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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를 이해하는 가장 빠른 길은 그 종교의 경전을 직접 읽는 것이다. 읽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이해하려 노력하면 더 좋다. 나 역시 성경을 읽고, 불경을 펼쳐보고, 여러 민족종교의 경전들을 때때로 들여다본다. 완전히 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읽지 않은 것과 읽어본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적어도 상대를 함부로 단정하지 않게 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읽을 이유는 충분하다.
이 글은 그 단순한 원칙에서 출발한다.
예수는 율법사의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았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율법사는 시험하는 말투로 물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겠습니까? 예수는 되물었다. 율법에 뭐라 기록됐는지 직접 읽어보라고. 율법사는 정답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예수는 그대로 하라고 했다. 그러자 율법사는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듯 다시 물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그 질문에 예수가 들려준 이야기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다.
강도 만나 쓰러진 사람이 있다. 제사장이 지나갔다. 레위인도 그냥 지나쳤다. 당시 종교 질서의 중심에 있던 두 사람이 외면했다. 그다음 사마리아인이 왔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이 반쯤 이방인 취급하던 집단이었다. 그가 멈춰서 기름과 포도주로 상처를 싸매고, 여관에 데려가 돈을 내고 돌봤다.
이야기를 마친 예수는 율법사에게 물었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었겠느냐? 율법사는 대답했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는 말했다. 가서 너도 이같이 하라.
구원의 기준이 어디 있는지가 이 짧은 이야기 안에 압축되어 있다. 민족이 아니다. 소속이 아니다. 율법 지식이 아니다. 쓰러진 사람을 보고 어떤 마음을 내느냐, 어떤 행동을 하느냐. 그것이 기준이다. 당시 유대교가 민족적 정체성을 구원의 울타리로 삼았다면, 예수는 그 울타리를 부수고 나왔다.
예수의 공생애는 세례로 시작됐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물 위로 올라올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렸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마가복음 1:11) 하늘로부터 받은 그 확인. 이것이 이후 예수의 행보를 가능하게 한 토대였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기에, 세상의 어떤 권위도 그 정체성을 흔들 수 없었다.
그 확신 위에서 예수는 전통 유대교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가르침을 폈다.
율법주의자들은 그를 적대했다.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 매달았다.
혹세무민한다는 죄목으로 처형되던 그 순간,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용서를 구했다. 그 육신은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마음은, 그 정신은 건드릴 수 없었다. 이것이 부활의 의미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 있다는 것.
이 두 장면 사이에 예수 가르침의 전부가 있다. 경계를 넘어 사랑하라. 그 사랑은 원수에게도 닿는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예수 스스로 십자가에서 실천해 보였다. 원수를 사랑하라 가르쳤고, 원수 앞에서 용서를 기도했다. 말과 죽음이 일치했다.
대종교 중광 교조 홍암 나철도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가르침을 완성했다. 1916년 음력 8월 15일,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 나철은 제천의식을 마친 뒤 순명삼조(殉命三條)를 유서로 남겼다. 한배님께 제천하고, 대종교를 위하고, 인류를 위해 목숨을 끊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조식법(調息法)으로 스스로 숨을 거두었다. 육당 최남선은 이를 육신제(肉身祭)라 불렀다.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친 제사라는 뜻이다.
예수의 십자가와 나철의 구월산. 두 죽음은 형식도 시대도 다르다. 그러나 가리키는 방향은 같다. 가르침은 말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을 몸으로 살아낸 사람만이, 그 가르침을 세상에 남길 수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말하는 것은 한 문장으로 압축된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 앞에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보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민족, 종교, 계급의 경계를 넘어선 보편적 인간 사랑.
대종교의 건국 이념 홍익인간(弘益人間)이 말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라. 경전 신사기(神事記)에 치화주 한검(桓儉)의 사역으로 기록된 홍익인세(弘益人世)는 한 민족, 한 계층, 한 시대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신인물(神人物) 삼극(三極) 사상 안에서 그 이로움의 대상은 세계 모든 존재를 향해 열려 있다.
