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카작행) 임로자 할머니(1926년생)
원동에서 살 때는 아버지가 군대상점에서 일하고, 소나 돼지 잡아 고기를 처리하는 기술이 있어서 잘 살았다지요. 그런데 1930년에 이웃사람이 러시아 경찰에 일본과 연관되어 있다고 무고하는 바람에 58년간의 유배형을 받아 끌려가면서 고생이 시작되었다지요. 남매 중의 일부는 남의 집에 보내기도 하고, 자신은 어머니와 살며 해삼위에서 빌어먹으며 살았다네요. 해바라기씨 하나씩 얻어먹기도 했다는군요.
다행히 10년만에 아버지가 돌아와 다시 잘 살게 되었는데, 그만 강제이주당했다네요. 아홉 살나던 해(1937년) 저녁 무렵이었다지요. 어머니가 그러더래요. “찰옥수수 따다 감자 넣어 떡해 먹자. 내일이면 어디론가 간단다.” 학교에 등록하고 겨우 이틀을 다닌 때였다지요. 그해따라 곡식이 아주 잘되어 벼 이삭이 풍성하고 우리에는 가축들이 있었다지요. 그런데 갑자기 화물버스가 들이닥쳤다는군요. 먹을 것만 겨우 챙겨서, 짐승 싣는 와곤(화물차)에 실려 원동에서 크즐오르다까지 먼 길을 가야했답니다. 한 간에 8가족(1층에 4가구, 2층에 4가구 평균)이 실려왔다지요. “오다가, 많이 죽었어.”라는 말을 자주 되풀이하십니다.
크즐오르다에 떨어져, 낙타들이 먹는 가시풀 위에 잠시 앉아 있다가, 언덕 높은 데로 걸어서 들어가, 일부는 빈 집에, 일부는 땅굴을 파고, 겨울을 보냈다지요.
이듬해 우슈또베에 조합을 조직하여 이주하였다지요. 짐 싣는 자동차에 실려 갔다지요. 벼랑진 땅에 이엉을 하고 지냈다네요. 그러다 학교도 짓고, 사무실도 짓고, 집도 지었다네요. 1941년에 전쟁이 시작되면서 청년들이며 남자들이 탄광으로 차출되면서(죽거나 돌아오지 못하기 일쑤), 여성들이 모든 일을 했다는군요. 이 할머니도 13세부터 일을 하여, 밭일이며 식당 일 등 많이 했다는군요.
학질이며 속앓이 병으로 많이들 죽었는데, 널도 관도 없이 묻었답니다. 먹을 게 없어서 쇠투리(감초. 솔롯까) 캐서 가루 섞어 쪄먹었고, 능자(돼지풀, 명아주. 레베다)도 먹었다지요.
1957년에 알마티에 공부하러 와서 3년제에 입학하였으나, 탄광 간 오빠가 도망쳐 오자, “딸은 공부할 필요 없다. 오빠를 공부시켜야 한다.”고 해서 중퇴하고 말았다고 하네요.
1991년에, 일제의 단속으로 가출하여 도일하여 사할린에 살던 동포 주영락 할아버지와 재혼하여 9년간 살았는데, “내가 죽으면 내 재를 고국 쪽에 뿌려 달라”는 남편이 하도 고국을 그리워하여 함께 갔으나, 두 동생 누구도 반기지 않고 거처도 주지 않아, 강원도 춘천 ‘사랑의 집’에 맡기고 온 후 몇 차례 할머니가 왕래했으나, 한동안 편지가 없더니 대사관에서 ‘2003년 사망확인서’를 보여주더라지요. 그 남편이 어디 묻혔는지도 모르고 있다는군요.
처음으로, 아들과 함께 채록하였습니다. 더러 러시아어가 나오면 아들이 도움을 주었습니다. 아들도 모르는 단어는 발음을 적었다가 집에 와 사전을 찾아 알려주었습니다. "야, 이게 생생한 러시아어다. 학교에서만 배우는 러시아어 실력만으로는 안되는 거 알았지?" 한마디 해주었습니다.