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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방
경덕도를 외울줄 아는 사나이
-길림시조선족예술관 전경업관장을 클릭하다
해주(한영남)
중국조선족들의 구심점인 연변 못지 않게 다양하고 활발한 조선족 민속이벤트를 펼치면서산재지역에 민족의 꽃을 화사하게 피워가는 사람들이 있다. 춤이면 춤, 노래면 노래, 거기에 시랑송까지. 송화강물줄기로 목을 적시고 백두의 정기를 호흡하면서 조선족 전통예술의 전승과 진흥을 위해 오늘도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 그들이 바로길림시조선족들이다.
길림시 거주 조선족은 현재 20만명으로 헤아려진다. 그들은 길림시조선족예술관을 준정부로 삼고 그 두리에 똘똘 뭉쳐 민족의 꽃을 알뜰히키워가고있다. 그리고 그 맨 진두에는 전경업관장이 씩씩하게 걸어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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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전경업관장을 처음 알게 된것은 지난 세기가 막 저물어가던 1997년의 어느 봄이였다. 김혁소설가가 불러서 술을 마시게 되였는데 그 자리에서 아주 늘씬하고 거침없이 시원한 외모와 호방한 웃음소리가 인상적인 한 사나이와 인사를틀게 되였다. 남자들은 술을 마시면 일단 나이를 따져서 호형호제하기 즐긴다. 적어도 나의 경우 나는 나보다 나이가 이상이면 웬만하면 무작정 형이라고 부르는 습관이 있다. 그날도 그렇게 불쑥 형이라고 불러도 되냐 물어보고는 그대로 불러버린것이 오늘에 이르고있다.
그리고 그뒤 우리 셋은 연길, 도문, 훈춘 등 곳들을 다니며 현지의 문인들과 어울려 문학에 대해, 인생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도문에서는 윤청남시인, 남철심시인, 김경희시인 등과 어우러져 모임을 가졌었다.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형은 독서광이였고 풍부한 독서량과 지식량을 자랑하고있었다. 그리고 그무렵에 그는 벌써 컴퓨터에 대한 지식을 상당정도 장악하고있었다. 평론이 위주였던 그는 문학을 대하여, 시와 소설에 대하여 그만의 일가견을 가지고있었다.
도문을 거쳐 우리는 다시 훈춘으로 향했다. 거기에서 이미 작고한 조은철소설가와 한정춘소설가, 류정남소설가, 량춘식소설가와 합류하여 그야말로 코가 비뚤어지도록 술을 마셨다. 술이 제일 약했던 나는 오바이트를 하면서도 마셨고형은 그런 나를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군 했다.
그뒤 나는 연길을 떠나 흑룡강신문사에서 한동안 편집기자노릇을 하였고 어느날인가그것을 때려치고 대련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동안 우리는 거의 만나지 못했지만 메신저와 전화로끝없이 수군거렸고 그것은 사내들만의 이야기였고 문학과 민족문화를 둘러싼 이야기들이였다.
내가 대련에서 어렵게 보낼 때였다. 청도에서 중국조선족연해문인회 발대식을 하니 참가하라는 요청이 날아왔다. 경업형도 거기 참가한다면서 대련을 거쳐 나하고 같이 배를 타고 가기로 약속이 되였다. 그러나 기차역에서 형을 마중하고보니 배편은 날씨탓에 출항이 금지되여 있었다. 잠간 생각하던 형이 나를 잡아끈다.
-가자, 시간 다그치지 않으면 회의에 참가하지 못하겠구나. 우리 심양에 가서 비행기편으로 청도에 가자!
심양으로 가는 기차와 버스를 알아보던 형은 잠간 미간을 찌프린다. 그림자가 되여 그냥 따라다니던 나는 신통치 못함을 느꼈다. 형은 결단을 내렸다.
-비행기로 심양에 가자!
우리는 대련에서 심양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심양에서 그날밤을 자고 이튿날 신새벽에 청도로 가기로 했다.
그날 저녁 나와 형은 단둘이 호텔에서 사나이 가슴을 열어젖히고 맥주를 마셨다. 형의 사유는 나를 많이 앞서 있었다. 나는 내 삶의 아픔을 호소하기도 하고 온갖 비리로넘치는 세상을 비웃기도 했다. 형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마디 툭 던졌다.
-아프더라도 그걸 그대로 글로 쓰면 문학이 아니야!
우리는 새벽에 공항으로 가야 했지만 푸름푸름한 새벽까지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잠간 눈을 붙였는데 형이 나를 깨운다.
-시간이 됐다. 가자!