1958년 문교부가 발간한 문교개관은 이렇게 정리했다. 홍익인간은 인류공영(人類共榮)의 뜻으로 민주주의 기본 정신과 부합하며, 기독교의 박애정신, 유교의 인(仁), 불교의 자비심과도 상통하는 전인류의 이상이라고.
예수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그어 보인 선과, 홍익인간이 가리키는 방향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대종교의 5대 종지(五大宗旨)도 같은 자리에 있다. 그 첫째는 경봉천신(敬奉天神)이고 셋째는 애합종족(愛合種族)이다. 하느님을 공경하고 인류를 사랑으로 합하라. 예수가 모든 계명 중 가장 크다 한 두 계명,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마가복음 12:30-31)과 구조가 일치한다. 경천애인(敬天愛人). 이 계명은 두 종교가 공유하는 언어다.
1998년, 한 문화운동단체가 전국 초등학교에 360개의 단군상을 건립하는 사업을 벌였다. 즉각 보수 개신교 진영이 들고 일어섰다. 단군상 철거를 요구하는 세미나가 열리고, 통합공과 자료집이 제작되어 교회마다 배포됐다. 갈등은 법원 가처분 신청으로 번졌다. 단군상 설치를 주도한 단체와 이를 저지하려는 교단 사이에서 한국 사회가 한동안 시끄러웠다.
표면적으로는 문화운동 단체와 종교 단체 사이의 충돌이었지만, 기독교 측은 이 사건을 처음부터 종교적 맥락에서 이해했다. 단군상 건립기에 대종교 경전 천부경이 언급됐다는 이유로, 이 운동의 배후에 대종교가 있다고 봤던 것이다. 그 후 25년이 지났다. 갈등은 가라앉았고 논쟁은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나 두 진영 사이의 오해는 해소되지 않은 채 묻혀 있다.
당시 보수 개신교 진영이 단군을, 나아가 대종교를 이해한 방식은 크게 세 방향으로 압축된다.
첫째는 단군을 역사에서 지우는 비역사화다. 단군은 허구적 설화의 인물일 뿐 실재했던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는 단군을 우상으로 규정하는 비종교화다. 유일신을 섬기는 기독교 신학의 시각에서 단군 숭배는 우상숭배이며, 대종교는 그 중심에 있는 이단 종교라는 것이다.
셋째는 단군 민족주의를 배타적 국수주의로 보는 비가치화다. 히틀러의 나치즘과 일본 군국주의가 바로 그런 민족주의로부터 나왔다는 논리가 동원됐다.
세 방향 모두 문제가 있다. 비역사화는 학계의 연구를 외면한 채 구성됐고, 비종교화는 대종교 경전을 한 번도 읽지 않은 상태에서 내린 판단이며, 비가치화는 단군 민족주의의 고유한 맥락과 내용을 살피지 않은 채 가져다 붙인 낙인이다.
보수 개신교 진영은 단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 담긴 삼국유사를 이렇게 정리했다. 나라에서 펴낸 역사서가 아니라 개인이 편집한 이야기책이라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삼국유사는 사료로서의 자격이 없고, 따라서 단군의 역사적 실존 근거도 애초에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러나 이는 학계의 상식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삼국유사는 국문학계와 사학계 양쪽에서 모두 중요한 문헌 자료로 인정받는다. 개인 저작이라는 사실이 사료적 가치를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역사 기록의 상당수가 사료 자격을 잃게 된다. 단군의 역사적 실존을 증명하는 작업이 완결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삼국유사 자체를 무효화하려는 시도는 학문적 논증이 아니라 선제적 결론이다.
단군의 역사성을 둘러싼 논의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고조선이 중국에 비해 매우 낮은 세율로 나라를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지배귀족이 대규모 궁궐이나 거대한 무덤을 만들지 않고 검소한 생활을 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역사적 유물이 부족한 이유가 존재 자체의 부재가 아닌, 그 검소한 통치 방식에서 찾아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진보적 성향의 교단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는 이 지점에서 보수 진영과 달랐다. KNCC는 단군사화에 역사적 사실과 신화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음을 인정했다. 단군사화를 민족의 중요한 정신적 유산으로 인식해야 하며, 신화적 요소를 내세워 무조건 거부하는 태도나 학문적 검증 없이 역사적 사실로 무조건 수용하는 태도 모두 편향이라고 했다. 또한 단군의 역사적 실재가 기독교 신앙 운동에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즉 같은 기독교 안에서도 입장이 갈린다. 갈등이 종교적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특정 교단의 특정 신학적 노선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 사실이 말해준다.
