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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2편은 다윗의 마스길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난하주에는
교훈입니다. 마스길은 곧 지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상태의 간증입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로마서4장에 인용하면서 다윗의 믿음으로 소개합니다.
우리가 범죄 한 것 때문에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신(롬4:25)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믿는 우리의 이야깁니다.
시편 32편은 죄 사함을 받는 방법을 자세히 기록한 교과서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의 공로로 죄 사함을 베푸는 것입니다(마1:21)
1절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허물은 불법입니다. 사함은 묵인 잊어버림(forgiven)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요8:11)고 하심과 같은 뜻입니다.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직역하면 죄의 덮어짐을 받은 자란 뜻으로 사43:25절에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죄를 덮으시고 기억을 상실하신 것과 같습니다.
렘31:34절에는 새 언약을 예언하고 “그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다윗이 ‘복이 있다’고 노래하므로 죄 사함이 그의 복인 겁니다. 우리에게도 그러합니다.
그가 가진 모든 부귀영화보다 죄 사함의 복이 더 크다는 말입니다. 이는 롬8:1-2절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 법의 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신 사람들이
받는 복입니다. 죄 사함은 무거운 짐을 벗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항상 죄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은 이 복을 모릅니다. 생명을 얻은 후에는 죄의 무게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기독교는 죄 사함을 베푸는 진리의 지식이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중요합니다.
2절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간사는 궤계와 모략, 곧 잔재주를 말합니다. 창3장의 뱀의 말에는 궤계가 있었습니다.
교묘하게 어떤 다른 목적을 두고 매끄러운 말을 하는 것을 간사함이라고 말합니다.
권모술수와 같은 것을 말합니다. 강단에 선 일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정죄란 죄로 계산하는 것인데
죄를 죄로 계산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는 겁니다. 엉큼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보통 ‘저 도둑놈’이라고 사람들이 말을 하는데 그 사람은 이미 정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직한 영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죄로 계산하지 않으시는 복이
있습니다. 꿀을 먹으면 달고, 소금을 먹으면 짜듯이 죄를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죄를 갖고 있지 않은 정결한 영이 되어야 복이 있습니다.
3절 “내가 입을 열지 아니 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사람의 배속에 마땅치 않는 것이 들어가면 토하든지 설사를 하던지 해야 합니다.
그 이전에는 신음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죄를 속에 두고 토설치 아니할 때에
곧 침묵할 때에 하루 종일 속에서 끙끙대는 가운데 내 뼈가 쇠하였도다고 고백합니다.
죄를 가지고 있으면 사망이라는 급료가 주어지기 때문에 생각이 어둡고 무거워지므로
뇌가 고장이 나서 골수가 윤택하지 못하므로 뼈가 마르고 그 다음엔 병이 옵니다.
4절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 위에서 기름 짜듯이 콱 누릅니다. 강한 스트레스입니다.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진액은 기름이라고 보면 됩니다. 흡사 물이
흐르다가 바짝 말라버린 강바닥과 같은 상태로 돌아가 버린 겁니다. 따라서 사람이
깻묵처럼 푸석푸석해 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죄의 독의 무서움은 생기가 없어집니다.
피가 마르고 살이 마릅니다. 점점 기가 죽습니다. 이런 현상은 죄의 무서운 독입니다.
그리고 죄의 자리에 머물면 하나님이 끊임없이 수사관들처럼 추적하십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추적을 받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5절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자복 곧 고백입니다. 죄는 뱉어내고 드러내고 불어버려야 합니다. 죄는 욕심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습니다(약1:15) 죄는 본능적으로 숨고 도망가고
변명합니다. 자신 속에 송사와 변명의 법정이 항상 열려 있는 상태가 됩니다.
죄 사함 받고 용서를 얻으려면 드러내고 노출시켜야 합니다. 죄가 있는 개인과 가정,
죄가 있는 국가는 쇠퇴해 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추적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죄를 추적하시는 목적은 죄인을 용서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죄는
박멸하고 죄인은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므로 불쌍히 여기십니다.