우리는 심양공항에 도착했다. 아직 시간이 좀 있었다. 자연스럽게 공항서점으로 발길이 돌려졌다. 이 세상 공항은 모든 물건들이 시가의 두세배, 많으면 열배에 달하기도 하지만 책만은 공항이라해도 같은 값에 팔았다. 이리저리 책냄새를 맡다가 나는 문득 영국 아가사 크리스티가 쓴 책을 발견했다. 추리소설로 유명한 그녀가 쓴 극작품. 내가 그 책을 손에 들고 보자 형이 한마디 한다.
-욕심나는 책 골라라. 사줄게!
내 경제여건이 여의치 않다는걸 너무 잘 아는 형은 대련-심양, 심양-청도 항공편 티켓을 전부 사주었을뿐만아니라 책까지 선물해주었다. 그 책은 지금도 내 책장 눈에 띄는 곳에 잘 소장되여있다.
그리고 나는 형의 배려로 도라지선정청년작가작품집을 묶을수 있게 되였다.
물론 행사때마다 그 바쁜 와중에도 짬짬이 나의 살아가는 형편을 물어봐주었고 변변찮은 나의 문학행보에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거의 20년전에 경업형을 형으로 모신게 참 잘한 노릇이였다고 혼자 쿡 웃을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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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알고보니 형은 나한테만 그렇게 대해준게 아니였다. 홍군식시인과의 일화는 더러 글로 지면에 소개된바 있고 정용호소설가, 김옥금시인 등 형은 요란하게가 아니라 시간나는대로, 여건이 허락되는대로 수많은 문인들에게 따스한 심장을내밀었던것이다.
2008년 나는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 초빙으로 오게 되였다. 형 역시 이 출판사에서 얼마쯤 편집생활을 한적이있다고 했다. 아는 사람들은 형에 대해 엄지손가락을 내들었다.
-경업이 남자지무!
그 한마디였다.
같이 사업했던 림승환선생, 리현길선생한테서 형에 대한 전설을 많이 들었다. 술 마시고 실수라도 하면 이튿날 술 사들고 가서잘못했다고 사과한다는 이야기며 아는게 많지만 절대 그런 티를 내지 않는다는 이야기며 동료들한테 어려운 일이라도 있으면 자기일처럼 나선다는 이야기며…
누구보다 호협한 글쟁이인 김동규소설가가 유일하게 승인하는 사나이가 바로 형이다. 술 마시다가 경업형 얘기만 나오면 김동규소설가는 목소리를 높인다.
-그자식 남자야!
그리고는 그 솥뚜껑같은 커다란 손을 휘저으며 마치 보는듯이 그려보인다.
한춘선생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다. 어느날 형한테서 전화가 왔다. 할빈에 병문안차 오니 안내해달라는것이였다.
마침 토요일이라 나는 아침 일찍 한춘선생이 입원해 계시는 병원으로 갔다. 먼저 병실에 올라가 경업형이 온다는 소식을 전하고 전화로 어디까지 왔는가 확인해보았다. 내가 기차역까지 마중을 가겠다는데 기어이 병원정문앞에서 만나자고 한다. 나는 시간맞춰 병원문앞에 나갔다. 멀리서 훤칠한 키꼴의 형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우리는 말없이 악수를 나누고는 병실로 향했다. 화장실에 다녀오며 기진맥진한 한춘선생을 형은 거의업다싶이 침대까지 모셨다. 선생은 무척 반기는 모습이셨다.
죽음과 고통과 아픔만이 감돌던 병실에 형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한춘선생도 표정이 무척 밝아지셨다.
형은 무겁게 메고온 가방을 열어제쳤다. 안에는, 한춘선생의 수필집이 들어있었다. 시간을 다그쳐 급히 만들어낸 수필집이였다. 형은 선생의 맥풀린 손을 꽉 잡아드렸다.
-지금은 의학이 발달해서 암두 별게 아닙니다. 어서 쾌차하셔 저 영남이랑 같이 술이나 한잔 해야지요!
-응, 그래야지.
그리고 우리는 선생이 쉬도록 작별을 고하고 밖에 나왔다. 우리는 부근에서 양꼬치에 맥주를 마셨다. 급히 돌아가야 한다면서 맥주 한병만 한다던것이대여섯병을 마셨다. 정말 개좆같이 쓸데없는 사람이나 암에 걸릴것이지를 연신 되뇌이면서…
몇해전 도라지 문학대상을 수상할 때였다. 새벽같이 일어나 6시 버스를 탔는데 도중에 다른 차가 사고를 내는 바람에 교통이 마비되여버렸다. 버스에 앉은채 대중없이 기다리는데 형한테서 전화가 왔다.
-어디까지 왔니?
-거의 도착하는데 이거 언제 풀릴지 모르겠소.
-이제 반시간만 더 있어보구 안되면 여기서 차를 보내줄게.
그렇게 어렵게 늦은 점심에야 들어갔다. 마중나온 리상학시인과 함께 호텔을 잡고 형한테 인사하러 갔더니 들어가도 모를 정도로 잠들어있었다. 상학형이 말한다.
