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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프랑스 유럽 언어문화 기행문-
14일을 회상하다
불어불문학과 박보화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2002년 여름, 태양마저 삼켜 버릴 듯한 열기가 대한민국을 뒤덮었다. 빨갱이 같다며 빨간색을 의식적으로 피하고 축구라면 브라질의 호나우두 밖에 모르던 나도 붉은 악마에 묻혀 한국 축구를 응원하고 있었다. 당시 고3이었던 나는 학업도 응원도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었다. 그 덕분에 남은 거라곤 물 빠진 빨간 티와 직선으로 추락해버린 나의 모의고사 점수였다. 그러나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월드컵이 끝날 때 쯤 다음 월드컵 개최국이 독일이라는 것을 듣고 무슨 일이 있어도 2006년에는 유럽에서 직접 축구를 느껴보고자 다짐을 했다.
그리고 6개월 뒤 운명처럼 나는 창원대 불어불문학과의 합격통지서를 손에 쥐고 있었고 유럽은 지도의 한 부분이 아니라 내 인생의 한 부분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꼭 내 손으로 벌어서 배낭 메고 떠나고자 했던 당초 계획에서는 수정이 되었지만 2006년 여름에 유럽을 밟겠다는 내 희망은 이루어 진 것이다. 지금 아니면 언제 가보겠냐는 가족들의 격려 덕에 순조롭게 준비할 수 있었다.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나고 여행 가방 속을 하나씩 채우면서 비로소 떠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여행 가방이 조금씩 채워질 때마다 마음은 더욱 더 설렜다. 내가 무엇을 보고 어떤 것을 경험하게 될까? 벅차오르는 가슴을 붙잡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기다리며 운명의 그 날만을 기다렸다.
프랑스로 떠나는 비행기 안
6월 24일. 드디어 오고야 말았다. 전 날 소주와 라면, 햇반, 고추장으로 가득 채운 여행 가방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시간이 빨리 가지 않음을 원망했다. 창원고속버스터미널에서 1시 차를 타고 서울로 떠나야 했기 때문에 오전 시간은 정말이지 길게만 느껴졌다. 12시를 갓 넘겼을 쯤 여행 가방을 끌고 터미널로 향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고 또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설명회 때 본 사람도 있었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앞으로 같이 여행해야 할 친구들이다. 보자마자 친해질 수 있을까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드디어 1시. 모두들 서울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약 4시간 30분 후에 우리는 모두 강남역에 무사히 도착했고 거기서 인천공항으로 가는 리무진을 또 갈아타야 했다. 과 후배 홍우와 밖을 바라보며 여기가 여의도니, KBS홀이니 하면서 촌스러움을 한껏 과시하며 인천으로 달렸다. 다소 맑지 않은 날씨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안개만 안 끼면 비행기는 뜬다는 사전조사에 힘입어 약간의 수면을 취하기도 했다.
처음 와보는 인천공항. 친구들 말대로 눈만 똥그랗게 뜨고 공항 안을 둘러보았다. 작은 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없는 게 없는 듯 했다. 도착해서 공항 내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마지막 한국식 밥이라고 생각하니 목이 막혔다. 그래서 열심히 먹었다. 한 달 동안 이 맛을 기억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저녁을 먹은 후 11시까지 무작정 기다리기 시작했다. 중간에 국제전화카드도 사고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전화도 하며 대학민국과의 안녕을 준비했다. 아직 병역미필자인 홍우는 여권을 만들 때도 그랬듯이 인천공항에 와서도 분주했다. 그러고 보면 대한민국 청년들이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여기가 이스라엘이었다면 나도 홍우만큼 분주했을 것을. 아! 난 지금쯤 제대해서 쉽게 외국여행 갈 수 있겠구나. 뭐, 어쨌든 이런 저런 얘기도 하고 생각도 하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으니 처음 보는 몇 사람들이 더 모이기 시작했다.
11시를 넘기고 드디어 여행 가방을 화물로 보내고, 비행기 표를 받아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자정이 가까워 오는 시간임에도 전혀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힘이 넘쳤다. 유리창 너머로 우리가 타야 할 '아랍 에미레이트' 비행기가 눈에 들어왔다. 부자 나라라 전 세계에서 비행기 보유수가 가장 높다는 에미레이트 항공. 이번 독일 월드컵 스폰서 기업이라 비행기 꼬리 부분에는 '2006 독일 월드컵'이라는 문구가 크게 적혀 있었다. 어쨌든 드디어 출발. 이제 한국과는 잠시 안녕이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말썽 일으키지 말고 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몸에서 신호가 왔다. 앞 뒤 간격이 좁은 2등석 좌석이라 옴짝달싹 못하기 때문에 다리로 피가 쏠려서 너무 힘들었다. 게다가 무려 9시간 30분이라는 긴 비행이었기 때문에 두 번의 식사를 하고 나니 소화가 안 돼서 속도 불편했다. 그나마 두 번째 식사 때 김치가 나와서 잠시나마 너무 행복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나고 현지 시간으로는 4시 30분에 경유지인 두바이에 도착했다. 새벽임에도 숨이 막힐 듯한 뜨거운 공기가 제일 먼저 우리를 맞이했다. 공항 내로 들어서자마자 중동국가임을 실감하게 되는 수많은 금들과 그림인지 낙서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들의 글자, 그리고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그들 특유의 코를 찌르는 냄새. 그리고 공항 곳곳에 드러누워 자고 있는 아시아인들과 흑인들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그들의 냄새 속에서 4시간을 꼬박 버틴 뒤에야 다시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전 비행기보다 더 많은 아랍인들 때문에 냄새는 더욱 감당할 수 없었다. 밀폐된 공간이라 이제는 미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문득 그들도 우리에게서 마늘냄새를 맡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그들도 우리처럼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어할까?
그렇게 우리는 냄새에 파묻혀 또 6시간 30분에 걸쳐 프랑스로 이동했다. 덧붙여 먹고 자고, 또 먹고 자고를 반복하며 또다시 엄습해 오는 다리의 통증을 참으면서 말이다.
첫째 날 - 프랑스
현지 시간으로 1시 30분경에 우리는 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창문 밖으로 물기가 보였다. 비가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드골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먼저 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거의 마지막쯤에 우리 가방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하나씩 하나씩 끌어당겨 '내꺼'를 찾았다.
