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 (朴炡)
1596년(선조 29)~ 1632년(인조 10) / 향년 37세
조선 후기에, 대사간, 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대관(大觀), 호는 하곡(霞谷). 또는 하석(霞石)이며,증 영의정 박소(朴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재감정(司宰監正) 박응천(朴應川)이고, 아버지는 좌참찬 박동선(朴東善)이며, 어머니는 청선군(淸城君) 이걸(李傑)의 딸이다.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1629년(인조 7)~1703년(숙종 29)』은 그의 넷째 아들이다.
1619년(광해군 11)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보임되었다가 아버지가 폐모론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양사(兩司: 사헌부·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자, 사직하고 시골에 내려와 독서로 자적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해 정사(靖社) 3등공신에 책록되었다. 같은 해 홍문관정자·박사를 거쳐 다음 해 사간,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사헌부의 장령(掌令)·집의(執義), 검상 등을 역임하였다.
1625년(인조 3) 부응교 유백증(柳伯曾),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나만갑(羅萬甲) 등과 함께 대사헌 남이공(南以恭)을 광해군 때에 당파를 만들고 권력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탄핵했다가 오히려 함평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626년(인조 4) 문과 중시에 급제해, 다음 해 동부승지가 되어 호패법 강화를 주장했고, 그 뒤 대사간·병조참지·병조참의를 지냈다. 이어 강원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으며, 다시 대사간으로부터 붕당을 만들어 자기 파를 천거했다는 탄핵을 받고 좌천되어 남원부사가 되었다.
남원부사로 임명될 때에 새 수령을 영접하러 나온 아전이 박정을 보고는
“젊은 사람이 말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으며, 오똑하게 단정히 앉아 있어 마음속을 알 수 없다.”
고 칭찬하였다. 당시 관내의 도적을 색출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금주군(錦州君)에 봉해지고 1631년(인조 9) 대사간·대사헌을 거쳐 이조참판에 특진되었다가 홍문관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소서파(小西派)의 핵심 인물로 비록 말은 과감하게 한다는 칭찬이 있었으나, 급하고 곧은 뜻이 지나쳐 자기 의견만을 주장하였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끝>
이재훈
▲금주군(錦洲君) 하곡(霞谷) 박정(朴炡) 정사공신 화상
작가미상, 〈박정초상〉, 1623년경, 비단에 채색, 140×82㎝,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7호, 개인소장. 조선중기의 문신 박정의 초상화이다. 사모를 쓰고 단령을 입고 두 손을 모은 채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백한이 있는 흉배의 문양으로 미루어볼 때, 박정이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 3등에 녹훈되어 정3품 벼슬을 하던 때의 그림으로 여겨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금주군 박정 신도비명/ 소재지: 인천광역시 서구 대곡동 236-6(지석묘 못가서)
▲소재지: 인천광역시 서구 대곡동 236-6(지석묘 못가서)
묘역이 자리해 있는 곳은 대곡동 두밀부락으로 검단초등학교 앞에서‘대곡동지석묘’ 방향으로 들어가면 청룡부리 앞에 ‘반남 박씨 선조묘역’이란 비석과 안내판이 도로 한편에 세워져있다. 이 곳의 지명을 “김포지명유래집”에는 ‘사방이막힌마을’이란뜻의 ‘두모곡’, ‘ 두곡’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신도비에도 이곳이 과거 김포 마산면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명에서 보이듯이 이곳은 과거 수리시설이 없을 때에도 물이풍부해 농사가 잘되고 인심이 후덕하여 한때 범죄 없는 마을로 지정이 되기도 했으며 마을의 소지명에도 식수를 제공하던 ‘찬우물’, ‘청룡부리물(박두물, 내물)’, ‘한메약수터’등이 전해오고 있다.
또한 마을 중앙에는 500년 동안마을을 지켜오며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시보호수 은행나무가 오늘도 묵묵히 서 있는데 이곳 두밀부락은 반남 박씨의 집성촌으로 500년 전, 처음 세거를 시작한 병문의 고비(古碑)도 자리해 있다.
마을의 중심지역에 자리한 묘역이 있는 산을 ‘분틀메’라고 부르는데 지명유래집의 ‘빌터뫼’는 ‘빌다’라는 의미와 안암산(계양산) 자리를 빼앗겨 현재의 자리에 눌러앉게 된 것이 분하다 하여 ‘분통메’라 부르던 것이 ‘분틀메’를 변했다는 옛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묘역이 자리한 이곳의 동편으로 한메가 자리하고 좌우로 안산, 청룡부리가 둘러쳐져 있어 아늑한 형국이며, 분틀메에서 바라보이는 산은 이 마을에서는 ‘칠봉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렇듯 대곡동 두밀 마을에는 역사적으로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태어났고 특히 정헌공 박동선은 인천과 부평의 부사도 지내 향토역사에 중요한 역할도 했다.
