부 김미연(45)씨, 교사 정명순(64)씨, 구재상(46) 미래에셋 자산운용 사장, 서효중(42) 가톨릭대 교수, 여자 프로농구 신한은행 플레잉 코치 전주원(38)씨 등. 이재성(40) 엔씨소프트 상무는 “자식을 키워보니 매 순간 어머니의 위대함을 생각케 된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