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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순은, 한국전쟁이 막 끝난 해,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 시절인 1953년 가을까지 소백산 골짜기 홍정골에서 살다가 장터에 있는 포목상의 나이 많은 주인 오 씨에게 씨받이로 팔려 왔다.
나이 겨우 열일곱에 마흔이 넘은 오부자의 후처가 된 봉순은 자식 귀한 집안에서 결국은 슬하에 칠 남매를 생산하게 된다.
소백산 골짜기의 홍정골에서 가마를 타고 장터에 도착한 날 봉순을 두고 오부자의 노모는 혀를 끌끌 찼다.
“하이고~ 저 어리고 비쩍 마른 것이 머 어 아를 가지겠노?
못 먹어서 마르고 비린내 풍기는 어린 여자는 그 이듬해에 오씨 집안에 첫아들 개동이를 출산하고는 그녀의 팔자도 현격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사무랍기만 한 긴 전쟁이 끝나고 기근에 시달리며 가을을 맞자 홍정골 봉순네 집에 이른 아침 마을에 금 부자가 찾아와서 쩌렁쩌렁한 소리로 그녀의 오빠를 닦달하고 있었다.
"봉식이 있나? 이리 좀 나와 본나!"
"아이고~ 어르신네 올라 왔니껴? 우에, 이리 일찌가이?..."
금 부자가 사립문에서 부르는 소리에 황급해진 오빠는 숫제 마당을 기어나가고 있었다.
"거~ 뭐로 자네, 윗대부터 부쳐 먹던, 아랫배기 논을 이자는 내놓아야 한다는 걸, 기별 들었제?"
"아이고 어른요~ 우에 글리껴~ 전쟁 통에 인민군이 내려오고 인민공화국 시절에 내가 머시라, 어른을 우째 했다는.... 그 걸... 누가 헛소문 퍼잤는지 내, 잘 아니더! 그누마, 갸가...뻔 한 거 아이껴? 내 논마지기나 부치는 거 그거 빼뜨라서 부치라카는 거! 우야튼, 어르신네 오해 말아 주이소."
"소문 믿고 그런 기 아이고 내, 그 논이나 밭이 필요한 데가 있어서 글네!"
전쟁 중에 인민군에게 극심한 곤욕을 치른 금 부자는 잠시 이북에 부역한 봉순이 오빠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고 선대부터 이어진 소작 관계조차도 끝장낼 지경에 이르렀다.
"노동자, 농민이 주인 되는 세상이 못돼서 안 됐네!"
봉순은 방 안에 숨어서 열병을 앓는 환자처럼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미동도 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가족의 가느다란 생명의 끈이 끊어지고 유난히 추었던 그해 겨울 어느 날이었다.
저녁상을 물리고 아랫방에서 바느질하던 봉순은 웬일이지 종일 보이지 않는 오빠가 궁금해진다. 가을에 금 부자에게 소작 거리를 뺏기고부터는 가장인 오빠의 모습이 애처로워서 제대로 눈조차 맞출 수가 없었다. 오빠는 아침 한 그릇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밤이 깊어 가도 소식도 없고 어머니에게 물어봐도 이렇다 저렇다 않고 그저 침묵만 지키는 것이 답답하기만 하였다. 그렇게 하루해는 저물었다.
"봉순아, 방문 좀 열어 보그래이!"
"오빠라? 해 종일 어데 갔었노? 밥도 안 먹고는..."
방문을 화들짝 여는 봉순은 어두컴컴한 속에서 키 작은 오빠보다는 한 걸음 뒤에 물러서 있는 중절모자에 긴 코드를 입은 훌쩍한 낮 선 사내 모습에 소스라친다.
"저...뭐로... 장터에 예천상회...거, 쥔 양반 아이가...“
오빠는 멋쩍게 사내를 소개했다.
봉순이 열어젖힌 문으로 소백산 두솔봉의 칼날 같은 찬바람과 흩날리는 눈보라가 회오리 되어 방안을 휙 하고는 훑는다.
근래에 와서 봉순이 주변에 뭔가는 모르는 이상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걸 느꼈고 그럴 때마다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더니 급기야 오늘은 내내 이유 없이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던 차에 오빠는 나이 든 사내를 데려온 것이다.
이때 봉순이 나이는 겨우 열여섯이었다.
봉순이가 아들을 얻지 못한 장터의 포목상 오 씨에게 영문 모르는 씨받이로 들이는 작업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사내는 눈보라 치는 그날 밤에 봉순이를 잠깐 보고는 이내 결정해 버렸다. 혼사도 없이 날을 잡았다. 봉순이는 옷 보따리를 챙겨서 야밤에 오빠를 따랐다. 오 부자는 가마 한 대를 보냈고 오빠는 가마꾼을 인도하면서 장래를 예측할 수 없는달빛이 훤한 타박 길로 장터로 향해 묵묵히 걷기만 했다.
