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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디모데후서 2장 19-21절
불의에서 떠나 자기를 깨끗하게 하라
고린도전서 11장 27절 이하에 보면 다음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11:27-29) 이 말씀 바로 앞에 성찬 재정의 말씀이 있는데(고전11:23-26), 성찬 재정에 이어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이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일이 없도록 자신을 살필 것을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특히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라고까지 말씀합니다. 달리 말하면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은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성찬이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도록 하는 데 있고,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모든 은택들을 공급 받는다고 할 때 분별없는 성찬 참여 그리고 자신을 살피지 않고 성찬에 참여하는 일은 그것이 유익이 아니라 오히려 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이 일에 대한 실제적인 교훈이 있었는데, 30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것은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과 같고, 이런 죄에 대한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면 약한 자, 병든 자가 많게 되었고, 또한 잠자는 자도 적지 않게 나오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때 잠잔다는 표현은 죽음을 가리키는데, 성찬에 참여하면서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심으로, 다시 말해 자신의 죄와 함께 먹고 마심으로 죽는 자들까지 생겼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이 기록될 당시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다른 면이 있습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는 특별계시가 있었던 시대고, 그런 계시를 받던 비상직분에 속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시대는 특별계시가 완성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계시가 있어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다른 성경이 더해지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비상직분도 우리 시대에는 더 이상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 비해 신약 시대가 은혜 위에 은혜의 시대라면 신약 시대라 할지라도 성경 계시가 완성된 지금은 더더욱 은혜 위의 은혜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30절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이 오늘날 비상시대처럼 나타나는 일은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드물기 때문에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의 마음이 아무런 분별력 없이 참여해도 되는가? 자신을 살피지 않고서 참여해도 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기록 당시 이런 일이 있음으로 좀 더 성찬 참여에 있어 자신을 돌아보도록 하는 일이 있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지라도 그런 일을 기록하여 교훈하고 있는 이상 우리는 주의 말씀의 뜻을 따라 자신을 살피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 자신을 한 번 돌아보았으면 하는데, 우선 디모데후서 2장 19절을 보시면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러나’라는 반대 접속 부사를 사용하면서 그 내용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다고 할 때 ‘그러나’ 앞에는 하나님의 견고한 터를 무너뜨리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들이 누군가? 17절에 의하면 후메내오와 빌레도입니다. 그들에 대하여 18절 상반부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그러니까 진리를 그릇되게 가르치는 자들, 그들이 하나님의 견고한 터를 무너뜨리려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진리를 그릇되게 가르쳐서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일은 무엇인가? 18절 하반부에 보시면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저들이 진리를 그릇되게 가르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을 무너뜨리기 위함인데, 바로 그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견고한 터가 서지 못하도록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그릇된 진리로 가르쳤던 것은 18절 중반부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는 것은 더 이상 부활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고린도교회 안에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성도의 부활을 부정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부활까지도 부정하게 된다는 데 있고, 그것은 곧 복음을 부정하는 것으로까지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12-15,20-22)
지금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 하나님의 견고한 터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견고한 터를 무너뜨릴 수 있는가 할 때 그럴 수 없다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이미 서 있다고 말씀합니다. 물론 주의 몸 된 교회 안에는 알곡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있습니다. 가라지 가운데는 히브리서 6장의 증거처럼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사람들도 있습니다(히6:4-5). 이런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존중을 받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기둥과 같은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6장은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 말은 교회 안에서 존중을 받는 사람, 또 교회의 기둥과 같은 사람도 진리에서 떠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동요를 합니다. 어떻게 교회 안에서 존중 받는 사람, 교회의 기둥과도 같은 사람이 진리에서 떠날 수 있는가? 그러나 그들은 처음부터 알곡이 아니라 가라지입니다. 가라지이기 때문에 사실은 한번도 참된 믿음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것처럼 보였을 뿐입니다. 특히 성령에 참여한바 되었다고 할 때 그들이 성령에 참여한바 된 것은 외적 충동에 불과한 것이지 내적으로까지 참여한바 된 것은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에게서 분명히 나타난 일입니다. 사울은 그가 왕으로 세워지기 전 겸손한 자로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선지자처럼 예언도 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되고 난 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 안에 있다 보니, 그리고 겸손한 모습을 보니 참된 믿음을 가진 것처럼 보였지만, 심지어 선지자들처럼 예언까지 하다 보니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것처럼 보였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아니요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선지자들처럼 예언까지도 한 그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러나 이때 예언은 성령의 외적 충동에 의해서지, 참된 선지자에게 있는 그런 역사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진리에서 떠난 것이고, 진리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알곡이 아니라 가라지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라지가 아닌 알곡이 진리를 한번 접한 이후 그 진리에서 완전히 떠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견고한 터가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 터는 마태복음 7장의 말씀으로 하자면 모래가 아니라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합니다. 반면 가라지가 지은 곳은 어디냐? 모래 위입니다. 