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밥혼술과 도시락은 진화한다. 2/2
도시락의 진화
벤또(べんとう 弁当, 辨当)는 일본말이고 우리말은 도시락이다. 내가 벤또(도시락)을 처음 안 것은 전후의 가장 어려운 시기였던 초등학교 2,3학년일 때일 것이다. 오후까지 수업이 있는 날이나 운동회 같은 행사 연습를 할때에는 도시락을 싸갔다. 아무나 싸가지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런대로 형편이 되어야 싸가지고 다녔다. 물론 내용이야 그져 그렇지. 쌀밥은 커녕 쌀보리밥은 양반이고, 시커먼 꽁보리밥이 대부분이고 다양각색이었다. 한복을 입고 조끼(쬐겨, jacket)를 입고, 벤또는 책과 함께 책보에 싸서 옆구리에 끼거나 어깨나 허리에 둘러메고 다녔다. 동무들의 도시락 찬을 보면 깨소금이나 새우젓은 당연히 부잣집 도시락이고, 고추장이나 지랑(간장)종지에 지랑을 넣어가지고 오는 학생도 있었다. 여학생들은 책보따리를 팔로 받치고 다니어서 도시락 찬이 엎지러지지 않았다. 남학생들은 책보따리를 어깨에 걸치거나 허리에 둘레 메고 다니니 지랑이 흘러서 책보가 흥건하고, 옷에도 묻어서 지랑 냄새가 났어도 그런대로 좋았다. 세상이 다 내 것인 때였으니까.
그후 세월이 흐르고 흐르고 흘러서 그 시절도 흘러갔으니 도시락이 그리워 진다. 이제는 학교 도시락은 사라지고 학교급식 문화가 자리 잡혀있다. 학교도시락은 그렇다 하더라도 누구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점심은 해결해야 할것이다. 직장에서도 한켠을 차지하는 도시락은 절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도시락을 싸기가 번거롭고 쌀 수도 없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식당에서 매식으로 해결해야한다. 코로나이전에는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같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코로나가 닥치면서 혼밥 혼술 시대가 되었다. 혼밥·혼술 시대가 깊어질수록 오히려 도시락 문화는 더 다양하게 진화할 것 같다.
예전 도시락은 학교나 공장에 싸가지고 가거나 배달을 하였고, 농촌에서는 들일을 하는 곳으로 머리에 이고가는 들밥이나, 새참은 단순한 끼니이기도 하였지만 고단한 농사일의 잠시라도 쉬게하는 조상들의 지혜이었다. 학교 생활에서도 맨 도시락에는 따뜻한 콩나물국을 주는데도 있었고, 대학의 강의동에도 도시락 공간을 별도로 마련한 데도 있었다. 봉투에 담아 다니든 점심봉투(sack lunch) 같은 것들이 이제는 그리움을 끌어내는 추억의 한 자락이 되었다. 양은 도시락에 김치와 계란프라이 하나만 있어도 든든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도시락은 단순한 ‘휴대식’이 아니라 개인의 생활 방식과 취향을 담는 문화로 변하고 있다.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사람들은 혼자 먹는 식사에 익숙해졌다. 직장 회식과 단체 모임이 줄어들고, 대학생들조차 혼자 식사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이런 변화 속에서 도시락은 오히려 가장 현대적인 식사 형태 가운데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혼자 조용히 먹기에도 부담이 없고, 시간과 장소의 제약도 적기 때문이다. 편의점 도시락, 샐러드 도시락, 건강식 도시락, 정기 배달 도시락까지 종류도 세분화되고 있다. 과거의 도시락이 “배를 채우는 음식”이었다면, 지금의 도시락은 “개인의 라이프 스타일”을 반영하는 상품이 되어 가고 있다. 앞으로는 도시락이 더욱 개인 맞춤형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AI와 데이터 기술이 발전하면 개인 건강 상태와 취향에 맞춘 도시락 추천도 자연스러워질 수 있다. 당뇨식, 고단백식, 저염식은 물론이고, 혼자 사는 노인을 위한 부드러운 식단이나 청년층을 위한 간편 고영양 도시락도 늘어날 것이다. 단순히 식당에서 혼자 먹는 대신, 집과 사무실, 공원, 자동차 안에서도 자기 방식대로 식사하는 문화가 확산될 수 있다.
도시락의 진화는 새로운 인간관계의 변화과정을 보여 주기도 한다. 예전 도시락에는 어머니의 손맛과 가족의 정이 담겨 있었다. 노란 계란 후라이 덮밥과 김치 냄새 밴 양은 도시락을 친구들과 둘러앉아 나누어 먹던 기억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공동체의 추억이었다. 등산모임에서 각자 손수 집에서 장만해온 도시락을 나누어 먹는것도 즐거운 추억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도시락은 점점 더 개인화되고 상품화되고 있다. 각자 스마트폰을 보며 혼자 도시락을 먹는 풍경이 생경했던 시대는 지나갔다. 앞으로는 혼자 먹는 자유와 소규모 공동체 문화가 함께 공존할 가능성이 크다. 서양의 소풍(picnic)에서처럼 각자가 마련해온 도시락을 벌려 놓고 나누어 먹을수도 있고, 회사에서는 강압적 회식 대신 각자의 도시락을 나누며 대화하는 새로운 형태의 식문화가 나타날 수도 있다.
돌이켜 보면 도시락은 한국 현대사의 변화와 함께 진화해 왔다. 도시락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김밥이 다양화되고 컵라면이 등장하였듯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진화하며 살아남을 것이다. 전래의 괴나리 주먹밥과 양은 도시락에서 공장 도시락으로, 다시 편의점과 배달 도시락 시대로 발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혼밥·혼술 시대 속에서 도시락은 가장 개인적이면서도 가장 현대적인 식문화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엿보인다.[2026.5.27.]
지랑이 무어냐고? 김삿갓의 반찬이외다.
<김삿갓 시 > 天長去無執 천장거무집, 하늘은 높아 잡을 수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