홍정골은 태백산맥에서 비켜진 소백산의 비로봉 옆자리에 솟아오른 두솔봉의 골이 깊은 달박골의 아랫동네이다. 봉순이 철이 들 무렵에 세상은 한국전쟁을 거쳤으나 이 골짜기에서는 국군이나 인민군은 구경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경상북도 최북단의 오지이다.
세상 물정 모르게 겨우 언문이나 해득하면서 어머니 따라 오빠 따라, 산이고 계곡이며 소작 부쳐 먹는 자갈밭이고 헤매면서 그저 집안의 양식에나 일조하면서 살아왔다.
눈보라가 치던 그 날밤에 장터의 포목상 오 부자가 오빠와 함께 다 큰 처녀 방에 들어서는 민망하고 거북스럽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담배 한 대를 피우고야 돌아간 연유를 봉순이가 확실하게 알기에는 그로부터 한참이나 흐른 이른 봄에 물레방아가 있는 동네 빨래터였다.
"봉순아~ 니는 장터에 예천상회로 첩새이(첩살이)로 든다메?"
겨우내 묵은 빨래를 나온 몇몇 처녀 중에 바른말 하기 좋아하는 끝녀가 누런 버드렁니를 들어내며 입을 삐쭉거리며 샘난다는 듯이 방망이질을 해댄다.
"야~야! 첩살이도 그 정도 되믄야 출쎄따! 출세..."
"암싸~ 이 산 중에서 안 그면, 평생 머슴의 여편네나 부잣집 종년으로 흙밖에 더 파겠나?"
"너들 집은 이자, 금 부자댁 부역은 아해도 될끼다! 금 부자 보그라 마누라가 일곱 아이라 일곱! 첩새이들이 하나 같이 귀부인인기라."
금 부자의 처는 그치보다 나이가 서넛 많은 본부인에서부터 그 부인의 막내딸 또래의 어린 처까지 일곱이나 되는데 어린 것들은 장터의 산천옥이나 금선옥에서 데려온 홍등가의 반반한 접대부 출신이다.
빨래터에 둘러앉은 처녀들이 봇물 터진 듯 저마다 한 마디씩 봉순이에 대한 질투 어린 감정으로 놀려대었다.
봉순이는 그동안 예사롭지 않은 집안의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혹시나 하는 두렵기도 한 의문을 동네 처녀로부터 해답을 얻은 셈이다. 그 두려움의 무게 때문에 오빠나 어머니에게 넌지시 조차 물어보지도 못했던 부분이었다.
"애고~ 내 팔자야 내한테는 와? 비단이 장사 왕서방 같은, 한 놈도 안 걸리노? 어이?"
처녀들은 까르르 수다를 떨지만 봉순이는 빨랫방망이로 스르르 팔 힘이 빠져나가면서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소나 돼지 팔리듯이 팔려나가는 거 제! 물레방아에서나 뽕밭에서나 만나면 정겹기만 하던 성일이가 소원해져 가던 이유가 다 소문을 들었을 것이제.>
1949년 10월 이승만은 좌익세력 척결과 전향시키기 위해 만든 단체가 국민 보도연맹이다. 보도라는 뜻은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것이다.
일 년 전, 1948년 10월 전라남도의 여수, 순천에서 국방경비대 14연대에서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여순사건이 터지자 당혹한 자유당 정권과 미 군정은 빨갱이를 색출하고자 국가보안법을 만들었다. 국가보안법은 이승만이 시작하여 박정희와 전두환이 정권 유지에 악용한 역사적인 악법이 되었다. 일본 강점기에 경찰, 군 출신의 친일파들이 만든 임의법이다. 오 제도, 옥 성진, 이 태희, 서정원, 정 희택, 김 태선등 사상 검사들과 경찰 출신이 보도연맹 결성의 주역이 되었다. 옥 성진은 친일 언론 출신이고 정 희택은 5공 정권 입안자로 감사원장을 지냈다. 김 태선은 김구 선생 암살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인물이다. 이들은 모두 이북 출신이다. 친일 사찰 경찰의 총수라 불리던 최운하도 주역 중에 한명이다.
이들은 이승만에게 충성경쟁의 하나로 보도연맹 가입자 할당제를 시행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무지한 상태로 가입한 자가 부지기수였다. 밀가루 준다고 가입시키고, 고무신, 비누 나눠 주면서 가입시키고 미운 지식인 등 경찰에 협조가 부족하면 가입시키고 하였다. 심지어 가입자 중에는 십 대 소년까지 포함된 사례가 있다. 가입시키면서 가입비까지 받아 내는 무안 후치의 경우이다. 실제로 좌익인사는 열에 두 명이 채 되지 않았고 설사 좌익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학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서북청년단은 학살의 주축이 되었다.
"봉식아, 니 요 도장 하나 찍거라. 면에서 밀가루 한푸대 줄낀데 도장을 찍어야 한데이."
"밀가루를요? 긴데 머, 도장이 아데 있니껴. 내사 머로 생전에 도장 쓸일이 업쓰이."
"엄지를 이래 대라. 손꾸락이 도자이지 머로."
