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神)들은 목마르다 (1)
정혁용 소설가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고만고만한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삶에서야 말로 심오함을 발견할 수 있는 거라고 추리소설가인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중에 영합하는 글쓰기를 지향합니다.
프롤로그
“보통은 사냥으로 죽인 뒤에 가죽을 벗기죠. 움직이면 좋은 가죽을 얻을 수 없으니까. 아마 당신도 한 번쯤은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에스키모나 유목민을 다룬 다큐 프로그램에서 말입니다.”
남자는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었으며 푸줏간에서 쓰는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꽉 조여 매고 있는 탓에 배가 볼록하게 튀어 나와 보였다. 실내는 덮지 않았지만 긴장한 탓인지 혹은 흥분한 탓인지, 땀이 흘러 형광등 불빛에 이마가 번들 거렸다. 남자의 표정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
“저는 이걸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명이라고 생각하죠. 물론 그 차이는 아시겠죠? 직업은 내가 선택하는 거지만 소명은 선택당하는 겁니다. 거절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결국은 그 길을 가게 되는 거죠. 끝내는 본인도 수긍하게 되고.”
일러스트 – 심이온
남자는 십 센티 정도 되는 칼을 동그란 숫돌에 갈며 말했다. 몇 번인가 형광등 불빛에 비추며 날을 점검하면서. 그리고는 만족스러운지 여자가 누워있는 시체 안치대 위에 칼을 내려놓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케네디가 그랬다죠? 인간은 불공평하게 태어난다고.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공평한 게 있어요. 죽음이죠. 정말이지 죽음은 공평해요. 분명하게 결과가 나오고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는 없으니까. 깔끔하고 완벽하죠.”
남자는 자신의 얘기에 스스로 감탄을 한 듯, 엄지와 중지를 딱 하고 마주치며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잠시 그 소리를 혼자서 음미했다.
“당신은 오늘 죽을 겁니다. 운이 좋다면 내일까지는 살 수 있겠죠. 그 이상은 힘들 거예요. 아직 그런 사람은 한 번도 못 봤으니까. 당장 죽여 달라는 눈빛의 사람들은 많았지만.”
남자는 놓인 칼을 다시 잡고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 이마를 톡, 톡, 두드렸다.
“사람의 모든 의문은 결국에는 한가지로 귀결됩니다. 인생의 본질이 뭘까, 라는 한 가지. 그것만 해결되면 사실 죽음이란 건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답도 내리지 못한 채 죽어요. 안타깝게도. 왜 그럴까요? 이유는 하납니다. 절박감이 없어서 그렇죠. 목숨을 걸고 해답을 얻겠다는 절박감. 하지만 그런 절박감을 가지기에 현대인은 너무 많은 것들에 노출되어 있어요. 성욕, 소비, 사랑, 가족, 직장…….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 그저 그렇게 인생을 끝내는 거죠. 정말 안타깝게도.”
남자는 칼을 다른 손으로 바꿔들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공포라고 생각해요. 정말 순수한 공포에 직면하면 삶과 죽음에 대해 혼신의 힘을 다하게 되고, 그러면 비록 짧은 순간이더라도 뭔가 깨달음을 얻어요. 아마 당신은 본 적이 없겠지만 저는 많이 봤습니다. 마지막 숨이 넘어갈 때의 인간의 모습 말이죠. 더 많은 고통을 당한 인간일수록 더 편안한 마지막 숨을 내쉬고 가는 것을 말입니다. 깨닫고 가는 거죠. 자신이 만족할만한 해답을 구하고서.”
남자는 손으로 여자의 다리를 쓰윽, 하고 쓰다듬었다. 여자는 시체 안치대 위에 양팔과 다리를 묶인 채였고 반응은 없었다.
“요 근래에는 제대로 된 일이 없었어요. 콤프레셔를 썼으니까. 입술과 턱 사이를 째고 호스를 밀어 넣고 콤프레셔를 트는 겁니다. 한 번에 가죽이 벗겨지죠. 아무런 재미도 없어요. 그런 건 그냥 일일 뿐이죠. 하지만 당신은 시간이 충분해서 좋군요. 피부도 멋지고. 당신 피부에 걸맞게 좀 더 신경을 쓸 겁니다. 가죽에 손상을 내는 일이 없게끔.”
