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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산(淸凉山 870m)
건지산(蹇芝山 554m) 고랭지 밭에서 바라본 청량산 전경
도립공원 청량산은 바위산으로 그 바위틈 속에서 시원함이 풍겨 나오고 산 아래는 강원도 태백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 물이 흘려내려 청량함을 느끼게 한다. 산과 강으로 산수가 함께 어우러진 산은 그리 흔하지 않다. 때문에 청량산이 된다. 일월산으로부터 서쪽으로 뻗어 산은 멈칫 강을 건너지 못하고 낙동강 가에 섰다. 멀리서보면 여느 산과 다를 바 없지만 품속에 파고들면 12봉 (丈人峰,仙鶴峰,紫鸞峰,香爐峰,蓮花峰,硯滴峰,卓筆峰,紫宵峰,擎日峰,卓立峰,金塔峰,祝融峰) 11대(御風臺,致遠臺,般若臺,風穴臺,瑤草臺,景遊臺,華巖臺,彩霞臺,密城臺,鶴巢臺,金剛臺) 5굴(金生窟,金剛窟,邯生窟,方丈窟,元曉窟) 3수(聰明水,甘露水,金生水)를 갖추었다.
이 산 전경은 남쪽에서 바라보면 어가행열도 (御駕行列圖)로 보이고 낙동강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날 서쪽에서 바라보면 정상을 비롯한 3개의 봉우리가 마치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으로 보이는데, 한편 천하에 둘도 없는 뫼 산(山)자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정상에 서면 멀리 태백산에서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장엄하게 뻗어있고 가까이는 낙동강 건너편 서쪽에는 백두대간 태백산 옥돌봉에서 뻗어 내린 문수산, 만리산. 박달산, 학가산으로 이어지는 문수지맥이 건너다보인다. 동쪽으로 일월산이 멀지 않게 보이며 남서쪽으로 우뚝 솟은 학가산이 보인다.
퇴계 이황을 비롯 농암 이현보 필체가 청량산의 산수를 빼 닮았다는 신라의 명필 김생, 신라의 문장가 고운 최치원, 백담 구봉령, 신재 주세붕, 성재 금난수, 송암 권호문, 오봉 신지제, 구봉 김중청, 백운거사 이규보등 수다한 인물들이 찾아 들었고, 청량산에서 도산서원에 이르는 도산12곡의 무대는 도산구곡의 빼어난 산수미로 하여 금강산, 지리산, 삼각산에 이어 산수문학의 보고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멀지 않는 온혜리에서 출생한 퇴계 이황선생의 청량산가와 도산12곡, 이웃 분천리에서 출생한 농암 이현보선생의 농암가와 어부가의 무대가 비단처럼 펼쳐지고 그 끝자락에 안동호가 내려다보인다. 예부터 소금강이라는 애칭으로 불려왔으며 수다한 인물들이 청량산의 산수를 노래하였으며, 산 아래 낙동강과 청량산의 험준한 산악지형은 천연의 요새를 이루어 숨어 지내기 좋아 고려 공민왕이 축융봉 골짝에 몽진하였던 명산이다.
청량산은 가을 단풍명산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단풍 절정기인 10월20일을 전후한 내 청량의 단풍과, 신록이 푸르러지는 5월10일을 전후한 청량산 외곽 종주산행으로, 산과 강이 어우러진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산하를 감상하노라면 세상사에 찌든 사람들에게는 분명 청량감을 맛보게 할 것이고, 무릇 청량산의 진면목을 보게 될 것이다.
晩秋에 찾은 淸凉山
청량산매표소 淸凉之門(청량지문)
나는 오늘 산행을 위해 나분 들에서 잤다. 들판에서 잤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청량산도립공원 관리사무소, 청량산 박물관, 음식점, 숙박업소와 주차장이 있는 집단시설지구로 이곳은 본시 광석나루터가 있었던 들판이 없는 마을이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던 광석제단(廣石祭壇; 넓은 돌 제단)이 있어 넓은 돌에서 유래된 변형된 마을이름으로 속칭 나분 들이다.