기독교가 대종교를 이해하면서 저지른 가장 결정적인 실수는 이것이다.
대종교가 단군을 신으로 섬기는 단군 숭배 종교라고 전제한 것.
사실이 아니다. 대종교 경전 본문 어디에도 단군(檀君)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종교의 궁극적 신앙 대상은 삼신(三神)을 초월하는 일체(一體)로서의 하느님, 즉 한얼님이다. 대종교의 삼신 사상은 조화주 한인(桓因), 교화주 한웅(桓雄), 치화주 한검(桓儉)으로 구성된다. 경전 신사기(神事記)가 이 삼신의 권능과 사역을 기록하고 있는데, 한검은 다섯 가지 일을 주관하며 홍익인세(弘益人世)를 이념으로 나라를 세운 치화주이다. 역사 속에서 한검이 단군왕검과 동일 인물로 이해되어 왔지만, 그것이 단군을 신앙 대상으로 직접 섬긴다는 의미는 아니다.
대종교를 단군교로 평면화하는 것은 기독교를 예수교로 평면화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예수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지만 기독교의 궁극적 신앙 대상은 하나님이다. 마찬가지로 단군은 대종교 역사관의 중심에 있지만 대종교의 궁극적 신앙 대상은 하느님이다. 이 기본적인 사실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구성된 비판은 표적을 잘못 겨냥한 화살이다.
대종교 경전 삼일신고(三一神誥)의 신훈(神訓)은 하느님을 이렇게 기술한다.
한얼님은 그 위에 더 없는 으뜸 자리에 계시사 큰 고이(德)와 큰 슬기(慧)와 큰 힘(力)을 가지시며, 저마다의 본성에서 한얼의 씨알을 찾아보라 너희 머리 속에 내려와 계시느니라.
이 짧은 문장에 두 개의 신학이 압축되어 있다. 초월적 신과 내재적 신. 기독교 신학에서 오랜 논쟁의 대상이 되어온 이 문제를, 대종교 경전은 단 한 구절로 통합해 놓고 있다. 신은 저 높은 곳에 계시지만 동시에 내 안에 내려와 있다. 이 구조는 신학자들이 범재신론(panentheism)이라 부르는 신관에 가깝다. 신은 우주 안에 내재하면서도 우주를 초월한다.
주목할 점은 이 내재적 신성이 인간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삼일신고 진리훈은 사람과 만물이 한가지로 세 참함(三眞)을 받는다고 기록한다. 신성은 인간에게는 온전히, 만물에게는 치우치게 주어져 있다. 물질에도 신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이 사물관은 오늘날 생태계 위기 시대에 새롭게 주목받아야 할 사상이다. 자연을 이용 대상으로만 보는 근대 세계관이 환경 파괴를 불러온 지금, 만물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인식은 다른 윤리적 토대를 제공한다.
보수 개신교 진영은 홍익인간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기독교의 사랑(愛), 유교의 인(仁), 불교의 자비(慈悲)는 역사와 경전을 배후로 가진 보편 윤리인데, 홍익인간은 그런 내용이 없다. 짤막한 설화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과 다르다. 홍익인간이라는 표현은 고려 말 편집된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최초로 등장하며, 대종교 경전 신사기에는 홍익인세(弘益人世)라는 표현으로 명시되어 있다. 대종교 홍범에도 교의(敎義)로 기록되어 있다. 나아가 홍익인간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 교육법에 기본 이념으로 명문화되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교육 이념 채택의 중심에 주목할 인물이 있다. 바로 백낙준 박사이다.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기독교인으로, 1945년 12월 조선교육심의회 제1분과 위원으로 활동하며 홍익인간을 교육 이념으로 제안한 사람이다. 미군정이 민족주의적 색채를 꺼려하자 그는 이를 영어로 인간에 대한 최대한의 봉사(maximum service to humanity)로 번역해 설득했다. 기독교인이 단군의 건국 정신에서 끌어낸 홍익인간을 새 나라의 교육 이념으로 제안한 것이다.