드골 공항은 두바이 공항과는 달리 오래되고 낡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둘러 공항을 빠져나오자 우리를 기다리는 큰 관광버스가 있었다. 이층 버스 같은 높이라 기분이 묘했다. 차창 밖으로 비에 촉촉이 젖은 도로와 수업시간에만 접할 수 있었던 낯익기도 하고 동시에 낯설기도 한 불어 표지판들이 보였다. 드디어 프랑스에 온 것이다.
물에 젖은 빠리. 내일까지 비가 온단다. 가이드를 동반하고 높은 관광버스를 타고 숙소로 이동했다. 도착한 첫 날이라 그런지 모든 것들이 낯설고 신기하게 느껴졌다. 들판에 둘러싸인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차들은 대부분 ‘푸조Peugeot'였다.
빠리 시내 주변에 있는 호텔. 길가에 흑인이 많아서 인지 할렘가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호텔로비는 아담했고 방은 더 아담했다. 짐을 풀 여유도 없이 몽마르뜨로 이동. 버스를 타고 가면서 유리창에 비친 빠리의 골목은 너무 많고 여러 갈래여서 현지인이 아니라면 길 잃기 딱 좋겠다. 건물은 다들 오래되었고 베란다는 모두 작은 화분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예술의 중심지 몽마르뜨. 몽마르뜨는 지형상 빠리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빠리 유일의 포도밭을 볼 수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점점 올라갈수록 내가 철학자나 예술가가 된 듯할 착각이 들 정도였다. 조금 올라가니 ‘라팽 아질Au Lapin Agile'이라는 카바레가 있었다. 냄비에서 도망간 토끼라는 뜻의 라팽 아질은 로트렉, 르누아르, 모딜리아니, 피카소 등 당대의 예술가들이 드나들던 카페였지만 지금은 지나간 샹송을 들을 수 있는 카바레로 바뀐 것이다. 몽마르뜨에서 신기했던 것은 건물마다 각자가 가진 역사와 이야기를 적어 놓은 것이다. 오래된 건물은 문화재 지정까지 해 놓았다고 하니 프랑스인들의 옛 것에 대한 애정이 돋보인다.
특히나 몽마르뜨 하면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이 바로 모리스 위트릴로Maurice Utrillo라는 화가이다. 몽마르뜨에서 태어나고 몽마르뜨의 풍경을 위주로 그린 그의 그림들을 통해 그가 얼마나 몽마르뜨를 사랑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왜 그토록 몽마르뜨를 사랑했는지 내가 직접 오고서야 절실히 이해할 수가 있었다. 어쨌든, 많은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은 몽마르뜨는 아직도 무명의 화가들로 붐비고 있었다. 떼르트르 광장Place du Tertre에는 자신의 구역임을 표시하는 번호가 적힌 공간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그림을 그려주고 있었다. 예전의 가난하고 고독한 예술가들로 붐비던 이 곳이 불과 100년 만에 국적도 모르는 화가들과 관광객들로 채워진 것이다. 그 곳에서 시간이 촉박해서 엽서를 못 쓴 게 가장 아쉽다. 일주일이면 간다는데.
사크레 쾨르 성당으로 이동. 경건한, 그러나 아늑하기도 한 성당. 빠리의 성당들 중에 가장 최근 건축물이라고 한다. 참고로 가장 오래된 성당은 시테 섬에 있는 노트르담 성당이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역시나 많은 관광객들로 붐볐고 대부분이 학생들이었다. 성당 앞에서 바라 본 빠리 시내는 왠지 우울하고 무거웠다. 날씨가 흐려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라앉은 듯한 모습이었다. 특히나 유별나게 높은 건물이 없어서인지 뻥 뚫린 느낌이 들어서 서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서울은 네모반듯하고 크기도 각양각색인 현대식 건물들로 채워져 있어서 삭막하지만 빠리는 정반대여서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온 듯한 기분도 들었다.
성당을 내려오는 길에 흑인들의 막무가내 상술 때문에 곤혹스럽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말려들지 않고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다. '아멜리에' 촬영지인 회전목마 앞에서 다들 만나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에스까르고라는 달팽이 요리와 쇠고기 요리를 먹었는데 쇠고기 요리는 너무 짰다. 흰 쌀밥 생각이 간절하게 날 정도로. 한국을 떠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쌀밥이 그리워졌다.
빠리의 첫 날을 기념하기 위해 윤정, 꽃샘, 홍우, 홍우의 룸메이트 희승이와 소주 한 잔을 했다. 깔끔한 꽃샘이 룸메이트 때문에 욕실의 물이 방까지 세어버려서 대략 한 시간을 고생했다. 프랑스의 건물은 오래돼서 욕실 바닥에 배수관이 없는 상태이다. 나도 잘못했으면 욕조에 있는 커튼을 그냥 내버려둔 채 샤워를 할 뻔했다. 만약 그랬다면 밤새도록 잠도 못자고 바닥을 닦았을 게다.
둘째 날 - 프랑스
잔뜩 흐린 빠리의 날씨. 미국'자유의 여신상'의 모태가 된 프랑스판 '자유의 여신상'을 지나 노트르담 성당으로 향했다.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웅장하고 위대했다. 스테인드 글라스로 들어오는 빛 때문에 더욱 신비롭고 근엄한 분위기를 풍겼다. 빠리의 노트르담 성당은 내게 각별한 곳이다. 빅토르 위고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 뮤지컬 ‘노트르담 드 빠리’때문이다. 거금을 들여 S석 자리까지 확보해 가며 올 해 초 서울에서 뮤지컬을 보았기 때문이다. 뮤지컬의 소품으로 등장한 이무기돌이 매우 인상적이어서 노트르담 성당에 가면 꼭 만져봐야지 생각했는데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만지기는커녕 눈으로 볼 수도 없었다.
그리고 노트르담 성당에 오면 꼭‘제로 포인트Zero Point'를 밟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다시 빠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속설이 전해지는 곳. 성당에서 출발하기 직전에야 '제로 포인트'를 발견하고는 수많은 관광객들을 헤쳐내고서야 발만 살짝 걸쳐 볼 수 있었다. 꼭 다시 돌아오리라!