-너무 지쳐서, 이번 행사준비로 밤샘을 많이 해서, 그나마 올 사람 거의 다 오니 시름 좀 놓은 모양, 그분들한테 점심 대접하며 한잔 했습니다…
거퍼 일년만인가 하얗게 세여버린 머리칼, 때이르게 비껴간 눈가의 주름들, 그리고 입을 벌린채 곤히 자는 모습… 문학이 뭐고 민족사업이 뭐길래 저다지 한몸내던져 혹사한단 말인가.
그러나 오후에 회의가 시작되자 머리를 반듯이 빗어넘기고 환한 미소로 사회를 보는경업형!
나는 경업형을 형으로 모신게 참 잘한 일이였다고 또 한번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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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관사업을 하면서 형은 활발한 문학활동을 거의 접었다. 그러다가 나는 형이 보내준 책을 받아보게 되였다. . 역시 형다운 발상이요 아이디어였다. 거꾸로 읽는 도덕경이라는 말이 너무 욕심나서 나는 이 글의 제목을 “를 외울줄 아는 사나이”라고 번듯이 달아주었다. 도덕경을 가볍게 내식으로 거꾸로 읽은것이다.
각설하고.
로자의 도덕경은 중국철학의 심오함을 그대로 담고있다. 쉬운 말로 썼지만 정작 리해하려면 굉장히 어려운 내용이라고나 할가. 형의 말을 빈다면 도덕경 자체는 우주생성의 원리에서 시작하여 경세치국, 마음의 수련 등으로 이어지는데 이것을 알아보기 쉽게 마지막 부분에서부터 거꾸로 시작해서 비교적 어려운 서두로 거슬러 올라간다는것이다. 그리고 리론적인 창의보다는 현실적인 분석에 많은 비중을 둠으로써 오늘날 경영관리에 도덕경의 철학적원리를 도입, 우리 삶의 모습을 조명하고자 했다는것이다. 도덕경의 위대한 점은 어느 한 령역에 국한되지않고 어떤 각도에서든 리해가능하며 나름대로의 해석 또한 가능하다는것이다. 하기에 어떤 프로그램이든 도덕경이라는 시스템에서 작동가능하다는것을 이 책은 내세우고있다. 우주의 철리, 치국의 리치, 기업의 경영관리 등은 많은 공통분모를 가지고있기에 경영관리의 시각으로 도덕경의 해독이 가능했다고 형은 겸손을 앞세운다.
책은 그렇다치고.
형은 민족문화사업을 하는 그 드바쁜 와중에도 청탁평론을 해오면 차마 거절하지못하고 밤잠을 덜 자면서 다 써주고있다. 그것이 서평이든 기획조명평론이든 가리지 않는다. 발이 넓은데다가 마음이 헌헌한 형은 이래저래 평론글을 많이 쓰게 되였다. 지금도 중국조선족 신문, 잡지에서 가끔씩 그의 평론글들을 보지만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어려운여건에서 그런 글들을 완성했는지 모른다. 그의 말을 빈다면 민족문화를 하면서 문학을 외면할수는없고 다 금싸래기같은 우리 민족의 글쟁이들인데 우리가 들여다보지 않으면 누가 들여다볼것인가 하는것이다.
형의 평론은 그러나 가볍게, 임무완성적으로 쓴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철학이 들어있고 풍부한 문학리론이 들어있으며 형만의 사상이 들어있다. 요즘 조선족평론계에서 활약하는 그야말로 몇 안되는 평론가들가운데 형의 평론은 단연 독보적이다.
문단애숭이들을 보듬어주는 섬세한 손길, 허점들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 은근슬쩍 지적해주는 방향감… 평론가라기보다 촌보난행의 문학길에 짐을 대신 짊어져주고지팽이를 꺾어주는 큰형이나 큰오빠같은 존재가 바로 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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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형이라고 함부로 불렀지만 이 장절에 와서는 관장으로 대우해드려야겠다. 이제 형은 나만의 형이 아니라 조선족문화사업을 위해 한몸을 불사하는 민족간부의 한사람이니 말이다.
민족문화사업은 민족전통을 떠날수 없다. 이것을 너무 잘 아는 전경업관장은 길림시조선족예술관의 중책을 떠메고부터 조선족 민족전통을 되살리는 크고작은 일들을 추호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우선 길림시에 있는 조선족로인협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그들의 진솔한 마음을 읽어냈고 전통문화를 전승하는 일을 착실히 펼쳐나갔다.
주어진 조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상급부문에 가서 비준을 받아야 하고 기층에 내려가 구체적인 조직을 해주어야 했다.
