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 그래프를 그려봤다.
20대부터 40대까지 가파른 오름세를 보이던 커브가 40대부터 50대 중반까지는 수평선을,
그때부터 완만한 하강세를 보이던 그래프는 70대에 들어 급속히 평균 이하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노인복지관에서 ‘웰 다잉’ 강좌 수강신청을 15명 선착순 모집한다고 해 서둘러 신청했다.
그 수업 시간에 그린 그림이다. 잘 죽는다는 것? 누구나 간절한 소망이겠지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불쑥불쑥 죽음에 대한 이 생각 저 생각이 자주 떠오르던 차에 매우 반가운 소식이었다.
나도 지금, 살아있는 내가 죽은 나를 안고 가는 게 아닐까? 생각은 갈래갈래인데 하루를 사는 움직임은 밍밍하기 그지없다.
생각하면 할수록 지금의 내 삶이 송곳에 찔린 듯 아리 하다.
저녁밥을 먹기로 한 약속이 깨어진 허전함을 달래려 도서관에 가서 무심히 신문을 뒤적이는데, 집에 찾아든 불쌍한 고양이를 보살피다 장례까지 치렀다는 짧은 칼럼이 번쩍! 띄었다. (조선일보 2024년 6월 14일 자 A18면 ‘길냥이의 마지막 순간’)
못 먹어 뼈가 앙상한데 상처까지 깊어 낑낑대는 길냥이가 불쌍해 통조림을 주었더니 떠나지 않아 한동안 같이 지냈단다. 같이 지내며 기운을 차리는 듯하더니 어느 날 아침, 뜰에 죽어 있더란다.
“언제부터 그는 이곳을 죽을 자리로 점찍었을까?” 생각하며 깨끗한 한지 석 장으로 곱게 싸서 장례를 치러줬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그를 안고 장지로 가는 도중 "살아있는 내가 죽은 나를 안고 가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도서관에 가기 바로 전, 나는 가끔 하는 버릇대로 빈 성당에 가서 예수님과 성모님께 하소연을 했는데 그날은 더 죄를 짓기 전에, 더 추해지기 전에, 가족에게 부담을 주기 전에 저를 데려가 주시라고 빌었다. 그래서 그 길냥이의 죽음이 더 가슴에 닿았던 것 같다.
태안 '팜 카밀레' 농원으로 수국을 보러 갔던 날, 성냥개비보다 가늘고 길이도 그 정도 될까 말까 한 작은 지렁이가 생각났다.
어쩌다 길을 잃고 자갈밭에 들어 온 지렁이가 높지도 않은 시멘트 턱을 넘지 못해 애쓰는 게 몹시 안쓰러웠다. 그대로 두면 물기 없는 자갈 위에서 땡볕에 말라버리겠지. 차마 손가락으로는 못 집고 나뭇가지로 집게를 만들어 그를 숲에 옮겨주었다.
해코지하려는 줄 알고 격렬히 몸부림치던 지렁이가 후에 고맙다는 생각을 했을까?
산다는 게 무어지? 눈을 뜨면 먹고 움직이다 어두워지면 다시 눈을 감고. 이게 사는 건가? 어쩌면, 잠을 청하며 뒤척이는 시간이 내겐 진정 살아있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온갖 잡생각에 괴로워하면서도 나를 돌아보기도 하고, 올바른 다짐도 하니 말이다.
미워하지 말자
의심하지 말자
야속해 하지도 말자
아주 작은 것이라도 하루에 한 가지 착한 일을 하자.
저녁, 집에 돌아올 때 신발이 끌리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는 것. 그럴 땐 길가의 담배꽁초 하나라도 줍자.
다짐은 근사한데 제대로 지키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 하나, 나 죽을 때 내 몸을 모교 의대에 실습용으로 기증하겠다는 다짐만은 꼭 지킬 거다. 내 인생그래프가 고공행진을 할 수 있게 멍석을 깔아 준 대학시절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된다.”(마태복음 5장 33절 중) 말씀을 기억하며 나와의 약속을 다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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