노트르담 성당 주변은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기 때문에 우리를 태울 버스가 정차할 곳이 없었다. 그래서 버스는 성당 멀리 떨어져 있었고 또 다시 그 버스를 타야 하기 때문에 잠시 동안 빠리 거리를 거닐며 어설픈 빠리지엔느가 되어 보기도 했다.
버스를 타고 지성인들이 잠들어 있는 판테옹 신전을 지나갈 수 있었다. 최근에는 퀴리 부인이 여성 최초, 외국인 최초로 신전에 들어갔단다. 나도 그들과 영원히 함께 잠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기 위해서 난 무슨 업적을 쌓아야 하나?
소르본느 대학 근처. 작은 서점이 굉장히 많았다. 직접 출판을 하기도 한다고 하니 우리 대학가와는 참 다르다. 근처에는 '레 두 마고Les Deux Magots'카페도 있었다. 사르트르와 보봐르가 즐겨 찾던 곳. 실존주의가 꽃을 피운 곳. 그 곳에 가서 커피 한 잔 탁자에 올려놓고 앉아있으면 나도 철학자가 된 기분일 것이다. 하지만 워낙 유명해진 터라 그 자리는 자리값도 따로 받는단다.
뤽상부르그 공원의 오벨리스크. 이집트에서 선물 받은 거라고는 하지만 거의 약탈이었을 듯. 우리의 직지심체요절이 생각났다. 루브르 박물관에 갇혀 있을 우리의 것. 내가 판테옹 신전에 들어가면 자연스레 돌아갈 수 있겠지?
그리고는 에펠탑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인 사이요 궁으로 향했다. 멀리서 봐도 이렇게 큰데 가까이서 보면 얼마나 클까. 프랑스는 에펠탑이 먹여 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고전적인 빠리에 들어선 현대식의 철제 구조물이 어쩜 그렇게도 잘 어울리는지 모르겠다. 아마 어느 것이든 프랑스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프랑스인들의 기질 때문일 것이다.
루브르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점심을 먹었다. 안 되는 불어와 영어로 샌드위치와 샐러드를 사는데 성공! 5년이나 불어를 배웠거늘 실전에서는 전혀 그 세월이 발휘되지 못하는 것이 서글프기만 하다. 게다가 샐러드의 맛은 별로였다. 곰팡이 치즈와 생고기는 아직은 도전이 불가능하다. 일찍 점심을 먹고 근처 기념품 상점에서 13개에 1유로 하는 엽서를 샀다. 부지런히 써서 보내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드디어 루브르에 입성. 루브르 박물관은 정말 크고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국적도 정말 다양해 보였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 중인 미술품들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 하루 안에는 다 못 본단다. 박물관의 시작은 프랑스 혁명 때 귀족 소유의 그림들을 다 루브르로 옮기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지금의 루브르는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한다. 루브르에는 이집트, 로마, 프랑스 미술들이 있다고 했다. 밀로의 비너스와 모나리자 감상을 필수. 그러나 모나리자 그림 쪽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감상 실패. 하지만 한 쪽 벽면 가득한 다비드의‘나폴레옹 대관식’그림은 황홀했다. 이 그림은 다비드가 똑같이 두 개를 그렸기 때문에 더욱 유명하다. 그리고 들라크루아의 작품인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도 감상할 수 있었다.
루브르를 나와서 개선문이 있는 샹제리제 거리로 이동. 오전에 흐렸던 날씨가 거짓말처럼 개이더니 갑자기 더워졌다. 프랑스의 날씨가 변덕스럽다더니 정말이다. 샹제리제 거리는 개선문으로도 유명하지만 명품 가게들이 줄지어 있기 때문에 명품 거리로도 유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고전적인 도시의 분위기와는 달리 이곳은 세련된 현대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개선문을 보고 거리를 걷고 맥도날드에서 콜라도 마시다보니 빠리지엔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뜨거운 커피는 파는데도 차가운 커피는 안 판다는 것이다. 커피는 따뜻하게 마셔야 한다는 고정관념이라도 가진 것일까?
프랑스에는 스마트카(Smart for two couple passion)라고 하는 이인승의 초미니 자동차가 굉장히 많았다. 1998년 벤츠와 스와치가 탄생시킨 것으로 좁은 공간에도 효율적으로 주차할 수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뚱뚱한 사람은 운전은커녕 운전석에 앉지도 못하겠다.
그리고 여기 시청은 너무 예쁘다. 우리나라 시청들은 새로 지은 건물에 정말 관공서같이 보이는 데 여기는 예날 건물 그대로를 개조해서 쓴다. 시청마저 관광지로 보인다. 큰 성을 보는 듯한.
마지막 일정으로 쁘랭땅 백화점엘 갔다. 우리말로 하면 봄 백화점? 백화점도 예전 건물 양식이다. 특이하게도 남성관, 여성관, 생활용품관이 따로 되어있다. 상품이 많다거나 진열이 잘되어 있다기보다 다양한 물건들이 있었다. 어느 하나 비슷한 것이 없고 개성이 있었다. 우리나라 백화점들의 일관적인 모습과는 달리.
백화점에서 우리 일행인 윤교수님이 실종된 바람에 저녁 식사가 늦어졌다. 식당의 웨이터가 한국어를 너무 잘하는 바람에 놀라기는 했지만 팁을 받기 위한 나름대로의 전략이라는 걸 알고는 좀 얄미워졌다. 어쨌든 저녁식사가 많이 늦어진 덕분에 우리는 버스를 보내고 루브르 근처의 튈를리 공원에 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몰리에르 동상도 볼 수 있었다. 프랑스 맥주와 콜라, 과자를 사서 공원에서 술판을 벌였다. 9시가 되어도 해가 지지 않는 날씨 때문에 꼭 저녁 6시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많이 돌아다녔다고 많이 피곤했다. 호텔까지는 지하철로 귀환했는데 지하철역이 우리나라보다 허름해 보였다.
