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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복식의 원류와 특징 의복의 기원에 대한 여러 이론에는 신체보호설, 장식설, 정숙설, 비정숙설이 있다. 약 70만년 전 구석기 시대, 이 땅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고, 돌을 갈아 만든 마제석기와 토기를 사용하는 신석기시대(기원전 6000년~600년경)는 덧무늬와 빗살무늬토기가 대표적이고 동물가죽이나 마를 재배해 만든 직물로도 의복을 제작했으리라 추측된다. 기원전 10세기 경 만주와 몽고지역으로부터 민무늬 토기를 쓰는 새로운 종족 “예맥”이 한반도로 들어와 선주민들을 흡수, 세력을 확장 했고 이때부터 몽고 인종과 알타이어계에 속하는 지금의 한민족(韓民族)의 구성이 확립되었다. 청동기 시대 유적을 통해 뽕나무에서 누에를 치고 견사를 만들어 견직물을 생산한 기록이 발견되며 당시 직물 생산이 보편화되었음 알수 있다. 기원전 7세기, 단군 왕검은 요녕지방과 한반도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여러 부족들을 통합해 고조선(단군조선)을 건국했으며 기원전 4세기 경에 요녕지방을 중심으로 한반도 북부에 걸친 연맹왕국으로 성장하였다. 그 뒤 기원전 1세기 때, 중국 연나라에서 온 위만이 고조선을 차지하여 위만 조선을 세웠다. 위만이 조선으로 망명할 때 상투를 틀고 조선옷을 입고 왔다는 기록은 이미 우리 고유의 복식문화가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며 유물에서 발견되는 대구의 장식은 당시 복식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려준다. 한민족은 철기시대 이전까지 스키타이 문화의 영향(많은 한국의 신화, 토테미즘, 샤머니즘)하에 있었고 복식 역시 스키타이계 복식문화권의 기마 수렵 생활에 편리한 북방 호복 계열의 의복이으로, 우리민족의 복식은 한족(漢族) 문화의 영향을 받기 전까지 스키타이 복식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민족 고유의 복식구조로 발전을 이루어 삼국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착용하였다. 특히 스키타이계 기마민족으로부터 세계로 전파된 바지의 착용(오늘날 한복바지)은 우리 복식에 나타난 기마민족 복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한국의 상고복식은 전체적으로 활동과 기마, 사냥 등에 편리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통해 선조들의 무(武)를 숭상하고 즐겼던 무풍적(武風的) 생활상을 확인할 수 있다.
2. 중국문화의 유입과 삼국시대의 복식 - 고유 복식의 형성기 우리 복식은 북방계열의 좁은 소매의 상의와 바지 형태의 하의를 착용한 북방계 호복계열로, 중국이 영향으로 치마를 바지 위에 착용하고, 통일신라 중엽에는 당의 관복제도를 받아들여 지배계급의 의례용 겉옷으로 입게 된다. 그리고 고려초기에 송의 복식, 고려 말기에는 원의 복식, 조선 초기에는 명의 복식이 왕족 및 지배계급에서 의례복으로 착용하는 등 주변국과의 교류를 통해 다양한 복식을 수용하게 된다. 대체로 그 기본구조를 유지한 채 독특한 복식문화의 이중구조를 형성하며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데, 한국복식의 2중 구조는 대략 계절에 따른 2중 구조, 신분과 계급의 차에 따른 2중 구조, 외래복과 고유복의 2중 구조로 나눌수 있으며, 매우 특징적인 것으로 한민족의 뛰어난 문화 수용성과 융합능력을 보여주는 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복식문화는 시기와 국가, 민족을 막론하고 여타 문화와의 교류를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형성되는 것이다. 한국복식의 기본 요소(상대복식의 기본형)로는 머리에 착용하는 모든 것을 총칭하는 말로 건, 건귁, 책, 조우관, 금관, 금동관(최고 지배층이 씀)등이 있는 관모 , 남녀가 모두 입은 저고리와 바지인 유와 고 , 가장 바깥쪽에 있는 표의인 포(두루마기), 상․군(치마), 금,옥,가죽,짐승의 뿔,직물,실(매듭) 등으로 만들어 유, 고, 포, 상을 고정시키는데 쓰이는 대(허리띠), 신발로는 장화 형태 화, 고무신의 형태 인 이, 회장이나 끝동에 기능적 장식적인 목적으로 댄 선, 금과 각종 옥,유리 등을 이용한 다양한 목걸이. 귀걸이. 반지, 팔찌등의 장신구를 들 수 있다. 삼국 중, 고구려복식은 계급에 따라 책과 절풍을 착용했으며, 공공모임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옷을 입고 금은 장신구를 착용하였다. 백제복식은 특히 대륙백제 통치시기의 중국적 요소가 짙은 특징이 있으며 ‘의복이 깨끗하다. 왜와 가까워 문신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모자를 관이라 저고리를 복삼이라, 바지를 곤이라 하는데 그 언어와 복장이 대개 고구려와 같다'고 전해진다. 신라복식은 수서등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백제와 대략 같은데, 복색은 흰색을 숭상하였으며, 부인들은 변발하여 머리 위로 감아올려 갖가지 비단과 구슬로 장식한다고 하였다.
