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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17)
할렐루야!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망 권세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하늘 문이 열린 적이 있었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난 다음, 하늘문이 열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 하늘문이 열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 17:5)
여러분! 예배드릴 때에 하늘 문이 활짝 열리기를 바랍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을 받아 본 자만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누구의 사랑을 받아 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도 이 땅에 살아가면서, 바로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셨습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이 땅에서의 사역을 잘 감당할 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마 22:36)
예수님께서 그 율법사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 22:37-39)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율법과 계명들이 있지만, 그것은 하나로 모아집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으면, 수많은 율법과 계명을 잘 지킨다 할지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3:1-3절 말씀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아멘.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맙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여러분! 사랑하십시오. 사랑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아가겠습니까? 주변에 있는 사람들, 가족들을 사랑하십시오.
이 세상의 사랑 가운데 가장 고귀한 사랑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3:16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누군가 신학자 칼 바르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신학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당신이 발견한 가장 위대한 진리는 무엇입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찬송가 563장입니다.
1절: 예수 사랑하심을 성경에서 배웠네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2절: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죄를 다 씻어 하늘문을 여시고 들어가개 하시네
후렴: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였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귀한 존재입니다.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면, 얼마나 힘이 납니까?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입니다. 변함없는 사랑, 한결 같은 사랑입니다.
로마서 8:38-39절을 보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로마서 5:8절을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신 33:29)
무엇을 많이 가졌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사람이 많은 것을 가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행복은 소유의 정도에 따라, 권력의 정도에 따라 결정되지 않습니다.
세상 행복은 한 순간입니다. 물거품입니다. 금방 사라집니다.
유월절 저녁,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주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주님은 제자들과의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새계명을 주셨습니다. 새계명이라고 해서, 이 세상에 처음으로 주시는 계명은 아닙니다. 지금껏 있던 계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신 주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식사 후, 베드로는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요 13:36)
주님은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 13:37)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내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요 13:38)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렸습니까?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 날 밤, 닭 울기 전에 베드로는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하고 맙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부활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는 만났지만,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더불어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날이 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날이 새어 갈 때에, 어떤 사람이 해변에 서서 외쳤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요 21:5)
“없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요 21:6)
그 말을 듣고,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졌더니, 고기를 너무 많이 잡아 그물을 들 수 없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외쳤습니다.
“주님이시다”
베드로는 웃통을 벗고 있다가 옷을 입고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잡은 고기를 가지고 뒤따라 뭍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이미 숯불 위에 생선이 놓여 있었고, 떡도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숯불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맛있게 익은 떡이, 숯불 위에 놓여 있었지만, 먹을 수 없었습니다. 숯불 위에 고기가 익어 가고 있었지만, 먹을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왔지만, 예수님에게 한 마디 말도 못하고 가만히 숯불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요 21:10)
그러자 베드로가 벌떡 일어나, 다른 제자들이 끌고 온 배에 가더니, 그물을 끌어 올렸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하셨는데, 생선을 가지러 간 베드로는 생선을 빨리 예수님께 가져오지 않고, 그물을 끌어 올리더니, 한 마리, 한 마리를 세고 앉아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인줄 알고 배에서 뛰어내려 헤엄을 쳐서, 예수님 앞에 왔지만, 베드로는 아무 할 말이 없었습니다. 멍허니 앉아 있었습니다. 또 생선을 가지고, 예수님께 갔다 드리고 나면, 또 멍허니 앉아 있어야 할 상황입니다. 그래서, “생선을 가져오라”는 예수님의 말은 뒤로 하고, 생선 한 마리, 생선 두 마리, 세고 있는 것입니다. 153마리까지 다 셀 때까지, 할 말이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습니다”라고 장담했는데, 그날 밤 닭 울기 전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으니, 예수님께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입이 천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 21:12)고 했습니다. 이미 숯불 옆에 와서 앉아 있다면,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 이제 먹자”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는 것은 조금 떨어져 앉아서, 마냥 고기를 세고 있는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떡과 고기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13절 말씀을 자세히 보면,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 “예수께서 가셔서”라는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했지만, 제자들이 숯불 곁으로 다가왔을까요? 그물을 끌어올려 고기를 세고 있던 베드로도 금방 숯불 옆으로 다가올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 곁으로 오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직접 그들에게 가셔서, 떡과 고기를 직접 나누어 주셨습니다.
침묵 가운데, 아침 식사를 다 마친 후에, 예수님께서 특별히 시몬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
아마도 베드로는 이 순간, 예수님이 잡혀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 식사를 하시면서, 떡과 포도주를 직접 주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떠 올렸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장담했던 자신의 말도 떠올렸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 21:15)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내 어린 양을 먹이라”(요 21:15)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만이 참된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 수없이 많은 말들 가운데,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 사랑입니다. 가장 흔한 말이 바로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랑이라는 말 때문에, 많은 사람이 웃고, 울면, 살아갑니다.
처음 만났을 때에도, 사랑하기에 계속 만남을 가지고, 헤어질 때에도,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짐을 가집니다. 그것이 세상이 말하는 사랑입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은 다릅니다. 요한복음 3:16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무슨 설명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자만이,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느낀 자만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위하여, 헌신하며, 봉사하며, 충성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몰라도 좋습니다. 아브라함이 누구인지, 이삭이 누구인지, 야곱이 누구인지, 뽕나무 위에 올라간 사람이 누구인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도 좋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가지 사실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날 사랑하심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5:8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라는 말 대신에 “나”를 넣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나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오직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고, 남은 조각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자신의 전부를 주신 사랑을 내게 주십니다.
우리도 그런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오직 예수여야 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마 8:13)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시 42:5)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 주님, 주님을 사랑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무덤에 머물러 있지 않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지금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십니다.
늘 주님과 함께 함으로. 사랑받는 자로서, 축복받는 자로서, 은혜 받은 자로서, 건강하고 행복하고 풍성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오직 주님으로 가득차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옵소서.
우리의 사랑을 받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