06시10분 숙소를 나와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안개 자욱한 길을 나섰다. 청량교를 건너 서 청량지문(淸凉之門)을 들어섰다. 이른 아침이라 나는 오늘 조조할인(早朝割引)이 아니라 조조 무료입장(早朝 無料入場)이다.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안개 자욱한 도로를 따라 올라 청량폭포 앞이다. 이곳 마을은 청량골에서 첫 번째 만나는 마을로 아래 두들 마을이라 전한다. 여기서부터 정상 장인봉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시작되는 곳으로 가파른 진입로를 따라 오르게 되는데 600m 거리 언덕배기 두들 마을까지 사륜구동 소형차량만이 오를 수 있는 진입로가 나있다. 이곳 아래 두들 마을 이정표에는 좌우 두 개의 이정표가 있는데 같은 자리에서 장인봉까지 좌측 것은 1.7km이고 우측 것은 1.9km이다. 좌우 어느 것이 정확하다고는 말할 수 없고 다만 참고할 뿐이다. 좁은 급커브 길을 따라 오르다 보니 숲속에 빈집이 안개 속에 흐릿하게 보인다. 다시 꺾어지는 도로에서 숲길을 헤치고 올라서니 도무지 사람이 살 곳 같지 않은 이곳에 민가가 보인다. 민가 마당까지 안개가 차 있는 그 집에 빨래가 걸려있는 것으로 봐서 사람이 살고 있는 게 분명하다.
높은 꼭대기에 들판이 있는 마을 청량산 중턱에 자리 잡은 두들 마을은 비가와도 빗물이 땅에 스며들 여지없이 경사가 급하고 토질이 척박하여 주로 대추나무를 재배해서 한때는 나무 한그루에 자녀 대학까지 시킬 수 있다 할 정도로 재미를 보았다. 밭가에는 토종 복숭아를 심어 굶주림을 면했으나 10여 호 되던 마을은 이제는 겨우 두어 가구가 남아 있는데 일손이 부족하여 복숭아나무는 잡목으로 뒤덮여 수확할 수도 없다. 지금도 토종복숭아는 청량산 자락에 지천으로 널려있다. 청량산을 남이야 인정하던 말든 내산(吾山)이라 여겼던 퇴계 이황선생(退溪 李滉1501~1570)은 일찍이 “청량산가”에서 청량산은 내산이고 낙동강은 백구(白鷗) 너의 강이니 믿을 수 있지만 복사꽃 강물에 떠내려가면 상류에 무릉도원이 있다하고 고기 잡던 사람들이 소문을 내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내산처럼 아끼던 청량산을 오염시키고 파괴할까 예언처럼 염려까지 했겠다.
淸凉山歌
청량산(淸凉山) 육육봉(六六峰)을 아는 이 나와 백구(白鷗)
백구(白鷗)야 훤사(喧辭)하랴, 못 믿을 손 도화(桃花)로다
도화(桃花)야 떠가지 마라 어주자(魚舟子) 알까 하노라.
정상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남쪽풍경, (앞에 보이는 산이 건지산)
청량산정상 장인봉(丈人峰870m)이다. 일명 의상봉(義湘峰)이라고도 한다. 최근에 새운 정상석에는 김생굴에서 글씨공부를 했던 신라의 명필 서성 김생(書聖,金生711~790)의 글씨를 집자한 장인봉(丈人峰) 이름이 새겨져있고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1495~1555)선생은 1544년 봄 열흘 동안의 청량산 등반을 하여 청량산 봉우리 이름을 명명하고 1547년에 유 청량산록을 완성했는데 뒷면에는 그의 시, 등 청량산정(登 淸凉山頂)이 새겨져 있다.
