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동국대학교의 불교대학의 불교학과를 그리고 서울대학교의 대학원 철학과 석사과정을 졸업하였다. 필자가 군승장교로 복무한 후 무엇을 해야할지 방황을 할 때, 은사 스님은 필자에게 세계 여행을 통해서 견문을 넓히고 스님으로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넓은 안목에서 결정을 할 필요가 있다고 충고하였다. 필자는 인도와 중국을 수개월에 걸쳐서 중점적으로 여행을 하였고, 동남아의 불교 국가도 상당 기간동안 돌아보았다.
이러한 여행을 통해서, 필자는 한국의 불교를 세계의 불교의 한 가운데 위치매김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필자는 세계의 중심지인 미국에서 세계의 공통어인 영어로 공부할 필요를 느꼈다. 그러한 연유로, 필자는 미국의 하와이 대학에서 영어를 공부하였다. 필자가 일년여동안 하와이 주립대학에서 미국의 문화와 영어를 배울 수 있도록 여러 모로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전 대원사 주지 대원 스님에게 감사를 드린다.
필자는 미국 불교학의 요람인 위스콘신 주립대학에서 불교학을 체계적으로 배우기 위해서 하와이 주의 호놀룰루에서 위스콘신 주의 매디슨으로 옮기게 되었다. 필자는 수년동안 매디슨의 소요암에서 화공 스님의 지도를 받고 살게 되었다. 필자는 위스콘신 주립대학의 매디슨 캠퍼스의 맨도타 호수를 바라보며 미국인 불교학도들과 더불어 불교의 미래에 대해서 토론을 하였던 추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필자를 지도하였던 미노루 기요타 교수, 구드런 뷔너만 교수, 찰스 헬러시 교수, 존 던 교수, 모튼 쉴레더 교수, 고타마 바즈라차리야 교수, 조 커터 교수, 등의 학문적 은혜를 결코 잊을 수 없다.
필자는 박사학위 논문의 준비를 위해서 일본의 도쿄 대학의 인도철학과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1년간 연구활동을 하였다. 필자의 은사인 정우 스님의 소개로, 필자는 구룡사의 일본의 자매 사찰인 후꾸오까의 쇼교지의 주지 다께하라 지묘 스님을 통해서 자신의 재가 제자인 도쿄 대학의 시모다 마사히로 교수를 소개받았다. 시모다 마사히로 교수는 필자가 도쿄 대학에 있는 동안 매우 친절하게 돌보아주었다. 필자가 1년동안 일본의 도쿄 대학에서 연구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누마타 재단에도 감사를 드리고 싶다. 이 때, 일본의 소까 대학의 관노 히로시 교수와 고마자와 대학의 요시즈 요시히데 교수가 필자의 박사학위논문을 완성하는 데 도움을 많이 주었다.
필자는 일본의 체재 기간동안 박사학위를 마무리할 수 있도록 될 수 있는 데로 많이 일본의 일차 자료와 이차 자료를 수집하였다. 그 자료를 가지고 일본의 도쿄에서 미국의 위스콘신 주의 매디슨으로 돌아온 후, 필자는 세계 최고의 수준의 불교학 장서를 자랑하는 위스콘신 주립대학의 인문학 도서관의 불교학 자료를 이용하여 박사학위를 완성하였다. 필자가 박사학위논문을 완성할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을 하여준 대만의 중국시보의 문화재단에도 감사를 드리고 싶다.
위스콘신 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필자는 은사인 정우 스님의 소개로 인도 남부에 있는 겔룩파의 데붕 사원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1년간 티베트 불교를 연구하였다. 겔룩파는 티베트 4대 종파 가운데 최대의 종파이다. 데붕 사원에서는 5000명 이상의 티베트 스님이 수행하고 있으며 우리 구룡사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는 링 린포체가 주석하고 계신다.