그렇게 말하고는 남자는 입맛을 다셨다.
“이제부터 시작될 일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보통은 팔, 다리, 몸통, 머리, 이런 순서로 진행합니다. 천장에 설치된 거울로 당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운이 좋으면 당신 내장이 움직이는 것도 직접 볼 수 있을 겁니다. 눈꺼풀을 잘라놨으니 안 볼 수는 없어요. 혹시 숨을 참아서 자살하려는 생각을 한다면 헛수고예요. 칼이 들어가면 심장이 먼저 반응해요. 숨을 안 쉴 수가 없죠.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은 안하는 게 좋아요. 당신은 그저 고통과 직면하기만 하면 됩니다. 간단한 문제죠. 시간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벗기는 데 길어야 한 시간입니다. 당신은 피부가 좋으니 한 번에 깨끗하게 벗길 생각입니다. 컬렉션에 넣을 생각이니까.”
남자가 열정이 섞인 눈빛으로 여자의 얼굴을 이리저리 만졌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자,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요?”
칼을 든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워 있는 여자의 눈에는 공포가 서렸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1. 오후 12시: 그 남자의 직업.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데, 나의 경우도 해당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경력은 이년 이 개월. 숙련공은 아니다. 원해서 시작한 일이 아니니까. 단지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초보자도 아니다. 인간이란 게 묘해서 같은 일을 반복하다보면 실력이 는다. 원하든 원하지 않던. 성실하게 살아본 적이 없는 인간이지만 어쩌다보니 이 일은 그렇게 해오게 됐다. 그럴 의도는 없었다. 하지만 결국, 이 일에 익숙해져버렸고 익숙해진 만큼 성실해졌다. 직업을 가진 보통의 사람들처럼. 나의 직업은 살인마다.
살인마를 직업으로 볼 수 있을까? 모르겠다. 이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처음을 지나면 생각이 달라지 게 된다. 인간은 자신을 합리화하는 동물이니까.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라. 합리화해서 견디거나, 그러지 못해서 파멸하거나. 두 가지의 선택밖에 없는 일도 세상에는 있다는 것을 배웠다. 배우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전자를 선택했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죄라는 말이 그저 개념에 불과할 뿐이라면, 그러니까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라 단지 생각이 만들어낸 관념일 뿐이라면, 악이라는 시선에서 죄를 걷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더 나아가 악 자체도 같은 방식으로 걷어낼 수 있을 거라고. 그렇다면 세상에 선악이란 없으며 오로지 행위만이 존재할 것이다. 그런 후라면, 노동과 대가를 일의 본질로 볼 때, 살인마가 직업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보통의 사람들처럼.
살인마라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남이야 어떻게 보든 나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다. 가정도 있고 지켜야할 자식도 있다. 한 때는 제대로 된 직업도 가지고 있었다. 공과금을 내고 세금을 내며 이런저런 생활을 위해 돈을 벌었다. 티비나 영화에 나오는 살인마들은 대개 정신이상자들이긴 하지만. 물론 그런 녀석들도 있겠지. 하지만 나와 같은 생활인도 분명 있을 거다. 가족이 있고 지켜야 될 가정이 있는. 스텐리 엘린의 소설, 이유 없는 폭발처럼 말이다. 세상은 넓다. 미친 사이코들만 살인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방금 전화를 끊었다. 열두시 삼분. 전화를 거는 남자는 언제나 간단하게 지시만 하고 끊는다. 장소와 도착시간. 그리고 처리 시간. 아직까지 남자의 말을 지키지 못 한 적은 없다. 전화를 끊고 병원을 나서자 거리에는 비가 내렸다. 10월도 중순. 젖은 낙엽과, 젖은 낙엽처럼 어깨가 처진 행인들이 도로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병원 주차장의 낡은 아반떼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장소는 울산. 서울을 빠져나가서 네 시간. 남자가 말한 시간까지는 넉넉히 남아 있었지만 점심은 거르기로 했다. 일찍 도착해서 기다리는 편이 났기 때문이다. 약속시간을 맞추는 보통의 사람들처럼.
