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丈母
壻 德田 이응철(2024. 6.10)
장모께서 백수를 눈앞에 두고 떠나셨다.
남들은 호상이라고 희희낙락하지만 아내는 삼우제가 끝났는데도 어머님을 잃은 혼돈의 늪에서 현실로 쉬돌아오지 않는다. 장모가 소천하시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무엇인가? 제 발이 저리다고 양심이 밀물처럼 닥친다. 우선 먼저 사위로써 좀더 자상하게 해드리지 못한 회한이 가슴을 친다.
일찌기 장모는 일본서 신교육을 받으셔, 일본어통역에 능통하시며 서예 또한 조예가 깊으셨다.
허나 백년손님 百年客을 증명이라도 하듯 늘 나는 친모처럼 자연스럽게 다가서지 못했다. 갑자기 내 인생사에 공백을 달려오셔 채워주셨으나 구태의연한 얄팍한 자존심에 항상 거리감을 두었으니 못난 사위였다.
장모는 정든 서울을 훅 떠나, 봄내春川로 낙향해 나의 흩어진 시심을 모아 둥지를 바로 고쳐 안온한 기류속에서 변함없는 교육활동에 주력하게 하셨다. 장모가 세상을 떠나시자 평소 잘못한 일들만 먹구름처럼 몰려와 장맛비가 쏟아진 셈이다.
장모, 장인 내외가 도심 근교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있는 신촌리에 터를 잡으시니 자가용이 없어 버스로 시내 볼일을 보셨다. 도심에 사는 우리 내외는 수시로 자가용으로 편리를 봐 드렸다. 바쁜 일정이 있을 때면 짜증이 난다. 무덤덤 하려면 아내 눈치가 보여 부부지간 작은 갈등이 이따금씩 빚어지기도 했다. 항상 소탈하시어 통이 큰 장모셨지만, 장인 어른의 뇌경색으로 오랜 병간호를 하시느라 삶에 주름 또한 많으셨나 보다.
장모를 어머니라고 부르라고 아내는 은근히 권유하지만, 내 어머님이 아니라서인지 목안에서만 어머님이지 막상 돌아가시기 전까지 단 한번 부르지 못한 것이 후회막급後悔莫及임을 고백한다.
활짝 웃게 한 것들은 혹 없을까? 두리번 두리번하다가 추억의 틈바구니에서 몇 건을 찾아낸다. 새로 이사 온 시골 마당이 허허롭다며 묘목 얘기를 자주 하셨다. 어쩌다 외식이라도 하려면 외식보다 유실수를 구해 달라고 채근하셨다. 식목일을 전후로 어린 묘목 하코트라고 하는 왕살구나무를 양구서 구해드릴 때 어찌나 반가워하셨는지 ㅡ.
식물 가꾸기에 남다른 솜씨가 있어 정성껏 심고 가꾸시더니, 몇 년 후 개량종 왕살구가 거짓말처럼 보석처럼 달려 첫 수확의 기쁨을 온 식구가 만끽하기도 했다.
외지에 근무로 주말이면 본가를 찾는다. 바닷가에 근무할 때 진부령 준령을 넘다가 차를 세우고 아내와 흐드러진 야생 붓꽃을 어렵게 캐다 드리면 이서방 고맙다고 한밤중에 맨발로 나오시던 장모가 아니던가! 다음 해 고대하던 만큼의 꽃은 피지 않았지만, 오히려 환경의 변화라고 사위를 다독이셨다.
철썩이는 동해안에 근무할 때, 밤과 새벽으로 초도 죽광에서 바다낚시를 그 얼마나 했던가!
화진포에서 주로 낚은 배도미를 주말에 어망째로 갖다 드리면 반색이셨다. 춘천 고장과 달리 특히 젓갈류를 누구보다 선호하시던 분이셨다. 어망에 작은 치어들까지 하나 버리지 않고 젓갈을 담그시며 싱글벙글하시는 모습 지금도 선하다. 오래오래 삭혀 수년간 찬 饌으로 장독에서 아내에게 퍼주시며, 이서방 덕분이라고 누누이 강조하시던 장모께 훅하면 상소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금은 부천에서 생명을 돌보는 간호사 막내딸이 사춘기 때였다. 살면서 삶이 실망케 해도 등을 다독이며 힘을 주어야하는데, 칭찬에 인색해, 장모께 달려가 고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항상 사위 편에 서셨던 장모! 돌부처 같은 부친 성품이라며 단단히 꾸짖던 장모-. 반면 심지가 깊음도 귀뜸해 주셨다.
세월이 흘러 막내는 엄마의 도움으로 영 넘어 간호대를 다시 입학하여 탄탄한 앞길을 열어주었으니 고告한 것이 진정 기우였다.
무엇보다 중앙에서 일필휘지 一筆揮之하시던 장모는 만년에 문묵文墨을 외면하시고 귀하게 받은 아호 덕전 德田을 일체 사위께 물려주시는게 아닌가! 수필가로 부족한 자신을 덕을 쌓으라고 쓴 아호는 발끈한 경주 이씨 성깔을 잠재우며 인의 주변을 서성이는게 한 장모 덕이다.
이제 장모는 거꾸로 선 나뭇잎이 떨어져 진정 자유의 몸이 된 것처럼, 구만리 장천 그 어디에도 날아올라 천국의 삶을 설계하시리라. 최근 병석에서도 장모는 어찌나 꽃을 좋아하시는지, 포토로 저렴한 화초만 구해드렸던 것을 후회하지만, 돌아가시기 전 13층 베란다는 온통 하늘 정원이었다. 가시는 마지막 길도 삼베가 아닌 평소 즐겨 입으시던 한복을 차려입으시고 꽃 속에 편히 잠드신 모습에 또 한 번 놀랐다.
장모 ! 물의 시원 始原 춘천에 딸을 안겨주고, 부족한 사위 인생 2막을 밀어주시던 은혜에 감사하며, 당시는 그저 무뚝뚝히 아니 귀찮기까지 했던 불효자임을 이제 뒤늦게 깨닫는다. 거문고와 책을 가까이하면 항상 즐겁다고 하사하신 금서상자락 琴書常自樂을 보며 오늘도 겸허한 몸짓으로 아호를 더욱 빛내겠다고 다짐해 본다. 묵정밭에 달빛처럼 환하게 핀 조팝나무를 누구보다 좋아하시던 장모님 아니 어머님! 제 인생 후반기에 허허로운 공터를 꽉 채워주시고 떠난 달빛 아래 조팝나무셨음이 아닐 수 없다. (끝)
첫댓글 늦었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덕전 ! ~
아호를 사위에게 내려주신 훌륭하신 장모님이셨네요
글을 읽으며 신사임당 상을 받아야 마땅하셨던 어머니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덕전 선생님 내외 분의 마음 속에 사랑으로 영원히 계실 어머니... 글 잘쓰시는 사위님께 고마워 하실 겁니다
글을 읽으며 가슴이 뭉클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다녀가셨군요. 우중에 별고는 없으시겠지요. 워낙 봄내에 내리는 장마는 착한 장마같아요.ㅎ
자주 오셔서 보시고 힘을 주시고 힘을 받으시길 바랍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