링 린포체는 올해 한국의 나이로 20세가 되기 때문에, 티베트 로싸르 (구정) 이후 달람살라에서 달라이 라마 법왕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았다. 달라이 라마 법왕은 지금부터 50년 전에 전생의 링 린포체로부터 비구계를 수계하였다. 링 린포체는 달라이 라마 법왕의 비구계 수지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수무강 의식을 집전하였다. 필자의 은사인 정우 스님이 구룡사와 여래사의 방문단을 이끌고 이 법회에 참석하였다. 이 때, 우리 방문단은 특석에 앉아서 그 의식을 참관하였고, 법회 이후에는 달라이 라마 법왕을 궁전에서 개별적으로 친견할 수 있는 인연을 가졌다.
필자는 이 때 은사 스님을 모시고 며칠간 인도를 순례를 할 수 있었다. 은사 스님은 우리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와 인도 불교의 발자취가 살아있는 히말라야 산맥과 티베트 지역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경제적으로 좀 더 윤택한 한국불교가 이 지역의 불교의 보존과 발전을 위해서 지원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불교와 힌두교의 접경 지대인 히말라야 산맥의 마날리에 한국불교의 사원을 건설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오랜 기간 동안 우리 구룡사에서 수행을 하였던 인도 마날리 출신의 쉐둡 스님이 담당하고 있다.
필자는 그 후 인도를 떠나 이곳 한국으로 돌아왔다. 은사 스님은 필자가 미국으로 돌아가 LA의 씨라이 대학에서 가르치기 전에 그 대학의 창립자인 대만의 성운 스님의 이념과 그 분이 창건한 불광산사와 그 관련 시설을 탐방할 것을 제안하였다. 은사 스님은 대만 불광산사의 성운 스님과 15년 이상의 선린 우호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 구룡사의 본사인 통도사와 대만 불광산사는 자매결연 사찰이다.
성원스님과 성운대사
이러한 인연으로, 필자는 지난 3월 16일부터 23일까지 8일동안 대만 불광산사와 그 유관기관을 돌아볼 기회를 가졌다. 필자의 구체적인 방문 일정은 서울 불광산사 주지로 필자의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의 동기 동창생인 의은 스님이 대만 불광산사의 불광산국제불교촉진회 사무총장인 각문 스님과 협조하여 만들어 주였다. 두 분은 필자가 1주일 여동안 불광산사와 그 유관기관을 탐방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여러 측면에서 배려하여 주었다.
필자는 지난 3월 16일 오후에 불광산사가 위치하고 있는 대만 남부의 까오슝 시의 국제 공항에 도착하였다. 한 명의 불광산사 직원이 공항으로 필자를 마중 나와 불광산사로 데리고 갔다. 불광산사에서는 불광산 국제불교촉진회 사무총장인 각문 스님이 필자가 머무를 곳인 조산회관으로 필자를 안내해주었다. 각문 스님은 국제불교촉진회의 소속으로 현재 불광산사에서 중국어를 공부하고 있는 몽고인 재가 불자인 쟈야와 한국인 재가 불자인 한순진을 필자의 안내인으로 배정하여 주었다. 자야는 인도의 바라나시의 중앙 티베트학 대학에서 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영어와 티베트어가 유창하였다. 필자는 그녀와 티베트어로 대화를 하였다. 사무총장인 각문 스님은 싱가포르인이고, 촉진회의 구성원은 대다수가 외국인 스님과 재자 불자라고 한다. 필자는 자야와 한순진과 더불어 간단히 불광산사를 돌아보았고, 저녁 공양은 7시에 조산회관의 식당에 먹었다.
필자는 3월 17일에는 불광산사의 대웅보전의 아침 예불의 참석을 시작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다. 아침 예불은 오전 6시에 시작하였고, 제 1부와 제 2부로 구성되어 있었고, 약 3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제 1부는 화엄경 정행품의 독송이었고, 제 2부는 예불문의 봉행이었다. 불광산사 주지 심정 스님이 아침 예불을 주관하였다. 왼쪽 한편은 비구 스님들이, 오른쪽 한편은 비구니 스님들이 착석하고, 그 양쪽의 뒤편으로 재가 불자들이 착석하였다. 특이한 모습은 보살계를 수지한 불자들이 보살비구로 불리우며 불광산사의 법복을 입고 아침 예불에 참석한 것이었다.