3. 통일 신라의 복식과 실크로드 - 복식의 변혁기 신라복식의 원형은 상대에 이어 여전히 북방 알타이계의 복식으로 간단하면서도 실생활에 편리한 옷이었으나, 여기에 삼국통일의 야망으로 친당정책을 쓴 결과 당의 의복을 수입하여 착용함으로 본격적으로 중국복식이 도입되어 널리 입혀졌다. 품이 넉넉한 폭이 넓은 형태로 바뀌었고, 이 때를 기해 고유 복식의 기본구조에 덧붙여 관모-복두, 단령,반비, 표와 같은 새로운 복식이 등장한다. 이런 중국복식의 도입과 착용은 왕족과 지배층에 한하였고, 일반 백성들은 여전히 민족복식을 착용했지만 우리 복식전체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큰 것으로 복식사에 있어 일대 전환기였다고 할 수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풍요로운 경제생활, 문화의 성숙, 사회의 안정으로 인해 계급의 복식질서가 어지러워지고 사치스럽고 예절에 벗어났으며, 외래품을 숭상하게 되었다. 이렇게 신라인들의 극도로 해이해진 복식기강과 위계질서를 바로 잡고자 제 42대 왕인 흥덕왕은 국민의 사치풍속을 금하고 신분에 따른 복식규정에 관한 금제를 발표해서 9세기 당시 신라의 각 계층(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평민)이 무엇을 입고 입지 말아야하는지(내용, 소재)를 자세히 기록해놓은 것이다. 이를 통해 왕과 왕비의 복식, 각 계급에 따라 복식의 양상도 유형을 달리해 다양하게 발전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의복재료도 견의 다양한 종류를 보면 당시의 복식양식이 얼마나 화려했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금제는 주로 귀족계급에 관한 것이고, 서민과는 관련이 적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라 말기에서의 통일신라의 복식은 상류계급의 복식으로 당제를, 하류계급에서는 국제를 이용하고 있었다. 이는 바로 우리 나라 복식의 주요한 특징인 복식의 2중구조 중 외래복과 국속복의 2중구조가 이 때에 이르러 확연히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알 수있다.통일신라는 외국문물(唐)에 적극적으로 접하여 이를 수용, 융합, 발전시킨 복식의 변혁기라고 할 수 있다. 신라는 육상과 해상의 실크로드를 통해 차츰 동서문화교류에 큰 역할을 담당했으며 이는 복식에도 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한국복식에 나타나는 서역복식 요소들인 포도문,석류문,연화문 등의 문양과 백첩포,계 등의 직물,또 흥덕왕 복식금제에서 볼 수 있는 공작미,비취모 등과 장신구에 애용되었던 옥 등은 모두 신라복식이 서역의 소재를 수용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4. 고려양과 몽고복식의 영향 고려 초기에서 중기까지는 중국 오대, 송 복식 영향기로서 통일신라시대 복식을 계승하여 2중구조를 형성하면서 고려도 신라의 제도를 그대로 사용하는 한편, 중국 오대나 송과 평화적인 친교 관계를 맺어 그 문화를 흡수하였다. 이후 남송, 금과의 교류시기를 거쳐 원(몽고족)과의 본격적인 교류가 시작되면서 몽고 풍속이 ”몽고풍“이라하여 우리나라에 유행하게 되었다. 수화자, 남자의 착수의와 홀태바지, 여자의 족두리, 신부의 연지 찍는 풍속 등이 그것이다. 고려왕비로 들어온 원나라 공주들의 궁양을 따른 궁중의 몽고풍을 민간이 모방하여 국속을 이룬 것이며, 남녀의 옷고름에 차는 장도는 그 형체와 패용법도 몽고풍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고려의 풍속 역시 원의 사회에 전해지게 되었는데, 이를 당시 몽고에서는 고려양이라고 하여 두루마기 등 우리 고유의 의복이 몽고에 전해지기도 했다. 이것은 고려가 정치적으로 몽고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동안 양국의 민족교류가 필연적으로 이루어진데서 온 고려인의 대륙진출로 말미암은 영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 말기는 명(明)복식의 영향기이다. 