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법칙에 부합하는 추구
성엄(聖嚴) 스님
많은 사람이 불교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말라고 가르친다고 생각하곤 하는데, 이는 사실 오해입니다. 불교는 ‘갈망(탐욕스러운 추구)’은 경계하지만, ‘발원(서원)’을 세우는 것은 권장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개인은 정진을 위한 목표를 잃지 않게 되고, 사회는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동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발원’이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거나 특정한 과업을 성취하겠다는 의지를 세우고 서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불교의 ‘사홍서원(四弘誓願)’은 다음과 같습니다. “중생은 끝이 없으니 다 건지오리다. 번뇌는 끝이 없으니 다 끊으오리다. 법문은 끝이 없으니 다 배우오리다. 불도는 위대하니 다 이루오리다.” 수많은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 끝없는 번뇌를 끊어내겠다는 서원, 한량없는 가르침을 배우겠다는 서원 등은 모두 타인을 위해 끊임없이 배우겠다는 다짐이자 원동력이 됩니다. 따라서 발원이란 평생토록 배움을 이어가는 삶의 태도를 의미하며, 동시에 복을 짓고 공덕을 쌓아 타인에게 더 많이 기여함으로써 스스로를 성장시켜 나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반면 ‘갈망’은 채워지지 않는 욕구, 즉 타인이 가진 것을 자신도 소유해야만 한다는 강박적인 마음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집을 가진 것을 보면 갑자기 자신도 집을 갖고 싶어지고, 또 다른 사람이 수입차를 탄 것을 보면 이번에는 수입차를 소유하고 싶어지는 식입니다. 그것이 적절한지, 실현 가능한지, 혹은 정말 필요한 것인지와는 상관없이, 그저 자신이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그것을 손에 넣어야 한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갈망은 아무런 합리적 근거가 없으며, 오직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매우 비현실적입니다.
어떤 이들은 탐욕에 눈이 멀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얻기 위해 비양심적이거나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기도 하는데, 이는 종종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기꾼들은 쉽게 이득을 얻으려는 사람들의 심리를 악용하여 그들을 함정에 빠뜨리고 금전을 갈취합니다. 한편, 스스로 노력하여 무언가를 얻으려 하기보다는 영적인 존재나 신, 혹은 부처와 보살에게 의지하여 자신이 바라는 바를 얻으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찰에서 소원을 빌고 부자가 된 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신상(神像)에 금칠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단기적 이익을 위한 거래는 신에게 뇌물을 바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인간 세상에 뇌물을 주고받는 이들이 있듯, 영적인 존재나 신들 중에도 뇌물을 받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나 보살, 그리고 올바른 신들은 결코 그러한 뇌물을 받지 않습니다. 뇌물을 받는 존재들은 인간 세상의 부패한 관리와 같습니다. 그들은 일시적으로 당신의 욕구를 충족시켜 마치 '효과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 수 있지만, 그러한 덧없는 이익은 비눗방울처럼 허망할 뿐입니다. 그것들은 곧 사라져 버리고, 당신에게는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미래만이 남게 됩니다. '돌을 금으로 바꾸는' 마법 같은 일조차 사실은 눈속임에 불과합니다. 어떤 환상을 씌우든 돌은 여전히 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신이나 부처, 보살이 당신의 소원을 들어준다면, 이는 본질적으로 당신이 쌓아둔 공덕을 미리 당겨쓰는 것과 같으며, 결국 언젠가는 반드시 갚아야 할 빚이 됩니다.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질 자격이 없는 것을 탐하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고통을 초래합니다. 설령 욕구가 충족된다 하더라도, 이는 마치 대출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많이 빌릴수록 나중에 갚아야 할 빚도 커지는 법입니다. 지금 누리는 즐거움은 훗날 고통이라는 쓴 열매가 되어 돌아옵니다. 따라서 부지런히 공덕을 쌓고 타인의 행복을 위해 기여하지 않는 것은 매우 중대한 잘못입니다. 그로 인해 겪게 될 업보(業報)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여서, 다음 생에 짐승으로 태어나 평생을 부림당하며 살아도 그 빚을 다 갚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진정으로 복을 얻고 싶다면, 스스로 노력하여 복을 쌓아야 합니다. 복을 쌓지 않은 채 복을 누리는 것은 마치 남에게 돈을 빌리는 것과 같아서, 사실상 빚을 지는 일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이 노력하여 얻은 것만을 온전히 가질 수 있으며, 아무런 원인 없이 부나 번영을 얻는 경우는 없습니다. 만약 대가 없이 무언가를 얻게 된다면, 나중에 치러야 할 대가는 훨씬 더 클지도 모릅니다.
