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현대가치 공존하는 전국 ‘초미니시(市)’
계룡시는 2003년 9월19일 전국에서 가장 작은 규모의 시로 개청했다. 1990년 충청남도 직할의 계룡출장소가 설치된 뒤 주민들의 민원이 잇따르면서 2003년 ‘충청남도 계룡시 도농복합 형태의 시 설치 등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었고 출장소에서 계룡시로 승격했다. 시 승격 이후 3만 6,000여 명(2006년 12월)에 불과하던 인구는 2009년 말 현재 4만 2,000여 명으로 늘었다.
행정구역은 엄사면, 신도안면, 두마면 3개면과 금암동으로 구성돼 있다. 2011년도 예산은 1,191억원 규모다. 도농복합도시라는 특성 때문에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거주환경이 뛰어나다. 육·해·공 3군본부가 위치한 국방중추도시로서 교육, 복지, 국방의 살기 좋은 도시로 ‘도약하는 계룡, 매력 있는 도시’를 지향하고 있다.
대한민국 최고의 군사 요충지
전형적인 농촌지역이었던 이 지역이 대한민국 최고의 군사 요충지로 변한 건 1993년 무렵이다. 1989년부터 1993년까지 완료된 계룡대(육·해·공 3군본부) 이전 사업으로 대규모 군대 시설이 들어서고 전국 각지에서 군인 가족들이 유입됐다. 1989년 육군과 공군본부가 계룡대로 먼저 이전했고 4년 뒤인 1993년 해군본부가 이전을 마쳤다.
신도안면으로 이름이 바뀐 남선면은 ‘관사촌’으로 계룡대에 근무하고 있는 군인 가족들의 보금자리다. 용남중과 용남고는 군 자녀를 위한 학교다.
대전시와 인접한 지리적 요건으로 관광산업도 활발하다. 주요 관광명소로는 계룡산 외에 신도안면의 국궁장, 신도안면 용동리의 괴목정·암용추, 신도안면 부남리의 숫용추가 유명하다. 주민은 원주민 중심의 두마면과 유입민 중심의 신도안면으로 구분되어 분포하기 때문에 이중적 구조를 띤다.
문화재로는 계룡산 신도내 주초석석재(충남유형문화재 66호), 두계 은농재(충남유형문화재 134호), 봉안사 옥석불(충남문화재자료 85호), 신도안면 왕대리 모원재(충남문화재자료 308호), 금암동 염선재(충남문화재자료 316호), 이심원충신정려현판(충남문화재자료 338호), 왕대리 신원재(충남문화재자료 379호) 등이 있다.
지상군 페스티벌 vs 군문화 축제
군 요충지로서 계룡시를 대표하는 군 관련 축제가 2가지가 있다. 바로 ‘지상군 페스티벌’과 ‘세계 군 문화축제’다. 해마다 10월쯤 열리는 지상군 페스티벌은 육군이 주관하는 대규모 군 축제. ‘군 문화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는 주제에서처럼 군의 과거-현재-미래를 한 눈에 볼 수 있고 병영체험 등 다양한 체험행사가 선보인다. 자녀들에게 군 문화를 이해시켜주고 싶다면 이만한 기회가 없다.
축제기간에는 계룡대 지역 관광투어는 물론 군사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계룡산 정상 150m 아래 헬기장까지 등산이 가능하다.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세계 각국의 군악의장대와 국방부, 육·해·공군, 해병대 군악의장대가 합동으로 펼치는 군악의장공연은 이색 볼거리다.
계룡시가 주최하는 ‘세계군문화축제’에서는 개·폐막식 등 공식행사를 비롯해 육·해·공·해병대 군악·의장과 함께 민간 군관련 일반공연이 다채롭게 마련된다. 주요 행사로는 미국, 일본, 몽골 등의 해외군악대 공연, 대한민국 국군 사진전시, 밀리터리 의상·군장체험, 전투식량 체험, 차량형 4D영상관, 풍선아트, GP·GOP경계근무체험, 위장체험 등이 있다. 야간투시경 수색체험, 군번줄 만들기 등의 참여·체험이벤트는 가족단위 관광객들에 안성맞춤이다. 성화봉송, 군 영화상영제, 안보견학 순환열차, 전국서바이벌대회 등의 부대행사 등을 통해 색다른 군문화를 직접 경험할 수 있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계룡산
멀리서 보면 평범한 여느 산과 다를 바 없지만 계룡산을 다녀온 사람들은 “산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고 감탄해 마지않는다. 산봉우리가 줄지어 날카롭게 솟아 있고, 깎아지는 듯한 낭떠러지와 울창하게 들어선 나무들이, 곳곳의 깊디깊은 골짜기와 그 골짜기에서 흐르는 쪽빛 내와 한데 어울린 풍경은 가히 압권이다.