고려말 원의 세력이 쇠퇴하며 고려는 명)과 친근을 도모하여 원(元)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는데, 음양오행설에 따라 그리고 원을 배척하고자 하는 새로운 움직임 속에서 자주성을 모색했고, 명에 관복을 청하여 새로운 주변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했다. 공민왕 때에 받은 왕의 면복, 원유관포, 군신의 배제관복은 중국에 비하여 2등 체강원칙을 적용, 왕복은 중국의 친왕례에 따른 것이고 왕비관복은 송, 명의 명부복인 적의였다. 이러한 명의 복식영향은 조선왕조시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주로 관복제도 및 일부 지배계층의 복식 변천을 가져왔을 뿐, 일반 복식은 우리 고유의 복식 구조에서 크게 변화된 바가 없었다. 보편적으로 넓어진 바짓가랑이, 길이가 짧아진 저고리, 넓은 치마폭 등의 세부적인 변화가 있었을 뿐이며, 이러한 일반복의 세부적인 변화는 전체적으로 의복의 아름다움이 강조된 것이어서 복식미의 진일보로 볼 수있다. 고려시대 복식 중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문익점에 의한 목면의 전래로 이것이 비단이나 명주를 마음대로 입을 수 없었던 서민의 복식에 커다란 전환기를 마련해 주었다. 현대 몽고족 복식 몽고족은 유목생활을 하여 남녀 모두 장포 착용. 일반적으로 소매가 길고 폭은 넓으며, 목깃 높고 우임이다. 소매 끝이나 밑단 등에 다른 색의 천으로 선을 둘러 적색이나 녹색의 요대를 맨다. 여성의 것은 남성의 것에 비해 몸에 달라붙는 형태이다. 여성은, 두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겨울에는 남성과 똑같이 원추형모자를 쓰고 산호, 호박, 진주, 금, 은 옥 등으로 장식한다.
제 5 주 조선의 왕복과 관복 조선왕조는, 그 기반을 확고히 하고자 3대 정책을 주요 건국의 이념으로 내세웠다. 외교적으로 사대교린주의, 문화적으로 숭유배불주의, 경제적으로 농본민생주의 정책을 썼으며 철저한 신분사회로 양반과 중인, 상민, 천민으로 구별되는 엄격한 신분제도가 있었다. 계급에 따라 관직(官職), 납세(納稅), 군역(軍役) 등이 차별되고, 의식주(衣食住)의 형태 역시 달랐다. 조선은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나뉘는 양반 중심의 사회로 사회적 신분은 세습되어 신분의 변화가 없었다. 양반들의 지위를 강화하고자 유교적 예속과 가족제도가 운영되었고 여성의 사회적 활동은 허락되지 않았으며 과부의 재혼도 금지되었다. 대가족제도를 유지하고자, 제사가 중요시되었고, 족보가 간행되었으며, 종중(宗中)의 모임이 중요시되었다. 이와 같은 유교적 예속과 사회운영을 위하여 향약(鄕約)이 조직, 운영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엄격한 계층분화의 사회풍조는 복식에 있어서 매우 엄격한 계층분화를 가져왔는데, 이 같은 신분복식은 왕복, 백관복, 서리복과 상층지배계급의 부녀인 명부복으로 집약되고 있으며, 이들 복식은 법제와 정령, 관습에 의하여 규제되게 되었다. 왕복과 백관의 복식은 크게 제복, 조복, 공복, 상복 등으로 나눌 수 있고, 왕의 편복은 사대부의 편복과 차이가 없이 국속의 저고리, 바지 및 포로서 답호, 철릭 등을 착용하였다. 이 외 융복이나 구군복 제도가 있었음을 「경국대전」「속대전」「대전통편」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제 6 주 한국의 전통 복색 고대 동양 사상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음양오행설은 우주를 음과 양의 두 가지 기본 요소로 나누고 우주의 모든 존재를 다섯 부분의 구성으로 보아 각기 모든 사물의 조화와 변화가 이를 기초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이러한 음양오행설은 오랜 기간 사상과 문화의 바탕으로 존재하면서 사회, 문화, 예술, 제도 등 모든 방면에 영향을 주어왔고 복색은 왕조의 흥망과 밀접히 연관되어 각 왕조의 숭상색으로 된 복식을 착용해 왕조의 덕을 기리기 위해 각 시대에 따라 복색의 규제 및 권장을 하였다. 음양오행사상에 근거하여 동방국가인 조선에서는 청색을 숭상하고 청색의 상극인 백색의의 착용을 금하는 상소들이 많았던 것이다. 복색에 관한 금제 중 대표적인 것을 들면 황, 자 .홍 ,회. 백. 옥색, 초록색이 있었다. 청색은 한민족을 상징하는 색으로도 쓰여서 우리 나라를 가리켜 청구라 이르는 등 민족적으로 오랜기간 청색을 선호하고 애용했다. 