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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사(세계/한국) 일반역사 스크랩 `소현세자`와 천주교 신부 `아담 샬(Adam Schall)`의 비화
KESLL 추천 1 조회 295 14.10.29 12:45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소현세자'와 천주교 신부 '아담 샬(Adam Schall)'의 비화 다시 읽는 우리역사

2007/04/17 21:32

복사 http://blog.naver.com/himammo/90016582626

 

'소현세자 천주교 신부 아담샬(Adam Schall)’ 비화

 


 
볼모로 청나라에서 독일 신부 아담 만난 '소현세자'
 
그는 9 만에 돌아온 고국에서 독살 당했나
 

소현세자(昭顯世子) 아담 신부(Father Adam Schall).

 

 

천주교와 서양의 문물에 눈뜬 소현세자

 

우리 역사에서 왕세자 한 사람의 죽음으로 국가의 운명이 크게 바뀐 사례는 흔치 않았지만 조선시대 소현세자(昭顯世子)의 경우는 다르다.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않고 인조의 대를 이어 등극했다면 적어도 조선후기의 역사 특히 일본과의 개화경쟁에 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현세자의 비극은 개인적 삶의 비극과 함께 역사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부왕 인조(仁祖)의 어른답지 못한 행동이 왕가의 비극을 국가의 비극으로 연장시킨 것이다. 국제적 감각과 영특한 자질로 군왕이 될 큰 그릇이었던 소현세자는 미처 뜻을 펴보지 못한 채 33세의 짧은 생애를 접었다. 독살당한 것이다. 그러므로써 천주교와 서양문물이 조선에 들어 올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소현세자는 1612년 인조의 장남으로 사가에서 태어났다. 인조반정과 함께 세자로 책봉되고, 정묘호란 때에는 전주에서 남도의 민심을 수습하는 역할을 맡았다. 병자호란 때에는 인조와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다 삼전도의 굴욕적 항복을 부왕과 함께 겪고 자진하여 청나라 볼모가 되어 심양으로 잡혀갔다.

 

남한산성, 고지도.

1636년(인조14) 청(淸)태종은 명(明)나라를 공격하면서 먼저 명나라를 섬기고 있는 조선을 신하의 나라로 삼고자 12만 대군으로 조선 침략을 감행하였다. 이것이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인조(仁祖)임금은 신하들과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40여일 처절한 항쟁을 벌였으나, 1637년 1월30일 끝내 산성에서 내려와 송파 삼전포(三田浦)에서 조선 역사에 유례가 없는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볼모가 된 소현세자는 함께 잡혀온 봉림대군과는 크게 다른 모습을 보였다. 봉림대군이 부왕과 조정의 뜻에 따라 청나라를 철천지 원수처럼 여기며 분노와 증오의 세월을 가슴에 쌓으며 보낸데 비해 소현세자는 대륙의 정세를 살피면서 이미 강대국으로 자리잡은 청나라와의 관계를 원활히 유지하고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하였다.

 

청군을 따라 볼모의 길을 떠나는 소현세자.

1637년 병자호란이 끝나자 청나라는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 인조의 세 아들을 볼모로 잡아갔다. 그 중 셋째아들 인평대군은 다음해에 돌아왔으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계속 청나라에 남아있었다.

 

소현세자가 회군하는 청군을 따라 북행길에 오를 때 인조는 서울 교외까지 전송나와 볼모로 잡혀가더라도 소무(蘇武)와 같이 행동할 것을 당부하였다. 한나라 무제 때 흉노에 잡혀간 소무는 19년 동안 흉노의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은 지절(志節)을 지킨 인물이었다. 삼전도의 치욕을 잊지못한 인조는 세자에게 절개를 지킬 것을 분부한 것이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수행원 300여 명과 함께 심양에 ‘심양관’을 짓고 거주하였다. 청나라는 소현세자를 통해 조선에 대한 대부분의 업무를 처리하였다. 세자는 조선 대사 이상의 외교관 역할을 한 셈이다.

 

 

아담 샬 신부와 학문적 교분을 쌓다

 

소현세자는 1644년 9월에 청군을 따라 북경에 들어가 70여 일 동안 체류하면서 서양인이 주관하고 있던 천문대를 찾아가 역법(曆法)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때 독일인 천주교 신부 아담 샬(Schall, J. A.)과 친교를 맺고 천문·수학·천주교 서적과 여지구(輿地球), 천주상(天主像)을 접하게 되었다. 아담 샬은 명나라 황제의 각별한 은총을 받으며 북경에 천주당을 짓고 소현세자의 숙소와 가까운 동안문에 살면서 소현세자와 사귀었다.