그 후, 대웅보전의 아침 예불 참석자들은 줄을 맞추어서 식당으로 이동하였다. 불광산사의 각각의 단위 조직원들이 식당의 밖에서 줄지어 서 있었다. 각각의 단위 조직은 각각의 소규모의 법당에서 아침 예불을 모시고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거의 모든 조직원들이 모여들었을 때, 그들은 줄지어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 식당에는 수천 명이 동시에 공양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대규모의 식당이었다. 이곳에서도 왼쪽 한편은 비구 스님이, 그리고 오른쪽 한편은 비구니 스님이, 그 뒤로는 재가 불자들이 착석하였다. 아침 공양은 승속을 포함하여 천여명이 참석하였고, 그들은 여법하게 의식을 통해서 공양을 들었다. 공양을 마친 후, 주지 심정 스님은 간단하게 법문을 하셨다.
아침 공양 참석자들은 각 단위 조직별로 줄을 맞추어서 각자의 일터로 돌아갔다. 필자는 숙소인 조산회관으로 돌아왔다. 각문 스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각문 스님은 필자가 오전 9시부터 10시까지 약 1시간에 걸쳐서 성운 스님을 친견할 수 있도록 일정이 잡혀있다고 말하였다. 필자는 필자의 은사인 정우 스님이 성운 스님에게 보낸 선물과 필자의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하여 각문 스님과 함께 성운 스님을 친견하였다. 성운 스님에게 박사학위논문을 증정할 때의 사진과 함께, 필자가 성운 스님을 친견한 기사가 3월 18일에 일간신문인 인간복보의 종교 면에 상당히 많은 분량으로 다루어졌다.
성운 스님을 친견할 때, 성운 스님은 몇 명의 스텝진을 수행하고 오셨다. 필자는 중국어로 의사 소통을 간단히 할 수 있고 거의 별문제가 없이 중국어 책을 읽을 수 있다. 필자의 중국어 회화가 유창하지 않기 때문에, 필자는 각문 스님의 영어 통역으로 성운 스님을 친견하였다. 불교적 전문 용어가 나올 경우에는 미국 예일 대학에서 불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던 대만인 의법 스님이 필자의 영어 통역을 담당하여 주었다.
성운 스님은 필자의 은사인 정우 스님의 안부를 묻고 우리 구룡사의 활발한 사회 활동을 칭찬함으로써 말씀을 시작하였다. 필자가 은사 스님의 추천으로 이곳 불광산사를 찾아 왔고 불광산사와 그 유관기관의 훌륭한 시스템을 배우고 싶다고 성운 스님에게 말씀을 드렸다. 대만 불광산사의 유관 기관인 미국 LA의 씨라이 대학에서 가르칠 때, 필자는 이 불광산사와 그 유관 기관의 방문 경험이 많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성운 스님에게 말씀을 드렸다. 나아가, 필자는 성운 스님의 그러한 훌륭한 경험이 우리 구룡사의 시스템을 발전시키는 데 밑거름이 될 수 있도록 은사 스님에게도 보고를 드리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3월 17일 오전과 오후에는 한순진과 자야의 안내로 불광산사의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성운 스님이 1967년 5월 16일에 대만 북서부의 의란 현에서 대만 남부의 고웅 현으로 옮겨오면서 대만 불광산사는 시작되었다. 불광산사가 위치한 곳은 원래 황량한 대나무 밭이었고, 현재는 대만에서 최대의 불교사원이 되었다. 불광산사는 인간 불교의 모토아래 사회적 활동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다. 불광산사의 종지로는 첫째는 문화사업을 통한 불교의 전파이고, 둘째는 교육사업을 통한 인재의 양성이고, 셋째는 자선사업을 통한 사회복지활동이고, 넷째는 법회활동을 통한 마음의 정화이다.