1958년 문교부가 발간한 문교개관은 이렇게 정리했다. 홍익인간은 인류공영(人類共榮)이라는 뜻으로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과 부합하는 이념이며, 기독교의 박애정신, 유교의 인(仁), 불교의 자비심과도 상통되는 전인류의 이상이라고. 기독교가 홍익인간을 비판하기 위해 든 기준, 바로 그 기준과 홍익인간이 상통한다는 것이 공식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대종교의 5대 종지(五大宗旨)는 경봉천신(敬奉天神), 성수영성(誠修靈性), 애합종족(愛合種族), 정구이복(精求利福), 근무산업(勤務産業)이다. 공경으로 하느님을 받고, 정성으로 성품을 닦으며, 사랑으로 인류를 합하고, 고요함으로 행복을 구하며, 부지런히 살림에 힘쓴다는 것이다.
마가복음 12장에서 예수는 모든 계명 중에 가장 큰 두 계명을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이것이 경천애인(敬天愛人)이다.
대종교 5대 종지의 첫 번째 경봉천신(敬奉天神)은 하느님 공경이다. 세 번째 애합종족(愛合種族)은 인류 사랑이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두 계명과 대종교의 핵심 종지가 구조적으로 일치한다. 이 유사성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양자 모두 초월적 일신에 대한 신앙을 전제로 하고, 그 신앙으로부터 인간 사랑의 실천 윤리를 도출한다.
대종교 경전 참전계경(叅佺戒經)에는 악인에 대한 사랑도 기록되어 있다.
밝은이의 사람사랑은 착한 이를 사랑하고 또한 악한이도 사랑하므로 악을 버리고 착함에 나아가도록 권한다. 사람의 성냄을 가라앉혀 남에게 혐의를 맺지 않게 하고 사람의 의혹을 해결하여 남에게 돌아가지 않게 하며 사람의 미혹을 인도해서 스스로 깨우쳐 얻게 한다.
원수 사랑을 가르친 기독교 복음의 정수와 맞닿아 있는 내용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십자가의 용서 기도가 한 방향을 가리키듯, 대종교의 악인 사랑 역시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1909년 대종교가 중광될 때, 봉교함에 지켜야 할 규범 봉교과규(奉敎課規)에는 이런 조항이 있었다.
"봉교인이 견문을 넓히고 슬기를 더하기 위하여 타교에 들어가 참여하여도 금하지 말 것. 또한 타교에 이미 가입한 자가 본교에 들어오고자 하면 곧 허가할 것. 한배검의 너그러우신 큰 뜻을 받들어 다른 종교를 공격하지 아니함."
자기 신도가 타종교 행사에 참석하는 것을 교단 창립 당시부터 규범으로 성문화한 종교가 세상에 얼마나 되는가. 1916년 교주 홍암 나철은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교를 앞두고 밀유(密諭)를 남겼다.
물기시교외인(勿岐視敎外人) 물이론역외인(勿理論域外人) —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을 따로 구별하여 다르게 보지 말라. 외국인이라 하여 따로 떼어 논하거나 차별하지 말라.
열여섯 글자에 담긴 것은 포용이 아니라 경계의 해체다. 같은 해 발표된 중광가(重光歌) 10장 도연원(道淵源)은 더 멀리 나간다.
찾아보라 가닥가닥 한배빛 선가(仙家)에 천선종조(天仙宗祖) 석가(釋迦)의 제석존숭(帝釋尊崇) 유씨(儒氏)의 상제임여(上帝臨汝) 야소(耶蘇)의 야화화(耶和華)와 회회(回回)의 천주신봉(天主信奉) 실상(實狀)은 한 한배님 (현대어 풀이: 찾아보라, 가닥가닥 살펴보면 한배님의 빛이 깃든 선가에, 불교의 석가모니가 공경하는 제석천도, 유교에서 말하는 상제도, 기독교의 야훼도, 이슬람에서 신봉하는 천주도, 그 실상은 모두 하나인 한배님이다.)