적색은 조선왕조의 상징색으로 남쪽과 화, 따뜻함, 활동, 여름과 심장을 나타냈다. 황색은 음양 상으로 중성이며, 오행 중 중앙의 토를 상징, 모든 색의 근원으로 숭상되었고 중국에선 천자의 색으로 가장 존귀한 색이었다. 농경사회로서 흙의 색인 황색이 생산과 풍요의 상징으로도 쓰였다. 백색은 백의민족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애용한 복색, 음에 해당하는 것으로 흉례(상복)에 사용되었다. 한편 백색은 청정과 순결, 광명의 표상으로 태양의 색이라는 상징도 가지고 있어 부정을 쫓는 의미도 있었다. 흑색은 음의 색, 오행에서는 소생을 상징, 만물의 흐름과 변화를 뜻하고 있고, 북쪽과 겨울을 상징해 만물의 쇠퇴를 뜻할 수도 있기에 금한 것일 수도 있으며 고대 상복제도가 흑색이었던 것 역시 백색과 비슷한 논리로 금제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백의풍습요인 백색은 한민족에게 단순한 색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깨끗하고 사욕에 물들지 않은 순결한 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화사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기질이 있었기 때문이다. 짜여진 그대로 인공을 배제하고 자연을 즐겨하는 성품으로 소색을 그대로 입어 자연에 순응하려는 심리이다. 그래선지 백의금령과 음양오행사상도 백의 착용에는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다. 우리 민족의 정서와 심미관 속에 백색이 주는 의미가 그만큼 강했던 것을 의미한다. 우리 민족에게 백색은 고대부터 청정과 순결, 광명, 도의의 표상이며, 태양의 색이라는 상징을 가지고 있었고, 부정을 쫓는 의미, 재생을 의미하는 색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이것에서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던 백색의 이미지와 순수나 소박 등에서 상호 일치되는 면이 보인다.
7. 한국의 전통 문양 문양이란 장식을 목적으로 표면에 나타낸 형상으로, 문양은 점 ․선 ․면 ․색의 구성, 또는 이들의 질서 있는 배열로 이루어지며, 문양의 기원은 질서를 가지고 아름답게 꾸미려는 인간 본연의 의지로 보는 “장식설”, 반복적인 행위에서 안도감과 질서를 준다는 견해로 “공간 공포설”, 주술적,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여 인간생존의 안락과 복을 기원한다는 “상징설” 이 있다. 이 3가지의 설은 모두 근거가 있으나, 차츰 그 발전 과정에서 순수한 장식으로서의 문양의 기능이 더욱 강조 활용되어왔다. 동물 문양으로 용맹의 상징으로 무관의 흉배에 많이 사용된 호랑이, 십장생 중 하나로 성품이 온순, 고결하며 장수와 벼슬을 상징한 사슴, 천년 장수하는 길한 새로 문관의 흉배에 애용된 학, 알이 많은 성질을 기려 다산다자의 기원을 담아 사용된 어류, 꽃과 함께 주로 쓰여 이성간의 사랑이나 부부간의 화목함을 상징한 나비, 전지전능의 상상 속의 동물로 왕과 왕세자, 세손의 복식에 이용된 용, 상상속의 새로 인, 의, 덕을 상징하여 왕비나 세자빈의 복식에 사용된 봉황, 신성하고 인내와 힘, 장수를 상징한 거북, 복을 가져오는 뜻이 담긴 박쥐, 화조(꽃과 새), 전설상의 동물로 어진 동물이라 하여 대군의 흉배에 장식했던 기린이 있으며, 식물 문양으로 꽃중의 왕이며 부귀와 길상의 상징으로 여성복식에 많이 이용된 목단(모란), 불교의 상징꽃으로 진흙 속에서도 맑은 꽃을 피우는 덕과 다산의 기원을 담아 여성복과 침구류 등에 사용된 연화(연꽃), 덩굴이 끊임없이 이어져 자손이 번성하라는 상징으로 단독적으로 혹은 기타 문양과 어우러져 많이 사용된 당초, 십장생 중 하나로 장수를 기원하는 뜻이 있는 불로초, 하나의 송이에서 많은 열매가 열리므로 다산의 상징이 담긴 포도, 석류, 절개와 굳은 의지의 상징으로 사용된 대나무 등이 있다. 그 밖에 기하추상문은 각종 점이나 선 등을 이용한 문양이며, 문자문은 글자를 문양화한 것으로 대표적으로는 만(卍),아(亞)자문 등이 있고 이외에 길상이나 장수를 뜻하는 수복(壽福)문이나 활옷의 이성지합(二姓之合) 문, 자연 속의 구름이나 파도, 바위, 산호 등을 표현한 문양 등이 다양하게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