登淸凉山頂 신제 주세붕 (愼齋 周世鵬1495~1555)
我登淸凉頂兩手擎靑天 ((아등청량정양수경청천) 청량산 꼭대기에 올라 두 손으로 푸른 하늘을 떠 받치니
白日正臨頭銀漢流耳邊 (백일정임두은한류이변) 햇빛은 머리위에 내려앉고 은하수는 귓전에 흐르네
俯視大瀛海有懷何錦錦 (부시대영해유회하금금) 아래로 구름바다를 굽어보니 비단결 같은 감회가 어찌 없을 소냐
更思駕黃鶴遊向三山巓(갱사가황학유향삼산전) 다시 생각하니 황학을 타고 신선 세계로 가고 있네!
맑은 날 정상에서면 북으로 문명산 등성이 넘어 태백산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소백산이 보이는데 태백산에서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파노라마처럼 장엄하게 뻗어있고 남서쪽으로는 흔히 사람들은 팔공산이 보인다고 하는데 사실은 태백산 옥돌봉(玉石山)에서 뻗어 내린 문수지맥의 명산 학가산이다. 남쪽으로는 청량산에서 오천유적지까지 도산구곡의 비경을 품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사행천(蛇行川)으로, 퇴계 이황선생의 도산12곡의 무대요, 농암 이현보선생의 농암가와 어부가의 무대가 되는 낙동강상류가 한눈에 펼쳐진다. 오늘은 날씨가 흐려 먼 곳을 볼 수 없어 아쉽다. 정상주변에 나무들이 크게 자라 시야를 가렸으나 오늘 와보니 나무들을 정리해 시계청소를 해두었다. 정상 남쪽 전망대로 이동하여 아래로 내려대 본다. 운해가 깔려 산 아래 낙동강은 볼 수 없으나 홀로 산정에 서서 아래로 망망대해를 굽어보니 정상석에 새겨진 신재선생의 “登 淸凉山頂”의 시구와 지금 나의 느낌이 일맥상통함을 느꼈다.
하늘다리에서 바라본 향로봉
하늘다리 주변 풍경
숙소를 06시10분에 출발하여 청량지문~청량폭포~두들 마을~ 장인봉정상에 07시40분에 도착했다. 약 3.5km에 1시간30분 걸려 올랐는데 정상에서 홀로 20분을 소비했다. 정상에서 내려와 최근에 놓여진 선학봉과 자란봉을 연결하는 하늘다라로 향한다. 선학봉에서 커다란 카메라를 맨 등산객을 오늘 처음으로 만났다. 운해는 좋으나 날씨가 흐려서 먼 곳을 볼 수 없으니 기대했던 만큼 좋은 사진 얻겠나 모르겠다. 해발800m 높이의 하늘다리를 건너 자란봉이다. 나는 좋은 풍광을 담아내려고 발품을 팔았지만 기대에 못 미친다. 뒷실 고개, 연적봉, 탁필봉을 지나 자소봉이다. 청량산에 오르면 서쪽에 장인봉과 동쪽에 자소봉을 필수적으로 오르게 된다. 09시20분, 장인봉으로 부터 동쪽으로 1.6km 거리에 있는 자소봉이다.
자소봉에서 바라본 일월산전경
자소봉(紫霄峰855m) 전망대에 오르면 맑은 날은 북쪽으로 태백산 천제단, 부쇠봉, 문수봉으로 이어지는 산마루가 어림되고 동쪽으로 작년 여름에 올랐던 일월산(日月山1218.5m) 일자봉과 월자봉이 건너다보인다, 그러나 맑은 날은 정상 시설물 통신탑이 훤히 보였는데 오늘은 그렇지 못하다. 청량산과 북쪽 문명산(文明山894m) 사이에 있는 북곡리 계곡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지난달 문명산 산행을 하고 하산 길에 민가에서 물도 얻어 마시고 사과도 얻어먹고 쉬어 갔던 기억이 있는, 문명산 남쪽자락에 있는 특이하게도 하나같이 파란지붕을 한 바로 그 윗 뒤실 마을도 내려다보인다. 이 전망대까지 예전에는 바위벽을 부여잡고 간신히 올랐는데 지금은 계단을 설치하여 쉽게 오를 수 있다. 네발로 기어오르는 것과 두발로 걸어 오르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쉬울까? 김환(金瑍) 의 이런 시가 있다.
