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럭키 세븐,
딱 일곱이었다.
우리는 늘 모이는 신산공원 방사탑 앞에서 두 대의 차에 나눠타고 성산포로
출발하였다.
제주여성작가에서 기획한 '술렁술렁 문학
기행' 의 첫 발자국은
한림화의 <아름다운 기억>의
무대 성산포와 온평리이다.

금강산도 식후경
아침을 거르고 나온 식구들을 배려하여 우선
식당으로 직행했다.
성산포 '짱아저씨네' 주요 메뉴는 해물탕과
갈치 조림, 성게칼국수 등
우리는 푸짐한 해물탕과 갈치 조림을
시켰다. 물론 막걸리도 시켰다.
들어가보니 그 식당은 섬의 후배가 운영하는
곳이었고 순란 쌤이 방과 후 학교에서 지도했던 제자의 집이기도 했다.
덕분에 더욱 푸짐해진 밥상을 끼고 우리는
재잘대기 시작했다.
점심 값은 한림화 쌤이 기어코
내셨다.

예전에 성산포에서 제일 잘나가던 도매상
동일상회는 한림화 쌤의 시집이다.
어렸을 때 그 집에서 눈깔사탕과 라면과
공책과 호야를 샀던 기억을 떠올리며 대문을 들어섰다.
성산포의 중심지답게 건물로 채워진 여백
사이로 무화과가 익고 있었다.
원홍 쌤은 언제든 와서 하룻밤 신세져도
된다는 말에 목소리를 높여 몹시 반겼다.

동일상회는 지서
동네다.
그 지서는 오래 전부터 그곳에 있었고
지금도 그 자리에서
성산포를 지키고 있었다. 4.3의 의인
문형순이 근무하던 바로 그 지서다.

간즈메 공장이 있던
자리다.
잠수들이 채취하는 구젱기와 전복들을
제조하여
일본으로 수출하던
곳이다.
<아름다운 기억>에서는 니마가 고등어 대가리를 얻기 위해
밤에 몰래 작업을 따라갔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정신대를 강제 동원하던
곳이기도 하다.


통밭알 앞이다.
성산포를 빙 두른 바다들은 나름 자기 멋의
특색이 있다.
우뭇개나 수메밑은 물이 깊어 전복 소라
문어 등등의 해산물과 미역 청각 톳 우미 등의 해초들이 나는데 반해
통밭알은 물이 깊지 않고 개펄이 있어
바지락, 대칼 등 조개를 팔 수 있다.
서청들이 주둔하던 국민학교는 바로 통밭알
앞에 있었는데 우리도 5학년 때까지 그 학교에 다녔다.
담 사이에 뚫린 개구멍을 빠져나오면 바로
통밭알 모래 사장이었다. 우리는 쉬는 시간에도 개구멍을 빠져나와
통밭을을 휘젓고 다녔다. 물론 선생님께
들키면 손바닥 맞는다.^^
모래 반 조개 반이던 약조개는 통밭알을
매립하며 같이 묻혀버려 이제는 씨도 없다.

4.3의 피밭이었던
터진목이다.
세계가 인정한 이 아름다운 곳에서 성산포
일대 사람들은 끌려가 총을 맞았다.
멋모르던 시절에도 귀신 나오는 파싹 모수운
곳이었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풍문으로 듣던 연예사를 도스렸다.
오조리서 우도까지 헤엄쳥 다니멍 연애하던
불륜과
모래밭에서 외간여자와 뒹굴던 외할아버지의
일화 등등.
"희한해. 연예할 땐 공동묘지서도 무섭지
안해."
라고 기꺼이 고백한 건 나모
시인.^^

온평초등학교다.
성산초등학교는 벌써 3번째 교정을
옮겼는데
온평은 예전 그 자리
그대로다.
아니 세월만이 품을 수 있는 아름다움을
더욱 간직한 채
무지개처럼 빛을 뿜고
있다.
우리는 나무 그늘에 앉아 그 아름다움에
하염없이 취했다.

저 비석이 있는 자리에서 운동회 파티를
열었다 한다.
타고난 불보재기인 니마 아버지가 칼을 잡아
회를 뜨고
옥돔을 구워 떠들썩하게 선생님들을 대접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6살에 입학한 영악한 니마가 자신이 물들인
오징어 먹물 운동복을 입고
폼 잡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계주 일등을 도맡아 하던 수니 언니를
따르던 함성들이 쟁쟁 눈에 선하다.