난데없이 봉식이에게 지장을 찍은 서류를 챙기는 이는 면사무소 총무계장 금동호였다.
금동호는 봉식이의 소작농토를 빼앗은 금부자의 맏아들로 상부로 내려온 보도연맹 가입자 목표를 채우고자 동분서주하는 중이다. 일제 치하에서도 조금도 재산이 줄지 않은, 아니 오히려 일정日政의 토지개혁 당시 눈먼 땅을 상당하게 거저다 시피 챙긴 금 씨네 부자父子는 한국 동란 때, 인민군이 낙동강까지 진군하자 잠시 몸을 숨기고 가세가 위태로운 적은 있었으나 숫제 동식은 인민군은 구경조차 못 한 산골짜기 촌부였을 뿐이다.
보도연맹은 1차 학살, 2차 학살을 거쳐서 30만의 억울한 양민을 희생시켰다. 경북의 영천, 영양, 의성을 포함하여 경상북도 일대가 특히나 참혹하였는데, 이 지역이 오늘날 수구, 극우 성향을 강하게 띄는 것은 당시에 입은 사상적인 폐해에 의한 심리적인 비정상 현상으로 본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빨갱이로 몰려서 죽임을 당했고 조금의 저항도 할 수 없었다. “난, 아니요!” 하는 강한 변명이 있어야 살 수 있었다. 10.1 대구폭동이나, 보도연맹, 인혁당 사건도 관련자 대부분이 대구, 경북사람이다. 극소수의 좌파 인사를 빼면 국민 대다수는 사상의 개념도 형성되지 않는 상태에서 영문 모르고 당하고 말았다. 이들은 그저 일상의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보도연맹에 가입하고 그 대가로 처절한 죽음으로 몰렸다. 이 사건의 실무자는 김창용 대령이다. 김창용은 일제 강점기에 만주 관동군 헌병 출신으로 일본군 부사관으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하고 여순사건을 진압했으며, 제주 4.3 항쟁에서도 토벌 지휘를 한 인물이다. 보도연맹 사건의 진상과 배상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친일 수구 정치 세력의 방해로 오늘날까지 조금의 진척도 이루지 못하고 있다. 한국 현대사의 가슴 아픈 역사이다.
봄날 빨래터에서 그때 막연하고 망망했던 기분과 현상이 봉순에게는 오십 년 후에 재현이 되었다.
막내아들 군대에 보내는 가족 아침이 경기도 수원에서 둘째 딸네 집에 있었다.
그 자리에서 중풍을 맞는 순간이 그때 빨래터에서 방망이를 쥐었던 오른팔이었다.
봉순은 영감 오 씨와 함께 막내아들의 입대 송별 식사로 막상 아침상을 받고 나니 서러움이 물밀 듯이 복받쳤다.
부유한 포목상 주인이었던 오 씨는 그 거뜬했던 재산이라고는 이제 읍내에 티끌만큼 남아 있지 아니하다. 일곱이나 되는 자식새끼들이라고는 하나 같이 마뜩하지가 않아서, 모든 식구가 모일 수 있는 곳이 둘째 딸년의 집인데 그나마 방 두 칸의 싸구려 전셋집에 사위 보기가 민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큰아들, 그러니까 봉순이 첩살이 들어가 팔자를 펴게 해 준 개동이는 벌써 오래전부터 죄짓고 도망 다니는 신세라 나타나지 않고 있다. 보나 마나 산적 머리를 해서는 검은 피부에 시커먼 몰골이 떠올라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큰 딸년은 그래도 살만한 년이 가게 일이 바쁘다며 의도적으로 빠진 것은 그렇다 치고도 그 사위 자식까지 낯짝을 내밀지 않는 것이 숫제 이대로 영영 칠 남매의 자식들에게 막무가내로 무시당하는 셈이다.
힘겹게 장가는 들었지만, 근황이 시원찮아 보이는 둘째 칠닥이 녀석도 요번에도 지 여편네와 같이 오지 않은 채 혼자 왔다.
"지 어미는 애들 학원 땜에..."
변명은 들었지만 봉순이는 이미, 며느리에게 때마다 시부모로서 경멸을 받아 본 지가 한두 번이 아니라서 지들 부부끼리는 오붓하지도 못하고 원만치 않은 형평임을 녹녹히 짐작이 가는 경우이다.
셋째 딸도 봉순이 자신이 너무 혼사를 서둘러 제대로 따져보지 못한 채 치른 것 같아서 내내 후회의 마음이 밀물처럼 하염없이 몰아닥치고는 하는 것이다. 자신이 오 부자에게 팔려 오듯이 딸자식을 또 다른 곳으로 밀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
또 막내딸은 어떤 놈을 만나게나. 될지. 첫 단추가 잘 끼워야 한다는데 몰락한 집안으로는 좋든 싫든 하나씩 여우기 조차 버거운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걱정은 나이 많은 영감이 막내가 군대를 제대할 때까지나 살아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이제, 그나마 맥이 다 빠진 부모라도 죽어 없어진다면 저 북새통 형제들 꼬라지 속에 막내는 얼마나 구박이나 받고 살거나....