청량산
東立雲揷十二峰 (동립운삽십이봉) 동쪽에 서 있는 구름위로 솟은 열두 봉우리
天池扶出玉芙蓉 (천지부출옥부용) 천지에 피어오르는 아름다운 연꽃과 같네
攀崖卽上高高頂 (반애즉상고고정) 벼랑을 부여잡고 높은 꼭대기에 올라보니
萬里群山一眼中 (만리군산일안중) 수만리 여러 산들이 눈 아래 펼쳐지누나!
이제 김생 굴로 하산길이다. 전남 해남에서 왔다는 단체등산객이 올라온다. 이 시각에 여기까지 올라오려면 묻지 않아도 나분 들에서 숙박을 했겠다. 아래쪽 단풍이 너무나 좋더라고 전언을 하면서도 힘들어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내가 매년 한번 씩은 가는 해남 두륜산과 달마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두륜산 단풍은 11월10일이 절정기라고 일러준다. 같은 차를 타고 산행을 같이 시작해도 체력은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몸집이 좋아 보일수록 나이가 들수록 체력이 떨어진다. 가파른 길을 오르다보니 선두는 기다리느라 힘들고 뒤따라오는 사람들은 못 따라가서 힘들다. 나는 초행인 이들에게 열심히 산행안내를 했다. 힘들어 하는 이들에게 지름길을 안내했더니 길을 가면서도 뒤돌아보며 고맙다고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김생이 글씨 공부를 했다는 김생 굴
김생 굴 옆에 또 하나의 굴
단풍 좋은 숲길을 걸어 내려와 신라의 서성이라 칭함을 받는 김생(金生711~790)이 글씨공부를 했다는 김생굴(金生窟)이다. 청량사 주변의 풍치를 한눈에 굽어 볼 수 있는 곳이다. 김생 굴은 두 개의 굴이 있는데 하나는 거처하며 공부하던 굴이고 옆에 석굴암처럼 생긴 천연 동굴 하나는 절벽에서 물이 항상 주룩주룩 떨어지는데 이물로 먹물을 삼았다한다. 김생은 청량산 동쪽 재산면 출신이라는 설과 함께 김생이 공부할 때 얽힌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오늘날 천재는 악필이라고 글씨 쓰기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으나 단순히 이쁘게 쓰는데 그치지 않고 글씨를 잘 쓰게 교육함으로써 매사에 정성을 기울리는 습관을 기울인다면 불량품이나 부실공사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은 월요일 평일인데도 단풍철이라 등산객들이 줄지어 김생굴로 올라오고 있다. 김생굴 앞에 류희지 (柳熙之)의 시가 걸려있다.