외적으로 보자면 집 자체는 화려할 수 있습니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 집을 지었기 때문에 그 집에서 보는 풍경도 좋을 수 있습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봄으로 사람들의 존중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면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반석이 아니라 모래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반석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7:24)라고 말씀한다고 해서 반석이 사람의 행위라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만이 반석이 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반석이 되신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요약되는 복음을 믿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는 자들, 그들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믿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견고한 터가 섰다는 것은 이런 대상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진 자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참된 신지가 그 대상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견고한 터 위에 서 있기 때문에 결코 넘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넘어지는 것처럼 보이고, 또 넘어지는 일이 있기도 하지만 다시금 일어서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견인의 은총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좀 더 확증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인침이 있다고 말합니다. 도장을 찍듯 하는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영원 전에 모든 것을 작정하실 때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신 자들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다는 것입니다(빌4:3).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생명책에 그 이름을 기록하시고 그 책을 인봉해 놓으셨는데, 하나님은 자신이 생명책에 기록한 모든 자들의 이름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고 할 때 하나님의 백성은 주의 이름을 참되게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받는데(행2:21, 롬10:13),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께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되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견고한 터 위에 있는 자들,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고 말씀하시는 대상들, 좀 더 간단히 말하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은 가라지처럼 완전히 타락하여 주를 떠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택자의 위로, 주를 믿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의 위로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견고한 터 위에 세우신 이상 우리가 참된 믿음에서 떠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이것은 내 실력, 내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견인의 은총을 베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내 실력, 내 능력으로 하자면 우리는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넘어져서 일어서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 주소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인내하시면서 또 말씀하시면서 견인의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시면 그런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19절 하반부에 보면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즉 모든 불의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18절에 있는 말씀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면 그릇된 진리에서 떠나라는 것이고, 단순히 그릇된 진리만이 아니라 진리와 상관없는 모든 불의함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기 때문에(롬1:18) 그런 모든 불의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 20절은 비유를 들어 이 내용을 설명합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여기서 사도 바울은 주의 몸 된 교회를 큰 집과 같다고 설명합니다. 큰 집에 보면 금 그릇과 은 그릇이 있는가 하면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그릇에 대한 비유를 한다고 해서 로마서 9장에 있는 긍휼의 그릇, 진노의 그릇으로 말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택자가 있는가 하면, 유기자도 있다는 그런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집, 다시 말해 주의 몸 된 교회를 큰 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이런 저런 그릇이 있는데, 귀하게 쓰는 것이 있는가 하면 천하게 쓰는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주의 몸 된 교회 안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고린도전서 12장에 고린도교회에게 주신 은사의 다양함을 설명하기도 하는데, 27절 이하의 말씀을 조금 읽어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고전12:27-30) 한 사람이 모든 은사를 가지고 있는 법은 없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런 은사를, 어떤 이들에게는 저런 은사를 주시는데, 그 모든 것은 에베소서 4장 12절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이런 다양함은 은사만이 아니라 성도의 수준에 있어서도 사실은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 것을 요구하지만, 모든 주의 몸 된 지체가 항상, 언제나, 어느 때나, 모든 일에 있어 모든 불의에서 떠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의 분량에 따라 믿음에 합당한 열매를 내놓는다고 할 때 어떤 이들은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러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믿음을 더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수준에 있기도 하고(눅17:5), 또 어떤 이들은 믿음 없음을 도와 달라고 할 수준에 있기도 한 것입니다(막9:24).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실 때부터 장성한 믿음의 분량을 가졌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실수 가운데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는 이스마엘을 낳은 사건은 결코 믿음과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지만, 그런 믿음에서 떨어진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떠합니까? 우리 평생에 있어서 외적으로는 짓지 않을 법한 죄를 지은 장본인입니다. 간음죄와 더불어 간접적이긴 하지만 살인을 저질렀던 인물입니다. 그의 전 인생은 하나님 보시기에 합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이지만, 그리고 그만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었지만, 믿음을 따르지 않은 행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비록 실제적인 살인죄, 실제적인 간음죄는 아닐지라도 우리 인생을 돌아보면 믿음에 합당한 열매보다는 율법의 기준으로 볼 때 하나님 앞에서 죄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을 얼마나 많이 짓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약속만을 붙들고 살아가야 하지만, 약속보다는 현실을 보라보면서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약속을 따라 어떤 열매를 맺기보다는 약속과 상관없는 열매를 맺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하기에 사도 바울은 21절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고 권면합니다. 주의 몸 된 교회라면,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자라면 누구든지 모든 불의에서 떠나야 하는데,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모든 불의에서 떠나라는 것은 18절 말씀과 연결해서 생각하자면 그릇된 진리에서 떠나라는 것이고, 참된 진리가 심겨 진다고 할 때 진리와 상관없는 모든 불의한 행실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우리는 진리를 그릇되게 가르치는 그런 가르침에서 반드시 떠나야 합니다. 그런 가르침이 우리 마음에 심겨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5장 13절의 말씀대로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기 때문에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는 것만 심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가르치는 자들은 거짓된 가르침에 대하여는 반박하면서 참된 가르침만을 가르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르침 받는 자들은 무엇이 참된 가르침인지, 그리고 무엇인 거짓된 가르침인지 분별력을 갖춰야 합니다.