자복이란 말은 있는 것을 사실대로 알린다는 뜻입니다. 그랬더니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고백합니다. 이 말은 옮긴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쓰레기통에
집어 넣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시103:12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죄는 본질이고 악은 행위인데 이 죄를 옮겨버리시므로
행위까지도 깨끗해집니다(요일1:9) 성전 문은 동쪽이고 은혜의 보좌는 서쪽인데
동으로 들어가서 서로 갔다가 다시 동으로 나아가면 그 죄가 사라지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복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겨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으로 수용해 버리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 해결자이십니다.
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다윗은 노래하고 있습니다(1-2절)
그래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고 합니다. 홍수는 물난리,
범람은 넘쳐나는 것입니다. 미치지 못한다 하는 말은 가까이 오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철저하게 붙드십니다. 그 분의 품으로 안으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하기 때문에(for) 6절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고 권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진리 안에서 교제가 되는 자,
곧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접속이 되는 자라는 뜻입니다.
‘주를 만날 기회’(5절의 상황) 난하주를 보면 ‘죄를 발견한 때’ 죄를 깨달을 때입니다.
딱 하고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간첩신고는 제 때 해야 하는 겁니다.
간첩들이 온 나라를 활개치고 돌아다니도록 하면 매우 곤란합니다. 기도가
안 나오면 억지로 하지 말고, 말씀에 자신을 비춰보고 묵상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도 또한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충만하면 기도보다 찬양이 더 좋습니다.
7절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셀라)” 주님이 도피처입니다.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십니다. 구원의 노래는 바로 찬송입니다. 찬송을 할 수 있는 상태로
나를 둘러 주신다는 뜻입니다. 찬송 속에서 둑을 쌓듯 방어벽을 쌓으십니다.
그러므로 환난에는 오직 기도와 찬송밖에 없습니다. 빌립보 감옥의 바울과 실라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과 접촉이 잘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진리를 따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그 죄와 의의 구렁 사이에 대한 감을 압니다. 금방 느낍니다.
찬송의 능력은 대하20장에 여호사밧 왕이 모압과 암몬의 침략을 받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받고는 찬양대를 군대 앞에 보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하나님의 자비의 영원하심을 감사합니다. 여호와의 복병이 나타나서
침략한 대적들이 저희들끼리 싸우다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8절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이는 길을 보이시고는 깨닫게 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항상 원칙적이고
보편적인 원리를 설명합니다. 예를 들면 ‘음식을 잘 먹으면 건강해 진다’는 식입니다.
그 음식의 맛과 열량 같은 것은 본인이 직접 알아 가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객관적인 지식이 개인의 주관적인 지식이 되어 체험하게 된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가르치기만 하고 깨닫도록 하지 못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영,
곧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이 말씀을 증거하면 계시의 영이 역사를 합니다. 말씀과
성령이 같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말씀 곧 진리를 배워도 깨닫지 못하면 죄인입니다.
하나님이 받아 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기도가 되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과 연결만 되어 있으면 됩니다. 이 점을 항상 점검해 봐야 합니다.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하나님께서 내 눈이 너를 지키고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9절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깨닫지 못하는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무슨 일이든지 깨달음을
통해 일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말이나 노새는 끌지 않으면 가까이 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습관적으로 받지 말아야 합니다. 정신을 차려야합니다.
내게 복을 주고 싶은 하나님께 간절하게 받고 싶은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마7:12)
전5:1절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고 하시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따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함을 말씀합니다.
10절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악인에게는 슬픔 곧 고민이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깨달음이 없는 자들입니다. 3-4절의 상태인데 진짜 골 때리는 상황입니다.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여호와 안에서, 곧 성령 안에서
주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주의 인자하심 곧 은혜가 둘러싸게 됩니다. 성도들이 진리를
따라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스스로 느낌이 옵니다(히11:6) 상을 주십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자석에 이끌리는 것과 같습니다.
요18:6절 주님께서 ‘내가 그니라’하시니 다 넘어집니다. 내뿜는 기운입니다.
이와 같이 천국은 생명의 기운을 내 뿜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11절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정직한 이라는 뜻은 곧은, 단단한 이라는 뜻입니다.
의인일수록 인간적으로는 단순하고 멍청해 보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처럼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합니다. 그저께에 어떤 분에 대한 평가를
하면서 그 분은 정직한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죄 사함을 받은 의인에게는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이 하나님의 선물이며(시51:10) 복을 받는 조건이 되는 겁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