봉순이 서러움이 왈칵 솟구쳐 목젖에서 막 삼키려는 미역국과 마주칠 때 빨랫방망이 쥐었던 오른팔이 묶인 호스가 풀려서 물이 빠져나가듯이 힘이 쭉 빠지면서 쥐었던 숟가락을 스르르 놓는다.
"아이고~ 내 팔이 왜 이렇노?"
그 말을 채하고는 봉순이 입이 돌아가면서 머금었던 미역국이 비뚤어진 입술사이로 주르륵 흐르며 사지를 벌벌 떠는 것이다.
봉순이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져 가는 중에도 셋째 딸의 광신도와 같은 기도소리가 어지럽게 돌고 돌았다.
“주여~ 오, 주여!!”“
반신불수가 된 봉순이의 중풍 투병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오래된 기억에 아련히 몰려오는 어머니, 봉순이에 대한 추억이 죽은 칠닥이에게 지금 되새김 되고 있다.
부잣집 후처로 들어와 칠 남매를 생산한 어머니 박봉순이 죽음을 맞이한 칠닥에게는 새삼 부모로서 진하게 애처로운 감정에서 가슴이 먹먹해 왔다.
이미 죽었음에도 이렇게 가슴이 아플 줄이야. 제기럴!
칠닥이가 귀농하여 전라도 변산에 정착해 있을 때, 농사일을 거들고자 온 어머니를 일을 마치고 격포항의 군산식당으로 모셨다.
푸짐한 해물 탕을 마주하고는 이런 음식이 생소해야 하던 노인은 정수리에 땀이 송송 맺힐 정도로 맛있게 드셨다.
“참, 맜있데이 이런 건 울메나 받노?”
“소주도 한잔해 가메 천처히 드소. 요 게는 막 씹어서 살은 삼키시고 빼다구는요, 접시에 뱉아 내고요. 머로, 왕새우도 있네, 까고말고. 그냥 우그작 씹으소.”
“니도 먹거래이 나는 이가 시원찮아서.”
그랬다. 어머니는 이런 음식을 평생에 첨 드시는 게로구나.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 부잣집의 마님이 되기는 하였지만, 집안의 첫아들인 개동이를 낳기 전까지는 노 시부모의 온갖 멸시를 받아야만 했던 철없는 여식이었다. 부잣집 안주인 호사도 그리 길지 않았고 오 부자가 몰락하는 그의 말년 인생을 오랜 세월 동안을 봉순의 아버지 나이의 남편과 동행해야만 했다. 봉순의 팔자는 펴게 해 주었던 첫아들 개동이는 평생동안 내내 당신의 가장 무거운 짐이 되기만 했던것이다.
어머니 봉순이가 얼마나 음식을 잘 드시는지 모자의 정겨운 모습에 흐뭇해진 식당 주인은 소줏값을 제해 주기도 하였다. 그 후로도 어머니는 해물 탕 맛을 못 잊으시는 모양이다.
“머로, 입이 궁금한 게 머 훌훌 한 거이.....”
해물탕이 당기신다는 말씀이다.
칠닥이가 1978년 7월 한여름에 군에 입대하는 날 어머니가 멀리서 주시하는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또래 입대 장정들과 집결지인 시내 공설 운동장으로 들어섰을 때 저 멀리 희끗희끗한 익숙한 모습에 놀란다. 칠닥이는 그 수많은 배웅하는 군중들 속에서 어머니를 발견한 것이다.
옥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으시고 손가방을 다소곳이 들고는 망부석처럼 이쪽을 주시하고 계시는 분은 멀리 있어도 어머니임에 틀림이 없었다. 기어코 쫓아오시는 어머니의 극성을 발견한 것이 하얀 석고상의 성경책을 낀 성모마리아 상과 같았다. 그 많은 배웅객 중에 어머니 모습을 발견했듯이 어머니 또한 깨알 같은 장정 중에서도 아들 칠닥이를 틀림없이 꼭 집어서 찾아내시고는 한숨을 쏟았을 것이다.
그러던 그의 어머니 봉순이가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은 아들 칠닥의 죽음을 지키고 있다.
꿈을 접고부터는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지금, 이 죽음이 깨어나지 않는 잠이라면, 칠닥이는 그의 소원을 성취한 셈이다.
인간의 변함없는 종착지가 죽음일 테지.
아들의 죽음을 망연히 지키고 있던 어머니 다음으로 칠닥이를 방문한 이는 막내 남동생이었다. 황망하고 믿기지 않아서.
"작은 형아가 왜 갑자기 이래 됐니껴?"
멍한 눈빛으로 어머니에게 묻는다.
"뇌졸중이라 칸다. 야 가 그동안 혈압약을 쭉 먹었잖나. 약을 먹으면 죽지는 말아야제...."