셋째 날 - 프랑스
아침 식사 후 베르사유로 출발. 어제가 휴일이었기 때문에 온 나라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 사람도 정말 많았다. 일단 어마어마한 궁전의 규모에 놀라 '우와~'룰 연발했다. 왕실 예배당을 잠시 보고 왕의 거처로 이동. 방이 워낙에 많아서 방마다 이름이 있었다. 베르사유는 루이 14세 때부터 왕궁으로 쓰이기 시작했고 그 전에는 루브르에서 국사를 처리했다고 한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나폴레옹 대관식’그림이 베르사유에도 있었다. 두 그림의 차이점은 들러리도 서 있는 3명의 여자 중 왼쪽 여자의 옷 색깔이다. 책에서 본 바로는 그 여자는 왕족으로써 다비드가 사랑한 여자라고 한다. 베르사유에 있는 그림이 첫 번째 그림이라고 하는데 옷 색이 다른 두 여인과 달리 붉은 색이다. 그걸 본 나폴레옹은 다비드가 그 여인을 사랑하는 줄 단번에 알고 다비드를 불러 다시 그리라고 했단다. 결국 다비드는 다시 그림을 그렸고 두 번째 그린 그림이 루브르 미술관에 있는 것이다. 그 큰 그림을 그렸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두 개나 그렸다는 것은 더 놀라운 일이다.
왕비의 거처는 거울의 방을 지나서 갔다. 양쪽 벽면이 다 거울이라 신기했다. 또 동시에 그들의 사치성을 볼 수 있었다. 베르사유에서 가장 신기했던 건 침대가 다 짧다는 것. 옆으로는 넓은데 길이는 매이 짧았다. 대체 어찌 잤단 말이지? 그 시절 사람들은 다들 신장이 짧았나? 아무리 그래도 너무 짧다.
부띠끄에서 베르사유 화보집을 사고 정원으로 뛰쳐나갔다.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바쁘게 사진을 찍고 출구를 찾아 뛰었지만 점점 궁전을 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지나가는 프랑스인 인부에게 출구를 물어보고 또 열심히 뛰었다. 역시나 정문에는 다 모여 있었고 20분이나 늦은 상황이라 너무 미안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에펠탑 열쇠고리를 사는 홍우. 너의 대담함에 박수를 보낸다.
점심을 먹으러 미라보 다리로 이동. 드디어 중국음식이다. 쌀에 매콤한 닭요리를 곁들이니 정말 살만했다. 얼마 만에 맛보는 쌀밥인지. 쌀과 숙주나물에 고추장을 비벼 먹으니 꼭 비빔밥을 먹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후에는 자유 관광이다. 미리 빠리 지도와 정보를 수집하지 못한 터라 경주언니한테 붙기로 했다. 지하철역에서 표 열장짜리 묶음인 까르네carne를 구입하고 라 데팡스로 가기 위해 물어보고 물어보고를 거쳐 지하철을 바꿔 탈 수 있었다. 우리나라와는 전혀 다른 구조라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라 데팡스 도착. 초고층 비즈니스 센터가 계속 들어서고 있어 ‘파리의 맨해튼’으로 불린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 파리 같지 않았다. 그리고 '신 개선문'이라고 불리는 그랑 다르쉬La Grande Arche는 정말 컸다. 커다란 (노아의) 방주를 의미하는 그랑 다르쉬는 그 내부에 빠리의 노트르담 성당이 들어갈 정도로 넓은 정방향 구조물로 새로운 빠리, 새로운 시대로 향하는 입구를 상징한다. 유리와 흰 대리석으로 지어진 두 개의 큰 빌딩을 이어놓은 이 구조물은 커뮤니케이션 감각을 이미지화하고 있다고 한다. 이 곳은 전 세계 사람과 사람, 구시대와 신시대 그리고 행정상 구 빠리와 신 빠리를 연결하는 입구인 셈이다. 그리고 샹제리제 거리의 개선문과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올해가 한․불 수교 120주년이라 한국인 조각가 '임동락'씨의 작품전을 하고 있었다. 한국인으로써 매우 뿌듯했다.
퐁피두 센터로 가기 위해 다시 이동. 지하철역에서 엽서를 보내고 서점에서 책을 구경하고 슈퍼에서 물과 먹을 것을 사서 이동했다. 시테섬 맞은 편에서 하차. 퐁피두 센터는 아쉽게도 오늘은 휴관이었다. 짓다만 듯한 느낌을 주기 위해 전기배관과 급수관 등이 전부 외부로 드러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배관들을 용도에 따라 색깔로 구분해 놓은 것이다. 아무튼 휴관으로 인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풍피두 센터의 맞은편에 앉아 다른 프랑스인들처럼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바닥에 "wifi"라는 글자를 그리고 있길래 호기심에 그 쪽으로 가 보았다. 불어가 잘 통하지 않아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소르본느 쪽으로 이동. 대학가를 기웃거리다가 각자 찢어져서 저녁을 해결하기로 했다. 프랑스식으로 저녁을 먹어보자는 간 큰 제안으로 그나마 손님이 많아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가 이것저것 주문을 해보았다. 샐러드에 아보카도는 맛있었지만 같이 나온 살짝 데친 해산물은 별로였다. '오늘의 요리'로 나온 쇠고기 요리. 몽마르뜨보다 와인향이 진하게 났다. 도저히 그냥을 먹을 수 없어 와인 한 잔을 걸치느라 또 약속시간에 늦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지하철도 반대방향으로 타서 더욱 늦어졌다. 늦어진 시간을 조금이라도 단축해보고자 열심히 뛰고 있는데 지나가던 프랑스 여자애들이 우리를 흉내 내며 웃기 시작 하는 게 아닌가. 바쁜 순간이라 다 알아듣진 못했지만 동양애들은 저런다며 좋지 않은 얘기들을 한 것 같다.
9시에 만나기로 했건만 도착시간은 8시 40분. 하지만 다행히 우리보다 늦은 사람들도 있었다. 50분에 유람선 ‘바또 파리지앵’에 탑승해서 세느 강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좀 늦게 유람선을 탄 지라 좋은 자리를 확보하지 못하고 그냥 멀리 보이는 풍경만을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람선이 돌아왔을 때는 반짝반짝 빛나는 에펠탑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호텔로 귀환할 때쯤 축구에서 이긴 프랑스인들은 심하게 경적을 울리고 소리를 질러댔다.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가야했기 때문에 조심히 이동했다. 유람선에서 하차한 뒤 사라지신 윤교수님 내외분 때문에 더욱 심각한 분위기. 빠리의 야경은 아름답건만 표정들은 다들 어둡다.