불교적 가르침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들이 교육이나 직업, 혹은 부를 추구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추구는 합리적이어야 하며, 반드시 스스로의 진실한 노력을 통해 얻어낸 것이어야 합니다. 나아가 권리와 의무, 그리고 책임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복을 누리고 싶다면 먼저 복을 쌓아야 하고, 권리를 누리고 싶다면 먼저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과법칙입니다. 이 원칙에 부합하는 추구만이 가장 바람직하고 확실한 길이며, 그렇지 않은 것은 단지 탐욕스러운 갈망에 불과합니다. 설령 그런 방식으로 무언가를 얻는다 해도, 결국에는 반드시 불행이 뒤따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탐욕스러운 갈망'이나 미신에 의존하기보다는, '진실한 열망'을 바탕으로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탐욕이나 미신은 결국 역효과를 낳을 뿐이며, 이로움보다는 해로움이 더 클 뿐입니다.
合乎因果的追求
圣严法师
一般人常以为,佛法要我们什么都不求,其实这是一种误解。佛法虽然教我们不要“贪求”,但却教我们要“求愿”,如此一来,个人不会失去奋斗的目标,社会也才有继续进步的动力。
“求愿”就是许愿、发愿,愿自己朝著某个方向走,或是完成某件事。例如,佛教的“四弘誓愿”说:“众生无边誓愿度,烦恼无尽誓愿断,法门无量誓愿学,佛道无上誓愿成。”无论是要度无边的众生、断无尽的烦恼,或是要学无量的法门,都是一种为众生无止尽学习的愿心和愿力。因此,求愿是活到老、学到老,一辈子持续不断地学习,并且要求自己种福、培福、多付出,也让自己更进步。
而“贪求”则是无止尽的欲求,无论看见别人拥有什么,自己都想拥有。例如,看见别人有一栋房子,就兴起想要拥有一栋房子的念头;如果别人拥有一辆进口车,则又转念想要拥有一轮进口车。无论该不该要、能不能要、需不需要,凡是自己想要的,就要得到手。所以,贪求并没有什么道理,只是为了满足自己的欲望而求,是不切实际的。
有些人利欲熏心,为了贪求不属于自己的东西而走旁门左道,结果往往因而倒大楣。例如,金光党就是专门利用人们贪小便宜的心理弱点,引诱人上当,来达成诈财的目的。此外,有些人虽不向人求,却转而向鬼神、佛菩萨求。例如到庙里许愿,等自己真的发财了,再回到庙里还愿,为神明“安金身”。不过,这种短暂利益的交换,只是一种贿赂神明的手段罢了。
就像在人世间有行贿、受贿的人,在鬼神界也有受贿的鬼神,但是,佛菩萨或是正派的神明是绝对不会受贿的。会受贿的鬼神就像人世间的贪官、污吏一样,虽然能暂时满足你的需求,好像真的有点效果,但一时的利益总是像肥皂泡一样虚幻,很快就消失了,换来的却是无法自主的未来。即使是“点石成金”的法术,事实上也只是一种障眼法,如果被点的东西本来就是一块石头,将来还会是一块石头。而神明或佛菩萨真的应许了你的愿望,也只是暂时预支自己的福报,以后还是要偿还的。
因此,非分的贪求一定会带来痛苦。即使求到了,也像是举债借来的,借的愈多,将来要还的就愈多,现在的快乐就是将来的苦果。所以,如果不好好地努力培福、奉献,罪过是 大的,将来要承受的因果责任难以想像,也许来世做牛做马都还不起。
其实,人如果想求福报就要先努力培福,如果不培福,而光是享福,就等于是欠债,就像他人借款一样。所以,一个人该拥有多少就拥有多少,没有人能够平白无故地赚到钱、得到富贵。如果真能不劳而获,将来可能还要付出更多的代价。
站在佛法的立场,一般人求学、求职、求富贵都是应该的,但我们的追求应该要合理,而且要付出自己的努力作为代价。其次,要明白权利、义务和责任的关系是并行的,我们如果要求福,就要先培福;要享受权利,就要先尽义务,这就是因果。只有合乎因果道理的追求,才是最好、最可靠的,否则就是贪求,即使勉强得到了,祸患也会跟著来。
所以,我们要用“求愿”的方法,为达成目标而努力奉献,切勿用“贪求”、迷信的方法,否则会得不偿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