불광산사의 주요 시설물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필자가 머무른 조산회관은 중국식과 인도식이 혼합된 건축양식으로 참배 신도들과 외빈들이 머무를 수 있는 시설이다. 둘째, 정토동굴은 아미타경에 기술된 극락세계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곳이다. 셋째, 불교문물진열관은 수천여의 불교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넷째, 대불성은 36 미터의 아미타불 입상과 그 주위에 480존의 소형의 부처님을 모셔놓는 곳이다. 다섯째, 대웅보존은 1000여명이 동시에 예불을 올릴 수 있는 곳이다. 여섯째, 대비전은 백의관음을 모셔놓은 곳이다. 일곱째, 만수원 납골당에는 7층으로 이루어져있고 그곳에는 5만여의 납골함을 안장하고 있다. 여덟 번째, 여래전에는 문물전시관, 종합사무실, 선방,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이 있다. 아홉 번째, 여래전의 좌우에는 금불루와 옥불루가 있다. 이곳에는 사경당과 선원이 있다. 열 번째, 화원에는 세계 곳곳의 화초를 심어놓은 곳이다.
저녁 공양은 불광산사의 유료 식당에서 국제불교촉진회의 각문 스님의 주관으로 의법 스님과 각계 스님과 함께 하였다. 의법 스님은 미국의 예일 대학에서 율장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던 비구니 스님이다. 이 스님은 성운 스님의 국제관련의 문제의 참모로 성운 스님을 대표하여 국제회의에 많이 참여하고 있다. 현재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샌디에고의 불광산사 분원에서 살고 있다. 각계 스님은 서울 불광산사에 약 4년간 머물고 있고, 본사인 대만 불광산사에 볼 일이 있어 잠깐 방문하고 있었다. 이 세 분의 비구니 스님과 저녁 공양을 하면서, 필자는 대만 불광산사에 대해서 귀중한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필자는 저녁 7시부터 9시 30분까지 2시간 30분에 걸쳐서 불광산총림학원의 비구 스님들과 더불어 좌담회를 가졌다. 필자는 1시간 30분동안 필자의 학문적 경험에 대해서 기조발표를 하였고, 1시간동안은 학인 스님들과 더불어 질의 응답 시간을 가졌다. 이 좌담회는 대만 불광산사의 여성 영어 통역관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 좌담회에 참석한 학인 스님들 가운데 몇 명은 외국인이었고, 그 외국인 스님과 중국인 학인 스님들은 필자의 영어를 매우 잘 이해한 것 같았다.
필자는 3월 18일에도 여전히 아침 6시의 예불로 하루를 대만 불광산사에서 시작하였다. 아침 공양 후 오전 10시, 필자는 가의시의 남화학관으로 출발하였다. 이때에는 국제불교촉진회에서 중국인 승휘 스님을 운전자로, 유럽의 오스트리아인 혜수 스님을 필자의 영어 통역관으로, 몽고인 자야와 한국인 한순진이 필자와 함께 남화학관으로 갔다. 혜수 스님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약 10년 동안 살았고, 그 때 대만 불광산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분원에서 수년간 신행생활을 하였고, 그곳에서 중국어를 2년간 배웠고, 대만 불광산사의 본사에서는 4년여동안 살았다고 한다. 현재는 불광산사의 선원에서 수행정진하고 있다. 불광산사의 선원의 대중 스님의 반 이상이 외국인 스님이라고 한다.
남화학관의 주지는 각배 스님이었다. 이 스님은 비구니 스님이고, 아르헨티나 대학을 졸업하였고, 현재 불광산사의 대만 전국적 조직인 인간불교독서회를 이끌고 있었다. 그 스님은 영어, 스페인어 그리고 포르투칼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남화학관은 지하 2층 지상 8층의 빌딩으로 법당, 선방, 국제회의실, 몇 개의 소회의실, 레스토랑, 수십 개의 강의실, 무용실, 전시실, 서점, 강당, 등등을 갖추고 있었다. 밤에는 600명 이상이 이곳 남화학관으로 모여들어 다양한 문화활동을 한다고 한다.