한 예로 오늘 본문만 하더라도 어떤 이들은 인간의 능력을 찬양할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칩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된다는 말씀으로 자신을 잘 준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그 사람을 쓰신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 스스로가 준비할 때 나타나는 것이지, 준비하지 않는 자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결코 인간의 능력을 찬양하도록 하는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물론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된다는 말씀 자체는 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계시로 기록한 말씀이 어떻게 틀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논리의 말씀은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기도 합니다. 즉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에 따라 마치 거기에 맞춰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하거나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고 할 때 그 모든 것은 누구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말씀합니다. 신명기 8장 18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본래부터 우리가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런 능력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입니다. 받았기 때문에 주신 자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오기에 인간의 능력을 말할지라도 인간의 능력을 찬양하도록 가르치는 바는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능력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라, 그만을 찬양하라고 가르칩니다.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지만, 누가 스스로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역사 없이,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누가 스스로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결코 우리를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되, 깨끗하게 하도록 하기 위해 무엇을 방편으로 주시는가? 말씀이라는 방편을 주십니다. 말씀이라는 방편을 통하여 우리를 돌아보게 하시고, 그것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만드십니다. 여기에 인간이 능력이 어디 있으며, 여기에 어떻게 인간의 능력을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본문은 인간의 능력을 찬양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몸 된 교회라면, 그래서 주의 이름을 참되게 부르는 자라면 마땅히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그 길은 모든 불의한 가르침에서 떠나는 것이요,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20절에서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 나무 그릇 그리고 질그릇도 있어서 귀하게 쓰이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이는 것도 있지만, 모든 성도가 무엇을 목적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할 때 천히 쓰는 그릇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귀히 쓰이는 그릇이 되도록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릇된 진리에서 떠나 참된 가르침 안에 머물러야 하며, 또한 그런 가르침 안에서 자신을 돌아보면서 불의한 행실을 버리고 깨끗하게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주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의 바른 교훈을 통하여 자신을 더욱 깨끗하게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신 목적이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도 예외 없이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불의에서 떠나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을 준비함이 되리라고 말씀하는데, 불의에서 떠나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할수록,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면 볼수록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우리를 그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또한 세상과 구별된 자로 있게 하셔서 주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자로 만드십니다. 그리고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되게 하십니다. 준비가 된다는 것은 갑작스러운 어떤 일에 있어서도 악이 아니라 선이 나올 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갑작스러운 어떤 일에 대하여 악으로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별 일이 아닌데도 갑자기 분을 내고 화를 냅니다. 욕하기도 합니다. 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순간적으로 거짓을 말합니다. 거짓을 숨기기 위해 거짓에 거짓을 더합니다. 이것이 본성적으로 나타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결코 낮선 모습이 아닙니다. 익순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모든 불의에서 떠나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할수록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가 되게 하셔서 본래는 악이 나아와 할 때 악이 아니라 선이 나올 수 있도록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의 마땅한 바는 불의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깨끗하게 하여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선한 일에 예비 된 자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견고한 터가 서 있고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시는 자들, 그래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할 때,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불의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불의 가운데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결코 성도의 합당한 자리가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의 마땅한 자리,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아가야 할 모든 방향은 어디 있는가?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자신을 깨끗하게 하되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통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주의 모든 백성의 목표는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권세를 가지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큼 부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우리는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거룩하게 구별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모든 선한 일에 대하여 예비 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릇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큰 그릇 되게 해 달라고 하거나 외적으로 볼 때 다른 사람이 부러워할 만한 그런 그릇이 되게 해 달라는 내용이 아닙니다. 다양한 그릇이 있고, 그런 그릇 가운데 어떤 재료를 가지고 만들었으냐에 따라 그 용도가 다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무엇이냐? 천히 쓰일 수 있는 그릇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귀하게 쓰일 수 있는 그릇이 되도록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은 이런 부분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큰 그릇 되게 해 주십시오. 사람들이 볼 때 남부럽지 않는 삶을 살게 해 주십시오.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해 주십시오.” 