넷째 날 - 프랑스
아침 일찍 에트르타로 이동했다. 에트르타는 쿠르베의 그림 ‘폭풍이 지나간 후의 에트르타 절벽’에서 그 아름다운 경치를 미리 만나볼 수 있었다. 오늘은 다행히 아침부터 날씨가 맑았다. 노르망디 지방에 위치한 에트르타는 정말 조그만 마을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눈앞에 펼쳐지는 투명한 바닷물과 맑은 하늘 덕에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바다인지를 구분하기조차 힘들었다. 자갈들로 이루어진 해변 가로 뛰어가 물에 발을 담궈 보았다. 물이 굉장히 차가운데 거기서 수영하는 외국인들은 정말 대단하다. 해변에서 왼쪽으로 코끼리 바위가 보였다. 모파상이 말한 대로 코끼리가 바다에 코를 빠뜨리고 물을 빨아들이는 듯한 모양이었다. 그곳은 모파상의 ‘백합의 골짜기’의 여주인공이 자살을 한 절벽이며 인상주의자들의 그림에 종종 등장하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 일행은 코끼리 바위 반대편 언덕에 올라 에트르타를 감상하고 에트르타의 별미라는 홍합요리와 능금주인 시드르Cidre를 마셨다. 홍합과 크림소스가 절묘하게 어울린 '물'은 정말 맛있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괴도 루팡의 집을 지나 몽 생 미셸로 이동했다. 늦게 도착한 터라 수도원은 아쉽지만 들어가질 못했다.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몽 생 미셸은 만조 때 바닷물에 둘러쌓여 작은 섬이 되었다가 간조 때 다시 육지와 이어지는 신기한 곳이다. 더욱 신기한 것은 아직도 그 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관광용품을 파는 상인들과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6시가 되면 다들 육지로 퇴근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보다. 게다가 호텔까지 있어 몽 생 미셸의 아름다운 야경을 감상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쉽게도 야경은 보지 못하고 생 말로로 이동했다.
생 말로는 신기하게 아직도 성벽 안에 도시가 있었다. 그러나 오래된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깔끔한 거리가 마음에 들었다. 노천카페에서 식사를 즐기고 있던 프랑스인들이 단체로 줄을 지어가는 우리를 보더니 신기하게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어쩌리. 개개인은 우수하나 단체로 모아두면 지지리도 말 안듣는 것이 한국인이거늘.
저녁식사로 먹은 물고기 스프는 정말 별로였지만 쇠고기 스테이크는 정말 맛있었다. 그 위에 얹은 치즈도 맛있었고 웨이터의 친절도 감사했다.
다섯 째 날 - 프랑스
오전에는 생 말로 자유관광을 했다. 빠리에서 자유 일정이 없이 빡빡하게 다니느라 힘들었는데 교외로 벗어나니 여유가 생겼다. 어젯밤에 묶은 호텔도 너무 안락하고 시설이 깔끔해서 잠도 잘 잤던 것 같다.
우리는 생 말로 성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영화 '라스트 콘서트'의 배경이 되기도 했던 생 말로는 정말 깔끔한 도시다. 빠리와는 정반대로. 신대륙을 발견한 자크 까르티에의 동상도 있었고, 해적 미니어처와 여러 가지 관광 상품들이 눈에 띄었다. 게다가 오늘부터 프랑스가 세일에 들어갔기 때문에 곳곳에 '세일Soldes'이라고 붙어있었다. 덕분에 많은 상점을 기웃거리며 지갑을 매만졌고 결국은 민소매 티 하나를 구입하고야 말았다.
성 밖에는 많은 요트들이 있었다. 프랑스인들이 휴가를 즐기러 생 말로에 많이 온다더니 다들 요트를 타러 오나보다. 요트를 손질하고 있는 프랑스인이 한 명이라도 눈에 띄였더라면 어떻게든 설득해서 잠시나마 타 볼 수 있었겠지만 신기하게도 그 많은 요트들 사이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은 요트를 타는 시기가 아닌가 보다.
오후에는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고성들이 각축을 벌이고 있다는 르와르 지방의 뚜르로 이동했다. 6시가 다 되어서 도착한 덕분에 직물 박물관과 포도주 박물관은 보지 못했다. 다만 생 가티엥 성당과 플뤼므로 광장, 뮤제 드 보 쟈르만 볼 수 있었다. 특히 생 가티엥 성당은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리고 같이 간 건축학도 언니의 말을 빌리자면 이 성당이 고딕양식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했다. 뾰족한 첨탑과 스테인드글라스, 그리고 옆에 기둥을 덧댄 플라잉 버트리스. 그러나 성당의 외벽이 너무도 낡아서 밤에 아무 조명없이 혼자 보면 으스스할 것 같기도 했다.
뚜르에서는 특히나 날씨 때문에 고생을 했다. 오후 6시가 넘었음에도 해가 지지 않아서 햇빛이 너무 따가웠다. 그래서 그늘만 골라서 다녔는데도 피부가 따갑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저녁은 뚜르의 시청 근처에서 먹었는데 시청 맞은편의 분수가 너무 아름다웠다. 분수 주변의 꽃들도 너무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었다. 정말이지 어느 곳에서건 엽서가 되는 풍경들 뿐이었다.
여섯째 날 - 프랑스
르와르 지역의 핵심인 고성 관광과 ‘빛과 소리의 축제’관람이 오늘의 일정이었다. 먼저 빌랑드리 성으로 향했다. 빌랑드리 성은 4가지 테마로 구성된 정원이 인상적이었다. 미로 같기도 하고 공원 같기도 한 정원은 정말이지 세심한 손길을 필요로 할 것 같았다. 이곳은 샤를르 8세가 이탈리아에서 데려온 정원사들의 영향을 받아서 16세기 정원 계획의 정수를 보여주는 곳이라고 한다. 게다가 여러 가지 야채들과 꽃의 색을 혼합함으로써 더욱 화려함을 과시했다. 어쨌든 너무나 반듯하게 관리된 정원 때문에 이 곳의 정원사는 가위손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런 다음 샹보르 성으로 이동했다. 성 자체만으로는 빌랑드리보다 훨씬 규모도 크고 아름다웠다. 성의 크기를 자랑이라도 하듯이 이 성에는 440개의 방이 있다고 한다. 대체 그 많은 방들을 다 뭐하려고. 방 찾아가는 것도 쉽지 않았겠다. 샹보르 성 앞의 카페테리아에서 피자와 토스트를 저렴하게 먹고 본격적으로 성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우려했던 것과 같이 방이 많아서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일행들과 떨어지게 된 것이 아닌가. 여기저기 찾아보다가 그냥 포기하고 있으려니 멀리서 낯익은 얼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역시 나는 크고 단순한 공간에서 살아야 하나 보다. 이 곳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설계한 이중 나선형 계단과 박제된 동물들이 전시되어 있던 방이 인상적이었다. 특히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이중 나선형 계단은 한쪽 계단이 다른 한쪽을 에워싸는 형태로 되어 있어서 올라가는 사람과 내려오는 사람이 서로 만날 수가 없게 되어있어 매우 신기했다.
