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사만 사천명
요한계시록 7장3절-17절
2019년 9월 1일 주일낮 11시
인도설교 선형수 목사 주은혜교회 진천
서로 인사합니다 반갑고 고맙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의 십사만 사천명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많이 갈라지는 어려운 문제이다. 하나님의 도장 찍힌 자가 이스라엘 각 지파 중에서 십 사만 사천명이라 한다. 12지파마다 일만 이천명 이다.
그러나 다시 사도 요한이 보니 온 세계에서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었다. 그리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서 구원의 노래를 불렀다. 이에 천사들도 화답하여 찬양한다. 장로 중에 하나가 이 무리들은 큰 환난 가운데서 나오는 자들이고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고 설명한다.
7장 3절에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들에 도장을 찍을 때까지(seal)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우리가 도장을 찍는다” 고 한다. 하나님의 인(인장, signet)은 반지 형태이거나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그런 원통형 일 수 있다. 그 인장을 그 천사가 갖고 있는데 ‘우리’라는 말을 쓴다. 우리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다.
태초에 하늘과 땅을 만드실 때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일체 하나님이 하셨다. 여기서도 그 천사를 예수 그리스도로 본다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택함받고 죄용서와 구원받은 자들에게 구원의 표시를 주시는 일을 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이마나 팔에 도장이나 문신을 새기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소를 매매하는 가축 시장이 1990년대 까지 있었다. 군단위 재래시장 마다 거의 있었는데 끝에 동그란 문자나 표시가 새겨진 쇠 막대를 달궈서 소의 뒷다리 허벅지 부위에 불도장을 찍는 것을 보았다.
이 인침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표시이다. 계 9:4에서 다섯번째 나팔 재앙으로 부터 그 인침받은 자들을 보호한다고 한다.
9::4 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니라
로마 제국 시대에 로마인들이 자기들의 노예들에 대한 소유권을 확증하기 위하여 철인을 달구어서 이마에 화인 즉, 불도장을 찍었다. 도망치지 못하게 하고 소유권 문제를 가리기 위한 것이다.
우리 나라도 조선시대까지 중죄인 얼굴에 어떤 표시를 새긴 적이 있는 것 같다. 죄수들, 전쟁 포로들, 노예들에게 낙인을 찍었다. 동서양에 비슷한 일들이 있었다. 요즘 팔이나 몸의 특정 부위에 문신을 새기는 경우가 많다.
지금은 주민등록증 혹은 여권을 가져야 활동하거나 여행할 수 있다. 보호, 통제, 감시 등 여러 의미가 있다.
갈 6장 17절에 바울이 말하기를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여기서 ‘흔적’(στιγματα 스티그마타)가 바로 불도장이나 문신 같은 것이다. 바울이 몸에 실제로 불도장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흔적을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표지로 가진 것이다. 이것은 율법에 매여 있다는 뜻의 할례와 대조를 이룬다.
이 예수님의 흔적은 은혜의 자유를 뜻하는 표지이다. 불도장이나 문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섬기고 복음을 전하는 중에 얻은 상처의 흔적이다.
고전4: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고전4: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고전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고전4: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바울은 더 나아가서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엡 1:13) 고 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인을 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다”(고후 1:22)라고 했다.
하나님의 인을 치는 것, 즉 도장을 찍는 것은 확실한 주님의 소유권을 의미한다.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할례를 행했지만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에게 세례를 준다. 물세례는 걷으로 드러나는 것이지만 성령 세례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을 친다 즉 도장을 찍는다는 것은 복음 전도를 말한다고 본다. 복음을 전하고 그것을 듣는 사람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복음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으면 거듭나고 새명생을 얻는다.
전도를 받은 사람은 말씀(벧전 1:23)과 성령으로(요 3:5) 거듭난다. 14만 4천명은 실제 유대인의 숫자가 아니라 구원받은 전역사 전세계의 성도들에 대한 상징적인 숫자이다. 영적 이스라엘을 말한다.
12는 택한 백성의 수 곧 선민의 수이다. 12지파나 12제자 모두 하나님의 택함받은 수이다. 10은 만수 즉 가득찬 수 혹은 완전 수 이다. 만수 10을 100배하면 1000이 된다. 선택 수 12에 12를 곱하면 144가 된다. 144에 1000을 곱하면 144000이다. 각 지파마다 구원받은 수가 12000인데 12지파를 더하면 144000이다.
문신을 하거나 불도장을 찍는 것은 상징이다. 오직 말씀과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를 주님으로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
예수님이 재림 즉 다시오셔서 심판하실 때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이방인이나 구원받은 자의 구분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은 영적으로 한 몸을 이룬다.