金生 窟(김생 굴)
金生健筆世爭傳 (김생건필세쟁전) 김생의 온건한 글씨 다투어 전해졌으니
此地探眞間幾年 (차지탐진간기년) 묻노니 여기서 공부한지 몇 년이던고
古穴荒凉人不見 (고혈황량인불견) 옛터 황량하고 사람도 없지만
至今遺跡尙宛然 (지금유적상완연) 지금도 그 유적 오히려 완연하네
청량정사 전경
김생 굴에서 내려와 청량정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44호)앞이다. 1832년 퇴계 이황선생의 유산(遊山)을 기념하여 사림들의 합의로 후학들이 세웠다 한다. 1896년 조선의병의 근거지가 되자 그해 일본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던 것을 1901년에 중건했다. 나는 일 년에도 몇 차례나 오는 청량산이지만 청량정사 앞에만 오면 만감이 교차한다. 그것은 내 나이 열두 살 때 처음 왔을 때의 기억 때문이다. 청량정사는 기억컨대 하나는 청량정사(淸凉精舍)요, 하나는 지금에 산 꾼의 집으로 사용되는 오산당(吾山堂) 이다. 각기 현판이 걸려있었는데 관리가 되지 않는 듯 기와지붕에는 키 큰 잡초와 푸른 이끼가 덮여 있었다. 곧 장 썩어 내릴 것만 같았는데 오산당 방바닥에는 누군가가 나무불을 피워 밥을 지어먹고 누어 잔 깔개 등 쓰레기들이 널 부러져 있었다. 오산당과 청량정사는 낮은 담장하나 사이였고 두 건물을 오가는 쪽문은 아이들 키에도 이마가 닿을 듯해서 갓 쓴 어른들은 어떻게 지나다닐까 궁금했다. 지금 생각하니 왜 그렇게 문을 낮게 만들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우리 일행은 청량정사 마루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했는데 건물 앞 오른쪽에 오래된 느티나무가 반세기가 지난 지금 보니 고사되어져있다. 청량정사 건물은 기둥을 제외한 서까래도 교체되어있고 기와도 새것이다. 산 꾼의 집으로 사용되는 오산당 건물은 함께 보수하지 않고 비가 새자 1970년대 새마을사업 때 기와를 벗기고 스레이트로 교체되어진듯하고, 그것도 낡아 근년에 지붕을 새로 입힌 듯 새것이다. 현판은 청량산 박물관에 가있는데 이 건물도 기와집이었다는 것을 벗겨서 정원에 쌓아둔 기와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청량사 주변 풍경
청량사 단풍
청량정사에서 걸어서 5분 거리, 청량사다. 많은 사람들이 만추의 풍경을 담을 려고 카메라를 치켜들고 있다. 신라 고찰로 알려진 청량사는 공민왕 친필로 전해지는 유리보전(琉璃寶殿) 현판이 달린 건물 하나와 숙소로 사용되는 건물이 전부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지금은 엄청 커졌다. 다시 돌아와 청량정사 앞을 지나 예전에 외 청량사로 불렀던 응진전으로 향한다. 금탑봉 중턱 절벽으로 난 길인데 어릴 적 기억으로는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아 길이 좁아 엉금엉금 기어갔다. 지금처럼 나무들이 많지 않아 절벽아래 바닥이 가물가물 내려다 보였다. 한발잘못 디디면 굴러 떨어질 것 같았고 나무가 없어 붙잡을 데도 없었다.
어풍대에서 바라본 청량산의 단풍
풍혈대와 응진전
풍혈대 아래 응진전이다. 풍광이 좋은 명소의 하나다. 옛적에는 입석으로 내려가는 길이 없어 막다른 곳이었다. 그때 기억은 아무도 살지 않는 응진전에는 험상궂은 사천왕상이 칼을 빼어들고 먼지를 뒤집어쓴 체 지키고 서 있었고, 풍혈암 (風穴岩) 절벽아래에는 커다란 바위굴이 있었는데 습기가 차지 않아 사람이 숨어살기 좋아보였다. 지금은 굴 앞에 또 다른 건물을 지어 가려지고 출입도 못하게 되어있다. 때문에 지금은 건물 뒤에 멋진 석굴이 있는 줄을 아무도 모른다.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남쪽으로 축융봉이 건너다보이는 이곳에서 휴식을 취한다.