참고로 남화학관의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 주제는 네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아동관련 활동이고, 둘째는 교육관련 활동이고, 셋째는 예능관련 활동이고, 넷째는 생활관련 활동이다. 첫째는 아동관련의 강의와 활동으로 아동 불교, 아동 율동, 아동 작문, 아동 서예, 아동 미술, 아동 독경, 아동 태극권, 아동 교육, 아동 고전무용, 아동 일요학교, 등등이다. 둘째는 교육관련 강의와 활동으로 선 수행반, 도시 불학원, 고전 문학반, 현대 문학반, 경전반, 불학반, 등등이다. 셋째는 예능관련 강의와 활동으로, 돈황 무도반, 중국 고전 악기반, 중국 고전 회화반, 서예반, 다도반, 등등이다. 넷째는 생활관련 활동으로 다양한 종류의 독서회, 요가반, 태극권반, 의학 관련 강의, 꽃꽂이 반, 등등이다.
점심 공양은 남화학관의 유료 식당에서 하였고, 오후 3시에는 가의현의 남화대학으로 갔다. 남화대학은 시내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있었고, 주위에는 상당히 큰 규모의 중정대학이 있었다. 이 남화대학은 1999년도에 종합대학이 되었고 학생수가 4500명 정도의 종합대학이었다. 대만 불광산사가 이 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이 대학은 3개의 단과 대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문과학대학, 사회과학대학, 그리고 경영대학이다. 남화대학은 최근에 토지를 상당히 많이 매입하였고, 계속해서 학교를 확장하고 있었다.
필자는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남화대학 종교학 연구소의 주관으로 좌담회를 가졌다. 필자의 좌담회에는 남화대학의 종교학 연구소의 교수님들이 참석하였다. 남화대학의 불교학 전공 교수들은 다음과 같다. 종교학 연구소장은 채원림 교수로 이슬람교의 전공자로 미국 템플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우혜정 교수는 천태종을, 여개문 교수는 초기불교를, 안영춘 교수는 불교와 서양철학의 비교를, 영유 스님은 영국 런던대학 SOAS에서 돈황본 금강경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여념 스님은 여래장 사상으로 미국 위스콘신 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혜개 스님은 템플 대학에서 천태의 마하지관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의공 스님은 선 전공자로 일본 동경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저녁 공양은 저녁 6시에 남화학사에서 하였고, 필자는 저녁 공양 후 저녁 10시까지 남화대학의 도서관에서 혜수 스님과 더불어 불광산사 관련 비디오를 관람하였다. 그 비디오에는 중국어 자막이 있었기 때문에, 필자가 그 비디오를 보는 데에는 별무리가 없었지만, 혜수 스님은 비디오를 보는 동안 중간 중간에 매우 유익한 논평을 하여주었다.
필자의 하루는 3월 19일에도 남화학사의 법당의 아침 6시의 예불로 시작되었다. 아침 예불 후, 남화학사에서 아침 공양을 하였고, 그 후에는 몇 시간에 걸쳐서 남화대학의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남화대학 총장실의 대외 담당 비서가 유창한 영어로 우리 일행을 안내하여 주었다.
남화학사에서 점심 공양을 마친 후, 우리 일행 가운데 유일한 중국인인 승휘 스님이 3월 20일에 있는 대만 대통령 선거의 투표를 위해서 고웅현의 불광산사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우리 일행은 그와 함께 불광산사로 돌아갔다. 우리 일행은 국제불교촉진회의 각문 스님의 안내로 각계 스님과 더불어 불광산사 유료 식당에서 저녁 공양을 하였다. 각계 스님은 투표를 마치고 한국의 서울 불광산사로 곧 돌아간다고 하였다.