소롯길에 들어서면 온통 나무밖에 보이지 않으나 길이 꺾일 적마다 맑은 내와 만나고 산등성이에 오르면 잇대어 선 봉우리에서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계룡산의 최고봉은 845m로 그다지 높지 않지만 산의 모습이 수려하고 수석이 푸짐하여 이미 삼국시대부터 백제를 대표하는 명산으로 알려졌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전국의 5대 명산중의 하나인 서악(西岳) 또는 중악(中岳)이라고 불렀다. 산의 생김새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 많은 계곡마다 소와 폭포를 안고 있고 산에 있는 수목의 54% 이상이 침엽수여서 늘 푸르른 인상을 준다.
계룡산 등산로는 크게 네가지로 나뉜다, 첫째가 동학사에서 다시 동학사로 돌아오는 코스로 둘째는 동학사→갑사, 셋재는 동학사→신원사, 넷째는 동학사→신도안으로 가는 코스다.
각자의 체력이나 시간에 따라 길게도 짧게도 잡을 수가 있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코스는 동학사를 출발해 오누이탑→신흥암→용문폭포→은선폭포→관음봉→연천봉→갑사로 이어지는 경로다. 굽이를 볼 때마다 계룡산의 색다른 모습을 볼 수 있고, 취향에 따라서는 절벽을 타내리며 갈 수가 있어서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
숫용추 암용추
신도안 부근의 계곡에는 암용추와 숫용추가 있다. 계곡의 물이 흐르다가 고인 10평 남짓의 작은 못(沼)이 암용추이고, 서남쪽의 골짜기를 흐르던 옥같은 맑은 물이 스무자 정도되는 절벽의 폭포 밑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검푸른 물이 괸 곳이 숫용추이다.
숫용추는 암용추에 견주어 물이 더 깊고 아래와 위에 웅덩이가 두 개 있는데 그 생김새가 남자의 성기를 닮았고, 암용추는 그 생김새가 여자의 성기를 닮았다. 이 두 곳이 영험이 있는 푸닥거리 장소로 여겨져 온 것은 성기 숭배 사상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또 용추라는 이름이 드러내 주듯이 이 두 곳에서는 용이 도를 닦아 승천했다고 한다. 이 두 용추는 위에서 떨어져 시원스레 부서지는 물소리와 바위벽과 숲이 어울려 신비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나 푸닥거리가 끊이지 않았던 이 두 웅덩이 양쪽 바위벽에는 이곳에 갖가지 소원을 빌었던 사람들의 이름이 어지럽게 새겨져 있다. 요즈음은 암용추가 있는 계곡 아래쪽에 작산 저수지가 생겼으며 계룡대가 들어선 이후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됐다.
괴목정
계룡시 용동리에 있는 유서깊은 공원으로 옛날에는 사람 많은 곳을 피해온 사람들이 이 근처에 자리 잡고 살았다 한다. 그들은 이곳에 앉아 신선객 이야기를 하다가 나무를 골라서 심곤 하였는데 되는대로 땅에 꽂은 나무는 모두가 괴목이었다고 하며, 나무가 많아서 괴목정이라 부른다고 전한다.
또한 이태조가 신도안을 도읍지로 정하고 주변 형세를 살필 때 무학대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지팡이를 무심코 꽂아 놓은 것이 나무가 되어 지금까지 살아 큰 괴목이 되었다고도 하는데 그 괴목이 정자 같은 구실을 한다 하여 괴목정이라고 부른다고 전한다.
요령소리, 주문소리 끊이지 않던 ‘단골의 고장’
나라에서 이곳에 중악단을 세워 제사를 올린 것처럼 개인들도 전국 곳곳의 명당을 찾아 푸닥거리를 하고 치성을 드렸다. 경관이 신묘한 곳에는 교당과 암자, 수도원과 기도원이 수없이 들어섰다. 계룡산도 마찬가지였다. 1976년 종교 정화운동으로 명승지에 있는 무허가 암자나 기도원 같은 것이 철거되기 전까지 계룡산 골짜기에는 단골(충남에서는 무당을 단골이라 부른다)의 주문소리와 요령소리와 징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요즘도 못 근처나 큰 바위 둘레가 촛농으로 온통 얼룩져 있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신도안은 천재의 재난이 있을 때마다 이 난을 피하려고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정감록’이나 풍수도참설에서 ‘난을 피하기 가장 좋은 10곳’ 중에 한 곳으로 꼽혔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갖가지 신흥종교가 들어섰다. 토속신앙과 무속은 말할 것도 없고 동학사상, 불교와 유교와 기독교를 제 나름대로 섞어 만들었다고 알려진 ‘세계종교 연합법황청’ ‘통일재단’ ‘신령 도덕회’ ‘간디 연구소’ ‘세계 일가공회’ ‘떡보살’ ‘무량천도’ 등 유사 종교단체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한때 200여 곳이 넘던 유사종교 단체들은 1976년 종교정화운동이 펼쳐지면서 강제로 헐리고 신도안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그들은 계룡산의 신령한 기운을 못잊어 신도안 민가로 숨어들어 그대로 버티고 있다. 산골짜기마다 펄럭이던 울긋불긋한 장식이나 깃발도, 돼지머리와 고사떡을 머리에 인 아낙네들의 행렬도 사라진 것 같지만, 이들은 차마 예전처럼 드러내 놓고 벌이지는 못해도 아직도 숨어서 국립공원 관리인의 단속의 눈길을 피해, 계속해서 푸닥거리를 하고 있다.