휴식을 끝내고 입석대로 향한다. 내려가면서도 이따금 응진전 쪽을 돌아보게 된다. 특히 단풍이 물들었을 적에 담쟁이 넝쿨이 바위 절벽을 타고 올라가는 그림 같은 풍경이 있어 청량산에서 빼 놓을 수 없는 풍경사진의 명소다. 입석대가 얼마 남지 않았다. 등산객들이 꾸역꾸역 밀려 올라오고 있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곧 입석대다. 많은 사람들이 산행을 위해 행장을 꾸리고 있다. 입석대는 청량산입구에서 재산면으로 넘어가는 물티재까지 청량계곡을 관통하는 도로가 있어, 여기서 산행을 시작하는 곳이기도 하고 끝내는 곳이기도 하다. 대개 산악회에서 청량폭포~두들마을~장인봉~하늘다리~자소봉~청량정사~응진전~입석대, 이렇게 하기도하고 그 반대 순서로 하기도 하는데 거리에 비하여 시간이 많이 걸리는 편이다. 급경사가 많아 체력소모가 많고 넉넉히 4시간30분 소요된다.
그런데 나는 오늘 입석에서 축융봉으로 새로운 산행을 위해 출발한다. 두 번 산행하는 기분이다. 도로를 따라 600m 거리에 청량산휴게소 직전에 산성입구가 있다. 11시30분 산성입구다. 축융봉 정상까지 2km에 1시간 거리다. 조금 걸어 들어가면 산성이보이고 천혜의 요새지 풍치 좋은 산골짝에 한두 개의 낡은 건물과 감나무 등이 마을을 지키고 있어 마을이었음을 증명한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지만 예전에는 여러 가구 살았던 산성마을이다. 고려 공민왕 (高麗 恭愍王)이 홍건적의 난(紅巾賊의 亂 1361년)을 피하여 안전(安全)을 위하여 동(東)쪽으로 가야하다는 건의를 받아들여 이곳에 왔을 적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공민왕산성(恭愍王山城)이 마을을 감싸고돈다. 왕이 머무는 동안 이 지역 백성들이 지극정성으로 받들어 모신 것에 감응하여 복주(福州)를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附)로 승격시켰으니 지금의 안동(安東)이다.
축융봉 정상주변의 풍경
산성을 따라 축융봉으로 오른다. 12시30분 축융봉(祝融峰845m)정상이다. 왕이 국태민안 국운융성발전을 기원하던 제단이었던 곳, 동서로 두 개의 바위봉으로 이루어졌는데 동쪽 것이 조금 더 높아 정상봉이다. 청량산에서 조망이 가장 좋은 곳이다. 청량산을 한눈에 감상할 수가 있고 남쪽으로 낙동강물줄기가 굽이굽이 흐르는 풍경이 내려다보이고, 동쪽 물티 재 사이로 건너다보이는 일월산의 조망과 일월산 등성이로 떠오르는 일출과 월출광경은 가히 환상적이다. 오늘 산행에서 본디 청량산 휴게소에서 숙식을 하고 일출을 보려했으나, 식사가 불가능하다해서 나분 들에서 자는 바람에 부득이 계획을 수정해버렸다. 오늘은 시계가 흐려 가까운 낙동강도잘 보이지 않는다.
축융봉에서 임도를 따라 0.9km 아래로 내려와 공민왕당(恭愍王堂)이다. 공민왕 위패를 모신 광감전(曠感殿)과 옆에 작은 또 하나의 건물이 있다. 축융봉 주변에 산성마을 사람과 가송리 사람들이 마을 대동제 형식으로 당제를 지내왔다. 이곳 말고도 공민왕과 관련하여 가송리에 공주당, 단천리에 왕모당이 있다. 공민왕당 아래에는 빈집들이 여럿 보이는데 몇 해 전까지 사람이 살며 사과심고 약초 심었던 이 산골 다락 밭도 대를 이을 사람이 없으니 묵밭이 되어있고 얼마 안가 산이 될게다. 그 때 누가 여기에도 사람이 살았다 증명하리요.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의 시를 생각하면서 발걸음을 재촉한다.
