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1TV 동영상 갈무리
이 사진은 얼마 전 트럼프가 트랜스젠더의 여성 스포츠 참가 금지를 추진하는 행정명령에 사인하는 장면이다. 트랜스젠더들로부터 백인 소녀들을 보호한다며, 백인 소녀들을 병풍처럼 세워놓고 사인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그러나 바로 엊그제 트럼프는 미국 연방 교육부를 폐지한다고 밝혔다. 사실은 저 소녀들도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 모두가 부자일 리 없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라는 가상의 적을 빌미로 공적 세계를 야금야금 파괴하는 것, 혐오를 부추켜 결국 자신의 발 밑에도 모닥불을 쌓아 스스로를 불태우게 하는 것, 그것이 증오를 기반 삼는 극우 정치의 실제 경로이자 오늘날 극우가 수행하는 정체성 정치의 속임수다.
미 연방 교육부는 1979년에 설립된 기관이다. 연방 정부 하에서 가장 작은 조직. 주로 무엇을 하냐면, 저소득층 공립학교와 학생들을 지원하고, 장애 학생들을 지원한다. 또 인종이나 성별에 따른 차별금지를 준수하도록 독려한다. 교육부가 폐지되면 미국의 전국 교사 일자리의 6%가 한꺼번에 증발된다. 하루 아침에 대량 실업이 일어나는 것. 또 수백만 명의 저소득층-장애 학생들의 교육권이 길바닥에 나앉게 된다. 트럼프가 트랜스젠더를 내쫓자고 할 때 환호하던 사람들의 일부도 피해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면 트럼프는 왜 교육부를 폐지하려고 들까? 작은 정부를 위한 구조조정이 주된 이유다. 트럼프와 예산 효율부를 장악한 일론 머스크가 칼을 뽑아 가장 먼저 교육부를 베려는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 따위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데 국가 돈을 쓸데없이 사용하지 말고, 교육 업무를 연방이 아니라 주 정부에 일임하자고 주장한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공공지출을 줄이는 대신 부자들에게 세금 감면을 하고, 또 공립학교를 사립 영리학교로 전환하려는 민영화의 욕망이 바로 교육부 폐지의 실제 배경이다. 이것은 공화당의 오랜 계획이었고, 또 신자유주의 정치의 오랜 구호였다. 더 나아가 파시즘의 오래된 욕망이다. 1922년 무솔리니는 정부 기관의 규모를 줄이기 위해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민영화에 착수했다. 가장 먼저 농촌 지역에서 정부 기관을 철수시키고, 그다음에 우체국, 철도 기업을 민영화했다. 기차가 제 시간에 오지 않았다. 1934년에는 히틀러가 과두 정치세력과 자본가들을 등에 엎고 철도, 공공 은행, 공공 사업 프로젝트, 건설 기관, 제철소 등을 닥치는 대로 민영화했다. 최저임금과 근로 조건에 대한 규정을 없애고 대대적인 규제 완화에 나섰다. 반발하는 노조에는 자경단을 보내 잔인하게 탄압했다. 때론 수용소로 끌고 가기도 했다.
그 유명한 마르틴 뇌물러의 "그들이 왔다"라는 시를 떠올려보자.
"제일 먼저 그들은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왔지만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어서 그들이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지만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또 이어서 유대인을 잡으러 왔지만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지만 나를 위해 말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파시즘에 대한 정의는 여러 의견이 각축하는 회색지대이기는 하나 간단히 줄여 보면 '사적 소유를 유지하고 증대시키기 위해 국민 중 일부를 적으로 배제하는 정치 체제다'.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파시즘하에서 적은 공산주의자, 노동조합, 이주민, 성소수자, 그리고 바로 유대인이었다. 그리고 오늘날의 극우 포퓰리즘과 파시즘 하에서 주된 적은 이슬람, 이주민, 트랜스젠더, 여성, 노동조합이다.
트럼프가 왜 증오의 불을 지르고 트랜스젠더와 이주민을 불태워가며 저렇게 파시즘의 성채를 쌓고 있겠는가. 바로 뒤에 돈이 흐르기 때문이다. 여기에 트랜스젠더와 이주민을 혐오하지 말자는 리버럴의 구호와 정치적 올바름을 또다시 간증하는 구호로는 충분하지 않다. 종종 그 주장들은 파시즘의 경로를 은폐하기도 한다. 사적 소유와 자본주의 탐욕 체제를 민주적으로 통제하지 않으면 언제든 파시즘이 창궐한다. 파시즘이란 백인 지식인들, 혹은 그 얄팍한 지식 세계에 적을 두는 자칭 유색인종 지식인들이 생각하듯 20세기 초반 유럽에 예외적으로 처음 등장한 게 아니라 15세기 말 남반구를 식민지화하면서 집단학살을 자행하던 바로 그 순간에 처음 등장했고 지금까지 눈에 보이지 않게 은폐되었을 뿐,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에 내장된 영속적 체제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가시적 파시즘은 외부로 향하던 파시즘이 내부로 전도된 형태일 뿐이다. 극우가 세계를 기만하는 방식은 한국에서도 실핏줄처럼 작동하고 있다. 생각해보라.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자마자 거의 같은 이유로 여가부를 폐지하겠다고 선언했던 것을. 그리고 여야 구분 없이 꽤 많은 남성들이 여가부 폐지선언에 환호하며 여성혐오 정치에 편승했던 것을. 여성혐오를 앞세워, 공공지출을 줄이고 공적 삶을 축소시켜 결국 모든 이의 손해와 고통을 자초하게 만드는 경로. 지독한 아이러니와 어리석음의 경로.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에 만연된 트랜스젠더와 노동조합에 대한 혐오는 어떤가. 여야 지지자들이 머리끄댕이를 잡고 싸우다가도 트랜스젠더와 성소수자 이야기만 나오면 쌍심지를 켜고 서로 손을 맞잡은 채 연대하지 않은가. 심지어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일부도 전세계 극우 진영이 선동하는 트랜스젠더 혐오에 기꺼이 화력을 제공하지 않는가. 또 탄핵 정국에 잠시 주춤하지만 노조에 대한 혐오는 또 어떤가. 파시즘의 기미는 의회 앞 장갑차의 형태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학교, 사무실, TV 앞, SNS, 유튜브 등 우리의 일상에 도도히 흐르고 있다.
하얀 백인 소녀들을 모아놓고 트랜스젠더를 쫓아내자는 트럼프. 증오를 부추켜 우리의 공적 삶의 파괴를 은폐하는 경로. 배제의 쾌락, 지배의 욕망, 순수성에 대한 열광, 이런 것들은 뺄셈의 정치다. 연대와 상생을 통해 서로의 삶을 더하고 풍요롭게 하는 대신, 자신의 정체성을 제외한 나머지를 마구 쳐내면서 결국 한 점으로 축소되다가 소멸되고야 마는 어리석은 뺄셈의 정치. 그리고 그걸 깨달았을 때는 마침내 "나를 위해 말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는 고립무원의 세계. 이것이 극우가 세계를 기만하고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이송희일
저작권자 © 가톨릭일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