계시록 14:1-5에도 144000이 언급된다. 이 144000은 구원 받은 신자들 즉 참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이를 갈라디아서 6장 16절은 하나님의 이스라엘 이라 부르고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택하신 백성이라 부른다. 야고보서 1장 1절은 흩어져 있는 열두지파 라고 부른다.
주후 1세기 에는 이스라엘의 12지파는 없었다.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그냥 유대인들이다. 북왕국 이스라엘 10지파가 주전 722년 앗수르에 망했고 남왕국 유다는 주전 586년 바벨론에 망했다. 포로로 잡혀 갔다가 약 70년 후 남은 자들이 돌아 오는데, 그 이후로 그냥 유대인들인 것이다. 열두지파는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신약의 12지파는 참 이스라엘, 예수를 주님으로 믿어 구원받은 영적 이스라엘을 말한다. 물론 현재도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람들이 계속 늘고 있다.
그런데 에스겔 48:1-29에 12지파를 언급한다. 에스겔 48:30-35에 종말론적 예루살렘의 12문들을 묘사한다. 에스겔서는 북왕국 열지파가 망하여 죽거나 포로가 된 지 150년이 지나서 기록한 것이다. 즉 주전 572년에 쓴 것이니 남유다 멸망 주전 586년 이후 6년이 지나서 쓴 것이다. (물론 에스겔서 정확히 주전 572년 기록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대략 그렇게 추정한다. 참조 David E. Aune, revelation 6-16. WBC, 1998, 461).
구원받은 자의 수가 14만 4천이라는 상징적인 숫자로 한정되어 있다. 구원받는 자의 수가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 처럼 인간이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구원받은 자의 수를 한정하여 정하신다.
인맞은 자 즉 도장이 찍힌 자나 흰옷 입은 성도는 모두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자, 즉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이다.
7장 9절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9:10에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구원받은 자들의 수가 많다는 것이고 그 많은 수를 상징적인 숫자 14만 4천으로 부른다. 인간은 구원받은 자를 능히 셀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 수를 정하여 아시고 구원받는 자를 한정하여 정해 두신다.
그 무수한 무리는 어디서 왔는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이라고 한다. 세상에서 불러서 구별하여 구원받은 자들을 나라, 족속, 백성, 방언으로 네번 강조하여 말한다.
이들의 모습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있었다”. 흰옷은 성결과 승리, 종려가지는 승리와 기쁨을 묘사한다(요 12:13).
요한복음 12장 13절에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요 12: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이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계시록 7장 14절에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고 한다. 흰옷을 입었다는 것은 예수 십자가 보혈의 피, 대속의 피를 믿어 죄사함과 구원을 받은 것을 말한다. 흰옷을 입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보혈의 피, 대속의 피를 믿고 죄사함 받고 구원얻은 자를 말한다.
14절에 흰 옷 입은 자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라 말한다. 큰 환난 가운데서 믿음의 싸움을 싸워 승리하여 구원의 영광과 기쁨을 얻은 자들이다.
지금 이 시대 우리 한국 교회는 환난의 시대를 살고 있다. 외부적으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는 일이 없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직접적인 박해는 없다. 너무나 편하고 안락하고 풍족한 시대이다.
역설적으로 박해와 핍박이 없으므로 환난인 것이다. 돈이 하나님보다 더 커 보이기 때문에 어려운 시대이다. 편안하고 즐겁고 재미나고 신나는 것이 교회 밖에 더 많다. 그래서 갈수록 예배를 드리기를 소홀히 한다.
흰옷 입은 자들, 즉 구원 얻은 자들이 하는 일은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서 큰 소리로 찬양하는 것이다. 그 찬양의 내용은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라고 하는 것이다.
구원의 길, 구원의 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가능한 것이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 혹은 돈으로 혹은 권력이나 힘으로 혹은 지식이나 부처나 마호멧으로 되지 않는다.
흰옷 입은 자들, 즉 구원받은 자들의 찬양의 결과는 무엇인가? 수많은 천사들이 화답하여 찬송하는 것이다.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수많은 천사들이 있다.
그 화답하는 찬양의 내용은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아멘으로 시작하여 아멘 으로 마친다. 흰옷을 입은 무수히 많은 구원 받은 자들의 찬양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뜻이다.
5장 12절에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수많은 천사들이 큰 음성으로 어린양을 찬양한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어린양에게 대한 찬양과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찬양이 거의 똑같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동등성을 보여 준다.
7장12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모든 계획과 작정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흰옷 입은 무수히 많은 무리들, 즉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긴다. 주로 찬양을 드린다.
더이상 배고픈 사람이나 목마른 사람이나 해나 어떤 뜨거운 기운에 상하는 자가 없다. 보좌에 계신 어린 양이 구원받은 자들의 목자가 되신다.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