 

예수회 신부, 아담 (Father Adam Schall, 1591-1669),

독일 예수회 신부로 중국에서 활약했다.(중국식 이름은 탕약망,湯若望).

 

중국 천주교의 대학자이며 북경 남(南)천주당의 신부 황비묵은 ‘정교봉포(正敎奉褒)’에서 두 사람이 사귀게 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썼다.

 

“순치원년(順治元年, 1644)에 조선의 왕의 세자 (소현세자)는 북경에 볼모로 잡혀와 있으면서 아담 샬이 훌륭하다는 말을 듣고 때때로 천주당에 찾아와서 천문학 등을 묻고 배워갔다. 아담 샬도 자주 세자가 거처하는 곳을 찾아와서 오랫동안 이야기 하였는데 두사람 사이에는 깊이 뜻을 같이하는 바가 있었다. 아담 샬은 연달아 천주교가 바른 길임을 이야기하고, 세자도 자못 듣기를 좋아하여 자세히 묻곤 하였다.

 

천주교 본당 -  북경 북천주당(北京北天主堂)’

중국 북경에 있는 북천주당은 조선 사신들이 북경에 가면 꼭 들리는 곳이었다. 바로 이곳을 통해 많은 한역 서학서(천주교 관련서적, 서양문물, 천문, 과학 등)들이 조선에 전달되었다.

 

세자가 조선으로 돌아가게 되자 아담 샬은 선물로서 그가 지은 천문ㆍ산학(算學)ㆍ성교정도(聖敎正道) 등의 여러 가지 책과 여지구 한 벌 및 천주상 한 장을 보냈다. 세자는 삼가 이것을 받고 손수 글월을 써 보내어 감사하고 칭찬하는 뜻을 표하였다.”

 

아담 샬은 명말의 ‘승정역서’편찬의 중심 인물이고 서양역법에 의해 추산한 신력(新曆)편수에 종사하고 있었다. 아담 샬과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만나게 된 것은 조선의 역사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다.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서양의 역법과 과학지식 특히 천주교의 교리와 천주상을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소현세자가 아담 샬과의 만남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야마구치 마사유키, ‘조선서교사’(朝鮮西敎史)〉

 

 

소현세자가 아담 샬에게 보낸 편지

 

“어제 당신이 보내주신 천주상ㆍ천구의(天球儀)ㆍ천문서 및 그 밖의 여러 양학서(洋學書)등은 반갑게 받았으며 이에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먼저 그중 두서너 가지 책을 읽었습니다. 정신을 수양하고 인격을 가다듬는데 관한 참으로 높고 먼 교리임을 알았습니다.

 

1670년 예수회 선교사 Ferdinand Berbiest 가 설립한

‘북경 천문관측소’

 

우리나라는 오로지 어둡고 깨지 못하여 이것을 모르고 있었으니, 이 교리는 우리들의 지식의 빛이 될 것입니다. 천주상은 벽에 매달아 놓았으니 보는 사람의 마음에 평화를 줄뿐더러 이 세상의 더러운 티끌을 씻어내리는 것 같아서 여러가지로 느껴지는 바 많습니다.

 

천주의와 여러가지 책들은 이제까지 이 세상에 이러한 것들이 있었음을 몰랐습니다. 이런 것을 받으니 꿈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것은 수백년동안 하늘의 움직임과 맞지 않아서 헛된 것이라고 여겨 왔습니다. 이제 참으로 보기 드문 물건을 얻었으니, 무엇이 이보다 더 반가우리요.

 

내가 우리나라에 돌아가면 궁중에서 쓰게 하고 책을 많이 박아서 글 보는 사람들에게 펴려고 합니다. 그리하면 사막과 같이 메마른 우리나라가 학문의 전당으로 화할 것입니다. 사랑과 은총을 받은 우리 국민은 서양사람의 과학에서 배운 것을 모두 감사할 것입니다. 당신과 나는 다같이 외국인으로서, 큰 바다를 건너 낯선 땅에 와서, 서로 만나 즐거이 사귐이 핏줄기를 같이 한 가족들과 같으니, 천리(天理)의 깊고 깊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각컨대 사람의 마음이란 비록 멀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지식을 사랑함으로써 서로 알아내고 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서양의 서적과 천주상을 우리나라로 가져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아직 천주교를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릇된 나쁜 종교라고 천주의 높고 귀함을 더럽힐까 두려워하는 바 입니다.