오후엔 앙제로 이동해서 짐을 풀고 "씨네쎄니"를 보기 위해 퓌 뒤 푸Puy du Pou로 이동했다. 특히나 이 쇼는 여행을 오기 전 내가 심혈을 기울여 조사한 것이라 더욱 애착이 갔다. 꼭 내가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된 것처럼 많은 기대로 가득 찼다. 퓌 뒤 푸에 도착하자 온통 외국인이었고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프랑스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조용한 산골 마을이 순식간에 도시 한 복판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곳 방데 사람들의 자원봉사만으로 이루어진 이 쇼는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매년 입장객이 늘고 일본에서는 조명과 음악의 판권을 사들일 정도로 유명해지고 있다.
9시부터 입장. 완전히 어두워지는 11시까지 기다렸다가 쇼를 관람했다. 이 지방 선조들의 희생을 후손에게 알리기 위해 시작된 이 쇼는 무대도 없고 유명한 배우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자원봉사자들의 노력으로 작은 오페라를 탄생시켰다. 웅장한 사운드와 눈을 깜빡이는 시간조차 아쉬울 만큼의 레이저 쇼는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1시간 20분에 걸친 쇼는 정말 감동적이고 인상적이었다. 왜 우리나라에는 이런 지역 사랑의 바탕이 되는 공연이 없는 것일까. 역시 단체 활동에 약한 것이 한국인이다. 어쨌든 쇼는 무척이나 훌륭했고 우리 앞 쪽에 앉은 마린보이들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일곱 째 날 - 프랑스
하루 종일 버스안에서만 지내야 했다. 프랑스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면적이 매우 넓기 때문에 하루 이동 시간이 매우 많이 걸렸다. 리옹으로 이동하는 것이 오늘의 일정이었는데 버스 안에만 있다보니 잠만 잤다. 그렇게 아름다운 프랑스의 풍경을 감상하지도 못한 채 말이다. 점신엔 대형 할인마트인 까르푸엘 갔다. 그 곳에서 점심을 해결해야 했는데 비싸고 뭘 먹어야 할지 몰라서 까르푸엘 들어갔다가 그냥 나왔다. 그런데 그 곳을 지키던 아저씨가 우릴 막아서는게 아닌가. 문제는 홍우가 메고 있던 큰 가방이었다. 우리가 아무 것도 사지 않고 그냥 나오니까 도둑인지 의심을 했던 것 같다. 동양인인 것이 죄다.
어쨌든 쓰린 속을 달래도 맞은편의 맥도날드로 갔다. 역시 다국적 기업의 맥도날드. 어느 나라엘 가건 마음 편히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웬만하면 발도 붙이지 않던 곳이 외국에 나와 보니 친숙하기까지 하다.
점심을 먹고 약간의 간식과 물을 사서는 다시 버스엘 탔다. 한국이 좋은 나라라는 것을 느꼈던 것이 이 곳 계산원들은 너무 건방지다. 우리나라 대형마트에 길들여져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느릿느릿하고 성의없어 보이는 그들의 행동에 조금 화가 나기도 했다. 화장실에 돈을 내고 가는 것과 식당에서조차 물을 사 먹어야 한다는 것 이후로 최고 마음에 안 드는 것이 프랑스 점원들의 느림과 불친절함이다.
여덟 째 날 - 프랑스
오전에 리옹 자유관광했다. 운이 좋게도 전통시장이 열려서 지나가며 프랑스의 전통시장을 구경할 수 있었다. 사람 사는 것이 별반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여기서 또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코 끝을 자극하는 과일 냄새 때문에 너무 힘겨웠다. 여행 경비만 충분했었더라도 그런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을.
우리는 벨쿠르광장, 구시가지를 둘러보았는데 너무 이른 아침에 돌아다녀서인지 길거리가 한산했다. 게다가 생떽지페리의 동상이 어디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어 포기해야만 했다. 꼭 어린왕자와 악수해 보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점심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해결해야 했는데 역시나 비쌌다. 이젠 익숙해져버린 샌드위치와 물을 골랐다. 당분간은 한국에 돌아가면 밀가루 음식과 마요네즈는 손도 안 댈 듯 했다. 정말이지 한 달 정도 살라면 그럭저럭 버티겠지만 그 이상을 힘들 것 같다. 소화도 안 되고 기운도 안 날 듯 하다.
오후에는 마르세유의 구시가지엘 잠시 들렸다가 니스로 행했다. 마르세유는 어찌나 덥고 더럽던지. 부랑자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더워서인지 윗옷을 훌렁 벗어버린 젊은 남자들도 여럿 눈에 띄였다. 드디어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경험한 햇빛을 나도 경험하게 된 것이다. 너무 더워서 걸어다닐 기운도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습도가 낮아서인지 땀이 끈적이지 않는다는 것. 그나마 땀이 끈적거렸더라면 아무 건물에나 들어가서 주저앉아 버렸을지도 모른다.
마르세유에서 출발해서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 니스에 도착할 쯤 깨어났다. 얘길 들어보니 깐느를 거쳐 왔다는 것이다. 세상에, 그 좋은 풍경을 또 못 보고 지나친 것이다. 쪽빛 바다라는 뜻의 ‘꼬뜨 다쥐르’를 그렇게 달렸건만 난 잠이나 잤던 것이다.
어쨌건 도착해서 짐을 풀고 해변에서 와인파티를 즐겼다. 우리끼리 웃고 떠들어서 그런지 한국이라는 착각마저 들었다.