필자는 3월 20일에도 불광산사의 대웅보전에서 아침 6시에 아침 예불을 모시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아침 예불과 공양은 주지 심정 스님의 주관으로 이루어졌다. 필자는 오전 9시부터 10시까지 한 시간에 걸쳐서 주지 심정 스님을 친견하였다. 심정 스님과의 친견은 영어로 이루어졌다. 심정 스님은 자신의 의사를 거의 대부분 영어로 표현할 정도로 영어가 유창하였다. 국제불교촉진회의 각문 스님이 때때로 심정 스님을 위해서 영어로 통역을 담당하였다. 심정 스님은 필자에게 필자의 은사인 정우 스님에게 금강경함을 전달해달라고 선물로 주셨다. 심정 스님은 필자의 은사 스님의 안부와 근황을 물으시고 한번 기회가 허락하면 대만 불광산사에 다녀가시라고 초청하였다.
승휘 스님은 대통령 선거의 투표를 마치고 불광산사로 돌아오셨고, 우리 일행은 오전 10시에 대만 북부의 대북현의 금광명사로 향해서 떠났다. 도중의 대만 중부의 창화현의 원림강당에서 점심 공양을 하였다. 원림강당에는 대만 불광산사의 비구 총림학원의 원장인 혜관 스님이 안내를 하여주셨다. 고향이 창화현이기 때문에, 혜관 스님은 대통령 선거의 투표를 위해서 불광산사의 본사에서 이곳 창화현에 잠시 들렸다고 한다. 혜관 스님은 일본 교토의 불교대학에서 수학을 하였기 때문에, 필자는 혜관 스님과 일본어로 대화를 하였다. 원림 강당은 남화학관과 마찬가지로 대규모의 빌딩이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원림 강당의 내부시설과 활동상황은 남화학관과 대동소이하였다.
대만 북부의 대북현의 금광명사는 대만 남부의 고웅현의 불광산사, 대만 중부의 창화현의 복산사와 더불어 불광산사 유관 사찰 가운데 핵심적인 사원이었다. 금광명사는 대만 북부의 수 많은 분원을 총괄하는 사원으로 규모면에서 대단히 크다. 금광명사는 대북국제공항에서 약 20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도착할 때, 우리를 안내한 스님은 말레이시아 출신의 비구니 스님이었다. 우리가 대웅보전을 참배할 때, 불란서의 불광산사 파리분원의 멤버들이 참배를 하고 있었다. 그 이후에는 미국 LA의 서래사의 멤버들이 금광명사를 참배하기 위해서 방문했다. 이 금광명사에는 대만 불광산사의 국제불광회의 총본부가 있다.
우리 일행은 3월 21일 아침 예불과 공양을 금광명사에서 한 후, 우리 일행은 의란현의 난양별원으로 갔다. 의란현의 난양별원은 원래의 이름이 뇌음사이다. 중국 본토에서 1949년에 대만으로 오신 후, 성운 스님이 1952년부터 대만 남부의 고웅현으로 옮겨 1967년에 불광산사를 창건하기 전까지 15년 동안 포교활동을 시작한 곳이 다름 아닌 이곳 난양별원이다. 몇 번의 중창불사를 통해서, 난양별원은 현재 10여 층의 거대한 빌딩의 건물이 되었다. 이곳에는 성운 스님의 혼이 깃든 곳으로 곳곳에 성운 스님의 숨결을 맛볼 수 있다. 이곳은 성운 스님의 불광산사의 정신적 고향이다. 이곳에도, 박물관, 미술관, 레스토랑, 도서관, 서점, 대형국제회의실, 소형회의실, 수많은 강의실, 대형 법당, 몇 개의 소형 법당, 무용실, 서예실, 선방이 있었다.