불교·유교·기독교·이슬람의 최고신을 호명하며 실상은 모두 한 한배님이라 선언한 것. 이것이 1916년 텍스트다. 종교다원주의가 20세기 후반 서구 신학계의 화두가 되기 반세기 전의 이야기다. 규범, 유훈, 경전. 세 층위 모두에 포용이 새겨져 있다. 기독교 진영이 대종교의 확산을 두려워하며 박해를 우려한 것은, 정작 세상에서 가장 관용적인 종교를 향한 기우였던 셈이다.
기독교 진영은 단군 민족주의보다 기독교가 더 민족적이었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3·1운동, 국채보상운동, 신사참배 거부 등을 근거로 들었다. 단군을 생명처럼 여기면서도 정작 일제 앞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기 위해 목숨을 건 사람이 기독교계만큼이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대종교의 항일운동은 그 규모와 총체성에서 비교 대상이 없다. 1909년 중광 이후 1915년 일제의 포교금지령으로 만주로 종교적 망명을 감행했다. 교주 홍암 나철은 1916년 구월산에서 순교했다.
1918년 무오독립선언, 청산리전쟁의 승리, 조선어학회 사건과 임오교변까지. 10여만 명이 고귀한 희생을 치른 비극의 역사다. 1920년 청산리전투를 이끈 독립군의 중심에 대종교인들이 있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급 이상 인사 중 대종교인이 대다수를 차지했다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대종교 항일운동의 특징은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전 분야에서 일제에 대한 총체적 저항이었다는 점이다. 목표 또한 단순한 조국 광복을 넘어 문화민족국가의 복원이라는 대아적 이상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 역사가 일반의 인식에서 소외된 것은, 기록과 역사화 작업 자체가 일제의 탄압으로 지속적으로 차단됐기 때문이다.
한편 개신교의 신사참배 거부 역시 그 전체상을 다시 봐야 한다. 일제 말기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한 것은 주로 오스트레일리아 선교 관할구역에서였음에도, 개신교 전체가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고 연구자들은 지적한다. 기독교의 항일 역사는 소중하다. 그러나 그 소중함이 대종교의 더 집중적이고 총체적인 항일 투쟁을 지운 채 자기 우월성의 근거로 사용될 때, 역사의 공정성이 무너진다.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 역사에서 대종교를 가장 진지하게 이해하려 했던 이들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한국에 온 서양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은 선교 목적으로 한국 전통 종교를 연구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불교, 유교, 도교, 샤머니즘이 혼재하는 한국 종교 지형의 심층에 수입 종교와 무관한, 순수한 하느님 신앙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한국이 오늘날 소유하고 있는 가장 순수한 종교적 관념은 수입 종교와도 전혀 무관하고 조야한 자연 숭배와도 극히 거리가 먼 존재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다. 이 하나님이라는 말은 하늘이라는 말과 님이라는 말의 합성어이다. 한국인들에게 이 존재에게 돌려지는 속성들과 능력들은 성경의 여호와와 너무 잘 일치하여, 외국 선교사들은 거의 보편적으로 기독교를 가르치는 데 사용하기 위하여 이 말을 수용하였다."
헐버트, 언더우드, 게일 등 초기 선교사들은 단군사화의 삼일신론이 기독교의 삼위일체론과 유비적 관계에 있음을 인정했다. 환인을 창조주로, 환웅을 신(spirit)으로, 단군을 성육신화한 제3위 신인(神人)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25년의 연구 끝에 한국 고유의 신 명칭인 하느님을 기독교의 신 God를 대신하는 성경 용어로 채택했다. 1932년 한국 종교 전반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선교사는 단군교의 신이 성경의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결론을 명시적으로 남겼다.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처음 기독교 복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들의 단군과 그의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였다고 말이다.
초기 선교사들이 발견한 이 접점이 기독교 한국 선교 성공의 중요한 토대였다. 그 접점 위에서 오늘의 기독교가 성장했다. 그런데 정작 그 기독교 단체들이 접점의 원천인 대종교를 우상 종교로 규정했다. 역사의 역설이다.