아홉 째 날 - 프랑스, 모나코 왕국
오전엔 니스 자유 관광의 시간을 가졌다. 도무지 일어나질 않는 막내 홍우를 버리고 윤정이와 꽃샘이랑 같이 지도 하나 들고 샤갈 미술관을 찾아 나섰다. 표지판이 미로처럼 되어 있어서 좀 애매하긴 했지만 어쨌든 찾았다. 미술관에는 아침 일찍 나선 다른 일행들이 보였다. 걸어서 왔다니까 다들 놀랬다. 다른 일행들은 버스를 타고 왔다는 것이다. 그다지 번 길이 아니었는데 버스는 돌아서 온 듯하다.
샤갈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어서 그림을 도무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한국인 가이드가 붙은 팀에 살며시 끼여 귀동냥을 해보았지만 시원치 않았다. 결국 염교수님의 설명을 듣고야 ‘노아의 방주’ 하나만 알아볼 수 있었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모르니까 정말 한없이 모르겠다.
샤갈미술관에 들렸다가 마르세나 광장을 거쳐 구시가지로 갔다. 구시가지는 원래 계획에 없었지만 구시가지를 동영상으로 담아오라는 경주언니의 미션을 수행하고자 물어물어 구 시가지를 찾아갔다. 그 곳에서 정말 철렁했던 순간은 언덕에서 더 올라가는 길이 없나 헤매이고 있을 때 다가온 한 아주머니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떤 좁은 골목길을 가르키며 그리로 가면 좋은 경치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골목이 너무 외지고 좁았던 지라 우리는 수상쩍어 거절을 하고 도로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생각하니 그 아주머니는 집시였던 것 같다. 옷차림도 헐렁한 옷이었고 좁은 골목길을 가르킨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의심스럽다. 그 쪽으로 들어갔다면 갑자기 돌변한 아주머니나 숨어있던 그의 동료들에게 우리의 카메라는 물론 그나마 가지고 있던 약간의 돈과 여권을 빼앗겼을지도 모른다. 하여간에 위험한 곳이다. 점심은 중국식으로 해결했다. 오래간만에 붉은 음식을 보니 또 반가웠다. 그런데 우리는 셋이서 세 가지 요리를 시켜 서로 나눠 먹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따로 요리를 시켜 각자 먹고 있었다. 그들이 우릴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뭐, 어떤 생각을 했던지 우리는 가난한 여행객들이고 많은 것을 먹기엔 돈도 부족하고 위의 용량도 그렇게 여유롭진 못하다.
오후에는 에즈Eze를 거쳐 모나코로 이동했다. 에즈는 유럽 각국 부호들의 휴양지로도 유명하다. 원래 모나코 왕국에 속해 있었던 것이지만 프랑스의 반환요청으로 다시 프랑스의 땅이 되었다고도 한다. 아름다운 경치와 조용한 분위기가 왜 부호들이 에즈로 몰리는지 알 게 해주었다.
모나코는 생각에 비해 실망이 컸다. 모나코에 들어서자마자 날씨가 흐려졌고 모나코 투어를 위해 거금을 들여 작은 투어기차에 탔건만 한국어 설명도 없었다. 그래서 도무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특히 왕궁. 지나치면서도 그 곳이 왕궁이라는 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뭐 입구는 썰렁해도 속은 화려하겠지. 그래도 명색이 왕궁인데 빌랑드리 성보다 못하다면야 말 다했지. 그러나 역시 돈 많은 나라답게 곳곳에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이 곳은 관광과 카지노로 많은 외화를 벌어들이기 때문에 실업률도 낮은 편이란다.
니스로 돌아와서는 저녁을 먹고 해변에서 사진도 찍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해변에서 추하게 수영을 하고 있는 중국인 아저씨들 때문에 급속도로 기분이 하강했다. 비키니를 입은 쭉쭉빵빵의 금발 미녀들과 울끈불끈한 근육을 가진 유럽 남자들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호텔에서 그냥 가지고 나온 샤워 가운을 걸치고 해변에서 수영을 하고 있는 중국인을 정말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다.
열 째 날 - 프랑스
나폴레옹 루트인 국도 85호선을 따라 안시로 이동했다. 나폴레옹이 코르시카 섬을 탈출해서 빠리를 탈환하기 위해 부대를 이끌고 넘으려 했다는 산. 그런데 지형이 너무 험하다. 도로가 깔린 지금도 이렇게 가기가 힘든데 말을 끌고 어찌 이걸 넘으려 했을까. 물로 험준한 지형 때문에 쉽게 발각되지 않겠지만 중간에 포기한 병사들이 많았을 것 같다.
배낭여행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이 국도를 지나가며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산을 보아서 좋았지만 휴게소가 없어 난감했다. 결국 다들 얼굴이 노래져서야 어느 음식점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대체 이 긴 길에 휴게소 하나 없다는 것이 말이 된단 말인가. 하긴 올 때보니까 차도 안지나가더라만은.
열 한번째 날 - 프랑스
아침 식사 후 안시를 둘러보았다. 작고 아담한 이 도시는 너무도 한적했다. 점심엔 치즈토스트와 물을 4유로에 사서 호수에 앉아서 먹고 보트를 탔다. 그런데 이 곳의 호수는 호수라기보다 바다에 가까웠다. 어찌나 넓은지 끝이 보이질 않았다. 물은 또 어찌나 맑은지 에메랄드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보트를 타고는 화장실 찾느라 고생. 시청까지 찾아들어갔으나 도무지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우리나라 좋은 나라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체 여기 사람들은 화장실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모르겠다.
오후엔 샤모니로 이동. 고산지대가 그런지 귀가 멍멍했다. 케이블카로 몽블랑의 '에귀 디 미디'까지 올라갔다. 해발 3800m정도라 산소가 부족해서 어지러움을 호소했다. 내려갈 때는 기상 악화로 중간 지점에서 한 시간을 기다리고서야 내려갔다. 예측할 수 없는 게 날씨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수시로 변하면 어쩌자는 것인가. 갑자기 구름이 밀려오더니 번개까지 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꿋꿋이 기다리며 장난까지 쳤다. 못 내려가면 어쩌려고 그런 대담한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내려와서는 잠시 샤모니 시내 관광을 했다. 마침 포르투칼과의 축구 경기가 있어 그 조용한 마을도 술렁거리고 있었다. 우리도 빨리 돌아와서는 숙소에서 프랑스와 포르투칼의 축구를 관람했다. 다행히 프랑스가 이겼고 우리는 또 밤 동안 경적을 울리고 달리는 시끄러운 프랑스인들의 환희에 묻혀 잠이 들었다.