칠닥이 눈에는 막내가 보이지는 않지만, 발자국소리나 말소리 그리고 풍기는 분위기가 평소의 막내 그대로였으며 생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막내의 냄새까지 감지되지 않는가 .
그런데, 대체 칠닥이 자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막내의 움직임을 자각하고 음성을 듣고, 그 옆에 초췌하게 웅크리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연상하고 있는 자신이, 죽은 자기 몸속에 그대로 있으면서 보지 못하고 듣기만 하는지 아니면 또 다른 자기가 이미 죽은 몸을 떠나 허공에서 눈과 귀가 아닌 어떤 파장으로 두 사람의 형상과 소리를 형상화하고 있는지 문득 그것이 의문스럽다.
참으로 죽음이란 새로운 경험이고 신비롭기가 짝이 없는 것이다.
막내는 칠닥이 핸드폰으로 저장되어있는 번호를 찾아 차례대로 연락을 취한다.
칠닥이는 형제 중에서도 막내를 누나와 함께 돈만 밝히는 수전노로 보아 왔었다.
형제 중에 대게가 어려운 중에서도 살만해진 그의 누나와 막내는 그만큼이나 식구들과는 멀어져 있었다. 누나는 애당초부터 그랬지만, 막내는 자기의 자리를 잡아가면서 그렇지 못하는 칠닥이와 큰형 개동이를 특히나 경멸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칠닥이 막 죽기 전에는 동생 과와 몇 번의 진솔한 대화로서 막내에 대한 편견의 틀에서 한 꺼풀이나마 벗게 됨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막내가 그토록 독살스럽게도 돈을 모으려 했던 의지에 대한 애증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편견에 의한 오해가 미안했었다.
아~
나는 세상에,
얼마간이라도 편견을 버리기나 하고 예까지 왔을까?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도무지 그렇다 할 자신이 없다....
그럼,
나는 대체, 이 편견의 숙제를 언제나 풀 수가 있을까?
풀 수 있는 건가?
젠장,
죽어서도
이렇게 골치 아플지는
생전에는 미처 몰랐다. 아닌가.
칠닥이는 이미 감긴 눈을 지그시 감는다.
언젠가 섬뜩한 꿈을 꾸고는 소스라친 적이 있었는데, 그의 몸뚱이가 갈비대가 끝나는 쪽부터 아래위로 두 동강이로, 그것도 큰 일본도와 같은 거로 분리되는 꿈이었다.
아마도 꾀나 오래전의 기억이었는데 그 느낌이 더러 되살아나기도 하였다.
몇 사람인지, 그의 벗은 알몸을 바닥에 뉘고는 이리저리 굴려 가며 칼질을 하여 생선토막 내듯이 갈라놓자 갈라진 단면은 그저 시커멓게 각이 잘 선체였다. 뭔가는 서걱거리는 묘한 기분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불쑥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가는 껍데기가 깨진 면도칼에 의해서 손가락에 붙은 손톱까지 서걱거리게 갈라놓던 섬뜩함이 기억으로 되살아났다. 목덜미가 찌릇거리고 추운 겨울날 문고리에 손이 쩍하고 붙어 버리던 그런 경험과 같은 것이었다.
꿈을 꾸고 있는 동안은 아프다거나 두려움이 없었는데 깨고 나서는 서늘한 마음이 한참 동안 기분을 흔들어 놓았다.
죽어 있는 칠닥이는 자신이 왜 지금에 와서 섬뜩한 생각이 불현듯 들까 하고 의아해한다.
그 자신은, 인생을 잘못 살아온 점을 더러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랬다는 사실이 연좌제와 같이도, 질기게도 주홍글씨처럼 가슴에 박혀 평생 죗값을 치러야만 했는지, 하는 생각이다. 쟝발잔인양 해서, 하늘인지 하느님 나발인지 운명, 뭐 그런 것이 그의 인생을 매섭게 구속하는 데는 항의도 못 한 채 한없이 무기력에 빠져들고 말았구나.
나쁜 일은 꼭, 반복된다.
“그대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가엾다 말아라, 정말 가여운 사람은 한 번도 꿈을 꾸어 보지 않은 사람이다.”
봉순이는 아들의 죽음을 맞이한 충격을 안은 채로 남겨진 살림을 챙길 모성 근성이 발동하여 앞집 여자의 집 현관문을 빼꼼히 밀었다.
“새댁요, 야가 왜 거 자전거 쌘비가 하나 있었는데, 그 게 어데 놔뒀는지 모를리껴?”
“글쎄요 저도 한동안 새벽으로 운동 나간다고 타는 걸 봤는데 그러고는 누구를 줬다고 그랬지요? 아마.”
“아이고 그럴 바야 막내를 주지나 않고, 거 뭐로 한 주유소에서 내리 이태를 차에 기름을 넣고는 그거 하나 얻었다고 수암동에 타고 왔던 것을..... 남 주기도 잘 주네.”
막내는 우선 그의 죽음을 육 남매에게 차례로 알린다.