이것을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그릇이 되는 것,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모든 불의에서 떠나 깨끗한 자로 서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불의에서 떠나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고 할 때 이런 내용과 관련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오늘 본문 이후에 나오는데, 22절을 보시면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고 권면합니다. 디모데서는 영적 아비인 사도 바울이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편지한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에 비해 디모데는 젊은 자로 있습니다. 누구든지 모든 불의에서 떠나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된다고 할 때 지금 사도 바울은 특별히 목회자로 소명을 받은 디모데에게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디모데 자신이 청년의 시기 가운데 있고, 청년의 때는 그때 가장 강하게 나타는 죄악 된 욕망들과 성향들과 취향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피하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이 불의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오히려 무엇을 가까이 해야 한다고 권면하는가?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혹 청년의 시기 가운데 있다면 청년의 때에 나타나는 그런 죄악 된 욕망들과 성향들과 취향들을 피해야 합니다. 멀리해야 합니다. 특히 악행을 즐겨하는 자들과 함께 하는 것을 금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악을 행하는 일에 동참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떤 사람들과 가까이 해야 하는가?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입니다.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몸 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과 가까이 하면서 그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럼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청년들만을 대상으로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청년의 정욕이라고 해서 청년에게만 이런 정욕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청년 시기에 가장 활동적일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지, 청년보다 나이가 적은 청소년 혹은 어린이에게는 이런 정욕이 나타나지 않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청년보다 나이가 많은 어른들에게는 이런 정욕이 나타나지 않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 편지의 수신자가 청년에 속하는 디모데이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지, 청년이 아닌 자들에게는 이런 정욕이 나타나지 않는가 할 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디모데에게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고 권하고 있다면, 이런 가르침은 그가 목회자로서 모든 성도에게 마땅히 가르쳐야 할 내용입니다. 당연히 이 말씀의 대상은 디모데 개인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그 대상입니다. 때문에 우리 역시 청년의 시기가 아닐지라도 청년의 정욕을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불의에서 떠나 자기를 깨끗하게 하라고 할 때 좀 더 실천적인 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23절은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24절 이하에서는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딤후2:24-26)고 말씀합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전서에서부터 계속해서 언급한 내용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4절입니다.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4장 7절에서는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는 말씀도 합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 2장 16절에서는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라고 하면서 17절에서 후메내오와 빌레도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그러니까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은 그릇된 진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신화와 족보와 같은 것들, 진리의 말씀과 상관없이 거저 시간만 허비할 뿐인 그런 내용들, 이런 것들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역으로 진리만을 가르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왜 진리만을 가르쳐야 합니까? 불의에서 떠나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방편이 진리의 말씀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4절의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주의 종은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말하면서 다투는 자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 훈계를 통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거역하는 자들조차 회개하여 돌이키도록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분명 목회자에게 주신 말씀이지만, 하나님께서 기록된 말씀으로 교회에게 주셨다고 할 때 여러분이 주의해서 들어야 할 내용이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이 아니라 주의 진리의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왜 그 말씀을 들어야 하는가 할 때 결국 모든 불의에서 떠나 자기를 깨끗하게 하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본성은 깨끗함이 아니라 더러움으로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주께 순종하기보다는 주의 말씀을 거역하는 자로 있습니다. 주께서 부르신 자들,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임에도 그렇습니다. 그만큼 우리 안에 있는 이 부패함은 주의 이름을 부르기 전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다는 것,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 우리를 교훈하시되 우리로 하여금 모든 불의에서 떠나도록 권하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안에 있는 불의함을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는 모든 불의함을 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불의함에서 떠나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기도를 통해 거룩해져 간다고 할 때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져 가야 합니다. 믿음에 있어 장성한 분량에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 모두는 솔직히 믿음을 더해 달라고 하는 수준에 있고 또 믿음 없음을 도와 달라고 하는 수준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의함에서 떠나야 하지만 사실은 떠나지 않는 모습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계속해서 무장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떠나게 하실 것이고, 나아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져야 할 목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성찬에 앞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할 때 이런 부분을 돌아보셔야 합니다. 과연 우리에게 참된 믿음이 있는가? 믿음이 있다면 우리 안에 있는 불의한 행실들에 대한 회개함이 있는가? 나아가 회개에 합당한 삶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 있는가? 그래서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며 그러한 열매들을 나타내고 있는가?
성찬을 앞두고 다시금 한주의 삶을 살아가겠지만, 어쩌면 그런 삶이 반복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말씀으로 모든 불의에서 떠나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보냈으면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어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