또한 인근에는‘지석묘’와 ‘밀양당씨 정렬비’도 살펴볼 수 있어 향토역사 교육의 장으로 손색이 없어 자랑스런 고장의 선조들을 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곳이기에 소개해 본다.
ⓒ인천서구청 블로그(구): 티스토리]
▲금주군 박정 묘표
묘는 경기도 김포군 검단면 대곡리에 있는데 현재는 행정 구역이 변경되어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었습니다.
■ 반남박씨 주요 세계도
[시조] 박응주(朴應珠) : 고려 호장
2세 박 의(朴 宜) :
3세 박윤무(朴允茂) : 진사
4세 박 수(朴 秀) : 밀직부사
5세 박상충(朴尙衷) : 판전교시사, 문정공
6세 박 은(朴 訔) : 좌의정, 수문관대제학, 평도공, 아들-①규(葵) ②강(薑) ③훤(萱)
□7세-①)박 규(朴 葵) : 예조참판, 아들-①병문(秉文) ②병균(秉鈞) ③병중(秉中) ④병덕(秉德)
8세-①)박병문(朴秉文) : 부사직, 아들-①임종(林宗) ②임정(林禎)
9세-①)박임종(朴林宗) : 상주목사, 아들-①억년(億年) ②조년(兆年)
10세-②)박조년(朴兆年) : 이조정랑
11세 박 소(朴 紹) : 사간, 기묘명현, 문강공, 아들-①응천(應川) ②응순(應順) ③응남(應男) ④응복(應福) ⑤응인(應寅)
■12세-①) 박응천(朴應川) : 아들-①동현(東賢) ②동호(東豪) ③동노(東老) ④동준(東俊) ⑤동민(東民) ⑥동선(東善)
13세-⑥) 박동선(朴東善) : 좌참찬
14세) 박 정(朴 炡) : 이조참판
15세 세규(世圭)-세견(世堅)-세후(世垕)-박세당(朴世堂) : 대학자, 판중추부사, 아들-①태유(泰維) ②태보(泰輔)
16세-②)박태보(朴泰輔) : 파주목사, 문열공
17세 박필리(朴弼履) : 통덕랑
18세 박사석(朴師錫) : 공주판관
19세 박윤원(朴胤源) : 감역, 문헌공
20세 박종여(朴宗與) : 서흥부사
21세 박운수(朴雲壽) : 순흥부사
22세 박제근(朴齊近) : 현령
23세 박정양(朴定陽) : 총리대신, 문익공
■12세-②) 박응순(朴應順) : 선조의 국구(의인왕후의 아버지)
■12세-④) 박응복(朴應福) : 대사헌, 아들-①동윤(東尹) ②동열(東說) ③동망(東望) ④동량(東亮)
13세-④) 박동량(朴東亮)) : 좌참찬, 충익공, 아들-①미(瀰) ②의(漪)
□14세-①) 박 미(朴 瀰) : 선조의 5녀(정안옹주)의 부마(금양위), 분서공
15세 박세교(朴世橋) : 첨정
16세 박태길(朴泰吉) :
17세 박필균(朴弼均) : 지돈령부사, 장간공
18세 박사유(朴師愈) :
19세) 박지원(朴趾源,1737~1805) : 양양부사, 저서-열하일기, 작품-허생전, 양반전, 호질 등, 북학파의 거두, 문도공
20세 박종채(朴宗采) : 현령
21세 박규수(朴珪壽) : 우의정, 문익공, 평안도관찰사 재임 시 제너널셔먼호사건 발생.
□14세-②)박 의(朴 漪) : 장령
15세) 박세채(朴世采) : 좌의정, 문순공, 동국18현의 1인
▣ 7세-③)박 훤(朴 萱) : 부윤
8세-②)박숭질(朴崇質) : 좌의정, 공순공
■금릉위 박영효(朴泳孝) 가계 : 박동량의 후손.
21세 박해수(朴海壽) :
22세 박제당(朴齊堂) :
23세 박원양(朴元陽) : 공조판서, 정간공
24세 박영효(朴泳孝) : 철종의 부마 금릉위, 한성판윤, 갑신정변의 주역, 중추원의장
이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