부석의 촌부자 댁으로 시집 가 그 댁이 지녔던 애초의 시댁보다도 더한 부富를 일으킨 칠닥이의 누나와 여장부의 틀을 지닌 신갈의 여동생에게, 칠닥이 생전에 가장 애처로워했던 대구의 여동생 하며, 부부애가 유난히 좋은 서울의 막내 여동생으로 하여 차례로 부고가 전해졌지만, 그러나 그의 형 개동이는 연락이 되지가 않았다.
개동이는 막내에게 큰돈의 빚을 지고 있는 상태인데 그 때문에 잠적하는 중이다. 그리고 칠닥이 핏줄인 조카 강하와 하정에게도 알렸다.
막내가 제 형의 죽음을 이리저리 알리고 있는데, 어머니가 한마디 하신다.
“영철 이한테도 전화를 하그라.”
“영철이요? 영철이가 누구 껴?”
"쟈, 친구 있잖나 전라도에....”
금자는 칠닥이 칠 남매의 둘째이며 장녀이다.
남매 중에는 가장 욕심 많고 드세다. 그리고 사치스럽다. 그러면서도 유독 칠 남매 중에 우뚝 솟은 부富를 누리고 사는 팔자를 지녔다.
금자는 늦은 나이에 결혼했다. 몰락한 오부자의 집안에서 중학까지만 졸업하고 방직공장에서 검단 일을 하는 그녀에게 좋은 혼처가 들어올 수는 없었다.
그나마 괜찮은 혼처가 들어온다 해도 자존심 높은 금자는 상대방이 볼펜을 쥔 사원이 아니라 장갑 끼는 공원이라면 매몰차게 거부하였다. 일반적으로 좋다는 직장으로 평판이 난 포항제철에 직원과 맞선을 볼 때도 집에 목장갑이 놓여 있는 걸 보고는 사무직이 아니라 공원일 게라는 판단으로 미련 없이 자리를 박찬 금자이다. 그러다가 맨 나중에 만난 상대가 부석사 앞에서 버스 정류소를 운영하는 부잣집 장남의 나이 든 노총각이었다. 금자를 만족시킨 조건은 무엇보다도 그 집안의 부富이었다는 건 지당하고도 당연한 일이었다. 금자가 걸었던 많은 결혼의 조건 중에 하나, 적어도 경제적인 면에서는 그런대로 만족할 수 있는 조건이다.
“하이고~ 남의 감기약은 왜 먹고 난리껴? 어이!”
거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오 부자는 안산, 수암동 칠닥이가 이혼하고 아이들과 함께 사는 십 삼 평짜리 아파트 안방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진하게 덮어쓰고 있었다.
그의 나이는 이제 팔십의 후반에서 구십을 바라다보는 상노인이 되어버렸다. 종일 방 안을 기어 다니다시피 하다가는 겨우 화장실에 가서 변기에 냄새 지독한 오줌이나 뒷거리를 쏟아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다가는 물약이고 알약이고 눈에 띄는 약은 닥치는 대로 입에 털어 넣는 것이다.
“틀니요? 살면 얼마나 산다꼬 이빨을 한다니껴.”
봉순이는 자신의 틀니를 맞추는 데는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면서 까탈스러웠지만 몇 남지 않는 치아로 힘겨워하는 오부자의 그런 소원은 일거에 무시하고 만다. 이제 오부자는 모든 식구가 자기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서러움이 밀려왔다. 더 살고 싶다! 죽는다는 건 싫다, 오래오래 살아야겠다! 누구든 죽음 앞에 무던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쉬운 끄나풀을 잡는 심정일까? 집안에 약으로 보이는 것은 재빨리 물도 없이 입에 넣고 우물우물 몇 남지 않은 치아 사이로 굴리며 삼켜버린다.
무리를 떠나야 할 때를 인식한 늙은 수사자의 서러움.
봉순이 어린 나이에 늙은 신랑을 맞아 평생의 질곡을 건너온 이제, 어느덧 자신도 노년을 맞고 말았다. 돌이켜 보면 과거가 억울하기만 하다. 일 일곱의 세상 물정이 까만 나이에 오부자의 예천상회로 후처 자리를 얻어들어 왔지만, 그의 거처는 포목 가게가 아니라 동부동의 농가 주택에서 오부자의 노모와 함께 지내야 했다. 노모의 수발을 들면서 그녀가 받은 대접은 하인이나 다름이 없는 지독한 시집 살이었다. 노모는 봉순이가 촌스럽고 몸에 비린내가 난다고 늘 구박을 주었다. 본처가 낳은 두 딸은 봉순이 또래나 다름없어 이미 말만한 처녀가 되어가고 있었고 그 어미 오부자의 본처는 오부자의 집안에서 봉순이를 들인 이후로는 홀연히 사라졌다가는 뚱하니 나타나고, 어느 날 또 사라지고는 하였다.