드디어 니마네 집이다.
지금은 넓혀진 길이 잡아먹고
다 자란 우리의 눈이 커져 나즈막한 구옥으로 보이지만
방이 네 칸이나 있는 큰집이었다.
세월을 대변하는 은행나무가 잘려나간 가지를 버텨 새 잎을 내는 걸
잘린 토막마저도 기어코 상징처럼 살아 버티고 있는 걸
모두들 감탄하며 만져보았다.

사라진 정지 대신 항아리
하나
저 속에 뭐가
들었을까?
혹시 니마 아버지
비밀이???

니마가 놀던 올레길이다.
키를 살짝 높이면 바다도 보인다.
그때는 올레마다 아이들이 넘쳤다.
위 아래 어시 동네 모든 아이들이 모여
배뜰락을 하고, 방치기를 하고, 고무줄에 곱을락, 자치기...
놀이도 계절 따라 유행 따라 굼실굼실 흘렀었다.

그러다 날이 저물어가고 지치면
요렇게 돌담에 기대고 앉았다.
가위바위보를 하여 수수께끼를 내고
으스스한 괴담을 풀어 놓았다.
우리도 그렇게 앉아
"감자에 싹이 났어 이파리에 감자, 감자감자 쎄야 ..."
를 정숙 쌤이 찍고

사진 찍는 정숙 쌤을 내가 찍었다.



온평리 동개맡 포구다.
사람들이 부역을 하여 방파제를 쌓았다 한다.
그 돌담 안에서는 아무리 강풍이 불어도 배들이 무사했다 한다.
니마 아버지는 여기서 배 두 척을 손수 짓고
바다를 호령하는 불보재기, 깡패, 해적 두목으로 신나게 살았었다
한다.
니마가 결석하며 멜 하나를 활로
찍은 후, 기절했던 원담은 사라져 없었다.

동개맡을 나오는데
"다 사라진 건 아니야!"
나를 붙잡는 낡은 태우
돌미역을 싣고, 우미를 실어 뒤뚱거렸을...
그런데 너무 방치했다.
많이 아파 보인다.
"니마야~~~ 저 태우 저대론 안되켜~~~ 어떵 어서지기 전에 살려살 거
아니~~~"

슬슬 덥다.
시계 바늘이 2시를 향해 가고 있다.
수니 언니가 길던 우물이 있다. 두레박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손길이 끊긴 우물은 그저 고여 있었다.
순선 쌤이 시원한 물을 사들고 왔다.
우리의 사막이 갈증을 풀었다.

요즘은 시골에도 멋진 카페가 있다.
물론 외지인이 운영하는 카페다.
냉커피와 온커피 카푸치노로 나머지 갈증을 채웠다.

열훈이까지 와서 혼인지를 빠트릴 수 없다.
너무 단장된 혼인지에서 연꽃을 보고, 흐드러진 멀구실낭 보라 꽃사태를 보고, 막
피어오르는 도채비꽃을 보았다.
세 개의 구멍과 그 구멍을 세운 한림화 쌤의 사촌오라방 얘기도 재밌게
들었다.

그리고 오늘 기행의 느낌을 나누고
다음 기행을 논의했다.
오늘로 채워진 가는 5월이 아쉽지 않다.

첫댓글 편안한 운전을 담당한 정숙 쌤, 순란 쌤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덕분에 더욱 행복했습니다.^^
올리느라 고생하셨어요~~!^^ 모두 즐거운 걸로 행복만땅이예요~!!^^
역쉬! 돌아서는 순간 그 이름들을 다 놓고 나왔는데 성산포 사람은 다 기억하시는 군요.ㅎㅎㅎ 이렇게 해 놓으면 오래오래 자세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예!
성산포 간즈메 공장이 아니라
온평 서개맡!!!
어제 서개맡은 못봤네예.^^
쌤이 여러가지로 꼼꼼이 마음 써준 덕분에 막 좋은 하루여수다. 고맙수다.^^
너무 좋네요. 새록새록 생각나게 하네요.
다음 기행이 기대됩니다.
감사감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