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을 거짓 겸손의 관점에서 한번 묵상하고자 합니다. 겸손이라는 덕목은 신앙의 차원에서 본다면 아주 최고급의 경지에 이르는 수단이 될 것입니다. 조금 거짓말을 보태면 성인의 경지, 아니면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공동상속자가 되어 하느님 나라 유업을 물려받을 수 있는 자녀가 될 수 있는 지름길이 될 수가 있을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돼 매일 매일 우리의 삶이 십자가를 지는 그런 신앙인이 되려고 고군분투해야 하는 이유가 우리의 신앙생활의 핵심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종의 자세는 단순히 종이라는 신분의 위치에서 종이 한 말의 의미도 살펴봐야 하겠지만 그 말 속에 담긴 다른 뜻도 한번 살펴보지 않게 된다면 어쩌면 불완전한 이해를 하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다시 한번 종의 모습을 보게 되면 종은 그저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신분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당연한 처사이고 당연한 행동입니다. 원론은 당연한데 우리는 그러한 당연한 행동이 단순히 당연한 행동이라고 표명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행동이 아주 품위 있는 모습과 행동으로 인식을 하고 평가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건 달리 말하면 당연한 행동이 당연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 행동이 아무리 당연한 것이라고 해도 사실 평범하고 당연한 행동이 되지 않기 때문에 깊은 울림을 주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모습이 종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종의 이미지를 비굴하고 몸을 굽실굽실 하면서 숙이는 그런 종의 모습의 종이 아닙니다. 주인에게 신실한 마음으로 바치며 순종하는 그런 종의 모습과도 같은 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하신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은 모습이 돼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그 모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모습을 취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십자가 앞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도 그와 같은 종의 모습으로 살아야 함을 몸소 친히 본을 보여주신 것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거짓 겸손을 보여주시기 위해 굳이 하찮은 피조물로 우리 곁에 육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서 오셨을 리는 만무한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모습을 십자가상에서 죽음으로까지 순종의 모습으로 본을 보여주셨는데 우리는 예수님의 그런 죽음 앞에 오히려 매일 그 죽음이 마치 덧없는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신앙인이 돼 가는 어처구니없는 이상한 현실이 현실이 되고 있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건 누구나 예외없이 우리에게 그와 같은 모습이 없다고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의 모습이 그런 이중 인격자의 모습으로 거짓으로 우리의 삶을 포장해가며 부단히 노력하며 살아가는 어리석은 삶을 오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모습은 이 지상의 삶에서 지금 마침 위령성월이라 더더욱 죽음을 묵상하는 시기인 만큼 우리는 이 지상에서 철저히 그런 모습을 배격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한평생 하느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였던 게 다 허사가 될지도 모를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에서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고 하신다면 우리의 이 지상에서의 삶이 얼마나 허사가 되고 마는 그런 삶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알면서도 단순히 시기와 질투라는 인간의 사악한 욕심의 포로가 돼 포로의 삶에 익숙해 나중에는 그 생활이 그저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와 같은 길을 계속 가게 된다면 그 영혼은 어떤 결과를 최후에 맞이하게 될지는 굳이 제가 답을 내지 않아도 나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