벌써 십수년 그 맥을 이어오던 길림시조선족민속문화축제를 문화브랜드로 세상에 알리기위해 그는 시정부, 시문화국, 시민족사무위원회 등 해당부문들을 발이 닳도록 찾아다니면서 각고정려, 로심초사를 아끼지 않았다. 70여개 대표팀의 3천여명 배우와 선수들이 참가한 축제에서는 조선족상품전시, 길림지구 조선족우수문예프로 시연, 소년아동미술작품전시, 조선족가수경연, 조선족무용경연, 배구경기, 축구경기, 탁구경기, 윷놀이, 그네뛰기 등 민속활동들이 펼쳐져 이벤트를 장식해주었다. 하여 길림시조선족민속문화축제는 중국축제문화 년회에서 가장 민속가치가 있고 가장 전승의의가 있는 민속문화축제로 선정되였고 중국조선족사회에서가장 영향력있는 문화이벤트의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다. 또한 지난 2013년에는 이 프로젝트가 국가문화부에서 발급한 제10회중국예술축제 “군성상”종목 “군문지성” 영예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2014년에는 아라디고추문화관광축제를 펼치고 추석제사프로젝트도 출범시켜 민속문화의 저변확대를 꾀하기도 하였다.
문화는 도시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문화는 농촌에 뿌리박아야 한다. 우리 함께 2014년 한해동안 전경업관장이 예술관 임직원들을 이끌고 농촌의 문화사업을 위해 동분서주한발자취를 수자로 더듬어보기로 하자.
3월 7일 길림시조선족합창단을 조직, “3.8”문예경연 조직;
3월 8일 길림시조선족녀성협회와 더불어 “3.8”문예공연;
4월말 금성촌에 찾아가 농악무 지도(연인수로 90명);
5월 반석, 구전, 영길, 서란 등에서 민속문화축제를 벌릴데 대한 지도사업;
6월 17일 문묘에서 무형문화재 공연활동;
7월 20일 “8.1”건군절을 맞아 부대에 찾아가 공연;
7월부터 9월까지 길림시조선족중학교들에서 “문체절”맞이 관련 지도:
9월 17일부터 20일까지 제4회아라디조선족민속관광문화축제 거행…
주 2차로 진달래무용반을 조직하여 조선족로인들에게 춤을가르치고 주 2차로 아리랑합창단을 지도, 주 2차로 조선족녀성협회의 활동을 지도하였으며 10월 7일부터 30일까지 화극단의 프로를 설계지도(12차)하여 상해아동극 경연에서 우수프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외에도 각종 문화골간양성반을 조직하여 조선족문화 내지 전통문화가 룡담산기슭에서새롭게 꽃피도록 피와 땀이 섞인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쏟은 노력은 아름다운 부메랑이 되여 돌아오는 법이다. 전관장과 그의 임직원들이 민족문화를 위해 이바지한 노력의 대가는 튼실한 결실을 맺었고 해당부문의 충분한 긍정을 받았다.
길림시조선족민속문화제가 국가문화부 군성상 프로젝트상 수상(2013), 길림시조선족군중예술관이 국무원으로부터 소수민족단결진보 선진집체로 표창(2014)받는 아름버는 영예를 떠안았다. 또한 그 개인도 길림성소수민족단결진보 선진개인(2015), 길림성문화사업 선진사업자(2011)라는 영예를 받아안았다.
여백에 적어본다
형은 오늘도 길림시정협 위원, 길림시번역가협회 부주석, 길림성문화협회 회원, 중국소수민족문화예술기금회 리사, 연변작가협회 회원, 흑룡강작가협회 회원, 길림성작가협회 회원, 길림시무형문화재전문가위원회 위원, 길림시농업과학기술학원 객원교수 등 사회직무를 한몸에짊어지고 자신의 몸이 로보트라도 되는양 만부하를 걸고 혹사시키고있다.
이제 무슨 말을 더 하랴.
언제 형을 만나면 기어이 한마디만 해야겠다. 사업은 그렇게 잘하는데 이제 술은 나한테 안될걸 ㅎㅎ 라고.
이 글을 옮겨 오면서.
한영남 시인이 쓰신 전경업관장의 글을 어렵게 찾았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연변의 모 문학상 시상식에서 큰 상을 받았답니다.
경덕도 ? ㅎㅎㅎ 전관장이 몇년전에
거꾸로 읽는 도덕경. 이란 책을 펴 낸 적이 있는데
한영남시인답게 바로 거꾸로 해서 이름을 경덕도로. ㅎㅎㅎ
첫댓글 전각. 서예도 베테랑 수준급인데 언급이 안 되였네요.
외모가 호방한 술꾼이지만 예술에는 그다지로 보였는데...
전관장님과 가뭄에 콩나듯 가졌던 술자리가 그립습니다요.
이거 첨 보는데...반갑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