 

‘여지구(輿地球)’

땅이 둥글게 생겼다는 사실을 조선의 지식층이 확실하게 알게된 것은 17세기 이후 중국에 와 있던 서양 선교사들과 접촉하면서 부터이다. 특히 서양 선교사들이 그린 세계지도가 전해지면서 땅이‘지구(地球)’라는 것을 믿게 되었고, 그와 함께 지구의 모양을 본 떠 놓은 지구의도 17세기에 이미 전해지게 되었다. 1645년(인조 23년) 청에서 돌아온 소현세자는 독일 출신의 선교사 아담 샬(湯若望)로부터 ‘여지구(輿地球)’를 얻어 가지고 들어왔는데 이것이 기록에 남은 첫 지구의이다.

 

그러므로 천주상을 당신에게 돌려보내고 실수함이 없게 하고자 합니다. 나도 당신에 대한 감사의 뜻은 나타내는 갚음으로 우리나라의 귀한 물건을 보냅니다. 그러나 당신이 베푼 은혜에 비하면 만분의 일도 못되옵니다. 삼가 말씀드립니다.”

 

소현세자가 서양의 진귀한 서적과 천주교 교리책을 받고 아담 샬에게 감사의 편지를 쓴 때가 1644년이었다. 1644년의 시점을 기억해두자.

 

 

조선은 친명(明), 친청(淸) 세력으로 양분된 싸움에 열중

 

소현세자가 북경과 심양에서 청과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익히며 양국간의 여러 가지 갈등 요인을 해결하고 있을 때 친명 존화의식에 빠진 조선의 조야에서는 세자를 탄핵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전개되었다. 청과 조선 사이를 중재하려는 세자가 마치 삼전도의 치욕을 잊고 친청주의자로 변신한 것으로 오해하고 비판하였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 세력은 세자의 행동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면서 각가지 모략을 일삼고, 인조 또한 몽고 치하의 고려 왕세자들처럼 청나라의 힘으로 자신을 폐하고 세자가 즉위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품었다. 그리고 아들을 감시하기 위해 수시로 내관을 심양관으로 보내 탐지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소현세자 거처였던 심양관(瀋陽館)

지금은 ‘선양시 소년아동도서관’으로 쓰이고 있다.

 

소현세자는 1644년 11월26일 청국의 볼모에서 풀려나 귀국길에 올랐다. 해외에서 9년 동안을 보낸 후 서울에 도착한 것은 33세 때인 이듬해 2월18일이었다.

 

그때는 이미 세자의 관측대로 명나라는 망하고 조선이 그토록 오랑캐로 멸시하던 청국이 중원 대륙을 석권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세자를 맞은 조정은 대륙의 정세 변화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권력싸움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특히 부왕 인조의 세자에 대한 비난과 증오심은 돌이키기 어려운 지경에 빠져있었다. 인조와 서인 정권은 세자가 쉽게 볼모에서 풀려나게 된 배경은 명나라를 배반하고 청나라에 귀의한 때문이라고 몰아부쳤다.

 

그러나 세자가 귀국한 데는 그럴만한 충분한 까닭이 있었다. 청국의 입장에서 명나라가 망한 마당에 조선은 더 이상 청나라에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래서 청국은 조선과의 관계를 풀고자 선심책으로 세자를 돌려보냈던 것이다. 세자는 환국할 때 중국인 5명의 환관과 궁녀들을 데리고 왔다. 환관 중에는 아담 샬로부터 세례를 받기 위해 교의(敎義)과정을 배우고 있던 천주교도가 포함돼 있었다. 이런 일들도 세자의 죽임을 불러온 단초가 되었다.

 

소현세자는 많은 서양서적을 갖고 귀국하였지만 정치적으로 독살되었기 때문에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귀국에 앞서 세자는 아담 샬에게서 받은 각종 선물 중 천주상에 대해서는 정중히 돌려보내고 싶다며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

 

중국에 서양의 천문, 과학, 천주교 사상 등을 전수한,

아담 샬(Adam Schall)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중국은 이들을 통해 서양문물을 흡수하고 꾸준히

교류하면서 전 세계를 상대로 한 무역교류를 확대한다.

 

“그러나 저는 서양서적과 천주상을 고국에 가져가고 싶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천주교라는 것을 아는 자가 없기 때문에 제가 우려하는 것은 이단사교(異端邪敎)라고 지목되어 천주의 존엄을 더럽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주상을 귀하에게 돌려보내 잘못을 범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귀하에 대한 의무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진귀한 물건을 사례로 보내어도 귀하의 은혜에 비기면 만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강제언,‘서양과 조선’)

 

 

200년 늦은 개화가 결국은 일본에게 짓밟히는 결과를 낳았다

 

인조의 냉대와 서인세력의 질시를 받으며 귀국한 세자는 두 달만에 병석에 누웠다가 곧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세자는 동천(東遷)하여 얼마되지 않아 질병을 얻고 며칠 뒤에 사망했다. 온 몸이 새까맣게 되고 몸 일곱 군데의 구멍에서 선혈이 낭자했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23년 6월조)

 

온 몸이 새카맣게 되고 몸 일곱 군데의 구멍에서 선혈이 낭자한 이 의문의 죽음은 독살임이 분명했다. 세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인조의 후궁인 조소용(趙昭容)의 관련설이 세간에 떠돌았다.