점심 공양은 난양별원의 유료 식당에서 하였고, 오후에는 난양별원의 배려로 의란현의 관광지를 참관하였다. 의란현의 화훼원을 방문하였고, 세계 방방곡곡의 화훼가 있었다. 전체를 돌아보는 데, 시간이 상당히 소요되었고, 저녁 공양은 의란현의 하나의 불광산사 별원의 유료 식당에서 공양을 하였다. 저녁에는 우리 일행은 의란현의 난양 평원의 야경을 즐겼다.
우리 일행은 3월 22일 아침 예불과 공양을 난양별원에서 하고, 오전 8시 30분에 의란현의 불광대학으로 출발하였다. 난양별원에서 불광대학은 약 30분 걸렸고, 우리 일행은 불광학사와 불광대학을 참관하였다. 불광학사는 각기 스님이 책임을 맡고 있었고, 우리 일행을 안내하여 주었다. 그 후, 불광대학의 방송통신연구소 소장인 왕석번 교수와 총장 비서실의 국제교류 담당자인 진희여 선생이 우리 일행을 안내하여 주었다. 왕석번 교수는 미네소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 일행을 영어로 불광대학을 상세히 안내하여 주었다. 불광대학은 몇 년 전인 2000년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학생 수는 현재 1000여명에 불과하지만 현재 계속 확장 중이었다. 불광대학은 인문과학대학, 사회과학대학 그리고 정보통신대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필자는 불광대학의 종교연구소 (소장 진옥석 교수)의 교수들과 더불어 불광학사의 식당에서 점심 공양을 겸하여 불교를 주제로 좌담회를 가졌다. 소장인 진옥석 교수는 미국 하와이 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전공은 종교심리학이다. 참고로, 불광대학의 불교관련 교수로는 동아시아 불교 전문의 람길부 교수와 인도 티베트 불교의 유국위 교수가 있다. 현재는 중국 북경의 중국장학연구소의 진경영 교수가 객원 교수로 있다. 유국위 교수는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필자는 유국위 교수와는 영어로 대화를 하였다. 진경영 교수는 티베트의 암도 지역인 청해에서 오랜 기간 동안 살았기 때문에, 필자는 진경영 교수와는 티베트어로 대화를 하였다.
우리 일행은 점심 공양을 마친 후, 오후 1시에 대만 수도인 대북시의 불광산사 분원인 보문사로 향하였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오후 4시부터 약 2시간에 걸쳐서 불광산사 분원인 기륭시의 극락사를 참배하였다. 극락사의 주지로 비구니인 만익 스님이 우리 일행을 맞이하고 사원의 구석구석을 안내하여 주었다. 이곳은 원래 일본 식민지 시절 일본의 사찰이었다고 한다. 대만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후, 일본인 주지 스님이 일본이 돌아가면서 한 대만인 스님에게 이 절을 주었다고 한다. 그 후, 그 대만인 스님이 이 절을 불광산사에 헌납하였다고 한다. 극락사는 다용도 건물로 지어져 있고, 사찰의 주위에 항구가 있기 때문에, 외국인 참배객이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오후 7시 반에 불광산사의 대북시 분원인 보문사의 유료 식당에서 저녁 공양을 하였다. 보문사는 빌딩 안에 위치하고 있고, 빌딩의 몇 개 층을 쓰고 있다. 빡빡한 하루 일정을 소화하느라 피곤하였기 때문에, 저녁에는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였다.