계룡산의 3대 사찰 ‘동학사 vs 갑사 vs 신원사’
계룡산을 대표하는 사찰로는 동학사, 갑사, 신원사 3곳이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동학사는 비구니들의 불교 전문강원이다. 동학사의 최초창건은 남매탑 전설에 전해지는 상원조사로부터 시작된다. 신라시대에 상원조사가 암자를 짓고 수도하다가 입적한 후, 724년(신라 33대 성덕왕 23) 그곳에 그의 제자 회의화상이 쌍탑을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당시에는 문수보살이 강림한 도량이라 하여 절 이름을 ‘청량사’라 불렀다.
고려때부터 조선시대를 걸쳐 모두 다섯 번의 중창이 있었다. 근대에서는 1950년의 한국전쟁으로 절의 건물이 전부 불타 없어졌다가 1960년 이후 서서히 중건되었다. 현재의 전각으로는 대웅전·삼성각을 비롯하여 조사전·육화원·강설전·화경헌·범종각·염화실·실상선원·숙모전 등이 있다. 산내암자로는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석봉암·천장암·마쇄암·보현암·실상암·옥천암·극락암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관음암·길상암·문수암·미타암·귀명암·상원암 등이 있다.
계룡산 서편 기숡에 자리잡고 있는 갑사는 420년(백제 구이신왕 원년)에 창건됐다. 556년(위덕왕 3년) 혜명대사가 천불전과 진광명전 대광명전을 중건했다.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가 1,000여 칸의 당우를 중수하고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해 화엄도량의 법맥을 이어받은 사찰로 크게 번창하였다. 전국의 화엄 10대 사찰 중 하나로 꼽힌다.
대적전 아래쪽의 쇠로 된 당간과 당간 지주는 보물 256호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이 당간은 충북 청주시의 용두사 터에 있는 것과 함께 쇠로 된 것으로는 국내에 둘 밖에 남지 않은 소중한 것이다. 또 보물 58호인 ‘월인보석’의 관목과 약사 여래 돌입상은 그 만든 솜씨가 우수하다. 백제시대 불상으로 알려진 보살 돌입상은 유람객이 목을 분질러 지금은 갑사에서 보관중에 있다. 그리고 불법을 찬양하고 계룡산의 경치를 묘사한 글이 쓰여 있는 갑사 사적비와 영규대사, 사명대사, 서산대사의 위패를 모신 표충원 같은 여러 유적들이 있다.
동학사, 갑사와 함께 계룡산 3대 사찰을 이루고 있는 신원사는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에 소재한다. 이 절은 백제 의자왕 11년(651)에 보덕화상이란 고승이 창건하고 그 뒤에 여러번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신원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으로 전해지며 원래의 건물지는 신원사와 중악단 남쪽에 전개된 넓은 밭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절의 둘레에는 고왕암, 등운암, 남암, 마명암 같은 암자가 있다. 그리고 절 곁에, 글머리에서 말한 지방문화재인 중악단과 그 앞터에 오층석탑이 있다.
신원사는 이성계가 그가 꾼 꿈을 임금이 될 꿈이라고 풀이해준 ‘팥거리할머리’를 천기가 누설될까봐 죽였는데 임금이 된 뒤에 이 할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었다고 해서 옛 이름이 ‘신혼사’였다는 전설이 있다. 그 할미는 계룡산의 산신이 되어 매바위라고도 불리는 상봉에 살면서 계룡산을 다스린다고도 한다.
특산물과 먹을거리
계룡시의 특산물로는 계룡산 물엿과 전통 장류, 칼라피망, 무공해 쌈채 등이 있다. 신토불이에 근간을 두고 농업경영인들이 직접 만들고 있는 물엿은 학계의 기술자문을 통해 전통 맛을 이어가고 있다. 장류는 순수 100% 국산콩만을 이용해 옛날 비법 그대로 담근 된장을 3년 이상 옹기에 숙성시켜 내는 깊은 맛이 일품이다. 무공해 쌈채 역시 농약을 전혀 사용하지 않으며 그린음악을 이용해 재배하고 있다. 먹을거리로는 ‘청향’의 한방백숙, 한방삼계탕, ‘토담’의 오리훈제, 오갈낙세전골 등이 인기를 모으고 있다. 또 ‘향적산묵집’의 묵무침, 한방오리백숙 등도 많이 찾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