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197년에 고국천왕이 죽었지만 후계자가 없었다. 좌가려의 난 이후 정치적 발언권을 얻지 못해 궁궐에 답답하게 처박혀 있었던 왕후 우씨는, 왕이 죽자 정치무대에 복귀할 열망에 싸여 애통보다는 희열을 더 많이 느꼈다. 그래서 그는 왕의 사망을 발표하지 않고, 그날 밤 미복(微服) 차림으로 은밀히 왕의 큰 동생인 발기의 집에 찾아갔다. 그는 발기에게 “대왕은 후사가 없으니 그대가 후계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며 호리는 말을 던졌다. 발기는 순나부 고추가로서 환도성간(丸都城干, 환도성주_옮긴이)을 겸직하고 요동 전역을 관리하고 있었기에 위세가 대단했다. 어차피 고국천왕이 죽으면 왕위계승권은 자신에게 있었다. 그래서 그는 우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왕위는 천명이니, 부인이 말할 바가 아닙니다. 또 부인의 야간 행차는 예법에 어긋나니, 왕후로서 할 일이 아닙니다”라며 엄정한 어조로 우씨를 책망했다.
우씨는 너무 부끄럽고 분하여, 그 길로 왕의 둘째 동생인 연우를 찾아갔다. 그는 연우에게 왕이 죽은 일과 발기한테 핀잔받은 일을 낱낱이 이야기했다. 연우는 매우 기뻐하며 우씨를 환영하여 밤잔치를 베풀었는데, 직접 고기를 썰다가 손가락까지 다쳤다. 그러자 우씨는 치마끈을 끊어 상처를 싸준 뒤, 연우의 손목을 잡고 입궁하여 동숙했다. 우씨는 다음 날 고국천왕의 사망을 발표하고, 왕의 유조를 꾸며 연우를 후계자로 삼고 즉위시켰다.
연우가 왕이 된 사실을 듣고 대노한 발기는, 우씨와 밀통한 연우가 서열을 무시하고 왕위를 범한 죄를 격문을 통해 폭로했다. 그 뒤 순나부 병력을 동원해 왕궁을 포위하고 격전을 벌였지만, 나라 사람들의 도움을 얻지 못해 3일 만에 패배했다. 순나부 하호 3만 명을 거느린 그는 요동 전역을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탁에게 바치고 구원을 요청했다.
공손탁은 한나라 말기의 영웅이었다. 그는 한나라가 망할 징조를 읽고 요동태수 자리를 얻은 뒤 요동에서 왕이 되기를 꿈꾸었다. 이때 요동의 본토는 차대왕이 점령한 뒤였기 때문에 고구려의 소유였다. 한나라 요동은 지금의 난주로 옮겨져 영토가 매우 협소했기 때문에, 공손탁은 항상 요동 땅의 고구려 영역을 엿보고 있었다. 그런 중에 발기의 항복을 받자 매우 기뻐하며, 정예병 3만 명을 동원한 뒤 발기의 투항군을 선봉대로 삼아 고구려에 침입했다. 그는 차대왕 시절 북벌군의 대본영이었던 제1환도성에 들어가 읍락을 불사르고 휩쓴 다음, 비류강 쪽으로 향하여 졸본성을 공격했다. 그러자 연우왕은 동생인 계수를 신치 즉 전군 총사령관으로 삼고 항전하여 한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좌원까지 추격했다. 곤궁해진 발기는 계수에게 “계수야! 네가 어찌 큰형을 죽이려 하느냐? 불의한 연우를 위해 큰형을 죽이려 하느냐?”라고 말했다. 계수가 “연우도 불의하지만, 너는 외국에 항복하고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조상과 부모의 강토를 유린했으니 연우보다 더 불의하지 않느냐?”고 말하자, 크게 후회한 발기는 배천(비류강)에 가서 자살했다.
발기는 일시적인 분노를 참지 못해 매국의 죄를 지었다. 계수의 한마디에 양심이 돌아와서 자살했지만, 그가 팔아버린 오열홀(烏列忽) 즉 요동성은 회복되지 못하고 공손탁의 소유가 되었다. 결국 공손탁은 요동왕을 자칭하고 요동 전역을 요동·요중·요서 3군(郡)으로 나누고, 바다 건너 동래의 여러 군(지금의 연태 등지를 포함)을 점령하여 한때 위세를 떨쳤다. 연우왕은 지금의 환인현 혼강 상류인 안고성으로 환도성을 옮기고 그곳으로 천도했다. 이곳이 제2환도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