열 두 번째 날 - 스위스
스위스 몽트뢰로 이동하는 날이다. 몽트뢰는 유럽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도시란다. 찰리 채플린이 별장을 지어놓고 지낼 만큼 아름답고 조용한 도시란다.
도착했을 때는 날씨가 우울했다. 비가 올 것 같이 잔뜩 찌푸리고 무거운 날씨. 우리는 fp만호수와 근처를 관람했다. 그리고 이 곳 저곳을 둘러보려 했으나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는 덕분에 점심을 먹기로 했다. 점심은 10유로짜리 중국식으로 해결했다. 이젠 중국 음식을 감사히 먹는 시기가 온 것이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시옹성에 가려했으나 버스를 반대 방향으로 탄 덕분에 실패 했다. 덕분에 트램이라는 것을 실컷 타 볼 수 있었다.
오후에는 루체른으로 이동. 빈사의 사자상을 보고 카펠교를 건너 다시 슈프로이어교를 건너 무제크 성벽으로 갔다. 정말 표정이 리얼했던 사자상. 꽃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카펠교. 좀 허름한 슈프로이어교. 가는 길은 험난했으나 돌아오는 길은 무척 쉬웠던 무제크 성벽.
달콤한 초콜렛 향기가 진하게 풍겼던 스위스의 초콜렛 가게. 현대식의 루체른 역. 레만 호수와 비슷한 루체른 호. 나름대로 알짜배기 구경을 하며 돌아다녔다. 그 동안은 좀 막연하게 돌아다녔는데 이제 막바지라고 정신을 차렸나보다. 덕분에 루체른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비가 와서 짜증이 났다.
저녁은 숙소에서 해결했는데 호텔 직원들의 불친절에 매우 기분이 나빴다. 먼저 식사를 하고 있던 중국인들을 보니 돈 많은 중국의 갑부들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상대적으로 빈곤한 한국의 대학생들에게는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 음식 접시도 던지듯 놓아버리고 음식도 마음대로 바꿔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럴 때 말이 통하지 않는 다는 것이 갑갑할 뿐이었다. 그래도 고추장과 김 때문에 상한 기분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다.
저녁엔 루체른 호수 야경을 감상. 강 건너의 불꽃놀이를 바라보기도 했다. 숙소에서 맥주한 잔 하고 훌라를 하다가 잠이 들었다.
열 세 번째 날 - 프랑스, 독일
아침 식사 후 스트라스부르그로 이동했다. 독일식의 건축양식으로 유명하며 알사스 로렌 지방이다. 리즐링이라는 포도로 만든 백포도주가 유명하다고도 한다.
스트라스부르그에 도착하자마자 쁘띠 프랑스를 보고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갔다. 그런데 왜 쁘띠 프랑스인지 모르겠다. 조금은 딱딱한 분위기가 독일식 마을인건 알겠는데 쁘띠 프랑스는 뭐가 프랑스식이라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각 도시별로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 외벽에 이끼가 낀 건지 매우 시커멓게 보였다. 그리고 이제 많은 성당을 봐서인지 더 이상 호기심을 자극하지도 못했다.
오후에는 독일의 하이델베르그로 이동. 하이델베르그성과 대학, 광장을 보고 카를테오도르 다리에 가서 원숭일 상을 만져보기도 했다. 원숭이 상의 반지를 만지면 다시 하이델베르그로 돌아온다는데 어느 도시에나 그런 속설이 있는 듯 하다. 어쩌면 모두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계략일 수도 있다. 어쨌든 카를테오도르 다리에서 철학자의 길이 있는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독일의 유명 철학자들이 그 길을 걸으며 사색했다고 한다. 난 깊이 생각하는 타입이 아니라 그 길을 걷는다고 해도 딱히 철학스러운 생각을 할 것 같지는 않다.
저녁은 역시 중국식. 말 그대로 미친 듯이 먹었다. 배가 터질 것 같을 때까지 먹었다. 남기는 것조차 너무 아까웠다. 한국에서처럼 남은 음식 포장해달라고 하고 싶었다. 어쨌거나 남은 음식을 뒤로 한채 숙소로 와서 마지막 맥주를 마셨다.
열 네 번째 날 - 독일
아침 식사를 하고 로텐부르그로 이동했다. 생 말로처럼 성 안에 도시가 있다. 전혀 독일 같지 않은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중세 마을 같았다. 크리스마스용품 가게들이 굉장히 많았고 테디베어의 본고장답게 테디베어 가게도 눈에 띄였다. 이 곳은 가난한 여행객들이 오래 있을 곳은 못되는 듯하다. 예쁜 상점들을 보고 있으면 들어가서 조그만 것 하나라도 사야 될 거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가격은 또 어찌나 비싸던지. 한순간 혹했다가도 가격표를 보고 얼른 정신이 들었다. 점심은 맥주와 피자로 해결. 뭐 나쁘진 않았지만 좀 부실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오후엔 윈헨으로 이동. 오락가락하는 날씨 덕택에 여러 번 잠이 깼지만 무사히 도착 할 수 있었다. 윤정이와 나는 남은 일정이 있기 때문에 뮌헨에 도착하자마자 일행들과의 작별을 고했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뮌헨 시내를 그냥 지나치려니 서글프기도 했다.
여행을 끝마치며
여행에서 돌아온 일주일간은 유럽을 잊지 못해 멍하게 사진만 들여다보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2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은 그 때가 꿈만 같아서 서글퍼진다. 외국에 나가면 다 애국자가 된다던가? 유럽의 아름다운 풍경과 선진국다운 고급문화에 반해 우리나라가 상대적으로 뒤쳐진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동시에 우리나라만한 곳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다시 돌아가리라는 결심을 잊지 않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내 나라에 대해 너무 많이 모르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몽마르트하면 모르스 위트릴로를 단번에 떠올리면서도 우리나라 예술가들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없었다. 내 나라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남에 나라나 기웃거리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앞으로 내 나라에 대한 공부도 열심히 해서 다음에 올 때는 한국적인 것도 그들에게 나눠주고 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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