장터에 있는 오부자의 포목상, 예천상회에는 영주 여자라 불리는 성분을 알 수 없는 삼십 대의 성숙한 여인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오 부자가 본처에서 두 딸 외에 사내아이가 생산되지 않자 어디선가 여자를 하나 얻어 왔지만, 그녀는 아들이고 딸이고 후세를 전혀 만들어내지 못한지가 몇 해된 모양이다. 그런 틈에서 봉순이는 이듬해 이 집안의 첫아들인 개동이를 분만하였다. 영주 여자는 제풀에 자리를 봉순이에게 내어주고 떠났으며 노모의 태도도 구박에서 극진한 사랑으로 바뀌어 예천상회의 어엿한 안주인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반면에 오부자의 본처 김 씨는 집을 비우는 기간이 이전보다도 더 길어졌으며 영 소식이 없다가는 어디서 기별은 받았는가 노모의 장례식에는 찾아왔다.
나이 사십이 넘어 첫아들을 얻은 오 부자는 그 자식이 지극하기가 그지없었다. 까무잡잡한 피부로 태어난 아이가 요에서 잠은 자다가 몸을 뒤처져서 팔 하나라도 요 밖으로 비켜나가면 얼른 수건을 접어 그 여린 팔 밑으로 받치고는 하였다. 귀한 자식은 천한 이름을 붙이는 풍습이 있어서 아이는 학교를 들어갈 때까지 “개똥이”라 불렸다.
“하이고~ 야가 그 개똥이껴? 마이 컸네. 아 들 잠깐이시더!”
봉순이는 장터의 유일한 극장, 그 옆 예천상회에서 밑으로 딸 하나를 얻고 그 밑에 더 얻은 아들이 칠닥이다. 이 년 터울로 임신을 하여 또 배가 불렀을 때 오부자의 일가인 오동태씨댁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 갔다가는 충격으로 유산하고 말았다. 그러고 이 년 후에 딸을 낳게 되는데 슬하에 칠 남매 중에 이 네 남매를 예천상회에서 출산하거나 키우거나 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봉순이가 더 없는 영후를 누리기는 평생에 팔자는 여기까지인 셈이다. 나머지 삼 남매는 오부자가 포목상을 정리하고 동부동 양철지붕의 마당 넓은 집을 사서 이사한 집에서 출산하게 된다. 그 때부터가 봉순이 인생이 마른 땅을 지나 진 땅으로 들어서는 시기인 것이다.
“저 아부지 나이가 사십만 되어도, 사십만 되어도...”
이미 오십을 너머선 오부자가 이사한 양철지붕 집에서는 가세가 쪼그려들기만 해 가자 봉순이는 남편의 나이 들어가는 처지를 아쉬워하다가는 한탄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젖은 땅이려니 하던 것이 질퍽거렸고 발목을 휘이 휘이 감아쥐는 수렁으로 이어지는 세월이 계속되었다.
봉순이가 오 부자에게 씨받이로 팔려 와서 호강을 누린 것은 불과 십여 년 남짓이다. 그토록 희망해 오던 첫아들 개동이를 낳고 예천상회 안방을 차지하고 나서, 개동이가 열두 살 먹는 해에 포목 장사를 그만두고 농가로 내려앉으면서 가세는 빠르게 기울어 간 것이다. 더구나 동부동에 기거하던 오 부자의 본처인 김 씨가 새로 사들인 빨간지붕 집으로 살림을 합치면서 한 집에서 살게 된 본처와 후처의 갈등도 날이 갈수록 심각해져 갔다.
“허~ 그린 기 아이라니깐요?”
“아, 음복에 칼을 같이 싸서 가 오면 그기 저주지 뭐껴?”
오 부자는 동부동에 초가 농가를 정리하고 빨간지붕 집에 농가로 자리를 잡고 본처, 후처와 한집에 기거하면서 일가친척인 춘복이를 일꾼으로 들였다. 춘복은 본래부터 농사일해오던 본처 김 씨와 가까울 수밖에 없었고 그런 현상은 후처 봉순이에게는 달갑지 않을뿐더러 막연한 불안감을 가지게 하였다. 살림을 합치고 첫 새해를 맞은 설날 아침에 미리 제사를 지낸 춘복이네 집에서 전해온 음복 보따리에 시커먼 부엌칼이 함께 싸여 전해진 것이다. 춘복이는 여편네의 맥없는 실수라 하였고 봉순은 자신을 쫓아내려는 저주라며 악을 써대는 것이다. 부처도 돌아앉는다는 시앗 보기로 오 부자는 한참 동안 혼란을 겪어야만 했다. 죽은 시어머니의 삼년상 탈상을 계기로 본처, 김 씨는 집을 나가서 소식이 없다가는 어느 날 불현듯 찾아왔다가 잠시 머물고는 사라지고는 하였다. 봉순은 남편 오 부자가 뒷돈을 댈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혼란을 다시 몰고 온 장본인은 개동이었다. 개동이는 중학 시절부터 주먹질하고 다니더니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아예 시골의 논두렁 건달로 자리를 잡았다. 봉순이는 평생 여러 번을 아들의 옥바라지를 해야만 했다. 오 부자가 가세가 기운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나이, 사십에 얻은 첫아들은 복이 아니라 화의 씨앗이었다.