 

세자의 치료를 맡았던 의관 이형익은 조소용의 사갓집을 출입하던 의원으로서, 불과 3개월 전에 의관으로 궁중에 들어왔던 인물이며, 세자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관례를 무시한 채 아무런 조치도 없이 무사했던 것이다.

 

인조의 독살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소현세자의 뒤를 이어 세손이 적통으로 왕위를 잇는 것이 당시의 법도이고 관례였다. 그런데도 인조는 소현세자의 아들 즉 세손이 3명이나 있었는데도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리고 소현세자가 적장자이므로 3년상을 치러야 했는데도 1년 단상으로 치르도록 하고, 세자빈을 역모혐의로 사사하고, 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귀양보내어 그 중 두 명은 의혹속에 죽게 만들었다.

 

김용덕 교수는 소현세자의 독살설과 관력, ‘조선 후기 사상사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소현세자 ‘동궁일기’ 원본.

 

“이번 이 오랜 숙제를 규명해온 결과 이른바 강빈(세자빈-필자)의 옥(獄)은 전혀 날조된 것이며, 그것은 소현세자의 폭훙(暴薨)이 가져온 연쇄적인 비극이었으며, 소현세자는 독살된 것이고 살태자의 장본인은 바로 인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현세자의 죽음과 관련하여 우리는 유능한 왕세자의 비극을 생각하기 이전에 우리 역사의 불운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소현세자가 아니라도 왕조시대에는 많은 왕과 세자, 왕자, 왕비가 권력쟁탈의 음모와 시기로 ‘궁중비사’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이다. 소현세자의 독살은 결코 새로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유독 소현세자의 죽음 앞에 역사의 불운을 떠올리게 된 것은 1644년이란 시점 때문이다.

 

부질없다는 가정이 허용된다면 그 시점에서 세자가 등극하여 아담 샬을 비롯한 청국에 머무른 서양의 천주교인ㆍ 학자들과 교류하고 그들을 통해 서양문물을 받아들였다면 조선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17세기 중국에 체류하던 독일 지질학자가 만든 중국지도.

 

조선이 강제로 개국한 것은 그로부터 232년 후인 1876년의 일이고, 일본은 조선보다 22년 앞선 1854년의 일이었다. 조선은 일본보다 200년 이상을 앞서 개국의 기회를 갖고서도 권력투쟁의 음모에 빠져서 하늘이 준 기회를 놓치고 결국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다.

 

“아들을 죽이고도 부족해 며느리를 적으로 삼아 죽인 후 사돈은 물론 손자까지 죽인 비정한 국왕의 시호가 어질 인자를 쓰는 인조(仁祖)인 것은 그야말로 역사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제대로 표현하면 그는 인조라기보다는 악조(惡祖) 또는 증조(憎祖)라고 해야 할 것이 다.”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문제는 인조가 악조 또는 증조로 지탄받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역사의 바른 전진을 가로막고 시기를 놓친 죄업에 있다.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헤롤드 라스키 교수는 “역사는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지 않을 때 가혹한 시련을 내린다”고 하였다.

 

 

http://jksm.segye.com/Service4/ShellView.asp?SiteID=&OrgTreeID=509&TreeID=502&Pcode=0006&DataID=20050203095800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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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10.31 09:31

    첫댓글 저는 조선시대 3대 악질 군왕으로 수양대군 세조와 연산군과 바로 이 인조를 꼽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왕으로서 극히 무능한 것에다가 유부녀 강간, 남한산성에 낚시터나 만들어놓고 유흥을 즐기던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카톨릭이 가져다준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천주교도 함께 받아들일 가능성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기 왕자를 그렇게 독살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왕권이 유지된다면 크나큰 비극입니다. 불쌍한 세자빈과 그 세손들의 죽음은 매우 슬픈 것입니다.

    그는 광해군에 비해서도 터무니 없이 무능한 외교 수완을 발휘하여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가져왔고

  • 14.10.31 09:33

    삼전도의 굴욕을 가져왔습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가져다 줍니다.

    우리에게는 나라를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던 수많은 기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권을 뺏기는 일은 일어났고, 지금까지도 남북분단의 비극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개인들에게 좋은 기회들은 수없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기회들을 포착하고 놓치지 말아야 하며, 차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축구선수들로 발견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차내는 축구선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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