野翁(시골노인)
身御冷然禦寇風 (신어냉년어구풍) 이 몸이 저 서늘한 날 샌 바람을 타고
千岩行盡一宵中 (천암행진일소중) 하룻밤 사이에 온 산천을 다 구경 했네
老僧贈我田家笠 (노승증아전가립) 늙은 스님이 농사지을 때 쓰는 삿갓을 주면서
勸早歸來作野翁 (권조귀래작야옹) 일찍이 돌아와서 시골 노인이나 되어주려무나
나분들 옛 광석나루터 건너편 풍경
공민왕당에서 1.4km 걸어 내려와 산성마을 입구다. 이제부터 도로를 따라 쉬엄쉬엄 걸어 나분들 마을 청량산 안동시내버스 종점이다. 오늘의 여정은 나분들~청량지문~청량폭포~두들마을~정상 장인봉~하늘다리~자소봉~김생굴~청량정사~청량사~청량정사~응진전~입석대~산성입구~축융봉~공민왕당~산성입구~입석대~선학정~청량폭포~청량지문~나분들 마을 집단시설지구까지 약16km 06시10분에 산행 시작하여 산행종료 14시10분이더라.
2012년 10월29일 월요일 흐림
첫댓글 훌륭한 산행기 잘 감상했습니다.
저는 청량산을 5-6번 정도 갔습니다.
선생님은 빡빡한 산행하셨네요.
감사합니다.漢詩^^*
道光 선생님! 자주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여러 번 찾으신 산이라 청량산을 왠 만큼 아시겠습니다.
혹, 시간이 있으시면 청량산 서쪽 건너편 만리산 능선 향적사나 관창리 민가에서라도
숙박을 하시면서 청량산을 감상해 보시기를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시기를 택하여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에 가실 때 조금 도움이 될런지 모르겠습니다.
이곳을 오셨군요 지나가시다가보면
거촌이란 마을을 지나가십니다.
축융봉도 몇번 가보았고 청량산 지인들과
모임에서 수시로 갑니다.
산사음악회도 열리고 강에는 여름이면
청량산 암벽을 감상하며 레프팅도 할 수 있습니다.
주말 휴일엔 멀리서 오시는분들을 위하여 양보하고
주중에나 한가하면 찾기도하지요.
단체에서 수련대회를 자주하고 언제 가도 항상 좋습니다.
산행일기도 대단하시고 사진이 잘 나왔어요.
琴堤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청량산에 대하여 너무도 잘 아시겠는데 저의 글을 읽으시고
혹 <그건 아닌데...> 하시는 부분은 없으셨는지요?
칭찬까지 해주시니 쑥스럽기도 하고, 한편 글쓴 보람도 느껴지네요.
수도없이 청량산을가고 안내도 했지만, 산행일기는 아직 못써봤습니다.
두들마을엔 불편하여도 지키고 사는 주민들이 감사하고
축륭봉쪽으로 민가는 이젠 빈집으로 되었습니다.
두들마을엔 민가에서 약초 막걸리를 담궈서 등산객들한테 팔고 있고
불편하여도 고향을 못버리고 살고 계신것은
청량산에 반하여 지키고 계시겠지요.
제생각입니다.
요즘 하늘다리 설치후 많은 등산객들이 찾고 있고
때론 사람들이 산으로다 온듯 하기도 하고 청량산가의 뜻을 가끔 세겨봅니다.
청량산은 50년 전 제가 어릴적 보았던 청량산이 아닌것 같습니다.
상류에 댐이 생겨 유수량이 줄었고요. 때문에 단풍도 옛날 같지 않는 것 같고요.
환경의 변화가 심각합니다. 나룻배를 타고 건너 다니던 건너편 선착장 부근이
마지막 사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도로공사로 청량골에서 쓸려 내려온
돌 무더기가 낙동강을 메우고 있지요.
인간에 의하여 자연이 이렇게 파괴되는 것, 가슴이 아픔니다.
퇴계 이황선생의 <淸凉山歌> 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풍광이 장관입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자주 찾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