“저 여자 관상을 봐! 평생 고생에 찌들거여.”
새벽 열차로 개동이 교도소 면회 길에 나선, 작은 보퉁이를 끌어안은 처연한 표정의 봉순이를 마주 보고 있던 두 사내가 귓속말로 나누는 대화를 옆자리에 앉은 칠닥이가 듣게 된다. 봉순의 장래는 예고되었다.
오 부자는 개동이가 사고를 여러 번 치는 과정에서 농토를 한 뙈기 두 뙈기 팔게 된다. 줄어든 농토와 줄어들지 않는 식구들의 씀씀이에 대지가 300평 되는 빨간지붕 집을 사채업자에 잡히고 야금야금 빼 쓴다.
농토를 정리하고 새롭게 시작한 양계업과 양돈사업은 오 부자의 손해만 늘려 놓는 결과를 가져온다. 연거푸 빚을 늘려 놓고, 다시 시작한 사업은 고물상이었다. 고물상은 오 부자가 부를 축적하게 된 시초가 된 업종이라 미련이 있었다. 그러나 봉순에게는 본격적으로 신상이 번잡한 시작점이기도 하다.
반면에 봉순이 오빠인 봉식이네 살림은 나날이 나아졌다. 여동생을 데려가면서 오 부자가 사 준 약간의 토지를 밑천으로 부지런한 그는 해마다 땅을 넓혀갔다. 더구나 봉순이 오 부자의 후손을 생산하자 숫제 그는 겁박하여 재산을 뜯어가기도 하였다.
“하이고, 오빠요! 왜 이러니껴.”
술에 취해서 예천상회에는 야밤에 들이닥친 봉식이는 대뜸 봉순을 향해 발길질해댄다. 이어서 말리는 오 부자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그런 행패가 한참 이어지다가는 마지막은 본처 김 씨의 딸을 붙잡고 꺼억, 꺼억 통곡하는 거로 끝난다. 이것이 칠닥이가 기억하는 어린 날 제 외삼촌에 대한 기억이다.
오 부자가 고물상을 개업하면서, 전국을 떠도는 도부꾼이 찾아왔다. 봉순이는 그들을 상대하면서 입이 거칠어지기 시작하게 된다. 남편보다 훨씬 젊은 남정네를 대하는 재미도 있었지만 대게는 인간 말종의 수준이었고, 폐인에 가까운 이도 더러 만나야 했다. 고물상은 오 부자가 기력을 다해 일을 손에 놓아야 할 때까지 수 십년이 계속되었고 나이 어린 촌색시였던 봉순도 세파에 찌들면서 늙어갔다.
생애에 호강은 개동이가 태어나고 청년으로 자라는 사이의 잠시였고 오 부자가 사업에 실패를 거듭해 가면서 가난과 함께, 커가는 칠 남매들의 우여곡절로 세상 편할 일이 거의 없이 나이가 먹어 갔다.
방황하던 개동이가 결혼을 하여 경기도 안양에서 그나마 불안전한 정착을 하고부터는 오 부자와 함께 노구를 그들에게 의지하게 된다.
개동이와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며느리는 씀씀이가 헤퍼서 얻어먹는 것은 부족함이 없었지만, 그만큼의 멸시도 받았다. 이빨 빠지고, 사라진 포효조차 목쉬어버린 수사자가 된 오 부자나 거기에 끼어 있는 봉순이도 매한가지의 신세인 셈이다.
서울서 생활하던 칠닥이가 이혼을 하고, 경기도 안산으로, 아이 둘을 데리고 내려옴으로써 부부는 그들과 함께 생활하게 된다. 며느리의 신세를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칠닥이는 이 년 후 농사를 짓겠다며 전라도 변산으로 떠나버린다. 부부와 같이 새롭게 생활을 시작한 이는 막내였다. 이 당시에 오 부자는 88세의 생애로 세상을 뜬다. 지독한 구두쇠인 막내는 철저한 생활 습관으로 많지 않은 월급을 모아 경기도 동백의 신도시에 있는 중형 아파트에 입주한다. 봉순의 생활 환경도 훨씬 좋아졌다.
남은 걱정은 막내 나이가 사십을 넘어가는데 장가를 못 든 것이다. 헤어진 경우도 있지만 어쨌거나 육 남매가 결혼하고 막내만 총각인 상태이다.
걱정은 전라도 색시가 해결해 주었다. 이제 새 며느리와 셋이서 생활하던 봉순은 막내가 결혼한 지 채 일 년이 못 되어, 인근의 소형 임대주택에 기거하는 홀아비가 된 개동이네 집으로 거처를 다시 옮기게 된다.
새 며느리에게 쫓겨난 것이다.
1부2편끝 12쪽 180매
구13쪽, 187매.
(현대사 : 보도연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