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의 큰 별 소설가 박완서 정혜엘리사벳 타계(다음 뉴스 담음)

[신성수]

작품세계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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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일 타계한 소설가 박완서의 작품세계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으로 파생된 내상, 천박한 자본주의가 빚어놓은 욕망에 대한 고발, 그리고 생명에 대한 따스한 포옹으로 압축된다. 개성 인근 개풍에서 태어나 3살 때 부친을 여읜 박완서는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하던 해에 6·25전쟁을 겪으면서 오빠를 잃고 가장으로 살아야 했다. 이 시절 미군부대 매점(PX)에서 근무하면서 박수근 화백과 교유했던 경험을 질료로 집필한 ‘나목(裸木)’이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되면서 뒤늦게 소설가로 살기 시작했다.
  
  
  ‘나목’의 주인공 경아는 6·25로 오빠를 잃고 노모와 함께 회색빛 어둠의 시절을 헤쳐나가는 인물이다. 논픽션으로 응모하려다 픽션으로 바꿀 정도였으니, 이 소설은 대부분 박완서의 실제 경험을 반영한 셈이다.지금이야 나이 마흔에 데뷔하는 일이 그리 특별한 건 아니지만, 고교시절에 데뷔하거나 20대 초반에 이미 유명 문사로 이름을 알리는 일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던 당시로서는 1남4녀의 엄마로 살던 ‘문학 주부’의 등단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늦깎이로 문단에 나선 것을 벌충이라도 하듯 박완서는 창작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고 작고하기 전까지도 영원한 ‘현역’으로 살았다.
  
  박완서는 생전에 “일제시대가 아무리 혹독했다고 해도 같은 핏줄끼리 살의를 갖던 6·25 때 비하면 덜했던 것 같다”면서 “우리 가족 얘기는 사실 그 시대의 한 전형을 획득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사의 범주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가족사를 거의 사실적으로 묘사한 ‘엄마의 말뚝’ 시리즈는 1981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했고, 소설의 소재로서 가족에 대한 그의 특별한 관심은 분단의 공간에서 탈피, 중산층의 허위의식을 절묘하게 파헤친 ‘도시의 흉년’ ‘휘청거리는 오후’ 등으로 이어졌다.
  

  

  ◇박완서씨가 젊은 시절 아기를 안고 밝게 웃는 모습.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잃은 박씨는 1988년 남편과 외아들을 한꺼번에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연합뉴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에서는 여성문제를 파고들었고, ‘그 가을의 사흘 동안’이라는 명편(중편소설)에서는 전후 낙태만 시키다가 은퇴를 앞두고 딱 한 번 생명을 보듬고 싶은 욕망으로 죽어가는 태아를 감싸안고 인큐베이터가 있는 병원으로 미친 듯이 달려가며 통곡하는 산부인과 여자 의사를 통해 ‘생명’을 절규했다. 그 통곡은 작가 박완서의 생명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막힘없는 절규요, 험난한 시대를 살아오며 구비마다 맺힌 한과 원을 한꺼번에 풀어내는 몸부림이었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박완서는 이렇게 썼다.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친선대사로 활동했던 박완서씨가 2005년 쓰나미로 피해를 본 인도네시아 반다아체 현지를 방문해 어린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제공

  “내 속의 통곡은 이제 한 방울의 눈물도 못 짜낼 것 같이 굳은 게 아니었다. 다만 크게 터져서 마음대로 범람할 수 있는 장소까지 갈 동안을 주리 참듯 참고 있을 뿐이었다.”
  
  소설가 인생 후반기의 그의 작품들은 문단의 유행을 벗어나 자신만의 고유한 빛깔을 빚어내는 쪽으로 나아갔다.
  

  

  ◇박완서씨가 2006년 5월 서울대에서 정운찬 총장으로부터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있다. 박씨는 1950년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그해 한국전쟁으로 학교를 중퇴했다.
  연합뉴스

  소설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이나 장편소설 ‘오래된 농담’ ‘그 남자네 집’ 같은 작품들은 노년의 여유와 관조와 따스함이 묻어나는 질감이었다. 물론 이들 작품도 그의 여타 생산물들이 그러했듯이 한결같이 독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박완서의 인생에서 ‘상실’은 내면에 감추어둔 크나큰 아픔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여의었고, 6·25 때는 하나뿐인 가장 같은 오빠를 잃었고, 다시 1988년에는 남편과 외아들을 한꺼번에 떠나보냈다.
  

  

  ◇박완서씨가 2007년 2월 산문집 ‘호미’를 출간할 당시 경기 구리시 아차산 자락 자택 마당에서 풀을 뽑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참척의 아픔을 겪으면서 당시 박완서는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눈물의 일기장에서 “만약 내 수만 수억의 기억의 가닥 중 아들을 기억하는 가닥을 찾아내어 끊어버리는 수술이 가능하다면 이 고통에서 벗어나련만. …신은 죽여도 죽여도 가장 큰 문젯거리로 되살아난다”고 절규했다.
  
  그는 이 아픔을 극복하고, 혹은 내면에 잘 숨겨두고, 창작의 길을 더 깊이 걸어갔다. 이제 그는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러 갔으니 행복하겠으나, 남은 이들의 태산 같은 쓸쓸함은 어이할까.
  
  조용호 선임기자
  
  

  ▲1931년 경기 개풍 출생 ▲숙명여고 졸업, 1950년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6·25전쟁으로 학업 중단 ▲1970년 장편소설 ‘나목’으로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돼 등단 ▲소설집 ‘배반의 여름’(1978) ‘엄마의 말뚝’(1982) ‘꽃을 찾아서’(1986) ‘저문 날의 삽화’(1991) ‘너무도 쓸쓸한 당신’(1998) ▲장편소설 ‘휘청거리는 오후’(1977) ‘도시의 흉년’(1979) ‘오만과 몽상’(1982)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3) ‘미망’(1990)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5) ‘아주 오래된 농담’(2000) ‘남자네 집’(2004) ▲수필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1977년)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1990년)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2010) ▲한국문학작가상(1980) 이상문학상(1981) 대한민국문학상(1990) 현대문학상(1993) 동인문학상(1994) 대산문학상(1996) 보관문화훈장(1998) 만해문학상(1999) 인촌상 문학부문(2000) 황순원문학상(2001) 호암예술상(2006) ▲2011년 1월 22일 담낭암으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