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백일홍나무 밑에서 개가 새끼를 낳았다.
꽃판 같은 붉은 젖꼭지에 매달린
희고 검은 여섯 송이 강아지들. ------』 -시인 이화은-
이 시는 아마 식물과 동물과 봄에 얽힌 재활을 간결한 그림으로 그려 놓으려 한 것 같다.
식물과 동물의 경계를 넘어 강아지가 꽃송이가 되고 백일홍나무가 강아지의 어미가 되었다.
봄을 바라봄에 있어, 불교적인 시각으로 관찰한 시인의 이 말은 우리 인간에서만 가능할 뿐인 시야를 제공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좀 더 다가가 세밀하게 보거나, 좀 더 떨어져 폭 넓게 계절의 모습을 바라보았을 때, 우주의 신비를 살짝 엿 본 경험을 가졌을 것이다.
이제 막 사월이 열리고 산과 들, 가로와 정원에는 저 멋대로의 색깔이 저대로의 법칙을 따라, 지난겨울을 잊어버린 양 무심히 피어날 것이다. 우리 중 일부는 봄노래 부르며 봄나들이 타령을 할 것이고, 봄나물 무침에 호기심을 기울일 것이며, 볕에 그을릴 피부 걱정을 할 것이고, 한 해 농사의 시작과 함께 따뜻한 기온에 몸과 마음을 적시며, 점차 사라져 가는 봄날을 조금씩 아쉬워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이 봄에도 병들어 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 죽어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난 겨울의 고민을 아직 삭히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 새로운 근심을 가지게 되는 이도 생길 것이다. 봄의 진행과는 무관하게 수레바퀴는 여전히 거친 소리, 부산한 먼지, 지워지지 않을 자욱을 남기며 구르고 있을 것이다. 사라지는 봄은 다시 겨울 쪽으로 굴러가 다음의 봄을 준비할 것이며, 꽃들도 시들어 사라져 버릴 것이다. 결국 이 봄은 영원하지도 않으며 진심으로 마음 두지 못할 친구 같은 것임을 목백일홍이나 강아지조차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에서 바야흐로 우리 인간은 무엇을 더 알아야 하나?
그것은 무엇인가? 그렇게 기다렸던 꽃피는 봄조차 잡아 두지 못할 것이라면, 나의 정처는 천지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발그스레해진 나뭇가지에 앉아 도란거리는 새들의 이야기에도, 함초롬히 생기 머금은 연두 빛 아기 풀잎과 방글거리며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꽃잎에서도 나의 정처를 찾을 수 없다면 오히려 봄은 얼마나 잔인한 타인의 잔치에 지나지 않을 뿐인가?
그러나 보라. 누군가 이미 노래해 버린 봄노래를 우리는 듣고 배운 바 있었다.
그의 충고는 이러하였다. “바라건데 길 찾는 자는 고인의 도를 배울 일이지 고인의 시를 배울 일은 아니다.” 하여서 우리는 목백일홍에 핀 검고 흰 꽃잎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미풍이 극락의 보배로운 나뭇가지를 스치니
천지간의 마음은 건달바의 현악 울림을 느끼노라...』 -栯堂-
계절은 원래부터 신비로운 것이다. 우리의 일도 그와 같으니, 오는 봄 또한 그러하리라.
첫댓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좋아하는 가곡 '그네'의 2절의 가사를 좋아 합니다.
'한 번 구르니 나뭇끝에 아련하고 두 번을 거듭차니 사바가 발 아래라. 마음의 일만 근심을 바람이 실어가네".
(前)지기님의 글을 대하니 무지 반갑습니다. 자주 접할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이든 끈기가 없어. 자주 나누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막걸리 내공이 절정고수급이더군요. 잇빨내공 대신 그쪽 막공으로 옮겨간 듯 합니다.. 그려.
가차븐 시일 내 원곡거사님 댁 부근에 가서(댁안에는 가지 말고) 냉이무침과 함께 막공 연마 하러갑시다. ㅎㅎ
동참에...'한표' 입니다. 日時 정해주시면 기꺼이 '냉이무침+막걸리' 하러 갑니다. ㅋㅋㅋ
여기 "봄노래 두곡"은 우리 권오주 전회장님의 사랑이 듬뿍 담긴 글입니다.
제가 대구구도회 회보 권두언을 걱정하여 근심이 많다고 허니
권 전회장님께서 이 글로 회보 권두언으로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전번주에는 2차모임에서 막걸리로 위로해 주셨고 오늘은 권두언으로 도와주신 권오주 전회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나무석가모니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