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소를 키우며
박혁수
103호 아저씨가 이사 온 후로 아파트 화단이 채소밭으로 변했다. 상추며 쑥갓이 커 가는 것을 부러워하던 아내는 그 아저씨의 도움으로 화단 한켠을 개간하여 손바닥만한 채소밭을 꾸몄다. 그리고는 우리도 요즘 유행하는 웰빙 식사를 할 수 있다고 즐거워했다. 아내는 한 뼘도 안 되는 채소밭에 하루에 두어 시간씩 공을 들이곤 했다. 농사에는 문외한이다 보니 채소를 키우는 일이 그리 만만할 리 없다.
처음에 뿌린 씨앗은 상추와 쑥갓, 그리고 열무였고 시장에서 가지모종과 고추모종 몇 포기를 사다 심었다. 대충 씨를 뿌리고 정성껏 물을 길어다 주니 싹이 텄다. 하지만 103호 아저씨의 채소에 비해서 색이 누리끼리한 것이 영양이 부족한 것이 틀림없었다. 씨앗을 뿌리기 전에 밑거름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상추는 가지에 비하면 좀 나은 편이다. 우리집 가지는 103호의 가지에 비하여 키가 반밖에 되지 않았다. 그 낮은 키에 힘겹게 달려있는 가지를 보노라면 큰딸 애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지고 다니던 가방이 생각나서 안쓰럽다. 어찌된 노릇인지 큰 딸 애는 키가 작은 편이다. 동생보다도 작아서 먼 친척들은 둘의 서열을 바꿔서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어렸을 때 보약이나 키 크는 영양제를 먹이지 않은 것을 후회해 보아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아내도 유난히 키가 작은 가지나무가 불쌍한지 다른 채소에 비해 남다른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옆 화단의 채소와 자꾸 비교가 되어 결국 웃거름을 하기로 했다. 시골에서 요소비료를 얻어다가 채소밭에 뿌리고 건강한 암녹색으로 변하기를 기대했으나 건강해지기는커녕 며칠 뒤에 하얗게 말라가며 몸살을 하기 시작했다. 비료가 뿌리에 닿지 않아야 하는데 욕심을 부려 너무 많이 뿌린 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차라리 그냥 두었다가 적당히 크면 뽑아먹을 것을 하는 후회가 든다. 누렇게 말라가는 채소들을 뽑아버리기로 했다. 하지만 큰 딸을 닮은 가지는 끝내 뽑지 않았다.
지난 번 실수를 거울삼아 유기질 비료를 사다가 씨앗을 뿌리고 밑거름을 하였다. 조금씩 자라는 모습이 지난번 채소보다 건강하고 모습도 튼실하였다. 손바닥만한 채소밭에서 나는 소출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웃집과 나눠먹기에 충분한 양이다. 이러한 소출이라면 밭 한 뙈기 논 한 뙈기만 가지면 우리 식구 먹거리 생산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먹고살기로만 하면 우리 4식구 통신비만 합하면 먹거리 구입은 충분할 것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생활에 꼭 필요한 기본을 넘어 삶의 군더더기가 너무 많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을이 오기 전까지는 벌레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상추나 쑥갓은 벌레가 잘 타지 않았다. 하지만 열무는 조금만 크면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름에는 벌레가 구멍을 하나 둘 뚫을 때 쯤, 어린 채소를 그냥 뽑아서 먹고 또 심으면 되었다. 하지만 김장을 목표로 심은 배추와 무는 벌레가 먹는다고 그냥 뽑아먹을 수가 없다. 배추 잎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한지 며칠 후에 아내는 범인을 알아냈다고 호들갑이었다. 바로 달팽이 녀석들인 것이다.
며칠동안 새벽에 달팽이 녀석들을 잡아내면서 콩을 3알씩 심었던 옛 선인들의 지혜를 생각했다. 그들은 한 알은 벌레 몫, 한 알은 날짐승 몫, 한 알은 사람이 먹을 몫으로 콩을 심었다. 물론 농약이 없어서이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상생의 정신이 더 크게 작용했으리라. 곰곰히 생각해보니 잡풀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제거되고, 먹을 것이라고는 채소밖에는 없으니 달팽이로서는 채소를 갉아먹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채소나 곡식 등 사람들이 기르는 풀들을 잡풀들과 함께 키우는 방식인 이른바 '방치농'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농약을 하지 않아도 옆에 다른 풀들이 있어서 채소나 곡식에 벌레가 덜 탄다는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인내심이고 훌륭한 상생의 정신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도 옆집 밭의 멀쩡한 배추와 우리 밭의 구멍이 뻥뻥 뚫린 것을 비교하니 속이 상했다. 생선뼈를 발효시킨 물이 달팽이의 퇴치에 효과가 있어서 농약 대용으로 쓰인다고 들었지만 실제로 만들어서 뿌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는 것을 정성이 부족하여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것이 어디 이런 경우뿐이랴. 내 하루 행동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편안함을 쫓아 쉽고 가까운 길을 택하는 경우가 허다할 것이다.
옆집 아저씨에게 물어서 농약을 뿌리고 난 후 기분이 씁쓸하다. 이제 내 채소밭도 대부분의 땅처럼 서서히 죽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달팽이, 굼벵이, 지렁이 등이 사라진 땅이 온전한 땅이라 할 수 있겠는가? 어른들은 옛 작물들과 지금 작물들의 맛이 다르다고들 한다. 옛날에는 밭에서 무를 뽑아 풀에 쓱쓱 문질러 껍질을 손톱으로 벗겨 먹으면 들큰하고 매콤한 것이 먹을 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무뿐만 아니라 쑥갓이나 버섯 등도 그 향이 옛것들 보다 약해졌다고 한다. 온전한 맛이 나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허긴 온전하지 않은 땅에서 기르는 작물에게 온전함 맛을 기대한다는 것은 욕심일지도 모른다.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여 사는 사람이 아름답다. 그래서 농부들의 일하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이는지 모른다. 하지만 초보 농사꾼인 나처럼 욕심 때문에, 때로는 정성과 인내가 부족하여, 성급함이나 편안함을 앞세운 방법으로 선을 가꾸는 것도 과연 온전한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의 조급함과 욕심 때문에 비틀려버린 아름다움이야 어떻든 하늘은 온전한 가을볕을 배춧잎에 뿌려대고 있다
(2004. 12. 1 )
(박혁수 회원님은 사이버 회원님으로 수필사랑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정회원입니다. 전남 영광에 살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