<다음 회에 계속>
P.S.
1. 장편소설입니다. 끝까지 제대로 완주할 수 있을 지 두렵습니다. 비교하자면 운동장 서너바퀴를 돌고난 뒤에 마라톤 출발선에 선 기분입니다. 그래도 뭐, 어떻게든 되겠지요. 닥치면 어떻게든 하게 되고, 어떻게든 하다보면 또 어떻게든 결과가 나오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매사를 빈틈없이 준비하고 다짐을 골백번을 한 뒤에 뭔가를 시작하는 쪽이었는데, 이러나 저러나 어차피 떠밀려 들어가면 준비를 한 인간이나 안한 인간이나 그닥 차이가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견디는 것만으로도, 또 견디다보면 아무튼 그럭저럭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용기란 게 별거 있나요. 저질러 놓고 보는 거지.
죄송합니다. 원래 의도는 이게 아닌데 이 놈의 말투가 잘 안고쳐집니다. 그러니까 재밌고 심도있게 잘 쓸테니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같은 말을 하려는 의도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문장을 쓰고 나면 곡해의 여지가 너무 많은, 어찌보면 한없이 건방지기까지한 말투로 흘러버립니다. 나쓰메 소세키 식으로 말하자면, 천성이 막무가내인 탓에 손해만 보고 살았다, 뭐 그런 정도 되겠습니다. 하지만 이왕 써버린 문장이니 그냥 두겠습니다.
다만, 쓰는 사람도 댓글을 달아주시면 무척이나 힘이 나니 읽으시면서, 뭐야 이거, 저 번 내용하고 아귀가 안맞잖아, 라는 부분이나 이 부분은 완전 개똥철학이잖아, 인내심을 테스트하려고 쓴 문장이야, 라는 말씀이라도 달아 주세요. 맞는 말씀은 어디까지나 참고는 하겠습니다.(고치는 경우도 있겠지요^^;)
그러니 댓글 좀 다세요. 재미가 없었다면 몰라도 실컷 읽으시고 그냥 가버리는 건,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밥만 얻어먹고 집에 가는 것과 같은 일이니까요. 그런다고 제가 어쩔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아! 이제껏 을,로 살았는데 연재도 을,이군요^^; . 필명이라도 갑, 이라고 바꾸던지 해야지 원.
2. 참고로 이 소설은 미스터리적 요소가 있는 스릴러 형식입니다. 추리소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과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스릴러 소설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큰 범주로 보면 다 추리의 장르입니다만) 그러니 기상천외한 트릭같은 내용(이걸 본격추리라고 합니다)은 없습니다. 왕가위의 영화 동사서독이 무협지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사실은 인생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듯. 그러니까 장르문학이라는 선입관을 가질 필요가 없고, 장르문학 매니아라면 원하는 부분이 없을 수 있습니다. 참고하시기를.(음, 이러다가 두 쪽다 외면을 받을 지도)
3. 저는 대략적인 스케치만 한 상태에서 소설을 쓰는 타입입니다. 소설이 어떤 내용으로 전개될지 자신조차도 명확히는 모릅니다. 등장인물들이 저에게 말을 거는 대로 쓰는 타입이죠. 그런 방식으로 쓰는 게 저는 즐겁습니다. 뻔히 아는 결말을 쓴다는 것은 적어도 저한테는 곤욕이더군요. 그러니…….. 댓글을 다세요. 그럴듯한 댓글은 적극 반영할 생각입니다. 어째 쓰고나니 물건을 파는 세일즈맨이 된 기분입니다만.^^:
4. 메일도 환영입니다. jhyong91@naver.com
정혁용의 ‘신(神)들은 목마르다’ 매주 월요일, 목요일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