일제강점기 북간도 화룡현 명동촌. 기독교 교육자 김약연이 1908년 설립한 명동학교 교가에는 이런 구절이 담겨 있었다.
"흰뫼(백두산)가 우뚝 솟아 은택이 호대한 한배검이 깃 차신 이 터에 그 씨앗 크신 뜻 넓히고 가르는 나의 명동."
한배검은 단군을 가리킨다. 교실 벽에는 예수와 단군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기독교 학교에서 단군을 교리에 어긋난다 보지 않았던 것이다. 윤동주, 문익환이 이 학교를 나왔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안창호는 평생 단군상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1945년 12월 조선교육심의회 제1분과위원회에서 홍익인간을 교육 이념으로 처음 주창한 사람은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기독교인이었다. 기독교인이 단군의 건국 정신에서 끌어낸 개념을 새 나라의 교육 이념으로 제안했다. 그 시절의 기독교인들은 알고 있었다. 예수의 가르침이 민족의 언어와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말하는 경계 없는 사랑과 홍익인간이 가리키는 방향이 같다는 것을.
예수의 본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추상적인 구호가 아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가리키는 방향은 구체적이다. 쓰러진 사람 앞에서 그가 유대인인지 사마리아인인지 묻지 말라. 자기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을 향해 멈춰 서라. 자기 종교 바깥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을 이웃으로 인정하라.
그 기준으로 다시 보면, 대종교와 기독교 사이의 갈등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멀어진 곳에서 일어난 일이다. 경전도 읽지 않은 채 우상이라 규정하고, 학계 연구도 확인하지 않은 채 설화라 단정하는 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이 한 것과 구조가 같다. 보이는 것에서 눈을 돌리고 지나쳐버린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한 예수. 그 정신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를 향해 먼저 읽고 알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관용은 선언이 아니라 행동이다.
기독교의 대종교 이해에서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대종교 경전을 읽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군이 신앙 대상인지를 논하면서 대종교의 기본 경전인 신사기나 삼일신고를 확인하지 않았다. 홍익인간을 비판하면서 그 사상적 내용을 기록한 문헌을 살피지 않았다. 학계가 그동안 연구한 것을 전혀 참고하지도, 소화하지도 않았으며, 연구 성과를 원용함에 아전인수격으로 혹은 의도적 취사선택을 통해 공정성을 잃었다는 비판이 기독교 역사학자 내부에서도 나왔다.
읽지 않은 채로 구성된 비판은 비판이 아니라 오해다.
오해는 갈등을 만들고 갈등은 증오를 낳는다.
그 증오의 역사가 지난 30년이다.
대종교와 기독교 사이에는 생각보다 많은 공통점이 있다.
초월적 일신에 대한 신앙, 경천애인의 핵심 계명, 타인에 대한 사랑의 윤리.
두 종교가 맞서 싸웠던 시간만큼, 나란히 서서 공통의 가치를 나눠온 역사도 있다. 일제강점기 기독교 학교의 교실 벽에 예수와 단군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는 기록은 그 가능성의 증거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평생 단군상을 몸에 지니고 다닌 것도, 기독교인이 홍익인간을 나라의 교육 이념으로 제안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갈등은 무지에서 시작됐다. 무지는 읽기로 치유된다.
대종교를 비판하기 전에 대종교 경전을 읽었더라면. 단군사화를 허구로 규정하기 전에 단군 관련 연구를 살폈더라면. 홍익인간을 공허하다 하기 전에 그 이념이 어떻게 제정됐는지 확인했더라면. 지난 30년의 갈등은 상당 부분 달라졌을지 모른다.
이 글을 쓰는 이유가 거기 있다. 갈등의 역사를 반추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해의 가능성을 열자는 것이다. 한국의 다종교 상황에서 공존의 길은 상대의 경전을 읽는 것에서 시작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말하는 것처럼, 먼저 멈춰 서는 것. 먼저 읽는 것. 그것이 지금 이 시대에 두 종교 모두에게 필요한 용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