필자는 3월 23일에도 보문사의 오전 6시의 아침 예불과 7시의 공양으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였다. 우리 일행은 오전 9시에는 보문사에서 그렇게 멀지 않는 곳에 있는 불광산사의 대북도량으로 갔다. 대북도량은 거대한 빌딩 건물의 몇 개의 층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대법당, 몇 개의 사무실, 수 십개의 강의실, 대회의실, 몇 개의 소회의실, 무용실, 박물관, 서예실, 미술관, 등등이 있었다. 게다가, 이곳에는 위성 불교 TV 방송국, 일간인 인간복보의 신문사, 여시아문 레코드사, 등이 있었다. 위성 불교 TV 방송국을 통해서, 대만의 불광산사는 불음을 세계 방방곡곡에 전파하고 있었다. 일간인 인간복보는 매일 20만부씩 발행하고 있고, 다른 일간 신문들과 차별화를 하기 위해서 문화면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한다. 여시아문 레코드사는 불교를 음악을 통해서 포교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최근까지 이곳에는 국제불광회의 총본부가 있었지만, 최근에는 대북현의 금광명사로 총본부가 옮겨갔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몇 시간에 걸쳐서 대북도량을 견학한 후, 오후 2시에 보문사로 돌아왔다. 그 이후 우리 일행은 보문사에서 오후 3시 30분에 짐을 챙겨서 대북국제공항으로 갔고, 고웅현 불광산사에서부터 필자와 동행한 필자의 영어 통역관 오스트리아인 혜수 스님, 며칠동안 운전을 담당하여 주신 대만인 승휘 스님, 티베트어와 영어로 필자의 말상대가 되 준 몽고인 재가 불자인 자야, 한국인으로 고웅현의 불광산사에 중국어를 공부하고 있는 한순진, 등의 일행은 필자를 공항까지 배웅하고, 그들은 곧바로 고웅현의 불광산사로 돌아갔다.
필자는 몇 일간의 불광산사와 그 유관기관을 견학하고 느낀 점을 몇 가지로 요약하고 싶다. 첫째, 성운 스님의 확실한 지도력이 불광산사의 조직을 이끌어가고 있다. 성운 스님은 불광산사의 지도이념을 인간불교로 확실히 설정하고 있다. 둘째, 인간불교의 이념의 실현은 산중불교가 아니라 도심포교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불광산사는 대만 전역의 도심 곳곳에 빌딩 안에 불광산사의 분원을 개원하였다. 셋째, 불광산사는 불교를 문화활동을 통해서 포교하고 있다. 불광산사와 전국의 분원에는 박물관, 미술관, 서예실, 무용실, 무수한 강의실, 식당, 서점, 도서관, 회의실,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위성 불교 TV 방송, 일간인 인간복보, 불광충판사, 불광산문교기금회, 몇 개의 잡지, 여시아문 레코드사의 운영이다. 넷째, 불광산사는 교육사업을 통해서 불교를 포교하고 있다. 불광산사는 대만 전역의 수많은 유치원, 보문중학, 불광대학, 남화대학, 몇 개의 승려 교육 기관, 재가자를 위한 수많은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다섯째, 불광산사는 복지사업을 통해서 불교를 포교한다. 불광자비기금회, 불광진료소, 재난구제회, 우애봉사단, 동계구제회, 관음방생회, 대자육아원, 불광정사, 인애의 집, 등등의 운영이다. 여섯째, 불광산사는 다양한 법회활동을 통해서 신도들의 마음을 정화시킨다. 선, 염불, 주력, 사경, 청법, 예불, 등이 법회의 주요활동이다. 일곱째, 불광산사의 특징은 국제성이다. 세계 전역에서 온 외국인 스님과 재가 불자들이 불광산사의 구성원으로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불광산사는 세계 방방곡곡에 불광산사의 분원을 개원하였다. 미국 최대의 불교사원인 LA의 서래사는 대표적 해외 사원이다.
필자는 우선 이 지면을 빌어 8일간의 대만 고웅현의 불광산사와 대만 전역의 주요 불광산사의 분원과 대학을 돌아볼 수 있도록 배려해준 필자의 은사인 정우 스님과 불광산사의 방장인 성운 스님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다. 이 두 분의 뜻을 받들어, 필자의 8일간의 견학이 정말 알차고 의미있게 되도록 행정적인 측면에서 배려해준 국제불교촉진회의 사무총장인 각문 스님과 서울 불광산사의 주지인 의은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마지막으로, 필자의 견학 일정동안 같이 시간을 허락하여 주신 혜수 스님, 승휘 스님, 자야, 그리고 한순진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2004년 5월 1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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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